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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폴리탄이 사랑한 도시⑦]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 위대한 혁명, 찬란한 비극 

표트르의 창조물이여, 너를 사랑하노라…(Люблю тебя, Петра творенье … ) 

글·사진 이지연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연구소 HK교수
하루아침에 만들어져 지상으로 내던져진 듯한 환영의 도시… 러시아 예술의 위대한 유산 간직한 기억의 보고
페테르부르크 밤은 더없이 화려하고 찬란하다. 그러나 조명이 꺼진 페테르부르크의 민낯은 비루하다. 강변의 아름다운 풍경은 빈 병을 줍는 삶에 지친 노파의 모습에 의해 퇴색된다. 페테르부르크가 건설된 1700년대 초부터 이 도시는 그 안에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이중성을 인정하지 않고 이 도시를 사랑할 수는 없다.


▎페테르부르크의 주요 교량들은 개폐교다. 하절기 동안 야간에 다리가 열리면 그 아래로 목재를 비롯한 대형 화물을 실은 배가 지나간다. 사진은 궁전 다리가 열린 모습.


1998년 여름, 비행기는 저녁 늦게 페테르부르크 공항에 도착했다. 방학 중의 단기 연수 프로그램으로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나는 선후배, 친구들과 함께 처음으로 러시아 땅을 밟았다. 공항을 나선 우리는 단체로 버스를 타고 기숙사를 향했다. 이미 상당히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7월 말의 페테르부르크는 아직 백야의 흔적을 어스름히 드러내고 있었다. 완전히 해가 지지 않은 회색의 어두움 가운데 푸르스름한 조명으로 비추어진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인상적이었다. 고골의 단편이 보여주는 그로테스크한 환상의 세계,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한 기만적인 백야의 모습이 이런 것이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간 좁은 거리를 달려 버스가 마침내 도시의 중심을 흐르는 네바 강변으로 나아갔을 때, 그때의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강변을 따라 펼쳐진 기념비적 건축물의 파노라마와 그 정점을 이루는 웅장한 겨울궁전의 풍경은 찬란했다. 그 찬란함은 강변을 따라 밝혀놓은 가로등과 건물 외벽 곳곳을 비추는 조명이 만들어낸 환영과 같은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페테르부르크의 밤풍경에 홀린 듯 도착한 기숙사의 놀랄만한 비루함이 현실로의 귀환을 알렸다. 침대는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소리가 났고 공동화장실과 욕실은 불량한 위생 상태도 문제였지만 사적공간으로서도 전혀 기능하지 못했다. 여름인데도 너무 추웠다. 자다가 몇 번을 일어나 짐을 뒤져 옷을 끼어 입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 비가 흩뿌리는 음산한 날씨 가운데 마주한 겨울궁전과 네바강은 어젯밤의 그 화려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어두운 표정만큼이나 흐린 회색 강변의 대리석 풍경은 오히려 슬퍼 보여 아름다웠다.

1998년은 힘겹게 페레스트로이카와 소연방 해체의 시기를 겪어온 러시아인들에게는 더없이 절망적인 한 해로 기록된다. 러시아는 국가부도사태에 직면하였고 이는 화폐개혁으로 이어졌다. 루블화는 100배의 평가절하를 겪었고 새로운 화폐가 만들어졌다. 갑작스럽게 단행된 화폐개혁으로 러시아인은 자신들이 모아두었던 루블이 눈앞에서 종이가 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경험에서 러시아인은 은행에 루블화로 예금하는 것을 꺼려하는 버릇을 오랫동안 버리지 못하게 된다. 지금도 러시아 도시의 거리에는 환전소가 즐비하다. 관광객뿐 아니라 러시아인 또한 달러나 유로를 루블로 환전하여 사용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누가 나를 페테르부르크로 이끌었나?


