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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에게 듣는다 ―홍일식 전 고려대총장 

“교과서 파동은 우파가 현대사 공부 게을리한 대가” 

사진 지미연 기자
현대는 역사서술 대상이 아니라는 전통적 역사인식에서 벗어나야…한국이 근대국가 건설에 성공한 과정을 연구한 저서 집필 중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은 지식이 깊고 경륜이 풍부해 우리 사회의 존경받는 원로로 꼽힌다.



홍일식(78) 전 고려대 총장은 지식이 깊고 경륜이 풍부해 우리 사회의 존경받는 원로로 꼽힌다. YS정부 때 교육부장관과 총리 후보로까지 오르내렸지만 상아탑에 머물러 있겠다며 고사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팔순이 가까운 지금도 수불석권(手不釋卷)하면서 집필활동에 몰두하고 있는 그는 평생을 전통문화와 우리 역사연구에 천착해왔다. 홍 전 총장을 찾아 교학사 교과서 파문 등 최근의 현안에 대해 들어보았다.

지난해 교학사가 펴낸 고등학교 교과서 <한국사> 파동은 국내 지식인 사회, 특히 우파 진영을 충격에 빠뜨렸다. 한 쪽당 평균 두 건에 가까운 오류가 발견되면서 결국은 1개 고등학교만 교과서로 채택하는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교과서 파동을 두고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박근혜 대통령이 아베 일본 총리와 마찬가지로 역사 교과서를 왜곡시키고 있다고 비판해 파문이 국제적으로 확산되기도 했다.

최근 서남수 교육부 장관은 국사교과서에 대한 검정업무를 위임받았던 국사편찬위원회에 교과서 파동의 책임을 돌렸지만 그동안 현대사 공부를 게을리했던 우파 진영의 자성론도 제기되고 있다.

이번 교과서 파동의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근본적으로는 역사를 바라보는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됐습니다. 보수(保守)는 지난 역사를 그냥 지키는 데 익숙합니다. 하지만 진보진영은 다르지요. 사회주의권의 역사 구분에서는 현대(現代)가 있고, 당대(當代)가 있습니다. 중국은 신해혁명부터 공산주의 정권수립까지를 현대라고 하고 우리가 현대라고 말하는 지금의 시대를 당대라고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당연히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도 역사서술 대상이 됩니다.

반면, 우리의 전통적인 역사인식에서는 당대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고대-중세-근세-근대-현대’ 이렇게 구분하지요. 전통적인 우파의 사고가 그렇습니다. 고구려·백제·신라 3국이 다 망한 뒤에야 고려 때 <삼국사기>가 나왔습니다. 고려가 망한 뒤 조선 성종대에 <고려사>가 나왔고, 조선시대에도 선대왕이 서거한 뒤에야 실록을 편찬했습니다.

해당 인물들이 많이 살아있기 때문에 현대는 정확히 역사로 서술할 수 없다는 것이죠. 최소한 50년 이상 지난 뒤라야 그 시대에 대한 역사서술이 가능하다는 것이 전통적인 역사관이었습니다. 그러니 우파는 지금의 우리가 사는 시대를 연구하는 당대사 즉 현대연구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파와 좌파는 이렇게 역사인식에서부터 차이가 있습니다.”

현대사도 역사라는 인식의 전환 있어야

결국은 우파가 현대사 공부를 안 했던 것이 이 같은 결과를 불러왔다고 봐야겠군요?

“우파는 애초부터 현대를 역사로 보지 않았지만 저쪽(좌파) 진영은 달랐지요. 8·15 이후의 현대사를 역사서술의 대상으로 보고 기민하게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꾸준히 연구해왔습니다. 다 알다시피 고(故) 리영희 교수를 비롯한 몇몇 교수의 주도로 현대사의 석사·박사학위 과정이 개설됐고, 80년대에 이미 <해방전후사의 인식> 등을 내놓지 않았습니까? 진보 진영은 지금 한국사를 전공한 석사와 박사가 수백 명이고, 전문 학자만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지금의 현대사 연구자들의 90%가 그쪽 성향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현대사 영역에서는 좌파 진영이 확실하게 우위를 점하고 있어요.”

