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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인터뷰 - MB 퇴임 후 첫 언론 인터뷰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 

“일관성과 신뢰 전제돼야 남북정상회담 가능” 

최경호 월간중앙 차장 사진 김현동 기자
■ 북한도 내부 안정 위해 남북관계 개선에 나설 수밖에 없을 것 ■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회복이 정상회담 성사의 지름길 ■ 2009년 싱가포르 남북 접촉은 실패 아닌 미완성이자 진행형 ■ 소상공인·자영업자·샐러리맨 정책개발 중 정치에 관심



지난해 12월, 북한정권의 2인자 장성택의 전격적인 처형으로 꽁꽁 얼어붙었던 한반도에 훈풍이 불어오는가?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월 6일 취임 후 첫 신년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이른바 ‘통일 대박론’을 언급한 지 한 달여 만인 2월 들어 남북한 당국자가 판문점과 금강산에서 잇따라 만나 고위급 접촉을 가졌다. 남북 고위급의 만남은 참여정부 마지막 해인 2007년 12월 이후 6년 2개월 만의 일이다.

하지만 사전에 의제 조율이 이뤄지지 않은 터라 구체적인 합의 도출에는 실패했다. 남북은 한미군사훈련과 이산가족 상봉 연계 문제에서 맞서면서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했다. 그러나 2월 14일 접촉에서는 한미군사훈련과 무관하게 2월 20~25일 금강산에서 열리는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또 양측은 남북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적극 노력하기로 했다.

이번 남북 접촉의 우리측 수석대표인 김규현(61) 청와대 국가안보실 1차장 겸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장과 북한의 원동연(67) 노동당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은 모두 양측의 ‘실세’라고 할 만하다. 외교부 차관 출신인 김 차장은 남북회담 경력은 없지만 NSC 업무를 맡은 지 8일 만에 대화 테이블에 앉았다. 이를 두고 향후 남북관계는 NSC가 주도하게 되리라는 전망이 나왔다. 박근혜 대통령은 한반도 정세 및 대북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MB(이명박)정부에서 없앴던 NSC를 5년 만에 부활시켰다.

북측 단장을 맡은 원 제1부부장은 대남사업의 베테랑으로 꼽힌다. 그는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출신으로 20여 년간 남북간 주요 회담과 접촉에 참여해왔다. 1990년 남북 고위급회담 때 수행원으로 1차 회담부터 7차 회담까지 모두 참여했고, 1992년 고위급회담 때는 군사분과위원회 위원으로 나섰다.

또 1995년 7월 베이징 2차 쌀 회담 때는 북측 대표, 같은 해 9월 3차 쌀 회담에서는 대변인을 맡기도 했다. 더구나 원 제1부부장은 2009년 10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임태희-김양건 비밀접촉’에 참여한 주인공으로 주목을 끌었다.

돌이켜보면 MB정부 때도 남북정상회담·이산가족 상봉 추진 등 남북화해를 위한 노력이 전무했던 것은 아니다. 특히 2009년에는 남북정상회담 일보직전까지 갔다가 무산되기도 했다. 이때 싱가포르 비밀접촉을 비롯해 정부의 대북 창구 역할을 맡았던 이가 바로 임태희(58) 전 대통령실장이다.

<월간중앙>은 2월 10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 한국정책재단에서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을 만나 최근의 남북 고위급 접촉의 의미를 들어봤다. 그가 언론과의 본격 인터뷰에 응한 것은 지난해 2월 이명박 전 대통령 퇴임 이후 처음이다.

임 전 실장은 인터뷰에서 ▷2009년 싱가포르 회담 뒷얘기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 ▷4강 외교 방향 ▷남북정상회담 성사 가능성 등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김규현 국가안보실 제1차장(오른쪽)과 원동연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이 2월 12일 경기도 파주 판문점 우리측 지역 평화의 집에서 열린 남북 고위급 접촉 전체회의에 앞서 인사하고 있다.



