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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입만 쳐다보는 ‘부평초 장관들’ 

 

박성현 월간중앙 취재팀장
청와대 실세 참모에게 치이고, 부하 직원들에게는 따돌림 현상도 생겨나…장관 임기 단명화 추세에 청와대와 직거래하는 실무 관료 늘어

▎2013년 3월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신임 장관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기에 앞서 인사를 나누고 있다. 대선 후보 시절 박 대통령은 책임장관제시행을 약속한 바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른바 ‘책임장관제’를 약속했건만 소신행정은 뒷전이고 청와대 눈치보기에 급급해 하는 장관이 적지 않다. 일부부처는 장관과 관료집단이 겉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권 출범 1년간 어떤 일이 벌어졌길래 내각은 주눅이 든 걸까?

2월 12일 국회의원회관 사무실에서 만난 김영우 새누리당 의원은 다소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날은 박근혜 정부 들어 처음으로 열린 판문점 남북 고위급 접촉 과정이 텔레비전을 통해 속속 전달되던 때다. 이날 남북대화에는 한국의 외교안보 컨트롤타워라 할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가 전면에 나섰다.

북한이 대화 상대로 NSC를 콕 찍어 선택하는 바람에 과거 남북대화 채널이었던 통일부는 일순간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됐다. 국회 외교통일위원이기도 한 김 의원은 “이제는 아주 가끔씩 성사되는 남북 접촉에서조차 통일부가 뒤로 밀린다”고 씁쓸해 했다.

김 의원은 불과 이틀 전인 10일 국회 본회의 외교·통일·안보 분야 대정부질문자로 나서서 “통일부 장관의 위상을 부총리로 격상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의 질문 요지는 이랬다. 박 대통령이 ‘통일은 대박’이라며 통일에 대한 여론을 환기했지만 우리 정부에 통일 정책을 주도하는 중추신경계는 없다. 지난해 출범한 대통령 직속기구 NSC는 국가안보 전략, 대북 안보정책을 짜는 기구로 통일정책을 수립·집행하기에는 한계를 갖는다.

과거 북한은 남북관계 현안이나 회담 제의를 장관급 회담 수석대표인 통일부 장관 앞으로 보냈다. 남한은 통일부, 북한은 노동당 통일전선부(통전부)가 창구 역할을 했다. 그래서 통일부 장관을 부총리로 격상시켜 통일 논의의 주도권을 안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게다가 NSC는 김장수 국가안보실장, 남재준 국정원장, 김관진 국방부 장관 등 대북 강경 노선에 입각한 군 출신 인사들의 입김이 세다는 게 김 의원의 진단이다. 따라서 통일부 장관을 부총리로 승격, 힘의 균형을 맞춰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국가안보실장에 밀리는 통일부 장관

이날 남북 고위급 접촉은 김 의원의 기대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갔다. 북측 수석대표로 남북 관계 실권자로 알려진 원동연 노동당 통전부 부부장이 나섰지만 남측 수석 대표로는 김규현 NSC 사무처장 겸 국가안보실 제1차장이 맡았다. 남북대화 파트너가 통일부에서 NSC, 즉 청와대로 바뀐 것이다.

김 의원은 가뜩이나 국가안보실·국정원·국방부 등 안보 관련 부서에 치여 자기 목소리를 못 내는 통일부가 더 위축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사실 현 정부 외교·안보 정책의 키는 NSC 상임위원장인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이 쥐고 있다. 그가 주도하는 대북정책은 국민의 확고한 지지를 얻고 있으며, 위태롭기만 하던 박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을 안정 궤도에 올려놓는 발판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북한도 이를 간파했기에 통일부를 제치고 김 실장의 NSC를 카운터파트로 지목하기에 이르렀다. 김 의원은 “류길재 통일부 장관은 박 대통령 자문교수 출신인데다 최근에는 박 대통령이 ‘통일대박론’으로 힘을 실어줬지만 김 실장의 파워를 당해내지 못한다”고 분석했다.