▎네바 강변에 위치한 표트르 대제의 청동기마상.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 표트르 대제의 업적과 함께, 러시아 문화 전체를 관류한 정치권력과 문학권력과의 은밀한 투쟁 역사를 증거한다.
1998년 여름, 내 손에는 늘 옛 루블과 새 루블이 잔돈인 코페이카 동전까지 합쳐져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러시아어가 서툴렀던 나는 구 화폐 단위로 가격을 말하는 보통의 상점에서 물건을 사기가 쉽지 않았다. 점원들은 무뚝뚝하고 불친절했으며 상품을 적극적으로 팔겠다는 자본주의적 의지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의지 없음’을 나중에 그리워하게 될 줄은 당시 전혀 예상도 하지 못했다. 음식도 먹기 어려웠고 편의시설도 엉망이었다. 그렇게 페테르부르크에서의 한 달 여 기간을 나는 일종의 극기 훈련의 시간으로 보냈다. 그리고 이듬해 9월 나는 다시 페테르부르크로 유학길에 올랐다. 이번엔 단기 연수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엇이 나를 다시 페테르부르크로 이끌었는지 분명히 말하기 쉽지 않다. 당시 모스크바에서는 스킨헤드라 불리는 우익 청년 집단의 동양인에 대한 테러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왔기 때문에 모스크바는 제외하기로 했다. 함께 페테르부르크에서 공부할 든든한 선배들이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였다. 그것으로 마피아와 스킨헤드가 판치는 ‘공산당 나라’ 러시아 땅에 유학가는 것을 꺼려하시던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부모님은 1998년 단기 연수에서 돌아와 러시아의 암울한 미래와 열악한 환경에 대해 성토하던 내가 다시 페테르부르크에 가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셨다. 사실 나도 페테르부르크에 가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기로 한 나에게 페테르부르크에 가는 것은 두렵고 도망치고 싶더라도 받아들여야 하는 일종의 당위 같은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그 어떤 감상성도 배제된 당연한 선택이었다.

도시에 새겨진 역사의 기억과 상처


▎네바 강변에서 바라본 겨울궁전의 야경. 에르미타주 미술관 건물의 일부다. 1764년 예카테리나 2세가 서구로부터 226점의 회화를 들여왔던 것이 시초가 됐다. 현재 약 300만 점의 전시품이 소장되어 있어 세계 최고의 박물관으로 꼽힌다.
페테르부르크는 도시 전체로 러시아 문학을 기록하고 있다. 네바 강가에 세워진 표트르 대제의 기념비는 ‘표트르의 도시’ 페테르부르크의 건설을 기념하는 단순한 기호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푸쉬킨이 자신의 서사시 <청동기마상>에서 찬양한 표트르 대제의 업적과 자연력에 대한 인간의 승리로서의 도시건설을, 그것을 한 순간에 파괴하는 대홍수의 재앙을, 심지어 창조자 표트르의 반(反)종교적 적그리스도의 형상을 주목했던 20세기 초반 러시아 상징주의 문학가들의 은밀한 비교(祕敎)적 탐구를 한꺼번에 표상하고 있다. 심지어 그 청동의 기마상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지 않은 신성한 기념비를 자신의 시에 바치겠다는 푸쉬킨의 선언을 상기시키며 러시아 문학사 전체를, 아니 문화 전체를 관류해온 정치권력과 문학권력 간의 은밀한 투쟁의 역사를 증거한다.

거기서 조금 더 발을 옮겨 모이카 운하 12번가에 위치한 박물관으로 단장된 푸쉬킨 생전의 집에 들르면 평생을 푸쉬킨의 삶을 소개하는 일을 해오신 할머니가 마지막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쉬킨이 드디어 운명하셨습니다”라는 말을 내뱉으며 다시 한 번 흘리는 눈물을, 아마도 평생 앞으로도 하루에 몇 번씩 흘리게 될 그 놀랍도록 진정성 어린 눈물을 마주하게 된다. 이어 <죄와 벌>의 허구적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소설 속 동선을 따라 센나야 광장 뒷골목으로 이어진 여정에 동참하다 보면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실제 주인공은 다름 아닌 당시의 화려한 도시 전경 뒤에 감추어진 무덥고 음습한 페테르부르크 그 자체라는 말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가장 서정적인 혁명시인이었던 알렉산드르 블록이 죽기 전 거주했던 아파트에 전시된 그의 마지막 얼굴을 보면서 혁명이라는 숭고한 신념을 끝까지 고수하였지만 동시에 혁명 이후의 현실에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20세기 초반 귀족 지식인의 비극적인 운명에 숙연해진다.