“북한도 긴장관계 지속은 원치 않을 것”

이명박 전 대통령의 퇴임 후 소식이 뜸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2011년 12월 대통령실장에서 물러난 이후 두 가지 일에 몰두해왔다. 우리 사회의 손발과 허리를 이루는 샐러리맨·자영업자·소상공인들을 위해 일하고 싶었다. 이분들이 선거 때는 늘 중심에 서 있는 것 같지만 평상시에는 ‘정책 대상’에서 소외되고 있다.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의 애로사항을 듣고 해결해주기 위한 자원봉사단체인 ‘소울림 포럼’을 1년 전부터 운영해왔다. 답답함을 달래주는 숲을 소울림이라 하는데 영어로는 소울(Soul) 즉 ‘영혼을 가진’이란 뜻이기도 하다.

또 다른 일은 119 안전재단이다. 우리 사회에는 긴급상황에서도 가족에게 연락이 잘 닿지 않아 목숨을 잃거나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의외로 많았다. 소방방재청과 함께 이런 분들에게 필요한 적절한 응급조치, 실질적 도움을 주기 위한 방법을 고민해왔다. 이르면 3월부터 시범사업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임 전 실장이 건넨 명함에는 자신의 직함을 ‘119 안전재단 이사장’이라고 적어 넣었다.)

어떤 계기로 이런 일을 시작하게 됐는가?

“IMF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나는 청와대에서 금융 구조조정을 담당하는 행정관으로 일했다. 그때 전(全) 금융기관 임직원의 3분의 1을 구조조정해야 하는 임무를 맡았다. ‘공직자가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하는데,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구나’ 는 자괴감이 들었다. 사실 야당 국회의원 시절에도 정책에서 소외돼 있는 사람들의 재취업을 위한 법안을 준비했다.”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의 갑작스러운 처형 이후 남북관계가 경색되는가 싶더니 얼마 전 남북 고위급 접촉 성사가 이뤄졌다. 하지만 미 국무성은 북한이 한두 달 안에 핵실험을 강행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최근 한반도 정세를 어떻게 보나?

“북한은 유교적 전통을 자기들에게 맞게 변형·유지하는 가부장적 체제를 갖고 있다. 유교에서 제사를 가문의 승계자가 맡는 것과 비교하면 약간 변형된 형태라 할 수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이후 그의 아들인 김정은이 정권을 잡았다. 따라서 내부 체제를 안정시키는 게 가장 급한 과제였을 것이다. 장성택 처형 등 일련의 사건은 김정은이 가부장적 구도에서 승계된 권력을 공고히 하는 과정이었다.

김정은이 ‘남북관계도 내가 주도한다’는 메시지를 주려고 (장성택 처형, 이산가족상봉 합의 등) 여러 가지 상황을 전개하는 것이다. 내적으로는 승계된 권력의 리더십을 공고히 하며, 외적으로는 국정을 장악하고 주도하고 있다는 과시일 것이다. 전임 정부 때 내가 만나고 경험했던 것을 바탕으로 말하자면 결국 북한도 남북관계를 개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남한과 긴장관계를 계속 이어가는 것은 내적·외적 신뢰도를 높이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북한이 절대 머리를 숙이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강하게 나가면 북한도 강하게 나온다. 저들의 입장에서는 가부장의 권위나 체면이 유지돼야 한다. 우리가 온건한 입장을 보인다면 북한은 자신들의 체면을 유지하면서 남북관계를 주도하는 모양새로 다가올 것이다.”

남북이 2007년 이후 거의 7년 만에 고위급 접촉을 가진 것이다. 북한이 먼저 제의한 이번 접촉의 의미는 무엇이며 북한의 속내는 어디에 있다고 보나?

“북한 입장에서는 잃을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고위급 접촉 이후 가시적인 성과가 나온다면 자신들이 남북관계를 주도하고 있다는 것을 안팎으로 크게 선전함으로써 내부를 안정시키고 대외 신뢰도를 제고할 수 있다는 계산일 것이다. 이번뿐 아니라 남북회담이나 접촉이 성과 없이 끝날 경우 북측은 ‘우리는 최선을 다했는데 남측이 소극적이었다’며 책임을 전가하려 할 것이다. 앞으로도 이 점을 감안해서 북측과 대화 및 협상에 임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내부 안정 위해 접촉 제안했을 것

북측 단장인 원동연 노동당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은 대남 관계의 베테랑이다. 2009년 10월 싱가포르 남북 정상회담 관련 비밀접촉 때도 만나본 인물 아닌가?

