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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書齋 | 도시를 걸으며 ‘도시의 기억’을 발굴하다 

화려한 도시의 명암 <인공낙원> vs 한국 근·현대사가 녹아든 용산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 

장석주 전업작가


한 남자가 프랑스의 한 지방의 호텔방에 들어 무심코 덧문을 연다. 덧문을 열자마자 여행자는 창밖에 펼쳐진 시골 풍경에 숨이 멎을 듯 넋을 잃는다. 그는 흐느껴 울기 시작한다. 그가 운 것은 감탄이 아니라 무력감 때문이다. “눈앞에 모든 것이 주어졌는데도 그는 아무것도 붙잡을 수가 없었다”고 프랑스 작가 장 그르니에는 썼다. 누군가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한다고 썼을 때, 그는 이미 아름다움이 우리 안에 끝없는 공허와 결핍감을 키운다는 사실을 선험적으로 깨달은 자다. 가끔 서울이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이 지루하고 산문적인 도시가 존재의 결핍감을 키워서 울리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산책자가 도시의 풍경 안과 밖을 더듬으며 나아갈 때 그 시선은 자주 시간의 지층을 파헤치는 고고학자의 그것으로 바뀐다. 장소들은 시간이 제 흔적을 남기는 명판(名板)이다. 시간은 사나운 기세로 달려왔다가 이윽고 무너지고 사라지는데, 이때 시간은 흐르면서 장소의 안과 밖을 할퀸다. 장소가 곧 시간의 다른 몸인 것은 바로 그런 사정 때문이다. 도시의 외관, 그 바깥 풍경들에 남은 오래된 시간의 자취는 오직 부재와 망각의 방식으로써만 오롯하다. 누구도 흘러간 시간에 가 닿을 수는 없는데, 그것은 이미 부재와 망각 속으로 존재 이전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시차를 두고 나온 정윤수와 이광호의 도시인문학으로 분류할 수 있는 책을 겹쳐 읽는다. 정윤수의 <인공낙원>은 도시 공간의 세부(細部)를 이루는 광장·극장·모델하우스·모텔·카지노·백화점·테마파크·경기장·박물관·공항·기차역 등에 대한 탐사 기록이다.

저자는 배회자이자 산책자의 정체성을 갖고 “맹진하는 속도와 휴식 없는 노동과 번들거리는 물신”(7쪽)들의 신호로 가득 찬 글로벌폴리스의 인공낙원을 가로지르며 ‘극장’에서 일상의 자명성 뒤에서 펄럭거리는 판타지가 가리키는 현실을, ‘모델하우스’에서 아무것도 영구한 것은 없고 쉽게 해체하고 철거되는 가설무대와 닮은 삶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아울러 ‘모텔’에서 절박한 욕망의 비상구이고 더는 도망갈 수 없는 최후 망명지의 모습을, ‘백화점’에서 온갖 색채들로 들끓는 욕망의 진원지를, ‘박물관’에서 해체되고 새로이 만들어지면서 유동하는 삶과 영속되는 것의 시간을 엿본다.

욕망과 자본의 결합, 메트로폴리스

정윤수는 ‘광장’에 대해 말하면서 먼저 최인훈의 <광장>에 나오는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라는 문장을 떠올리고, 프랑코 만쿠조의 광장이 “만남, 의 견 교화, 산책, 휴식이 이루어지는 장소”라는 말을 인용한다. 말할 것도 없 ‘광장’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일 것이다.

광장이 “단순히 물리적으로 널찍한 도심 속의 공간이 아니라 밀실의 개인이 공포와 외로움을 이겨내고 좀 더 넓고 따스한 공동체로 스며드는 통로”(41쪽)라는 개념이라면, 불행하게도 서울에는 그 개념에 딱 맞는 광장은 없다. 기껏해야 국가 상징물과 조형물들이 배치되어 있고, 가끔씩 국가 이벤트나 시정 홍보를 위한 행사를 치르는 너른 공간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개인에게 그곳은 ‘허가’를 받아야 비로소 이용할 수 있는 장소다. 우리는 개별자의 삶과 사회가 상호삼투하며 만든 동시대인의 공간적 기억의 저장고라는 의미에서의 ‘광장’을 갖지 못한 것이다.