우파 진영이 현대사 공부가 부족했다고 인정하더라도 오류가 너무 많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보수 진영의 현대사 연구자라고 해봐야 손으로 꼽힐 정도인데 평소에 오랫동안 연구를 해왔던 것도 아니고 새 정부 출범 이후 갑자기 교과서를 내야 한다고 해서 부랴부랴 만들다 보니 실수가 많이 나온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종군위안부가 일본군대를 자발적으로 따라갔다고 오해받을 수 있는 역사기술이 나온 것입니다. 우파 진영도 이제는 현대를 역사학의 한 분야로 놓고 전문적으로 연구해가야 이런 일을 겪지 않게 될 겁니다”

현대사에 대한 정확한 기술이란 게 애초부터 어려운 것 아닌가요?

“좌파 진영의 현대사 서술도 완벽한 게 아닙니다. 지난 10년 동안 부단히 고치고 고쳐서 만들어진 결과물입니다. 쉽게 말해 저쪽은 10쇄가 아니라 한국사 10판을 낸 격입니다. 그러니 오류가 적을 수밖에 없지요. 거기에 비하면 교학사 교과서는 이번에 겨우 초판본을 낸 것입니다. 오자·탈자 오류가 수백 건 나온 것은 당연합니다. 이런 이유로 교학사 교과서가 공격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번 교과서 파문을 통해 보수 진영이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현대사에 대한 공부가 애초부터 부족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배운 사람일수록 교만해서는 안 되고 늘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는 겸손함을 가져야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우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이번을 계기로 해서 가진 자는 베푸는 데 인색하지는 않았는지, 배운 자는 교만하지 않았는지, 권력자는 군림하지 않았는지 냉정하게 반성을 해야 합니다. 이런 반성 없이는 진정한 사회통합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사대교린(事大交隣)은 고도로 세련된 외교정책

박근혜 대통령은 2월 13일 역사교과서 논란과 관련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역사교육을 통해서 올바른 국가관과 균형잡힌 역사의식을 길러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며 “사회적 통합이라든가 공동체의식을 더욱 확장하는 이런 문제에 있어서도 균형 잡힌 역사의식이 제대로 정착되지 않고는 사회적 통합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우리 사회가 자라나는 세대에 올바른 역사의식을 심어주는 데 소홀했다는 것은 이번에 교과서 파동을 겪으면서 보수적인 학계와 지식인들이 반성해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균형 잡힌 역사의식을 강조했는데, 역사에 대한 균형 잡힌 태도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흔히 조선왕조가 망한 것을 두고 왕실의 무능과 양반계급의 부패와 타락을 거론하지만 이것은 부분적인 문제일 뿐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일제가 우리사회의 분열을 위해 만들어놓은 식민사관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젊은 학자들은 우리가 사대주의(事大主義)였다고 나쁘게만 보는데,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강자와 약자가 공존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맹자(孟子)는 ‘이대사소(以大事小)’와 ‘이소사대(以小事大)’의 외교정책을 논했습니다. 맹자는 큰 것으로서 작은 것을 (예로) 섬기는 이대사소에 대해 ‘하늘의 이치를 즐기는 것이니 천하를 거느릴 수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늘의 이치란 도덕적 정당성을 말하는 것으로 곧 리더십이 있어야 통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맹자는 또 작은 것으로서 큰 것을 섬기는 이소사대에 대해 ‘이는 하늘의 이치를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니 그 나라를 보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는 약소국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과 지혜를 말한 것입니다. 맹자의 이 같은 주장에 비춰보면 조선의 사대교린(事大交隣)은 고도로 세련된 외교정책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강자와 약자가 공생공영하는 수단이요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붕당정치의 폐해를 많이 지적하는데, 500년 넘게 나라를 지탱한 조선의 힘은 바로 문민통치(Civilian Control)에 있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조선의 창업은 패도(覇道)로 했지만 통치는 인의예지(仁義禮智)의 공맹(孔孟)사상으로 했습니다. 조선의 문신들이 연약한 붓 한 자루 가지고 거칠고 힘센 무신들을 거느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도덕적 정당성과 논리적 합리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역사에 대한 균형 잡힌 사고가 필요합니다.”