“원동연 제1부부장은 실무자급 회담부터 차관급 회담까지 거의 평생을 남북관계 실무를 담당해온 대남 전문가다. 2009년 접촉 당시 실무능력과 협상능력을 두루 갖춘 인물이라는 느낌을 받았다.”(원 제1부부장은 2002년 10월 장성택과 함께 북한 경제사찰단의 일원으로 서울을 방문하기도 했다)

임 전 실장은 노동부장관 시절이던 2009년 10월 싱가포르에서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과 만난 것으로 안다. 당시 임 전 실장은 너무 강하게 밀어붙이지는 말자는 입장이었다고 들었다.

“북한은 공식석상이나 대외적으로는 적어도 자신들이 남북협상을 주도하는 것처럼 비치기를 원한다. 저들이 체면을 유지하고 싶어하는데 우리도 똑같이 (강하게) 나가면 접점이 생길 수 없다. 나는 그 사람들이 그러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저쪽의 체면은 살려주되 자신들이 약속한 것을 이행할 수 있도록 확실한 장치를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 그렇다고 이전 정권에서처럼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 저쪽에서 ‘아니면 말고’ 식으로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을 때를 대비해 확실한 제동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MB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을 시도한 것은 모두 세 차례였다. 결과적으로 세 차례 모두 무산됐지만 MB정부 역시 이전 정부들과 마찬가지로 남북정상회담이 절실했다는 증거다.

첫 번째로 2009년 10월 전후 임태희 노동부장관과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의 싱가포르 비밀접촉이다. 두 사람은 이 시기에 적어도 세 차례는 만났던 것으로 알려졌다. 양측은 ▷남북정상회담 ▷납북자 국군포로를 포함한 이산가족 고향 방문 ▷국군 유해 공동발굴 ▷인도적 지원 등 6개 항목에서 사실상 합의를 이뤘다.(이 부분에서 임 전 실장은 합의라는 용어 대신 ‘의견접근’이라는 표현을 썼다.) MB정부의 세 차례 남북정상회담 시도 가운데 성사 일보직전까지 갔던 것은 ‘임태희-김양건 싱가포르 접촉’이었다.

두 번째로 2010년 가을, 김숙 국가정보원 1차장이 수 차례 평양을 방문해 천안함 폭침 이후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기 위해 정상회담 추진 방안 등을 모색하기도 했다. 북측에서는 류경 보위부 부부장이 김숙 차장의 상대로 나왔다. 천안함 폭침에 대한 북측의 입장 표명과 관련해 류 부부장은 “(나의) 재량 범위에서 협의할 수 없는 일”이라며 선을 그었다고 한다.

이듬해 1월에는 류 부부장이 극비리에 서울을 방문했다. “과거 불행한 사태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한다”는 선에서 양측이 출구전략을 논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서울을 방문하고 돌아간 류 부부장이 총살을 당했다. 표면적 이유는 수뢰·부정축재였지만 “대남 전략을 남측에 노출했다”는 비난을 받았다고도 전해졌다.

세 번째 시도는 2011년 5월, 이명박 대통령의 베를린 연설이 촉매제가 됐다. 이 연설에서 이 대통령이 이듬해 3월로 예정된 핵안보정상회의에 김정일을 초청한 것이 계기가 돼 남북관계자가 중국 베이징·선양 등지에서 접촉했지만 좌절됐다. 같은 해 6월 9일 조선중앙통신이 “그(김천식 당시 통일부 통일정책실장)는 우리와 만나자마자 이번 비밀접촉은 정상회담 개최를 위해 대통령의 직접적인 지시와 인준에 의해 마련됐다고 하면서 그 의미를 부각시켰다. (김태효 당시 대통령대외전략비서관이) 시간이 매우 급하다고 하면서 대통령의 의견을 반영해 작성했다는 일정계획이라는 것을 내놓았다. 접촉이 결렬 상태에 이르자 김태효의 지시에 따라 홍창화(국정원 국장)가 트렁크에서 돈봉투를 꺼내들자 김태효는 그것을 받아 우리 손에 쥐여주려고 했다. 우리가 즉시 쳐 던지자 김태효는 얼굴이 벌개져 안절부절못했으며, 홍창화는 어색한 동작으로 트렁크에 황급히 돈봉투를 걷어 넣고 우리 대표들에게 작별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비난을 퍼부었지만, 협상에 참여한 우리 측 인사들은 하나같이 북측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말했다.