메트로폴리스가 품은 다양한 인공 장소는 우리가 욕망하는 것들에 대한 자본의 응답이자, 일상의 밋밋함 너머의 판타지를 충족시키고자 기획된 허망한 유토피아일 것이다. 그것이 허망한 것은 이 인공장소들 속에서 욕망의 충족은 유예되고, 판타지는 영구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인공낙원의 ‘장소’들은 제각각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것들이 함유한 도시 인문학적 의미를 궁구할 수 있는 탐색의 대상들에서 개별자들의 다채로운 욕망과 그 욕망들에 들린 물신이 날마다 이 인공낙원을 둘러싸고 벌이는 피와 죽음의 사육제의 풍경을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용산을 걸으며 확인한 모더니티의 참혹함

이광호의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는 삼각지에서 효창공원·용산전자상가·해방촌과 이태원을 품고, 한남동과 동부이촌동,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어지는 서울의 일부를 이루는 용산이라는 공간에 대해 아름답고 쓸쓸한 인문적 탐사의 기록이다. 하필이면 왜 ‘용산’인가? 그것은 ‘용산’이 “모더니티의 참혹함과 혼종성”을 어떤 내재성으로 함께 갖고 있고, “애써 지우고 싶은 식민과 이식의 역사와 모욕과 단절의 시간이 폭력적인 개발을 호출하는 기이한 장소”(7쪽)인 까닭이다. 용산은 일제강점기 일본군 주둔지였고 해방 뒤에는 미군 부대가 차지하고 있던 곳이다. 더 거슬러올라가서 13세기 고려 말, 이 장소는 몽고군의 병참기지가 있던 곳이다.

이광호는 용산의 그 익숙하고 진부한 길들을 걸으며 시간과 장소의 상관관계로 제 생각의 물길을 밀고 나간다. 장소는 시간을 앞지르지 못하고, 오직 흘러간 시간만을 망각과 부재의 형식으로 제 몸에 새긴다. 시간이 장소에 새긴 문신들은 건달들이 제 등에 새긴 문신처럼 결코 아름다울 수가 없다.

“장소는 시간을 앞지르지 못한다. 장소는 시간의 몸을 입고 있으며 내밀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장소를 둘러싼 이야기는 완전히 드러날 수 없으며 이해받을 수도 없다. 장소의 의미가 타오르던 극적인 순간은 결국 사라진다.(12쪽) ‘용산’이란 기억과 망각의 사이에서 명멸해가는 우연들의 집적에 지나지 않는다.

인문적 소양이 풍부한 산책자로서 이광호의 시선은 ‘용산’의 현재, 즉 전자상가·아이파크몰·전쟁기념관·국립중앙박물관, 긴 담으로 차단된 미군기지, 이국의 풍물들이 기묘하게 뒤섞인 이태원의 거리들에 머물지만, 그의 마음은 시선이 가 닿을 수 없는 ‘과거’들, 외세의 주둔지였고, 붉은 사창가였던 과거의 시간들에 더 오래 머문다.

이광호의 문장들은 정연하다. 추상적이고 모호한 것들에 대해 말할 때조차 그 엄격한 질서는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다. 그 정연한 문장의 질서 너머에 깊은 슬픔으로 흐트러진 마음의 짐승이 있다. 물론 그 짐승은 한 번도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생의 참혹한 우연에 이미 깊이 찔린 그 짐승은 슬픈 눈으로 저쪽에서 현실 이쪽을 응시한다.

미친 듯이 포효하고 싶지만,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는 이 마음의 짐승이라니! 이 짐승을 미치게 만드는, 그러나 끝내 미쳐지지 않는 내면의 깊은 슬픔은 느닷없이 호명되는 그 정체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너’라는 존재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걸으면서 중얼거리는 자가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하고, 너는 나를 듣지 않으며, 나는 네 안에서 나를 듣는다”(79쪽), “너의 이름은 뼈아픈 비밀과 같고, 나는 결코 ‘너’라는 단 하나의 이름에 닿을 수 없다. 너의 영혼과 삶을 정확하게 요약하는 이름은 없다. 이름은 불가능하지만, 또한 불가피하다. 너에게 꼭 어울리는 이름은 없다”(93쪽) 시도 때도 없이 호명되는 ‘너’란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시간일까, 혹은 이미 현실에서 자취를 감춰버린 사랑했던 누군가일까?

분명한 사실은 ‘너’는 지금-여기에 부재하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장소가 이름에서 초연하다면, 침묵과 고독 속에 유폐되어 있는 부재의 ‘너’ 역시 그렇다. 이광호는 “위태로운 기억과 망각, 기다림의 순간 속에 명멸”(12쪽)하는 장소의 침묵들과 ‘너’의 침묵 위에 제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침묵을 겹쳐내려는 욕망 때문에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201408호 (201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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