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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욱의 생활에서 만난 철학 | 앙리 베르그송 - ‘몸이 곧 프레임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 인간의 감각이나 사유 활동도 이미지의 작용일 뿐… “인간은 신체가 가진 특권으로 세상의 이미지를 임의적으로 변경할 수 있다” 

◎ 박영욱의 생활에서 만난 철학

영화 <명량>의 한 장면. 베르그송은 영화에서의 움직임은 실제 현실의 움직임이 아닌 그것을 공간적으로 분할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다.(위) 라 몬테 영이 직접 그린 Composition 1960 #7 악보. 하나의 음만 계속 진행할 뿐 여기에는 멜로디나 박자 혹은 리듬이 존재하지 않는다.(아래)
미국의 미니멀리즘 음악가 라 몬테 영(La Monte Young)이 작곡한 ‘Composition 1960 #7’(1960)은 그 유명한 존 케이지의 음악 ‘4분33초’ 못지않게 특이하다. 연주자는 피아노 앞에 앉아서 서스테인 페달(sustain pedal, ‘음의 유지’를 온·오프 하는 페달)을 누른 채 피아노의 B와 F#음만을 강하게 내리친다. 서스테인 페달 때문에 강하게 내리친 음은 빨리 소멸하지 않고 오랫동안 잔향을 남기며 지속된다.

1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음이 지속되며 더 이상 잔향이 남아있지 않게 되면 연주는 끝이 난다. 물론 이 곡은 첼로나 바이올린 같은 현악기로 연주해도 무방하며, 전자악기를 이용하면 1분이 아닌 수십 분 혹은 수백 분 동안 지속될 수도 있다.

이 특이한 음악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혹자는 이를 음악이 아닌 퍼포먼스로 이해할지도 모른다. 이 음악은 하나의 음만 계속 진행할 뿐 여기에는 멜로디나 박자 혹은 리듬이 존재하지 않는다. 멜로디나 리듬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여러 음이 단속적으로 연결돼야 할 것이다. 간단한 동요 ‘산토끼’만 하더라도 ‘솔,미, 미, 솔, 미, 도, 레, 미, 레, 도, 미, 솔’ 하는 식으로 분절된 음이 이어지며, 각각의 음은 특정한 길이를 갖는다. 그러나 라 몬테 영의 음악은 하나의 음이 그저 윙윙댈 뿐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멜로디나 리듬도 없는 이 연주를 음악이라고 생각할 턱이 없다.

영 자신도 그의 곡에서 연주되는 이러한 지속적인 음을 전통적인 음악의 ‘음(tone)’이라기보다는 ‘윙윙대는 소리(drone)’라고 불렀다. 그런데 영이 이 ‘윙윙대는 소리’를 자신의 음악 재료로 사용한 데는 연유가 있었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라 유난히 청각적 감수성이 예민했던 영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소리는 계곡의 물과 바람, 나뭇가지의 흔들림과 같은 자연의 소리였다. 이러한 소리는 전통적으로 바흐나 베토벤, 혹은 슈트라우스의 음악이 내는 인위적인 소리와는 전혀 다르다. 그는 생명의 소리를 내고 싶었던 것이다.

생명이란 ‘지속’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이미지로 본 베르그송에게는 인간의 신체 혹은 감각이나 사유 활동 또한 이미지의 작용에 불과하다.
이런 자연의 소리, 즉 생명이 있는 소리의 특징은 그것을 악보로 기록할 수 없다는 점이다. 악보로 담는다는 것은 공간적으로 배열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가령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은 ‘다단조’(Cminor)라는 조성을 지니며 그 유명한 첫 두 마디 ‘빰빰빰빠암, 빰빰빰빠암’은 ‘G, G, G, Eb, F, F, F.D’로 표기되며 이를 오선지 악보에 정확한 높이와 길이로 공간화할 수 있다. 그러나 영이 만든 ‘윙윙대는 소리’는 일정한 높이도 길이도 지니지 않는 하나의 지속적인 음일 뿐이다. 그것은 결코 공간적으로 나타낼 수 없다.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 son, 1859~1941)이 현대인에게 던지고자 한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다. 인간의 생명이란 결코 양적으로 나타내거나 공간화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의 모든 물질문명은 공간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이 지닌 본질로부터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다. 생명의 본질이란 공간화해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닌 마치 영이 표현한 ‘윙윙대는 소리’처럼 시작도 끝도 없는 순수한 ‘지속(durée,dur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생명의 본질인 순수한 ‘지속’을 수량화하고 공간화한 것이 바로 현대의 문명, 혹은 나아가 전통적인 서양문명에 내재한 사상인 것이다.