홍 전 총장은 서울 태생으로 조선조의 손꼽히는 문벌 가문인 남양 홍씨 후예다. 그의 기억에 이르면 집안의 어른들은 벼슬살이를 할 때만 서울 관철동의 집에 살았고, 대대로 살아온 본가는 경기도 양주 상수리에 있었다고 한다. 학자물림인 그는 현재 살고 있는 성북동 자택에 ‘한국인문사회연구원’을 설립해 이사장을 맡고 있다. 외부 활동을 자제하며 집필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평생의 연구 작업을 축약한 저서를 준비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가제로 <내 조국 대한민국〉이라고 정해보았는데 ‘문화선진대국으로 가는 길’이라는 부제를 달았습니다. 이르면 올해 상반기에 출간할 생각입니다. 저는 이 책에서 우리나라가 어떻게 근대국가 건설에 성공했는지를 제 나름대로 규명해보고자 했습니다. 예를 들면 1919년 발표한 ‘기미독립선언서’가 있습니다.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일본의 무신(無信)을 죄(罪)하려 아니하노라”는 구절이 있지요. 저는 ‘선언’이라는 단어에 주목합니다. 한자로 언(言)과 어(語)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언(言)은 상대가 믿든 안 믿든 내가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반면 어(語)는 서로 주고받는 대화를 뜻합니다. 독립선언서는 일본의 입장과 무관하게 우리의 독자적인 선언입니다.

선언서 내용을 보면, 우리 선인들은 일본에 국권을 빼앗겼지만 다시 돌려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에 구걸해서는 자주적인 근대국가 건설은 하지 못합니다. 독립선언서에는 자주독립 선언뿐만 아니라 우리의 반성과 다짐의 의미도 있습니다. 우리가 국권을 빼앗긴 이유가 일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있다는 성찰이 당시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인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선인들은 극일(克日)의 의지의지로 절치부심해 피와 땀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구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 치하를 이겨내고 자주적인 힘으로 근대국가 건설에 성공했다는 말씀이군요?

“식민지가 되었다가 2차대전 이후 국권을 회복한 나라는 많습니다. 하지만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어 근대국가 건설에 성공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거의 유일합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제가 연구한 결론은 일제 강점기 망명정부 세력과 국내의 민족세력의 두 역량이 합쳐진 결과라는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해외에 망명한 민족세력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인촌 김성수 선생과 조만식 선생 등 국내의 민족세력은 굴욕을 참아가며 당시 근대국가의 모델인 일본으로부터 배울 것은 배워서 자강(自强)의 길에 매진했습니다. 2차대전 종전 후 이 두 역량이 하나로 합쳐져서 대한민국이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뤘다는 게 저의 연구결론입니다.

무엇보다 국내 민족진영과 해외 망명세력 간에 절묘한 역할분담이 자연스럽게 이뤄진 것이 근대국가 건설에 성공한 요인입니다. 그래서 한국은 중국이라는 용광로에 빠져들지 않고 고유한 문화와 영토·언어·문자에다 상당한 혈통까지 지켜올 수 있었습니다. ”




“문장은 습관이 되기 때문에 무섭다”

홍일식 전 총장은 베스트셀러 <한국인에게 무엇이 있는가>를 비롯해 <21세기와 한국 전통문화> <문화영토시대의 민족문화> 등을 펴냈다. 국문학자이자 문장가인 그의 글은 쉽고 간결하고 명확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고려대 국문과 재학시절에 청록파 시인으로 유명했던 조지훈 교수와 국문학자인 구자균 교수로부터 호된 글쓰기 훈련을 받았다고 했다.