이는 박근혜 정부 들어 국무위원인 장관이 청와대 대통령 참모에게 밀리는 한 단면에 불과하다. 대통령의 사표 반려에 이은 ‘항명 파동’으로 번진 지난해 9월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의 충격적인 사퇴 과정도 같은 맥락이었다.

당시 진 장관은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의 분리를, 최원영 청와대 고용복지수석은 연계를 주장했다. 사무관에서 차관까지 복지부에서 잔뼈가 굵은 최 수석이 친정의 국장·과장을 청와대로 불러 보고를 받으면서 진 장관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당시 최 수석은 진 장관과 갈등이 없다고 반박했지만 새누리당의 한 재선 의원은 “당시 진 장관 사퇴는 최 수석이 의견 마찰을 빚던 진 장관을 제치고 복지부 공무원들과 직거래한 데서 촉발됐다”고 말했다. 진 장관 사퇴를 보는 여권의 시각이다. 심상정 정의당 원내대표도 “청와대 수석이 장관의 소신을 꺾은 월권행위”라며 “아무리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 해도 책임장관제의 취지에서 벗어난 일”이라고 비판 대열에 가세했다.

이렇듯 대통령 자문교수 출신(류길재 장관)이나 대통령직인수위 부위원장을 역임한 실세 정치인(진영 전 장관)도 청와대 참모와의 파워게임에서 힘에 부치는 게 요즘의 내각이다. 이에 더해 자질을 의심케 하는 실언으로 화를 자초한 장관도 있다. 윤진숙 전 해양수산부 장관은 여수 원유 유출사고와 관련해 “GS칼텍스가 1차 피해자이고, 어민이 2차 피해자”라고 말한 데 이어 답변 과정에서 웃음을 보여 정치권과 현지 주민들로부터 거센 질타를 받은 끝에 해임됐다.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카드사 고객 정보 유출에 즈음해 “어리석은 사람은 무슨 일이 터지면 책임을 따지고 걱정만 한다”는 발언으로 피해자의 반발을 사는가 하면 박 대통령의 구두경고를 받기도 했다.

새해 들어 정가에 개각설이 급속도로 퍼진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김기춘 비서실장이 직접 나서서 “박 대통령이 개각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적극 진화에 나섰지만 시간 문제일 뿐 몇몇 부처 장관이 경질될 것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히 나돈다. 개각 요인이 있어도 집권 2년차의 차질 없는 국정과제 수행과 6월 지방선거, 인사청문회 등 정치 일정 때문에 망설인다는 관측도 뒤따랐다.

박근혜 정부의 내각은 말 그대로 ‘동네북 신세’로 전락한 느낌이다. 이와 관련해 보수 정부에서 장·차관을 지낸 한 원로급 인사는 “기본적으로 역량이 부족한 장관을 앉혀 놓으니 청와대 눈치만 보게 된다”면서 “박 대통령이 원칙에 입각해 국정을 운영하면서도 인사에서는 적재적소 원칙을 벗어나 아쉽다”고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2월 4일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박 대통령의 모두발언 내용을 국무위원들이 받아적고 있다.



대통령 말 한마디에 우왕좌왕하는 부서들

불행하게도 현재의 내각에서는 지난해 5월 작고한 남덕우 전 국무총리가 극력 경계했던 행정부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박 대통령의 외곽자문그룹의 좌장으로 알려진 남 전 총리는 2010년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국정 책임은 국무위원이 지므로 장관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는 게 정도”라고 강조한 바 있다.