내가 걷는 거리가 곧 내가 읽는 역사 속의 시인들이 언젠가 거닐었던 바로 그 거리이고 그 가운데 위치한 건물들이 바로 그들이 살고 시를 썼던 그 장소라는 사실이 때로 나를 설레게 한다. 그 길을 가다 이른 나이에 운명한 시인의 친구로서 아직까지 왕성하게 연구하고 있는 노(老) 학자 선생님을 만나 근황을 묻고 공부에 대한 담소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는 나에게 이 도시가 허락한 은총이다.

페테르부르크는 기억의 도시다. 많은 역사적 기억을 보존하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박물관이다. 세계 최고 중 하나로 꼽히는 에르미타쉬 같은 대형 박물관 외에도 정말 작고 지엽적인 주제로 모아진 군소 박물관이 무수히 많다. 지금 시내 어딘가에 서 있다면 주위를 둘러보라. 분명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무엇인가를 모아 둔 말도 안 되는 듯한 박물관 하나가 보일 것이다. 이러한 박물관은 외국인 관광객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관광객은 전 세계 미술품이 총집합되어 있는 거대한 에르미타쉬의 규모에 압도되고 러시아 미술의 정수를 모아둔 러시안 뮤지엄의 작품에 경탄하는 데만도 시간이 부족하다. 이것은 기억하기를 좋아하는 페테르부르크인의 몫으로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손자의 손을 이끌고 박물관을 방문해 연도를 하나하나 읊으며 사물에 담긴 기억을 풀어내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도시 전체에 포진해 있는 표트르 대제와 러시아 제국의 왕들로부터 레닌에 이르는 통치자의 동상, 그들의 궁전과 별장, 성당, 그 외의 많은 기념비는 러시아 역사의 거대한 내러티브를 들려준다.

그것은 새로운 제국 러시아의 탄생, 영토의 확장과 제국의 승리,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과 붕괴로 이어지는 러시아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도시의 이름마저도 그러한 역사적 과정을 드러낸다. 처음 베드로의 도시로 건설된 페테르부르크는 혁명을 거치며 페트로그라드로, 레닌그라드로, 마침내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이때 그러한 기념비적 형상 뒤에는 자주 러시아 역사의 비극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황제의 위엄을 당당히 드러내고 있는 표트르 대제의 기념비에는 이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는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수많은 이름 없는 민중의 원혼이 어려 있다. ‘유럽을 향한 창’, 유럽과 대등해지고 러시아를 유럽의 일부로 편입시키고자 했던 열망과 열등감으로부터 시작된 거대한 건설 프로젝트, 국경 외부의 땅, 엄밀히 말해 땅도 아닌 축축한 늪지를 메워 그 위에, 유럽과 가장 가까운 곳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겠다는 무모할 정도의 극단적 시도가 이 도시를 만들어냈다. 어느 날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전대미문의 도시, 발음도 러시아어를 닮지 않았던 이 페테르부르크는 그렇게 마치 하루아침에 만들어져 지상 위로 던져진 사악한 반(半)신의 작품처럼 러시아 역사에 등장했다.

알록달록한 둥근 지붕이 매우 러시아적이라 느껴지는 피의 구세주 사원은 그 동화처럼 화려한 외관에는 어울리지 않게 1881년 3월 1일 극단적 인민주의자의 폭탄테러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된 황제 알렉산드르 2세를 기리고 있다. 파블로프스크라는 도시 근교의 아름다운 공원에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아들로서, 불우한 왕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파벨 1세의 슬픈 운명이 깃들어 있다.