이 만남에서는 구체적으로 2011년 6월 판문점, 8월 평양, 2012년 3월 서울(핵안보정상회의) 등 정상회담 시간표까지 논의된 것으로도 알려졌다. 그러나 천안함 관련 사과 문제, 북한의 무리한 요구 등에 발목을 잡혀 끝내 정상회담은 불발됐다. 북한이 핵문제는 회피하면서 무리한 대가만 요구했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당시 노동부장관이 대북 특사 역할을 한 것에 대해 지금도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임 전 실장이 그 역할을 맡은 배경은 무엇이었나?

“남북관계에 대해서는 한나라당 의원 시절부터 우리가 주도해서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마 2004년 일이었을 것이다. ‘개성공단이 북한에 있기 때문에 북측이 일방적으로 조치를 취하면 우리는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개성공단과 연계한 공단을 남한에도 만들자’고 제안했다. 관철되지는 못했지만 그게 파주통일공업단지특별법이다. 북쪽에서 부품을 만들면 남쪽에서 조립하는 식으로 둘이 합쳐야 완성품이 될 수 있다는 취지였다. 그 법안을 주도하다 보니 진보학자들 모임에도 초청을 많이 받았다.

2005년에는 뉴욕에서 개최된 세계한민족법안 세미나에 참석해 이 주제를 발표했다. 2006년에는 개성공단과 평양을 방문했다. 당시 한나라당 국회의원 신분으로는 입국 허가를 받을 수 없었기에 경기도 자문위원 자격으로 북한을 다녀왔다. 북측에서 안내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내가 그런 법안을 발의했다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비서실장 시절이던 2007년 그리고 당 정책위의장이던 2008년에 대북 업무와 관련해 많은 접촉과 문의가 있었다. 그리고 2009년 북한에서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사절단이 올 때 청와대 면담 요청과 함께 나에게 먼저 연락이 왔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대북 창구가 됐다.”


▎이명박 대통령이 2011년 12월 12일 청와대에서 하금열 신임 대통령실장에게 임명장을 준 뒤 사의를 표한 임태희 전 실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공(功) 다투면 일 그르쳐

주무부처 소속이 아닌 인사가 대북 관계 업무를 맡은 데 대해 다른 부처의 불만은 없었나?

“2008년 이야기를 하겠다. 숭례문 복구공사가 한창일 때 언론에서 금강송이 부족하다는 기사가 나온 적이 있다. 그때 내게 ‘북한에는 금강송이 많으니 그것을 들여오면서 남북관계 개선의 계기로 삼으면 어떻겠느냐’며 우리가 원하면 주선해주겠다고 연락한 사람이 있었다. 역사적 문화재를 복원하는 데 북한의 금강송을 쓰면 남북 화해·교류의 상징이 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어 대통령에게 보고한 뒤 관계 부처의 의견을 들어 본격적으로 접촉하게 됐다.

그런데 얼마 후 (북한 금강송을 쓰자는 아이디어를 제공했던) 북한을 수시로 드나드는 한 중국 인사가 도저히 이 사업을 추진하지 못하겠다고 말해 왔다. 특정 부처와 일을 추진할 경우 나머지 부처와 등을 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관련 부처들이 저마다 자신을 창구 삼아 일하자면서, 그렇지 않을 경우 사업상 불이익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며 압박한다는 것이었다.”

부처 간에 공을 서로 차지하려 했다는 말로 들린다.

“국회의원 시절에는 별로 못 느꼈는데, 입각한 이후에는 노동부장관으로서 이 일을 하는 것에 대해 불편해하는 분위기를 분명히 느꼈다. 남북관계야말로 협업이 필요하다. 또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추진되는 게 좋다. 그렇지만 내부적인 주도권 다툼 문제는 반드시 해결돼야 한다. 북측은 변함이 없는데 우리측은 그렇지 않다. 북측은 이런 우리의 특성을 잘 알고 있다. 우리 스스로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MB정부에서는 남북관계도 실용적인 관점에서 접근했다.

2009년에 북한에서 적극적으로 나온 것은 이 전 대통령 임기 초반에 정상회담을 추진해야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때 정상회담이 성사되긴 했으나 임기 말이었던 터라 효과가 크지 않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우리는 일방적 지원은 안 된다는 입장이 확고했다. 인도적 조치에 상응하는 인도적 지원·유해발굴·국군포로·이산가족 등에 대한 조치로 쌀 지원 즉, ‘선(先) 인도적 조치, 후(後) 인도적 지원’, 큰 덩어리로 인도적 교류·경제협력이었다.”

