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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부족을 독려하는 사회잠은 삶다운 삶을 누리기 위해 꼭 필요한 조건이다. 지칠 대로 지친 사람에게는 잠은 달콤한 휴식이고, 몸에서 빠져나간 기력을 충전하는 잠시 멈춤이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기쁨의 시간이다. “잠은 감미로운 꾸물거림이요 일시 정지이며, 매슈 드 아베튀아(Matthew De Abaitua)의 표현을 빌자면 ‘위대한 중단(Big Quit)’이다.”(<언제나 일요일처럼>, 톰 호지킨슨, 남문희 옮김, 필로소피) 현대가 분주함과 속도의 시대라면, 잠은 “행동을 우위에 두는 이 세상에 맞서는 저항의 한 방법”(<언제나 일요일처럼> 275쪽)이다.하지만 많은 사람이 건강에도 좋은 잠을 줄이는 대신 고된 노동의 속박에 자신을 내맡긴다. 가속화된 문명에 탑승한 사람들은 늘 수면부족에 시달린다. 수면부족은 끔찍한 사고와 참사와 재난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흔한 고속도로에서의 차량 충돌사고들은 말할 것도 없고 체르노빌 같은 대형 참사도 수면부족이 원인이었다. 노동자들에게 더 많이 일을 시키려는 탐욕스러운 기업가나, 경직된 도덕주의자들이 잠을 낙오자의 표상으로 낙인 찍었다. 그들은 부자가 되려면 잠을 줄이라고 말한다.그들은 잠을 많이 자는 건 게으름뱅이들의 습관이라고 선전한다. 잠은 낙오자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낮의 노동, 낮의 욕망들에 초연한, 느긋한 삶을 살려는 승리자의 것이다. 잠을 충분히 자는 사람은 수면부족에 시달리는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 미국 중산층 가정 출신으로 20대 청년기에 남태평양의 푸카푸카섬에 정착해 살았던 로버트 진 프리스비라는 사람이 1929년에 쓴 <푸카푸카>라는 책에 이렇게 썼다.“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야 할 이유를 전혀 알지 못했고, 대부분 일어나지도 않았다. 하루 종일 잠만 자다가 밤에 일어나서 바닷가 모래밭에 횃불을 밝혀놓고 낚시를 한다. 그리고 식사를 하고 춤을 추고 사랑을 나눈다. 푸카푸카에 대해 잘 모르는 교역선 선장들은 그 섬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주민들이 배에 짐 싣는 일을 하려고 들지 않기 때문이다.”(<언제나 일요일처럼> 110쪽)푸카푸카의 원주민들은 잠을 충분히 잔다. 그들은 가속화된 문명 따위가 만들어낸 관습에 휘둘리지 않은 채 충분히 휴식하면서 자기들만의 리듬으로 살아간다. 휴식은 단순한 빈둥거림이 아니다. 휴식은 수단과 목적의 일체감 속에서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밀도 있게 보내는 순간을 뜻한다.
인생의 참 의미 찾는 쉼의 정적삶이 바빠진 것은 우리의 물건들에 대한 소유욕망과 소비욕망 때문이다. 집·자동차·냉장고·텔레비전·세탁기·그 밖의 갖가지 물건을 향한 욕망! 우리는 그것들을 사들이기 위해 빚을 지고 그 빚을 갚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그래서 바빠졌던 것이다. 하지만 이 물건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까? 이 물건들은 소유하고 소비하는 동안 약간의 행복감과 재미와 위안을 주기는 한다. 하지만 그 행복, 재미, 위안은 항구적이지 않다. 그 대신에 물건들은 우리의 돈과 시간, 자유와 인간관계와 창의성을 앗아간다. 삶의 지혜는 덜 중요한 것들을 버려서 비우기, 그리고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으니 할 수 없는 일들을 포기하는 데서 나타난다. 그러게 하면 빡빡하던 생활에 여백들이 생겨나고, 육체적 실존의 유동성을 크게 낮춘다. 고독과 정적이 깃든 여백의 시간들에 우리는 낮잠도 잘 수 있고, 호젓하게 공상에 빠지고, 평소에 못 읽던 책도 읽을 수 있고, 가족과 함께 밥을 먹고 여행을 할 수도 있다.휴식의 시간은 버려지는 시간이 아니다. 휴식의 시간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잡음과 내재적 잡음에서 홀연히 자유롭게 되어 몸과 마음에 두루 편안함이라는 선물을 준다. 휴식은 취향을 꽃 피우고, 재능을 만개할 수 있는 인생의 소중한 여백이다. 바쁜 문명 세계를 등지고 숲 속에서 2년여 동안 호젓한 삶을 살았던 현자는 이렇게 말한다.“머리를 쓰는 일이건 손을 쓰는 일이건 어떤 일을 위해서건 지금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희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는 몇 번이고 마음에 새긴다. 여름 아침이면 늘 하듯 해가 떠서 점심때까지 소나무, 호두나무, 옻나무에 둘러싸인 채 흔들림 없는 고독과 정적 속에서 햇빛 잘 드는 문 앞에 앉아 공상에 젖어 든다. 새들이 노래하면 소리도 없이 집 안을 빠져 나갔다.”(<고독의 즐거움>)소로는 소나무, 호두나무, 옻나무로 둘러싸인 숲 속 생활에서 고독과 정적이 깃든 시간들을 온전하게 누렸다. 그는 햇볕을 쬐며 공상을 하고 숲 속의 새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가 찾아 누린 것은 소박한 삶이고, 그 안에 깃든 삶의 정수(精髓)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바쁘게 사느라 잃어버린 가치, 의미 있는 인생이다.왜 우리는 푸카푸카의 원주민들이나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같이 살 수 없을까? 그것은 돈과 권력과 지위를 향한 넘치는 욕망 때문이다. 그러나 고액 연봉, 더 좋은 집, 최신 전자제품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소유욕망과 소비욕망에 들린 삶은 우리를 번아웃과 죽음으로 내몬다. 행복하고, 자유롭고, 열정적인 삶을 원한다면 그것을 당장에 멈춰야 한다. 더 적게 소유하는 것에 만족한다면 그토록 많은 시간을 일에 매쳐 보낼 필요가 사라진다.우리를 옥죄는 가짜 욕망, 가짜 필요에서 자유롭게 되면 더 많은 생활의 여백과 휴식의 시간을 누릴 수 있다. 물건에 대한 애착을 버리면 그것에서 해방된다.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치워보라! 뜻밖에 많은 자유시간이 생긴다. 인터넷을 끊어보라! 훨씬 더 자유로워진다. 더 많은 시간을 읽고 쓰고 생각에 잠길 수 있는 데 사용할 수 있다. 더 많은 시간을 햇볕을 쬐며 걸을 수 있고, 좋은 벗들과 즐겁게 지낼 수 있다. 더 많은 시간을 자기를 돌보는 데 쓸 수 있고,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장석주 전업작가. 충남 논산 출생. 1979년 조선일보·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문학평론 당선으로 등단했다. <월간문학> 신인상(1975년)과 해양문학상(1976)을 수상했다. ‘고려원’ 편집장을 거쳐 청하출판사를 운영했다. 지금까지 시집, 비평집, 인문서 등 70여 권을 펴냈다. 대표 저서로 <일상의 인문학> <마흔의 서재> <철학자의 사물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