이탈리아의 피렌체를 방문한 사람이라면 한번쯤 꼭 둘러보게 되는 성당이 있다. 그것은 엄청난 규모의 돔 형태로 이루어진 두오모 성당이다. 원근법의 창시자로 잘 알려진 브루넬리스키(1377~1446)가 설계한 이 거대한 돔은 흥미롭게도 치밀한 설계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중세 시대에 지어진 대부분의 성당은 시공을 위한 설계도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두오모 성당의 장엄한 돔의 비밀은 완전히 알려져 있지 않다. 오늘날은 설계도면 없이 건축물을 짓기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런데 알고 보면 건축에서 설계도가 사용된 것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오늘날의 시공을 위한 설계도면을 처음 만든 사람은 19세기 중엽 신고전주의 건축가인 비올레르뒤크(Eugène Viollet-Le-Duc, 1814~1879)로 알려져 있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계산된 도면을 사용할 경우 건축물은 매우 정교하고 체계적으로 지어질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생각지도 못한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건축 과정에서 도면으로 수량화할 수 없는 불규칙한 곡면의 형태는 배제되고 만다.

말하자면 직선과 사선, 원이나 타원의 호(弧)와 같은 규칙적인 선만 시공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다 보면 건축물의 형태는 획일화되고 만다. 근대 이후 모더니즘 건축물이 획일적으로 직사각형의 반듯한 형태를 띠게 되는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오스트리아 출신의 건축가 훈더트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 1928~2000)는 일부러 울퉁불퉁한 형태의 불규칙한 곡면을 사용한 건축물을 만들었다. 그는 자연에는 직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지고 직선으로 만들어진 설계도면을 무시했다. 정량화한다는 것은 현실의 삶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현실을 계량화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끊임없이 계량화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러나 현실을 수량화할 경우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역설에 빠지고 만다.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 철학자 제논(Zenon)이 제시한 그 유명한 역설 또한 현실이 지닌 본성을 잘 보여준다. 잘 알려진 대로 제논의 역설은 이러하다. 어떤 사람이 활에 화살을 꽂아 10m 떨어진 과녁을 향해 활시위를 당겨서 놓았다. 이제 화살은 활을 떠나 과녁을 향해 날아간다. 정확하게 조준된 화살은 순식간에 과녁에 도달할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제논에 따르면 이 화살은 결코 과녁에 도달할 수 없다. 제논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명한다. 활을 떠난 화살은 먼저 활과 과녁의 중간지점(A1)을 통과해야 한다. 그 다음에 화살은 그 중간지점(A1)과 과녁 사이의 중간지점(A2)을 통과해야 한다. 또 그 다음에 화살은 이 중간지점(A2)과 과녁 사이의 중간지점(A3)을 통과해야 한다. 이 과정은 무한히 반복될 것이다. 말하자면 화살은 A1, A2, A3,A4, A5, A6……의 중간지점을 통과해야만 과녁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중간지점은 무한하기 때문에 결국 화살은 무한한 지점을 통과해야 하며, 시간상으로는 무한한 시간이 걸리게 된다. 그리하여 제논은 결국 활을 떠난 화살은 결코 과녁에 도달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제논의 역설과 ‘순수지속’

제논의 논증에 어떠한 오류가 있을까? 이를 수학적으로 해결하려는 많은 시도도 있었지만 그다지 신뢰할 만한 것은 아니다. 이에 반해서 베르그송은 제논의 역설을 아주 다른 각도에서 해결했다. 그는 제논의 역설이야말로 오히려 현실의 운동을 잘 설명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제논의 역설은 사람들이 운동에 관해 갖는 잘못된 생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사람들은 운동을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이동하는 공간적 좌표의 변화로 생각한다. 이에 상응하여 특정한 공간의 한 지점에 하나의 시간이 대응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공간적 좌표가 무한히 분할할 수 있듯이 시간적 좌표 또한 무한히 분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분할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그것을 요소들로 분해하고 단절하여 계량화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베르그송은 시간을 이렇게 계량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제논의 역설을 발생시킨 원인이라고 본다. 애초에 시간은 공간적으로 분절되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시간을 분절시켜서 본다. 우리는 항상 시간을 말할 때 시계에 나타난 계량화된 수치를 생각한다. 우리는 오늘 아침식사와 점심식사 사이에는 5시간의 간격이 있다는 식으로 항상 계량화하는 것이 습관화됐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생활을 위해서 편의적으로 시간을 공간화하고 단절시킨 것일 뿐 시간 자체의 특성은 아니다.