상호주의 바탕으로 남북관계 설정해야

임 전 실장은 MB정부에서 추진했던 대북정책을 ‘프라이카우프(Freikauf·자유를 산다)’제에 빗댔다. 냉전 시절 서독은 동독의 반체제 인사 석방사업을 벌여 3만3755명을 데려왔다. 그 조건으로 서독은 동독에 34억6400만 마르크(약 1조 8천억 원)의 현금과 현물을 제공해줬다. 현인택 당시 통일부 장관은 2009년 10월 23일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국군포로·납북자 문제의 해법과 관련해 일정한 대가를 주고 데려오는 ‘독일 정치범 송환방식’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프라이카우프제를 의미한 것이었다.

남북정상회담이 성사 직전에 무산됐는데 아쉽지는 않았나?

“아쉬웠다. ‘지금까지 추진됐던 어떠한 회담보다도 진전된 회담이었다’는 전문가들의 평가를 직접 듣기도 했다. 우리는 북핵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남북정상회담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북한은 이것은 미·북 간의 문제라며 의제로 삼을 수 없다고 맞섰다. 하지만 우리는 6자 회담의 주요 당사자가 남북이고 거기에 다른 나라들이 참여한 것인데, 북한이 미국과 대화를 원한다면 남한을 통해 미국과의 대화도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북측을 설득했다. 그게 안 되면 북·미 간 대화도 어려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북핵 문제가 정상회담 의제로 올라가는 데 거의 의견 접근이 이뤄졌다. 원래는 싱가포르에서 내가 전권을 갖고 정상회담 협의를 마무리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협상 막바지에 서울에서 연락이 왔다. 결론을 내지 말고 최종 서명은 통일부에 넘기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싱가포르에서 김양건 부장과 큰 원칙만 결정하고 실무협의는 통일부-통일전선부 회담에서 마무리하기로 이야기를 마쳤다. 내가 국회의원 신분이었다면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합의를 끝냈어도 되는데 노동부장관 신분이었기에 마무리는 통일부-통일전선부 회담에서 맡는 것이 좋겠다는 정부 입장을 들었다.

그 후 장관급회담이 아닌 실무회담이 진행됐는데 양측이 싱가포르 협의의 연장선과는 다른 요구를 하면서 결국 정상회담이 무산됐다. 어디에서 나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북한이 정상회담을 대가로 5억~6억 달러를 요구했기 때문에 무산됐다는 주장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북한이 그런 요구를 했다면 대통령이 협상을 허용할 리 만무했을 것이며 실제 김양건 부장도 그런 요구를 한 적이 없다”(이 대목에서 임 전 실장은 지금 생각해도 많이 아쉽다는 듯 연신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임 전 실장이 북측과 협의내용에 서명한 것을 두고 훈령 범위를 벗어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는데.

“훈령을 어겼다면 나중에 대통령실장에 발탁될 수 있었겠나? 논의한 사안을 정리해주지 않으면 그 사람들은 평양에 돌아가서 뭐가 되겠는가? 그래서 상대가 정리해온 내용에 볼펜으로 일일이 줄을 그어가며 ‘맞다’ ‘아니다’ ‘이건 논의된 것은 맞지만 취지는 이런 거다’는 식으로 설명해줬다. 내 글씨가 가득한 문서에 ‘임태희’라고 써줬다.”

최근에 진행되고 있는 이산가족상봉 문제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다.

“북한이 설령 이중적인 의도를 갖고 나온다 하더라도 그것을 우리 뜻을 관철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 과거에 북측과 논의할 때 남북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을 공동으로 진행하자는 의견에 근접한 적이 있었다. 무엇 때문에 북한이 공동유해발굴사업에 응했겠나? 우리와 함께하면 저들한테도 도움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에서 전쟁 기록을 갖고 있는데 우리가 이긴 전투에 관해서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만 패한 전투는 그렇지 못하다.