“만약 대통령이 장관보다 측근 보좌관을 더 신임한다면 차라리 그 보좌관을 장관으로 임명하면 된다. 장관들은 적극적으로 국민을 설득하고, 사실무근의 잘못된 주장을 혁파하고, 정치권·언론매체와 빈번히 접촉해 이해와 협조를 구하는 등의 역동적인 활동을 해야 하는데 일부 장관은 청와대만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청와대 참모정치를 경계하고 내각을 국정 전면에 내세우라는 주문이다. 물론 이때는 이명박 정부 시절로 이 대통령이 ‘비서정치·’ ‘참모정치’에 의존하면서 장관이 국장 한 명도 마음대로 임명하지 못하는 등 부서의 인사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올 즈음이다. 남 전 총리는 당시 “장관들에게 책임과 권한을 위임해 그들 스스로가 난관 돌파에 최선을 다하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며 그렇지 못한 현실을 질타했다.

박근혜 정부도 인사권이 장관의 손에서 떠났다는 인식이 파다하다. 새누리당의 한 당직자는 “장관이 국장·과장 인사도 마음대로 하기 어려운 것 아니냐”며 청와대의 입김이 부처 인사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지금의 상황은 박 대통령의 당초 약속과도 거리가 멀다. 박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인 2012년 11월 6일 장관에게 헌법과 법률이 정한 실질적인 권한을 주겠다며 이른바 ‘책임장관제’, ‘책임총리제’를 약속한 바 있다. ‘책임장관제’란 각 부처 장관이 인사와 예산 등에 실권을 쥐고 업무를 수행하며 그 결과에 책임지는 제도로 풀이할 수 있다.

지난 1년을 돌이켜보면 책임장관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주요 국정 현안 대응에서 부처는 자기주도 행정은 고사하고 대통령 말 한마디에 춤추거나 정책을 뒤집기가 일쑤다.

노사정위 건만 해도 그렇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5월 20일 오전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경제주체들이 양보를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도록 노사정 대타협을 적극 추진해 달라는 주문을 했다. 방하남 고용노동부 장관은 이날 오전 11시 기자간담회를 열어 노사정 대화를 뒤늦게 제안하기도 했다.

지난해 7월 교육부도 한국사를 수능 필수과목으로 할 것인지 말지를 놓고 체면을 구겼다. 당초 교육부는 국어·수학·영어까지 선택인 수능 체제에서 한국사를 필수로 하는 건 수능체제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다른 과목과의 형평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에 서있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언론사 간부 간담회에서 “수능으로 들어가면 깨끗하게 끝나는 일”이라고 밝히자 물줄기가 바뀌었다.

장관이 소신을 펼치지 못하면 권위가 흔들리고 부서 장악력도 현저히 떨어지게 마련이다. 구설수에 자주 오르고 연일 언론에 얻어맞는 장관이라면 부처의 말단 공무원도 존경심이 우러나지 않는다.

얼마 전 윤진숙 장관 해임을 맞은 해양수산부가 꼭 그랬다. ‘실패한 인사’로 비판받는 윤 전 장관은 해수부 고위 공무원들과도 썩 잘 어울리지는 못했다고 내부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가 전했다. 1, 2급 공무원들은 최고 전문가다. 이들 간부 중에는 윤 전 장관에게 충언을 하길 꺼리는 경우도 있었다. “장관은 고위 관료로부터 이런저런 돌아가는 얘기를 들어야 하는데 언제부터인가 공무원들의 얘기를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았다. 짜증을 낼 때도 있어 공무원 중에는 입을 닫아버린 이도 있다.”

카드사 개인정보 유출사태와 관련한 실언으로 물의를 빚은 현오석 부총리의 기획재정부도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 현 부총리는 정통 재무관료 출신이지만 1급 공무원 생활을 본부에서 해보지 못했다. 기재부의 전신인 재정경제부 경제정책국장·국고국장(2급)을 지내다 1급으로 승진하면서 세무대학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또 세무대학장 재임 1년도 채 안돼 세무대학이 폐교 조치되면서 보직을 받지 못하고 퇴직했다.