페테르부르크 역사의 가장 비극적인 장면


▎1. 제2차 세계대전 전승기념일의 거리 퍼레이드. 2차대전은 독일과 소련의 전쟁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만큼 양국은 국운을 건 전쟁을 치렀다. / 2. 손녀의 부축을 받고 전승기념일 퍼레이드에 참가한 2차대전 참전 노병.
러시아 역사는 때로 그 극단성으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러시아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외의 어떤 것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페테르부르크의 삼위일체 다리를 지나 강변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러시아 혁명의 첫 포성을 울린 거대전함 오로라 호가 그 위용을 드러낸다. 그것은 위대한 혁명의 상징이지만 사실 러일전쟁과 러시아 혁명, 스탈린의 공포정치로 이어지는 20세기 러시아 격동의 역사에 대한 불길한 전조이기도 했다. 이제 와서 그것은 실패한 사회주의 혁명의 유물로 남게 되겠지만 그럼에도 러시아 혁명 자체는 사회주의 체제와 스탈린 통치의 역사가 범한 많은 오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숭고했다는 점만은 기억하고 싶다. 자신의 전부를 이념 하나만을 위해 내버리고 혁명의 불꽃을 향해 뛰어들었던 당시 러시아 인텔리겐챠 청년들의 프로메테우스적 열망과 그 비극성에는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의 기억 또한 그렇다. 5월 9일의 승전기념일은 러시아에서 가장 큰 국경일이다. 온 국민이 거리의 퍼레이드를 즐기고 노병은 옛 제복에 훈장을 있는 대로 달고 나와 이 축제를 만끽한다. 거동이 불편해 가족의 부축을 받고 행진에 참여하는 노병은 특별히 클로즈업된다. 최신식 전차며 무기가 거리로 나오고 공중에서는 에어쇼가 펼쳐진다. 이는 나치 독일에 맞서 싸운 연합군의 승리, 특히 러시아의 독일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는 행사다. 올해는 특히 승전 70주년을 기념하면서 더욱 성대하게 이 행사가 치러졌다. 온 국민이 러시아의 승리를 기뻐하고 러시아의 영광을 기린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승리는 사실 페테르부르크가 겪은 도시 봉쇄의 끔찍한 역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흔히 2차대전은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연합군의 승리로 해석되지만 실제 전투의 강도와 희생자의 수를 고려한다면 이는 곧 러시아와 독일 간의 전쟁이었다. 2차 대전에 참전한 10여 개 국의 전체 사망자는 4500만 명이며 그중 60%에 해당하는 2700만 명이 소련인이었다. 또한 2차대전 중 독일군 사망자의 80%는 소련과의 전쟁 중에 발생했다.

이때 독일과 러시아 간의 전투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1941년 9월 25일 시작된 ‘레닌그라드 봉쇄작전’이었다. 그것은 1944년 1월 27일까지 900여 일 동안 계속되었다. 도시가 봉쇄되고 보급로가 차단된 기간 동안 약 100만 명의 페테르부르크인이 포탄에 맞아 죽거나, 굶어 죽었다. 1941년경 330만 명에 달하던 도시 인구는 봉쇄가 종결된 시점엔 사망자와 피난민으로 인해 56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봉쇄 첫해 겨울 집중적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하루 사망자가 5천 명에 달하는 때도 있었다. 사망자의 수가 많아 시체 처리 시설이 마비될 때면 거리에 시체가 뒹굴기도 했다. 나무껍질은 모두 벗겨 먹어 하나도 남은 것이 없었고 책상의 다리나 책의 가죽을 씹어 먹기도 했으며 심지어 인육을 먹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진다. 그렇게 세 번의 혹독한 추위를 극한의 상황에서 버텨냄으로써 페테르부르크인들은 ‘레닌의 도시’를 초토화시키려던 히틀러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1998년 연수 기간에 만난 타타르계 러시아인 선생님은 자신이 가족 중 레닌그라드 봉쇄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점차 레닌그라드 봉쇄를 직접 겪은 세대는 우리 곁을 떠나가고 있고 그 처절하고 치욕스러웠던 기억은 희미해져 가겠지만 이 사건은 앞으로도 페테르부르크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것으로 기록될 것이다. 국가의 승리를 기념하는 떠들썩한 행사의 뒤편에서 조용히 담담하게 페테르부르크인의 기억으로 남겨져 있을 것이다. 2차대전 중 독일군의 폭격 과정에서 생긴 상처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이삭성당의 거대한 기둥들처럼, 100년마다 반복되며 수많은 이를 죽게 만든 대홍수를 기록하고 있는 건물 외벽의 현판처럼. 페테르부르크는 역사의 비극적 상흔들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드러내고 있다.