“국문학과 2학년 무렵인데, 하루는 조지훈 선생께서 다다이즘(dadaism)에 대해 리포트를 써오라고 숙제를 내주신 적이 있습니다. 1950년대 후반이라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검색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도서관에 가봐야 일본어 백과사전이나 있는 정도여서 겨우 그것이나 베껴 써서 제출하는 정도였지요. 저도 눈치껏 200자 원고지 15장에 성의껏 정서해서 제출했습니다.

하루는 연구실 앞을 지나가는데 선생님이 ‘홍군!’ 하고 저를 부르셨어요. ‘(제출한 리포트를) 내가 봤다. 이런 것이나 베껴오라고 시킨 줄 아는가’라고 하시더니 원고뭉치를 제 앞에 툭 던지시는 겁니다. ‘제 글을 써오라는 것이지, 누가 베끼라고 했나’ 그러시면서 말입니다. 선생께서 저를 각별히 키우려고 점 찍어놓고 일부러 호되게 하셨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 그때는 얼마나 무안하던지요.(웃음) 제 속으로는 ‘남들도 다 베꼈는데, 왜 나만 가지고 그러시나?’ 하고 서운했지요.

그래서 다다이즘이 뭔가 하고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정성껏 리포트를 써서 다시 냈지요. 그 뒤에 조지훈 선생께서 저를 다시 부르더니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글의 내용은 체험이 축적되면 자연히 채워지지만 문장은 습관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 문장이 이게 뭐냐? 한 문장에 같은 단어가 반복해서 들어가는 것은 삼가야 한다. 이런 만연체 문장은 안 된다. 고쳐라.’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제 원고를 빨간펜으로 일일이 다 고쳐주셨습니다.”

조지훈 선생의 그 가르침이 평생의 교훈으로 남으셨군요?

“<춘향전>에 보면 ‘행인임발우개봉(行人臨發又開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편지를 보내기 전에 다시 한번 꺼내서 본다는 뜻이죠. 원래 당나라 시인 장적(張籍)이 그리운 이에게 보내는 편지에 행여 할 말을 다 못했을까 편지 들고 막 떠나려는 아이를 붙들고는 다시 봉투를 뜯어봤다는 데서 나온 말입니다. 그만큼 옛날 사람들은 문장을 신중하게 다루었습니다.

조지훈 선생님뿐만 아니라 구자균 선생님도 저를 엄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제가 대학 3학년 때 군에 입대하게 됐는데, 서울역에서 기차 타고 강경역에 내려서 논산훈련소까지 40리 길을 걸어갔습니다. 도착하고 나서 ‘논산훈련소 부대에 잘 안착했습니다.…’ 이렇게 교수님께 편지를 보냈더니 보름 뒤에 답장이 왔어요. 편지가 꽤 두툼해서 뭔가 하고 뜯어봤더니 철필에 빨간색 잉크를 찍어서 일일이 교정을 해서 보내셨더라고요.

‘안착(安着)했다는 말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이렇게 적으시고는 제가 보낸 원래 편지의 맞춤법, 띄어쓰기까지 새빨갛게 지적해 고쳐주셨습니다. 이듬해 7월 첫 휴가를 나와 선생님을 찾아가서 큰절을 드리면서 ‘그때 무안해서 혼났습니다’ 그랬더니 ‘이놈아! 너는 그렇게 충격요법으로 가르쳐야 돼. 그냥 해서는 못 고쳐’ 그러시더군요. 우리의 전통적인 교육은 그렇게 스승이 제자의 성격과 품성에 맞게 답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베풀 때는 상대방이 열등감을 느끼지 않도록 남모르게 도와줘야 한다. “대북 지원도 마찬가지”라고 홍 전 총장은 말한다. 사진은 2012년 북한수해 지원물품 수송장면.
이 대목에서 홍 전 총장은 동양의 전통적 교육관에 대해 설명했다. <논어>를 읽다 보면 공자(孔子)가 같은 질문에도 제자마다 가르쳐주는 답이 달랐는데, 이는 제자마다 성격과 특성을 고려한 맞춤형 교육이라는 것이다. 홍 전 총장은 그 사례 중 하나로 공자의 제자인 자공(子貢)을 거론했다. 자공은 집안에 재력도 있고, 공자가 천하유세하러 다닐 때도 비용을 댔던 이재에 능한 제자였다. 공자는 자공이 “군자(君子)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고 묻자 “군자는 말은 신중하게 하고 행동은 민첩해야 한다”고 말했다.