이와 관련해 박근혜 캠프에서 경제정책 수립을 담당한 여권의 한 경제통은 현 부총리가 가진 근본적인 핸디캡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재정경제부 근무 당시 일을 맡기면 미적거린다는 평가를 받곤 했다. 일 처리가 우유부단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현재의 기재부 관료들을 통솔하는 데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1급 사표 제출, 전 부처로 확산?

현 부총리는 공공기관 개혁에서는 일부 성과를 냈다는 평가도 받는다. 하지만 인사 적체가 심한 기재부의 ‘군살빼기’에서 리더십을 발휘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기재부 안에는 아직 보직을 받지 못한 1급 상당 고위 관료가 6, 7명에 달한다. 기재부에 소속된 고위공무원 수가 정부가 배정한 인원을 훨씬 넘어섰다고 한다.

자리가 부족하다 보니 외부에 파견 나간 유능한 기재부 중견 간부들조차 복귀하지 못하고 정부산하기관이나 각종 ‘위원회’ 같은 곳에 임시로 몸을 의탁하는 경우도 있다. 올 초 총리실의 무더기 1급 경질사태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을 조직이 바로 기재부다. 인사 적체를 해소해야 기재부 인력 운용에도 숨통이 트이고 산하기관과 각급 공공기관에 제살깎기와 경영 합리화를 요구할 명분도 강화된다.

3월쯤에는 조직에 ‘칼을 대는’ 대규모 인사가 단행되리라는 전망이 유포된다. 기재부발 인사태풍이 부처 전반으로 확산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현 부총리가 비대증과 동맥경화를 앓는 기재부 상층부의 물갈이에서 어느 정도의 뚝심을 발휘할지 관심사”라고 국회 기획재정위 소속 조정식 의원(민주당)이 말했다. 현 부총리는 경제 부총리로서 경제 관련 부처를 총괄하고 조율하는 리더십도 역대 부총리와 비교할 때 뒤처진다는 비판적 시선도 부담으로 작용한다.

장관의 장단점은 부서의 부하직원들이 누구보다 잘 알기 마련이다. 부정적인 언사도 이들의 입을 통해 전파된다. 예컨대 A씨는 지나치게 의전을 따지다 보니 한마디로 피곤한 스타일이다. 적재적소에 사람들을 배치하고,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던 전임자와 정반대의 캐릭터다. 앞에서는 따르지만 뒤에서 수군거리는 이가 많다.

B씨는 일은 일대로 시키고 사람을 챙기는 데는 소홀하다. 과거 공직에서 일할 때도 업무 능력은 별로인데 보고서를 워낙 잘 만들어 ‘리포트의 귀재’, ‘브리핑의 대가’라는 닉네임이 뒤따랐다는 등의 소문이 꼬리를 문다. 더 극단적인 경우도 있다. C씨의 경우 동문서답형 소통으로 ‘무개념 장관’이라는 비아냥도 받았다고 한다. 게다가 간부 대신 자신이 신임하는 실무과장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기도 했다.


1 세종시 어진동 정부세종청사 주변에 수도권 중앙행정기관들의 이전을 환영하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2 요즘 공직사회에서는 과거 정권의 행정부에서 볼 수 있던 열정이나 사명감이 엷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1년 임기 장관은 관료조직의 적수 될 수 없어