패한 전투에서는 사상자가 많이 나오기 때문에 상세하게 기록을 남기기 어렵다. 반대로 생각하면 북한은 우리가 패한 전투의 기록을 많이 갖고 있을 것이다. 남북이 기록을 서로 공유해야 유해발굴이 가능한 이유다. 그래서 프라이카우프 방식이 중요하다. 우리가 필요한 것과 상대가 필요한 것을 걸어놓고 한쪽이 발을 빼면 제재가 가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북한이 인도적 조치를 한다면 우리도 그에 상응하는 인도적 지원을 한다. 그게 바로 상호주의다.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이산가족상봉도 정례화해야 한다. 다만 서신교환과 상봉 등을 패키지(한 묶음)로 하고 그에 상응하는 인도적 지원을 하는 방식이다. 나중에 (남북정상회담 등과 관련해) 논의가 활발해지면 싱가포르 논의는 실패가 아니고 미완성이자 진행형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향후 협의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막연한 낙관론은 금물

박근혜 대통령이 신년 초 ‘통일 대박론’을 들고 나왔다. 현 정부의 남북정상회담 가능성을 어떻게 보나?

“남북관계는 기본적으로 정상회담을 통해 풀어나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한 번에 이뤄지지는 않는다. 남북정상회담이 절실하다고 해서 신뢰관계가 미흡한 상태에서 급하게 서두를 일은 아니다. 박 대통령이 말한 신뢰 프로세스가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 일관성과 신뢰가 전제돼야 남북정상회담은 가능할 것이다.”

신뢰관계를 강조했는데 이와 관련해 현 정부에 조언해준다면?

“다양한 채널의 소통이 필요하다고 본다. 분위기는 점차 조성되고 있으니 북한의 영향력 있는 인사와 신뢰할 수 있는 우리 측 대화 채널이 필요하다. 이런 채널이 만들어지기까지는 개별적 노력들이 축적돼야 한다. 담당자가 바뀌었다고 해서 대북정책의 근간까지 바뀌어서는 안 된다. 우리 내부적으로 (공을 차지하기 위한) 주도권 다툼이 있어서도 안 되고 책임 있는 대화가 가능하도록 소통체계가 만들어져야 한다.”

일부 인사는 금방이라도 통일이 될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한다. 어떻게 보는가?

“북한에 다녀온 한 외국인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비록 평양에 국한된 말이긴 하지만 북한의 상황이 조금씩 나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한 사람의, 그것도 평양 한 곳만을 본 소감을 갖고 이렇다 저렇다 평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수 있지만 참고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우리 입장에서 통일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막연한 낙관론은 곤란하다. 그건 아주 나이브(Naive·순진에 빠진)한 생각이다.”

현 정부 들어 대일 관계가 매우 껄끄러워졌다. 어떤 이들은 미국과 중국의 경쟁 구도 속에서 한국의 줄타기가 위태로워 보인다는 지적도 한다.

“박근혜 정부의 외교를 큰 틀에서 보자면 과거 정부의 기조를 유지해가고 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일본이 급속도로 우경화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임 전 실장이 인터뷰에 응한 2월 10일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 한국·중국과의 관계를 얼어붙게 만든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한·일 정상회담 개최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밝혀 주목을 받았다) MB정부 때는 외교 역시 철저히 실용주의였다. 실용이 아니라 편가르기를 하면 강대국 간의 갈등에 끼일 수밖에 없다.

요즘 국제정세를 보면 일본은 실용외교로 가지 않는 것 같다. 중국과 미국은 어떤 땐 실용외교인 듯하다가도 어떤 때는 전략적 갈등을 빚는다. 중·일 간에는 늘 갈등이 생긴다. 댜오위다오(釣魚島, 일본명 센카쿠 열도·尖角列島) 문제, 국제사회에서 영향력 행사, 동북아 주도권 등을 두고 양측이 맞선다. 이런 점을 고려했을 때 한·중·일을 외교선상에서 한데 묶는 지혜도 필요하다. 세 나라가 함께 모이면 정치적 논의는 자연스럽게 자제할 수밖에 없다.

또 대화 테이블에 일본이 있으니까 우리가 중국과 만나도 미국이 오해할 소지가 생기지 않는다, 실용적인 관점에서 보면 미국에 대한 경제 의존도는 조금 줄어들었지만 안보와 국제적 신뢰도 면에서는 여전히 미국은 중요한 파트너다. 미국이 왜 2010년에 G20 정상회의를 한국에서 개최할 수 있도록 도왔겠는가? 한국에 대한 미국의 신뢰를 국제사회에 보여줌으로써 한국의 신용도를 높인 것이다. 그리고 그 토대 위에서 한·미 간 관계를 강화한 게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이었다.”