러시아 모더니즘과 페테르부르크의 운명


▎2차대전 당시 독일군의 폭격으로 손상된 이삭성당의 기둥. 1941년 9월부터 1944년 1월까지 도시가 봉쇄되고 보급로가 차단된 기간 동안 약 100만 명의 페테르부르크 시민이 사망했다.
아마 지금 이맘때쯤 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한다면 백야기간 동안 펼쳐지는 음악축제로 떠들썩할 것이다. 세계 유수의 음악가들이 도시를 방문해 화려한 레퍼토리를 펼쳐낸다. 음악 애호가라면 축제 기간 동안 내내 마린스키 극장을 비롯한 페테르부르크의 대표적인 공연장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오페라와 발레가 공연된다. 오늘날 음악이나 발레를 배우러 러시아에 가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일이지만 사실 러시아에 이 모든 예술 양식이 유입된 것이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 이후에서였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는 매우 놀랍다. 바흐가 그 웅장한 <마태수난곡>을 만들고 있을 때 러시아에서는 단선율의 그레고리안 성가와 같은 비잔틴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 발레 음악의 대가로 이해되지만 당시 그의 발레 음악의 안무를 구성하고 러시아에 발레를 교육시켰던 것은 프랑스인 마리우스 프티파였다.

근대 회화, 오페라 등 모든 예술 장르에 있어서 러시아는 한 발 늦을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는 서구화 정책 이후 우선 유럽의 예술적 유산을 한꺼번에 받아들였다. 국민음악파의 오페라나 차이코프스키의 발레음악이 만들어졌던 19세기 후반에서야 비로소 러시아에서는 세계 수준의 근대적 예술양식이 태동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20세기의 문턱에서 러시아 예술은 그 전성기를 맞이한다.

디아길례프는 페테르부르크의 젊은 예술가들과 작곡가 스트라빈스키 등을 이끌고 파리로 향했다. 거기서 이들은 유럽의 관객이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전위적 발레 공연을 펼쳤고 이는 유럽 관객들의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세기말의 혼란스러운 페테르부르크에서 탄생한 그로테스크한 춤은 곧 전 유럽을 사로잡았고 ‘발레 뤼스’ 혹은 러시아 시즌이라 불리며 러시아를 어느새 세계 발레의 종주국이 되도록 만들었다. 이후 발레 뤼스는 해체되지만 각각의 멤버는 각지로 흩어져 미국과 유럽의 발레예술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러시아 모더니즘, 아방가르드로 지칭될 수 있는 20세기 초반의 많은 예술형식이 페테르부르크로부터 탄생했으며 그것은 당시 페테르부르크를 지배하던 문화적 분위기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세기말의 종말론적 분위기와 혁명의 열기 가운데서 몇몇 젊은 예술가가 유미주의적이며 퇴폐주의적인 예술의 원칙을 따른 반면, 새로운 예술형식의 창조가 곧 새로운 세계 창조로 이어지리라는 무모하면서도 굳은 믿음을 지녔던 일부 전위적 예술가는 정치적 혁명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이후 대부분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는 스탈린 정권의 수립과 함께 망명하거나 박해를 받게 되지만 이들의 예술적 유산은 페테르부르크 언더그라운드 문화 가운데서 지속된다. 그뿐만 아니라 전위적인 아방가르드의 미학적 강령이 소련의 정치권력에 의해 폐기되었다 하더라도 교양 있는 소련 시민을 양성하려는 소련의 문화혁명 가운데에서 음악과 발레 등에 대한 교육은 보다 활성화되었다. 부르주아 예술인 발레가 쇠퇴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소련 시대에 부흥한 것이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위대한 연주가들을 다수 매출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소련 시기는 과연 문화적 황무지였나?