반면 박근혜 정부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직업공무원들의 입김이 세졌다는 게 전반적 인식이다. 이명박 정부의 경우는 이상득·최시중·이재오·정두언 등 나름대로 정권창출 지분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각기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노무현 정부도 유시민·이광재·안희정 등 측근 정치인과 386출신들이 군기반장 역할을 했다. 이들은 방대한 관료집단을 제어하고 때로는 윽박질러 국정과제 수행에 나서도록 독려하는 역할을 맡았다. 개중에는 ‘2인자’, ‘왕의 남자’, ‘OO대군’ 같은 타이틀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현 정부에는 정권의 홍위병으로 국정 전면에 나서 호령하는 그룹이 없다. 박 대통령은 특정인에게 힘이 쏠리는 걸 용인하지 않았거니와 의원 시절부터 자기 일이 아닌데도 참견하기 좋아하는 정치인을 멀리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의 청와대에서 홍보기획관과 정무수석을 지낸 박형준 동아대 교수는 박 대통령 스타일이 권한을 위임하는 형이 아니라 만기친람(萬機親覽·모든 일을 친히 살펴 봄)형에 가깝다고 했다. 박 교수는 “박 대통령은 정치하는 과정이나 집권과정에서 그 누구에게도 빚을 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서 “그래서 누구를 특별히 챙기거나 권력을 나눠주지 않는 1인 통치로 가고 있다”고 했다.

이런 환경에서는 대통령이 임명한 장관이 흔들리면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에도 곧바로 적신호가 켜질 수 있다. 그래서 비대한 관료조직의 고삐를 죄는 조치가 취해지기도 했다. 지난해 말 총리실에 몰아친 인사태풍이 그랬다. 1급 10명이 사표를 제출했고, 그중 절반인 5명이 경질됐다. 유정복 안전행정부 장관은 “공직 이기주의 철밥통을 깨기 위해 부처별 1급 공무원에 대해 일괄사표를 받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공직사회 전반으로의 확대 가능성을 언급했다. 이명박 정부에서도 전 부처의 1급 공무원 사표를 받았다.

집권 초기 1급 공무원들의 일괄 사표 제출 및 경질·반려는 두 가지 효과를 낳는다. 사표를 낸 본인들은 잘릴까 노심초사하게 마련인데 사표를 반려해주면 인사권자가 누구인가를 다시 한 번 되새긴다. 충성의 대상이 전직 대통령에서 새 대통령으로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또 사표가 반려된 고위 공무원은 정권의 재신임을 받은 만큼 부하직원에 대한 통솔력이 강화된다.

영(令)이 서면서 공무원 조직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아직은 1급 일괄사표 조치가 총리실에 국한되고 있지만 공직사회를 다잡는 효과를 본 듯하다. 이와 관련해 안전행정부의 한 공무원은 “다른 부처도 제대로 안 하면 총리실 짝 난다는 경고로 받아들여졌다”고 관가의 분위기를 전했다.

박근혜 정부의 내각이 이처럼 맥을 못 추는 건 시대적 흐름과도 맞물린다. 나라 살림살이가 커질수록 공무원 조직은 비대해지는 데 반해 장관의 권능은 축소되는 경향을 말한다. 무엇보다 장관 수명이 점점 줄어든 탓에 약체 장관이 다수 배출된다는 분석도 나온다.

장관의 임기와 역할에 대해서는 고(故) 남덕우 전 총리가 일가견을 가졌다. 생전의 그는 “장관 취임 후 자기 부서의 업무 내용과 당면과제를 파악한 다음 정책을 구상해 소정의 절차를 거쳐 국회에서 입법화하자면 2년도 짧다”고 했다. 장관을 빈번히 교체하면 주체적으로 일을 할 수가 없으며, 결국 정책 추진은 청와대 비서진을 거쳐 대통령의 결재를 얻는 관행이 굳어지고 장관은 과객(過客)에 불과하게 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물론 그가 살았던 시대와 지금의 세상은 딴판이다. 그는 1969년 10월부터 1979년까지 꼬박 10년 동안을 재무장관·경제기획원장관·대통령 경제특보로 일했다. 집권자의 전폭적인 신임아래 경제정책을 신념과 철학에 입각해 일관되게 추진했다.