우리가 만약 공간적인 측면에서 사고한다면 하나의 지점에서 운동은 절대로 발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운동은 하나의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시간적 경과를 거치면서 이동할 경우에만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논의 궤변처럼 하나의 점에서는 운동이 결코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제논이 활을 떠난 화살은 결코 날아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운동을 하나의 점에서 다른 점으로 이동하는 공간적인 사건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은 각각의 한 점에서 운동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그 운동이 단순히 공간적인 이동이 아닌 하나의 시간적인 사건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적인 사건, 즉 시간은 전적으로 공간과는 다른 것이며 결코 공간적 좌표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다.

원래 순수한 시간은 공간적으로 분할되지 않으며 지속될 뿐이다. 베르그송은 이렇게 분할되지 않고 공간화될 수 없으며 계량화할 수 없는 순수한 시간을 일컬어 ‘순수지속(durée pure, pure duration)’이라고 부른 것이다. 공간적으로 계량화될 수 없으므로 이 순수지속으로서의 시간은 오로지 직관(intuition)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을 뿐이다. 약속시간에 늦은 연인을 기다릴 때의 5분과 고된 작업 중에 갖는 5분간의 꿀맛 같은 휴식은 결코 같은 5분이 아니다. 이 차이는 계량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느껴질 뿐이다. 이 질적인 차이를 가르는 직관적인 시간이 순수지속인 것이다. 그리고 현실의 운동, 나아가 운동하는 생명체의 근원을 이루는 것은 바로 이 ‘순수지속’이다.

잘 알려진 대로 베르그송은 영화라는 매체를 매우 비판적으로 보았다. 그 이유 역시 순수지속과 관련이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는 초당 24개의 정지된 화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흔히 프레임이라고 부르는 이 정지된 화면의 움직임을 우리의 눈은 감지할 수 없기 때문에 마치 사진 속의 인물이나 사물이 움직이는 것처럼 지각된다. 말하자면 영화에서의 움직임은 실제 현실의 움직임이 아닌 그것을 공간적으로 분할한 것에 불과하다. 이는 초당 수백 개의 프레임 혹은 수천 개의 프레임으로 구성된 디지털 영화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베르그송은 현실의 운동 자체는 영화의 화면에 담을 수가 없다고 보았다. 베르그송이 보기에 영화야말로 시간을 공간화한 대표적인 매체인 셈이다. 그러나 베르그송의 운동에 관한 이론은 아이러니하게도 후에 들뢰즈라는 철학자에 의해서 영화가 지닌 순수지속으로서의 운동을 설명하는 이론적 토대로 사용되기도 한다.

세상은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


원근법의 창시자로 잘 알려진 브루넬리스키가 지은 두오모 성당의 엄청난 돔은 놀랍게도 시공을 위한 설계도 없이 만들어졌다.
베르그송은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내가 앉아 있는 의자, 밖으로 보이는 건물, 산과 돌, 그리고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찻잔과 찻잔 속에 담긴 커피 등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이미지일 뿐이라고 말한다. 만약 누군가가 세상의 모든 것이 이미지일 뿐이라고 주장 한다면 이 사람은 극단적인 관념론자처럼 보일 것이다. 이 극단적인 명제는 마치 근대 영국의 관념론 철학자 버클리 주교(George Berkeley, 1685~1753)의 유명한 명제, ‘존재란 지각된 것이다(Esse est percipi)’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버클리의 주장은 사과가 빨간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지각하기 때문에 빨간 것이라는 극단적인 관념론의 견해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베르그송은 자신이 결코 관념론자가 아닌 유물론자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물론 베르그송의 철학은 매우 소박한 유물론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소박한 유물론이란 우리 눈앞에 펼쳐진 세상이 세상의 실제 모습이며 우리는 이 진실한 세계의 모습을 감각기관을 통해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믿는 태도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렇게 소박한 유 물론을 주장한 사상가는 거의 없다. 베르그송도 예외는 아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베르그송이 추구하는 것은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저서 곳곳에서 이러한 목표의식을 반복적으로 표출하고 있기도 하다.