▎볼쇼이 오흐틴스키 다리에서 본 페테르부르크의 야경. 가운데 멀리 보이는 건축물이 스몰늬 사원이다.
도시의 비극적 역사가 결국 개인의 운명으로 수렴된다 하더라도 삶을 구성하는 매 순간을 비극이라는 틀로 재단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종종 소련 시기에 대해 오해한다. 19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 소련의 붕괴와 함께 한국에서 소련의 공식 미학이나 사회주의 문화이론에 대한 관심은 시들해졌다. 그것은 우리에게 과거 언젠가 억압된 유토피아의 꿈을 담고 있었던 금단의 열매였다.

유토피아도, 금기도 사라진 시대는 그것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어느 순간 사회주의 문학이나 예술에 대한 연구는 일종의 시대착오로 느껴지게 되었다. 소련의 문화 역시 인위적이고 반(反)러시아적인 프로젝트로 간주되었으며, 소련 50년의 역사는 당의 공식적 이데올로기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빈 문화적 황무지로 이해되었다. 진정으로 미학적인 것은 공식문화의 박해를 피해 주변으로 후퇴한 은닉된 언더그라운드로만 존재할 뿐이라 여겨졌고, 소련 시기를 무사히 살아낸 일부 예술가의 경우에는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그들의 작품 깊은 곳에 감추어진 내재된 저항의 정신을 칭송하였다.

그러나 감추어진 저항이란 형용모순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솔로몬 볼코프가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전기에서 그를 ‘숨은 반체제 인사’로 규정하는 것을 불편해 했다. 쇼스타코비치의 위대함은 본질적으로 이 역시 형용모순일 수밖에 없는 ‘숨은 반체제 인사’라는 표현에 있지 않다. 오히려 지젝은 그의 스탈린주의적 교향곡의 모호함 속에 내재하는 도착적인 사도-마조히즘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절대적 고유성을 발견한다. 상황은 좀 다르지만 페테르부르크의 구세대 지식인들은 소련 시기를 문화적 황무지로 폄하하는 것을 못마땅해 한다.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소련에는 그 어떤 진정한 문학도, 음악도, 회화도, 연극과 영화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냐고 반문한다. 그 속에도 여전히 문화가, 삶이 숨 쉬고 있었다고 항변한다.

분명 소련 시기를 보는 우리의 관점은 온전하지 못했다. 그것은 지나친 ‘열광’과 완전한 부정의 양극 사이에서 진동하였다. 러시아에서 소련 시대 교육을 받은 나이 지긋한 지식인과 예술인을 만나면서 가장 먼저 폐기되어야 했던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소련 시기를 경직된 문화의 불모지로 보게 되는 나의 무의식이었다. 소련은 분명 억압적인 사회였겠지만 지켜져야 하는 규범만 준수한다면 얼마든지 예술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페테르부르크의 문화적 저력의 기저에는 지금도 다름 아닌 이들 소련 시대를 살았던 문화적 인텔리겐챠 들이 존재한다.

필자는 1999년 9월부터 2003년 8월까지 4년이 채 안 되는 시간을 페테르부르크에서 보냈다. 어쩌면 그때가 유학생의 황금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가와 학비는 여전히 쌌지만 자본주의의 물결과 함께 러시아에서도 전 세계 각지의 상품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1년 전 연수를 왔을 때는 그 어디에도 없었던 대형 상점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러시아는 많이 변했다. 소련의 해체부터 1999년까지의 기간이 소련의 역사를 청산하고 사회주의 유산을 비판하는 데 몰두했던 시기라 한다면 푸틴 대통령이 집권한 2000년 전후로 러시아는 소련을 극복하고 동시에 계승하면서 고유의 국가 정체성을 만들어가기에 바빴다. 서방에서는 러시아의 민주주의 후퇴를 이야기하고 신제국주의의 부활에 대한 두려움을 알렸다. 러시아는 2008년 또 한 번 경제위기를 맞이할 때까지 초고속 성장을 하였다. 그 사이 생계를 위해 허가받지 않은 채 택시 영업을 하면서도 요금 흥정조차 민망해 하며 돈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던 ‘쑥맥’ 소련 교양인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점원의 직원은 친절해졌고 길에 서서 지도라도 보고 있으면 길을 알려주겠다고 먼저 다가오는 사람도 생겨났다. 젊은이들은 예전의 소련식 촌티와 화려함을 벗어나 세계 표준의 유행에 편승한 글로벌한 복장을 하고, 그들의 얼굴 또한 1998년 여름의 우울함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러시아는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로 또 한 번 경제 위기를 맞이했지만 대다수의 러시아인은 당당하게 러시아의 주권을 옹호하며 서방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를 높인다.