반면, 요즘 장관의 수명은 남 전 총리가 최저선으로 여긴 2년에도 턱없이 못 미친다. 참여정부의 장관 평균 수명은 11.4개월, MB정부는 16개월에 불과했다. 1년이 좀 지나면 짐을 싸는 게 요즘의 장관실 풍속도다. 6개월 정도 업무를 파악하고 나서 일이 손에 좀 익을 즈음이면 떠나야 하는 식이다. 그래서 “내부에서 발탁된 경우가 아니면 장관을 제대로 하기가 구조적으로 어렵다”고 정치평론가인 황태순 위즈덤센터 수석연구위원이 말했다.

“정무감각이 뛰어난 정치인이나 실세 측근인사가 장관으로 온다 해도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부서를 휘어잡고 독보적인 성과를 남기기는 어렵다. 인수위 부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자타가 공인하던 실세였던 진영 전 장관의 사퇴 사례가 말해준다. 물론 현 부총리의 경우와 같이 해당 부서에서 잔뼈가 굵은 관료조차 리더십이 약하면 맥을 못 추는 게 요즘의 내각 현주소다.”

공직사회에 애국심, 선공후사는 옛말

장관들은 웬일인지 박 대통령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진다. 텔레비전을 통해 간간이 전달되는 국무회의의 모습은 뭔가 획일적으로 비친다. 박 대통령이 미리 준비된 수백, 수천 자 분량의 원고를 읽는 동안 장관들은 열심히 받아쓰는 식이다. 대통령은 국정운영의 큰 틀뿐만 아니라 세부적인 각론까지 제시하는 일이 잦다.

대통령이 세심한 부분을 일일이 챙기다 보니 장관들은 소신행정을 펴기보다는 대통령의 의중을 파악하는 데 골몰하는지도 모른다. 각 부처는 아래로부터의 토론과 분석을 통해 창의적인 정책을 제시하기보다는 청와대에서 내려오는 지시를 완벽히 처리하는 데 급급하다고 정부의 한 간부는 말했다.

이런 경우 공무원들은 자기 소관업무 방향이 청와대의 기류와 맞닿아 있는지 끊임없이 확인하려 든다. 아무리 중요한 국익사업일지라도 청와대의 지시 한마디에 중도에 방향을 틀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공직사회 매커니즘을 연구하는 한 전문가는 정부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장관도 대통령만 쳐다보는 경우가 많다. 부서를 이끄는 간부도 장관과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짜내본들 그게 청와대에서 채택될지 여부를 자신하지 못한다. 차라리 청와대에서 시키는 과제를 열심히 하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부처의 간부는 권력 핵심부의 돌아가는 상황을 한눈에 꿰는 이른바 ‘선수들’이다. 각 부처는 청와대에 정예요원을 파견한다. 부처의 생존, 개인의 안위를 위해 권력 핵심의 동향을 귀신같이 파악해서 본부에 알린다. 때로는 청와대에 사적인 안테나를 세워 정책의 방향을 탐문하기도 하고 장관을 거치지 않은 채 청와대에 직보를 하기도 한다.

공직사회의 무사안일주의도 외부에서 온 장관을 더 힘겹게 한다. 강석훈 새누리당 의원은 대통령직인수위 국정기획조정분과 위원 시절, 정부 부처간 칸막이 제거 등 공직사회 개혁 방안 수립에 깊숙이 관여한 바 있다. 그가 본 공직사회는 과거와 달리 애국심이나 선공후사 정신이 박약했다. 강 의원은 “정책 집행에서도 그다지 열정이 와닿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앞서 언급된 남 전 총리는 재임 10년 동안 인사권을 100% 행사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장관은 내가 임명하지만 차관은 장관이 임명하라”고 전권을 넘겼다는 것이다. 남 전 총리도 차관이나 차관보를 임명할 때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일이 한 번도 없었다고 돌이켰다. 요즘은 장관들이 대통령과 대면하는 빈도도 점차 줄어든다는 얘기가 들린다. 아버지 시절에 비하면 박근혜 정부의 장관은 한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물살에 왔다갔다하는 부평초 같은 존재라는 푸념이 나올 법도 하다.

201403호 (2014.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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