기회 되면 다시 국회에서 일하고 싶어

2010년 7월부터 2011년 12월까지 1년 5개월 동안 대통령실장을 맡았는데, 바람직한 비서실장의 역할은 뭐라고 보나?

“실장에 발탁되는 순간 세 가지 생각을 정리했다. ▷보이스리스(Voiceless·침묵) ▷페이스리스(Faceless·나서지 않기) ▷무한책임이 내가 생각한 대통령실장의 덕목이다. 대통령실장으로서 최대한 말을 아끼고, 언론 노출을 자제하되 책임질 일은 책임지자는 의미다. 직원들에게도 ‘책임은 실장이 질 테니 소신껏 일하라’고 주문했다. 청와대는 과거에는 일을 지휘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각 부처가 일을 하도록 설득하고 ‘정치 소비자’인 국민 입장에서 각 부처가 책임지고 일하게끔 해야 한다. 나는 대통령께도 ‘최종 을(乙)은 대통령이십니다’라고 진언했다. 이런 자세로 일했지만 청와대에서 나온 지 2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 있었던 모든 일은 곧 대통령실장이 한 것 아니냐는 지적을 듣곤 한다. 처음에는 섭섭하기도 했지만 요즘은 대통령실장이 한없이 무거운 자리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스린다.”

지난해 10월 재·보궐선거 때 출마를 준비했으나 예상과 달리 선거구가 단 2곳으로 축소되면서 무산된 것으로 안다. 향후 행보와 관련해 어떤 구상을 하고 있나?

“나는 정부 정책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가 서비스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공직을 그만두고 정치에 뛰어든 사람이다. 16대 총선 때 한나라당 공천을 받지 못했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국회에 들어가 법안을 만들고 정책을 추진하는 일을 하고 싶은 게 사실이다.

앞서 말했던 바와 같이 우리 사회의 손발과 허리를 이루는 사람들에게 정부와 국회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이 간격을 좁히는 것이 우리 사회의 과제다. 박 대통령이 주장하는 중산층 70%도 샐러리맨·자영업자·소상공인이 공정하게 평가받고, 기회를 얻고 발전할 수 있어야 가능하리라고 본다. 이런 일은 정치권과 정부에서 풀어야 한다. 일할 기회를 갖기 위해 준비하고 노력하겠다.”

본인의 장점과 상품성은 어디에 있다고 보나?

“내가 생각한 일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해낸다. 지금까지 그래 왔다. 중간에 더디게 진행되거나 실패한 것처럼 보여도 반드시 한다. 그게 임태희다.”(인터뷰에 배석한 임 전 실장 측 한 관계자는 청와대 행정관부터 대통령실장까지, 정부 사무관부터 장관까지, 국회 초선의원부터 정책위의장까지 지낸 분이 몇이나 되겠냐고 말을 보탰다)

임 전 실장은 이명박 전 대통령 퇴임 이후 공식적인 행사 참여가 많이 줄었다. 그렇다고 그의 발걸음이 아예 멈춘 것은 아니다. 임 전 실장은 인터뷰가 있던 날에도 여러 분야 관계자들, 소상공인연합회 사람들과 만남을 이어갔다. 현재 그는 ▷한국정책재단 정책자문위원장 ▷119 안전재단 이사장 ▷소상공인연합회 정책자문위원장을 맡고 있다.

2월 10일 임 전 실장과의 인터뷰는 2시간 30여 분에 걸쳐 진행됐다. 사전 질문지와는 별개로 몇 가지 ‘돌발질문’도 던졌지만 임 전 실장은 크게 당황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남북 고위급 접촉이 이어지는 와중에 전화상으로 추가 인터뷰가 이뤄지기도 했다.

인터뷰를 마친 뒤 임 전 실장은 “이명박 전 대통령 퇴임 후 1년 만에 처음 인터뷰에 응하다 보니 조금은 긴장했던 것 같다”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그는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기회가 곧 있을 것”이라며 여운을 남겼다.

201403호 (2014.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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