동양의 교육은 사람 특성 고려한 맞춤형

공자는 자공이 무엇이 부족하다고 본 것일까요?

“공자가 평소에 보니 자공이 착하고 후하면서 너그러워 잘 베푼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덜 겸손하다는 인상을 받았던 거죠. 공자는 자공의 그런 품성을 꿰뚫어보고 자공이 조금 더 겸허해질 것을 바랐던 것입니다.

남을 도와준다는 것에도 동양과 서양이 차이가 있습니다. 서양은 기부행위나 베푸는 것 자체를 선행이라고 여겨서 적극 권장합니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베푼다는 것이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고맙고 감사한 일이지만 주는 사람의 우월감, 쾌감이 내재돼 있다고 봅니다.

받는 사람은 말로는 고맙다고 하고 은혜가 백골난망이라고 하지만 그 사람의 밑바닥 심리에는 ‘왜 나는 받기만 하는가?’ 하고 자존심에 상처와 열등감을 느끼게도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자기가 잘됐을 때에 은혜를 갚는 보은(報恩)이 아니라 배신(背信)하는 보복심리로 나타납니다.

미국이 세계 도처에서 많이 도와주고 베풀면서도 얼마 안가 ‘양키 고홈’ 소리를 듣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풀 때 상대방이 자존심에 상처나 열등감을 느끼지 않도록 남모르게 또 겸손하게 도와줘야 합니다. 그래야만 훗날 보은심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동양에서는 남을 도울 때도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입니다. 이것을 예(禮)라고 합니다. 이게 동양 문화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동양에서 내가 남에게 베푼다는 것은 내가 쓰고 남아서가 아니라 내 자신에게 가혹하리만큼 인색했기 때문에 비로소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받는 사람도 이것을 알기에 감사하게 받을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북한을 도울 때도 이런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요즘 ‘통일은 대박’이라는 대통령의 발언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통일은 대박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도덕성에서 앞서야 통일도 주도적으로 이뤄낼 수 있습니다. 중국에 공산정권이 수립되기 전인 1945년 당시에 국민당의 장개석과 공산당의 모택동은 그 세력과 규모가 비교 자체가 안 될 정도였습니다. 모택동은 산도적처럼 연안(延安)으로 쫓겨 갔지만 장개석에겐 엄청난 병력과 재력과 화력이 있었고, 국제적으로도 외교가의 거물로 대접받았습니다.

그런데 불과 3~4년 만에 중국 천하가 모택동 차지가 되어버립니다. 왜 그랬을까요? 장개석 군대가 농촌마을에 들이닥치면 마구잡이로 약탈하니까 농민들이 다 도망갔지만 모택동 군대는 군기가 엄해서 마을청소부터 해주고 군량에 쓰일 양식 값으로 시세의 두 배 이상을 매겨 영수증을 써주는 등 민심을 얻어서 이겼던 것입니다.