이미지라고 하면 우리는 어떤 사물의 가상적인 모습, 혹은 그것과 관련하여 마음속에 떠오르는 주관적인 인상을 염두에 두기 마련이다. 가령 자동차의 이미지는 자동차 자체가 아닌 자동차를 그려놓은 그림이나 혹은 자동차와 관련하여 떠오르는 상황들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베르그송이 여기서 말하는 이미지는 다르다. 베르그송이 말하는 이미지는 ‘감각적 재료(sense data)’에 가깝다. 자동차를 예로 들어보자. 자동차는 분명 하나의 사물(chose, thing) 혹은 물질(matière)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물의 정체는 무엇일까? 우선 유선형의 날렵한 모습을 띠고 있다. 하나의 형태라는 이미지를 지닌다. 또 근사한 쥐색의 표면을 이룬다면 쥐색이라는 이미지를 지닌다. 그리고 몸체는 철판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철판 또한 목재나 플라스틱과 감각적 데이터, 즉 이미지로 구별할 수 있다. 심지어 데카르트가 물체의 본질이라고 말했던 ‘연장성(extension)’, 즉 어떤 공간을 점하고 있다는 것 역시 우리가 촉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미지이다. 유령과 실제 사람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은 공간성일 터인데 이것 역시 감각적 재료에 의해서 구별이 가능할 것이다. 말하자면 실제 사람과 유령은 다른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는것이다. 결국 우리가 어떤 사물을 자동차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 자동차는 자동차에 부합하는 무수히 많은 이미지로 구성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베르그송이 어떻게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을 슬며시 넘어설 수 있는가를 간파할 수 있다. 자동차라는 물질은 그것을 구성하는 이미지들을 종합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물질이 이미지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유물론적 견해에 잘 부합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미지라는 것이 인간의 감각에 의해서 파악되는 주관적인 측면을 지닐 수밖에 없다. 가령 소나 강아지는 인간이 보는 것과 같은 자동차의 근사한 색을 똑같이 지각하지 못한다. 쥐색이나 파란색, 딱딱함, 유선형의 날렵한 곡선과 같은 이미지는 분명 인간이 지닌 감각기관의 개입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러므로 자동차라는 물질을 이루는 이미지를 인간의 감각과 무관하게 그것에 앞서서 존재하는 자립적인 물질로 이해할 수는 없다. 이미지의 총합으로서 물질이라는 베르그송의 견해는 유물론적이면서도 관념론 적인 특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르그송은 자신의 견해가 유물론과 관념론의 전통적인 대립을 넘어서 그것을 해결한 것이라고 믿었다.

이미지와 ‘비결정성의 지대’


앙리 베르그송 기념 우표. 베르그송은 인간만이 신체가 가진 특권으로 세상의 이미지를 어느 정도 임의적으로 변경할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만약물질이 이미지의 총합이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자동차의 이미지는 곧 자동차라는 물질 자체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인가? 베르그송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물이든 우리에게 알려진 이미지 외에 엄청난 이미지를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과거에도 사람들은 소금이 흰색과 고체의 이미지를 지니며, 짠맛의 이미지를 지니며, 물에서는 용해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금의 짠맛이 나트륨이라는 원소에서 비롯되며 나트륨은 단지 짠맛뿐만 아니라 과다 복용 시 인체에 부정적인 반응을 일으킨다는 감각적 성질(이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오늘날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였다 하더라도 소금이 지닌 무한한 감각적 성질, 즉 이미지를 파악한다는 것은 이론상 불가능하다. 우리는 사물이 지닌 무한한 이미지들 중 단지 우리가 알고 있는 극히 일부분의 이미지들을 종합하여 그것에 대한 상, 즉 전체적인 이미지를 형성한다. 베르그송은 사물이 지닌 이렇게 무수히 많은 이미지 중 일부(짠맛, 흰 결정체, 물에 녹는 성질 등)를 종합하여 만들어진 통합적인 이미지(소금)를 ‘표상(répresentation)’이라고 부른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 소금이라고 불리는 물질이 있다고 치자. 이 물질은 과거에도 존재하였으며 과거나 현재에도 똑같은 물질적 속성, 즉 이미지들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과거의 사람들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소금이라는 이 물질에 대해서 갖는 표상은 다르다. 과거에 사람들은 나트륨이라는 정체를 몰랐기 때문에 소금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오늘날의 사람들은 건강상의 이유에서 그것을 두려워하기도 한다. 소금에 대한 표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소금은 우리가 모르는 엄청나게 많은 감각적 성질, 즉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닌 소금의 표상이 곧 소금 자체는 아니다.