숭고함 선사하는 이삭성당과 네바강의 물결


▎100㎏의 황금을 입힌 돔으로 유명한 이삭성당의 실루엣. 세계적인 규모로 손꼽히는 이 성당은 프랑스 건축가 몽페랑이 40년에 걸쳐 완성했다.
나는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후에도 2년에 한 번 정도는 여름을 러시아에서 보낸다. 요즘은 문화와 학문적인 영역에서마저 모스크바 집중현상이 심해져서 굳이 페테르부르크를 다시 방문할 이유가 없음에도 러시아를 갈 때면 꼭 페테르부르크를 찾는다. 1998년 여름에 느꼈던 도시의 아름다움에 대한 매혹은 없어진지 오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고향과 같은 감동과 편안함이 그곳에 있다. 그해 낯선 일상에서 부딪혔던 어려움과 불편함은 오일달러 유입으로 인한 경제성장 과정과 자본주의화에 힘입어 이제 많이 개선되기도 하였거니와 페테르부르크의 유학 생활이 어느 정도의 불편은 감수할 수 있는 러시아적 참을성을 나에게 선물했다. 무엇보다 나는 그곳에서 내 삶의 가장 충만하면서도 힘든 시기를 보냈다. 한여름 뜨거운 한국을 떠나 그늘진 페테르부르크의 좁은 골목 여기저기를 거닐며 상흔처럼 남아 있는 기억을 다시 한 번 불러내는 일은 이제 나에게 일종의 제의와도 같은 것이 되었다.

나에게 페테르부르크는 더 없이 소중하다. 여전히 조명이 꺼진 페테르부르크의 민낯은 비루하다. 강변의 아름다운 풍경은 빈 병을 줍는 삶에 지친 노파의 모습에 의해 퇴색된다. 공연 중 휴대폰 벨소리를 울려대는 일부 졸부는 때로 러시아 문화의 위대한 유산을 감상하는 것을 방해한다. 거리의 건축적 기념비는 그 아래에서 다리가 잘린 채 구걸하는 젊은 군인의 비참한 모습과 함께 시야에서 사라진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1998년 여름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던 날 밤의 내 경험 안에 고스란히 있었던 것들이다. 심지어 그것은 페테르부르크가 건설되던 1700년대 초부터 이 도시의 근원에 존재하고 있던 모순이기도 하다. 페테르부르크의 이러한 이중성을 인정하지 않고 이 도시를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도 내가 페테르부르크에 갈 때면 꼭 들러 묵게 되는 부모님과도 같은 노부부 선생님들 댁을 나서 바실리 섬의 1번선 거리를 지나 마침내 네바 강변이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의 풍경에는 코끝을 시리게 하는 울림이 있다. 네바강 너머의 조명 없는 이삭성당은 더 이상 찬란하지 않지만 포탄의 습격으로 상처 입은 도시의 역사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그 육중한 기둥과 네바 강의 빛나는 물결은 페테르부르크의 전경과 어우러져 찬란함을 넘어서는 숭고함을 선사한다.

이지연 -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한 후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박사수료 후 페테르부르크 소재의 러시아 학술원 문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연구소 HK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러시아 아방가르드, 불가능을 그리다>(2015), <제국과 기념비: 권력의 표상공간으로서의 20세기 러시아 문화>(근간) 등이 있다.

201507호 (2015.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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