베트남의 사례도 마찬가지입니다. 베트콩을 창설한 ‘첸유탄’의 수기를 읽어보면 고딘 디엠 월남정권이 너무 부패해서 베트콩 8만 명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8만 명이 베트남정부군과 미군, 한국군 등 수백만 명을 이겨냈습니다. 그들은 도덕성에서 앞섰고, 인간의 본성을 어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독일이 총소리 한 번 나지 않고 통일된 것은 서독의 월등한 경제력도 작용했지만 통일돼도 서독 사람들이 자기들을 죽이거나 보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동독 권력층의 발포명령 없이 기적처럼 통일이 된 것 아닙니까. 지금 우리는 어떤가요? 북한의 당 간부나 인민 대중들이 생각할 때 ‘남한으로 흡수통일되면 모두 남한 사람의 종노릇이나 하게 될 것이다. 그럴 바에야 못살아도 차라리 우리 식대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아무리 우리가 돈을 많이 쏟아부어도 통일이 어려울 것입니다.”


▎홍 전 총장(맨 왼쪽)은 고(故) 조지훈 교수로부터 호된 글쓰기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존경하는 마음에 지훈상운영위원장도 맡았다.



공생공영의 인류정신이 한국의 전통

홍 전 총장은 평생을 전통문화 연구에 매진해왔다. 고려대 제 13대 총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에는 동양고전에 대한 교육을 강조했다. 당시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교양과목으로 <명심보감>을 수강해야 했다. 그는 외국 석학들이 학교를 찾으면 무조건 한정식집으로 모셨다. 그렇게 해서 총장을 마칠 때쯤 되니 젓가락질 못하는 사람들은 없더라고 했다. 이 때문에 한때는 ‘완고한 전통주의자’라는 말까지 들었다. 그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평생을 우리 전통문화 연구에 천착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펄 벅(1892~1973) 여사가 한국을 소재로 <살아있는 갈대(Living Reed)>라는 장편소설을 쓰기 위해 1960년 늦가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이야기입니다. 지프차를 타고 경주 안강 근처의 국도를 지나가는데, 황혼녘에 지게에 볏단을 짊어진 농부가 역시 볏가리를 잔뜩 실은 소달구지를 끌고 묵묵히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답니다.

미국 같으면 당연히 농부가 그 달구지에 올라타고 채찍을 휘두르면서 갈 텐데 한국의 농부는 소와 짐을 나누어지고 함께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는 거죠. 그래서 펄벅 여사는 우리나라를 ‘고상한 국민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라고 격찬합니다. 자연과 더불어 만물이 공생공영하는 문화를 높이 산 것이죠.

작곡가 윤이상의 오페라 <심청>이 유럽에서 클래식으로 평가받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유럽의 예술계는 1972년 제 20회 뮌헨올림픽 전야제 때 윤이상의 공연을 계기로 메시아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왕비가 된 심청이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고 아버지’ 하고 아버지를 끌어안자 ‘어디 보자! 내 딸아’ 하고 심봉사가 눈을 뜨는데, 어두웠던 공연장의 조명이 밝게 켜지면서 팡파르가 울려퍼지고 맹인잔치에 참석했던 모든 맹인이 다 함께 눈을 뜹니다.

‘아! 이런 발상도 있었구나!’ 기립박수가 15분 동안 터져 나왔답니다. 유럽 사람들이 다 놀랍니다. 아버지 눈을 뜨게 했던 심청의 그 정성으로 인해 모두가 다같이 눈을 뜬다는 생각, 공생공영하는 인류의 오랜 염원이 우리 전통 속에 녹아있었던 겁니다. 그 이후 독일에서 윤이상은 악성(樂聖)이 됐습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전통문화가 가진 엄청난 힘이라고 봅니다.”

21세기 들어 한류열풍이 불면서 우리 문화의 힘이 새삼 주목받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군요?