여기서 다소 난해하지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비 결정성의 지대(la zone de la indetermination)’라는 용어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소금이라는 사물은 무한히 많은 이미지를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완전히 결정되지 않은 비결정성의 지대이다. 경우에 따라서 소금은 짠맛을 내는 양념으로 표상될 수도 있고 혹은 의학적인 견지에서 나트륨으로 표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소금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수히 많은 이미지들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소금은 설탕이 아니라는 점이다.

소금이 아무리 ‘비결성의 지대’라는 특성을 지닌다고 해도 소금이라는 ‘비결성의 지대’와 설탕이라는 ‘비결성의 지대’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다만 우리가 소금 혹은 설탕으로 표상하는 사물이 곧 그 사물 자체가 아닌 ‘비결정성의 지대’를 원천적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 중의 하나는 ‘지각(la perception)’이라는 개념과 관련된 것이다. 사물은 그 자체가 아닌 무수한 잠재적인 이미지들이 얽힌 ‘비결정성의 지대’로 우리에게 마주한다.

이때 우리는 사물을 어떻게 지각하는 것일까? 과연 우리 인간은 앞에 있는 사물을 무수한 잠재력을 지닌 ‘비결정성의 지대’로서 마주하는 것일까? 현실적으로 이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신체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몸이 곧 프레임이다


훈더트바서가 설계한 건축물. 그는 일부러 울퉁불퉁한 형태의 불규칙한 곡면을 사용한 건축물을 만들었다.
베르그송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이미지로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신체 혹은 감각이나 사유 활동 또한 이미지의 작용에 불과하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신체나 눈, 코, 귀 등의 감각기관 역시 이미지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인간이 물질을 감각적으로 파악하는 지각 활동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베르그송은 이를 인간의 감각기관이라는 이미지와 물질이라는 이미지가 만나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누군가가 앞에 있는 자동차를 지각한다고 치자. 그 사람의 신체 이미지와 자동차라는 물체 이미지가 만나는 과정이 지각일 터인데, 이때 사람과 자동차가 동등한 위치를 지닐 수는 없다. 지각이란 사람이 능동적으로 자동차라는 수동적 사물을 파악하는 적극적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지각작용은 사람과 대상이라는 두 항목의 결합으로 발생하지만 어디까지나 사람이 능동적인 역할을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사람이나 물질 대상이나 둘 다 이미지일 뿐이라면 지각 활동의주체적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의 능동성을 설명하기가 곤란하다.

베르그송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신체라는 이미지를 다른 이미지와 다른 특권적 이미지로 설명한다. 그는 신체라는 이미지가 지닌 특권을 그것에 따라 다른 이미지가 변하게 되는 그러한 이미지로 간주한다. 인간의 신체와 사물이 마주했을 때 사물은 신체라는 이미지를 변경하지 못하지만 신체는 사물의 이미지를 얼마든지 변경할 수 있다. 가령 인간이 차를 볼 때 멀리서 보는가 가까이서 보는가에 따라 크기가 바뀌며, 앉아서 보는가 서서 보는가에 따라서, 혹은 어떤 생각으로 어떤 기분에서 보는가에 따라서 이미지가 변경된다. 하지만 차라는 사물은 인간의 이미지를 변경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신체의 특권은 바로 세상의 이미지를 어느 정도 임의적으로 변경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결과가 나온다. 인간이 어떤 각도에서 보는가, 혹은 어떤 심적인 상태에서 보는가에 따라서 세상의 이미지가 변경된다. 영화에 비유하자면 카메라의 앵글을 어떻게 들이대는가에 따라 풍경의 이미지가 변한다. 가령 치열한 전투장면을 근접촬영하여 피가 튀고 근육이 불쑥 솟는 장면까지 묘사한다면 매우 박진감 있고 잔인한 느낌의 이미지를 전달할 것이다. 하지만 아주 높은 상공에서 촬영을 한다면 이 치열한 전투장면은 마치 개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그저 일개의 인간집단이 야단법석을 떠는 소란처럼 느껴질 것이다. 어떠한 각도에서 어떻게 프레임을 짜는가에 따라서 이미지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베르그송에 따르면 인간의 지각 활동에는 그 밑바닥에 프레임을 짜는 보다 근원적인 영역이 존재한다. 그것은 우리 몸에서 이루어지는 심층적인 영역에서의 정서적인 차원이다. 베르그송은 이를 ‘정념(affection)’이라고 부른다. 인간의 지각은 바로 정념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정념을 일으키는 인간의 몸이 곧 지각을 형성하는 프레임인 셈이다.

201410호 (201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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