“한류가 맹위를 떨치는 것도 그 속에서 인본주의, 즉 ‘사람 냄새’가 나기 때문입니다. 한국인의 의식의 밑바닥에는 ‘사람은 죽으면 누구나 신이 된다’는 사고가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면서 부모조상의 영혼이 제사음식을 직접 와서 자시고 간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나라이건 사람 위에 신(神)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사람 밑에 신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번은 효자로 이름난 어느 양반이 시골마을을 지나다 어느 집에서 제사 지내는 걸 보게 됐답니다. 그런데 제상에 음식을 놓지 않고 상 밑에다 뭘 놓고 지내더랍니다. 사정을 들어보니 ‘생전에 부친이 개고기를 즐겼는데, 죽어서도 입맛이 바뀔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제사상에 개고기 올린다는 얘기는 못 들어서 상 밑에 놓아도 드실 수 있을 것 아닙니까’라고 하더랍니다. 이것은 단순한 웃음으로만 넘길 수 없는 섬뜩하기까지 한 지혜라고 하겠습니다.”

원시종교 속 인본주의가 한국인의 뿌리

그 인본주의는 어디서 비롯됐을까요?

“우리의 뼛속에, 핏속에 살아있는 게 인본주의입니다. 사람이 생명을 잃을 위기에 봉착했을 때 서양 사람들은 핼프 미(Help me), 일본사람들은 다스케데 구레(たすけて くれ), 중국인은 추밍(救命)이라고 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사람 살려’ 그럽니다. ‘날 살려줘’가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억울하게 당할 때도 우리는 ‘아이고~ 사람 잡네’라고 합니다. 나를 강조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강조하는 사람 중심의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종의 외교고문을 지내고 헤이그에 밀사를 보내는데 도움을 준 H.B 헐버트(1863∼1949) 박사가 한국인의 종교에 대해 책에 이렇게 썼습니다. ‘한국인은 일상생활은 유교의 규범에 따라서 하고, 사색과 명상은 불교적으로 하고, 위기에 봉착할 때는 원시종교로 돌아간다. 위급할 때 돌아가는 것이 진짜 한국인의 종교’라고 했습니다. 기가 막힌 통찰입니다.

이분이 이런 글을 쓰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서울 가회동 골목을 지나는데 양반집에서 아이가 아프자 마지막에 굿을 하더랍니다. 바깥주인이 고향에 다녀온다고 하면서 집을 비워주자 안주인이 무당을 불러 굿을 했던 겁니다. 결국 한국인은 아무리 교양 있고 지체 높은 선비라도 위급할 때 마지막에 의지하는 수단은 굿이었다는 거죠.(웃음) 그 인본주의의 뿌리는 단군신화까지 이어집니다. 그래서 곰도 사람이 되기를 원했던 겁니다.”

이 인본주의를 어떻게 발전시켜나가야 될까요?

“오늘의 상황에 맞는 ‘신인본주의’을 만들어가야죠. 저는 그 핵심이 바로 효(孝)라고 봅니다. <맹자>에 ‘노오노(老吾老)하야 이급인지노(以及人之老)하고, 유오유(幼吾幼)하여 이급인지유(以及人之幼)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 어버이를 받드는 마음으로 남의 어버이에게까지 미치고, 내 어린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의 어린것에까지 미치게 하라는 내 집에서 효를 행해야 밖에 나가 다른 어른을 공경하고 이웃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사랑의 확대재생산입니다.

제가 아들 셋에 딸 하나를 뒀는데, 손자손녀만 모두 11명입니다. 제가 2년 전 여름에 손자손녀들을 한자리에 모두 모이게 했습니다. 4박5일 동안 모아놓고 ‘사촌들이 정을 통하고 살아야 한다’면서 너희들끼리 연락도 하고, 재미있게 지내라고 했습니다. 그 비용은 다 제가 댔습니다.

지금은 손자손녀들이 인터넷으로, ‘카톡’으로 서로 생일축하도 하고, 저희들끼리 연락해서 안부를 전하고 삽니다. 저는 이게 자녀들에게 천만금의 유산을 주는 것보다 낫다고 봅니다. 이것이 21세기의 주고받는 수평적 효도이고, 신인본주의입니다. 현대의 효는 무엇보다 자기가 성공하는 것입니다. 나의 성공을 나보다 더 바라는 이가 바로 내 부모님이기 때문입니다.”

201403호 (2014.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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