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코스모폴리탄이 사랑한 도시⑧] 라오스 비엔티안 | 그들의 삶의 중심엔 가족이 있다 

‘지금, 여기’를 즐기는 소박한 쾌락주의자의 도시 

글·사진 한명규 라오스 코라오그룹 부회장
경적 소리, 싸우는 소리, 곡(哭) 소리가 없는 ‘3무성(無聲)의 도시’… 소소한 일상이 즐거움의 원천, 돈으로 행복 사지 않는 절제의 미덕 돋보여

▎메콩강의 노을은 아름답다. 라오스 주변 1811㎞를 굽이굽이 흐르면서 라오스를 먹여 살리는 ‘영혼과 생명의 강’이다.
비엔티안의 사람들은 천천히 길을 걷는다. 급할 이유가 없다. 약속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탓하지 말라. 시간은 언제나 비엔티안의 편이기 때문이다. 기다림이 아름답고 편하단 것을 배워야 한다. 벼가 익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비엔티안 시민들에게.

인도차이나 반도의 작은 나라. 불과 5년 전 만해도 사람들이 거의 눈여겨보지 않던 라오스가 요즘 ‘핫(hot)’한 여행지로 떴다. 전엔 생각지도 못한 항공기 직항편이 매일 서울과 비엔티안을 오간다. 비엔티안 중심가엔 ‘꽃보다 청춘’의 주인공이 되어 보려는 한국에서 온 젊은이들과 인생의 황혼을 즐기려는 노인들이 넘쳐난다.

라오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데는 매스컴의 영향이 컸겠지만 그게 다는 아닐 것이다. 뭔가 매력이 있지 않으면 사람들이 계속 찾아오지 않을 것이고, 여행사도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가 어렵다. 라오스에 무슨 매력이 숨어 있길래 한 해 400만 명에 이르는 외국인이 이 나라를 찾아올까.

라오스는 5개국으로 둘러싸인 내륙국가다. 동쪽으로는 베트남, 서쪽으로는 태국, 북으로는 중국과 미얀마, 남으로는 캄보디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라오스 지도는 한반도 지도와 매우 흡사하다. 면적도 한반도의 1.1배이니 거의 같다. 그러나 인구는 700만 명이 되질 않으니 그들의 절반만한 땅에서 5천만 명이 살아야 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여간 부러운 일이 아니다.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Vientiane; 현지발음으로는 ‘위양짠’)은 한반도 지도로 치면 황해도 해주나 인천쯤에 위치한다. 산악지대가 대부분인 라오스 땅에서 비엔티안은 커다란 평원에 자리 잡고 있다. 바다가 없는 대신 메콩강이 도시를 휘감아 지나가며 도시의 숨통을 틔워준다.

씨암(태국)의 침공으로 초토화된 굴곡진 역사


▎루앙프라방에서 비엔티안으로 천도한 쎗타티랏 왕의 동상. 그는 란쌍 왕국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지도자로 추앙받는다
비엔티안 인구는 80만 명으로 한 나라의 수도라고 하기에는 너무 적다. 거리 풍경으로만 보자면 한국의 1970년대 중소도시 정도라고 할까? 고도제한으로 말미암아 높은 빌딩이 없는 데다 낡은 건물이 산재해 있어 도시로서의 품격을 논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수도는 수도다. 땅값만 하더라도 시내에 집을 지을 만한 땅은 보통 수억 원을 호가한다. 1인당 국민소득이 2천 달러가 되지 않는 라오스에서 땅값만은 선진국 수준이다.

라오스인들 사이에 비엔티안이라는 이름의 도시는 없다. 외국 사람들은 라오스의 수도를 비엔티안이라고 하지만 정작 라오스 사람들은 위양짠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비엔티안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 프랑스인이 라오스 현지 발음을 프랑스식으로 표기한 것인데, 현대에 들어와 그것을 영어식으로 읽다 보니 생겨난 이름이다. 라오스의 많은 지명이 이런 배경을 갖고 있어 다소 혼란스럽다. 예를 들어 ‘젊은이의 천국’으로 불리며 배낭객들이 즐겨 찾는 방 비엥(Vang Vieng)을 현지에서는 왕위양이라고 하고, 옛 수도인 루앙프라방(Luang Prabang)은 루앙파방이라고 한다.

비엔티안은 한때 융성을 누리기도 했으나 씨암(태국)의 침공으로 두 번이나 초토화된 굴곡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비엔티안이 수도가 된 건 1560년. 란쌍 왕국이 미얀마, 씨암과의 전쟁으로 국력이 쇠약해질 무렵 쎗타티랏이라는 걸출한 왕이 등장해 루앙프라방에서 비엔티안으로 수도를 옮겼다. 미얀마의 침공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쎗타티랏은 왕위에 오르기 전 아버지의 명에 따라 자신이 지배하던 치앙마이에서 에메랄드 불상인 ‘파깨오’를 옮겨와 비엔티안에 ‘호 파깨오’라는 사원을 지어 모셨다. 현재 라오스 최대 명소인 탓루앙 사원을 건립하는 등 왕국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그러나 란쌍 왕국의 소중한 보물이었던 파깨오 불상은 지금 라오스에 없다. 되레 적국이었던 태국 왕실의 상징이 되어 방콕에 있는 에메랄드 사원에 모셔졌으며 오늘날까지 태국인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어찌된 일일까?

씨암은 1779년 란쌍 왕국이 분열로 인해 쇠약해진 틈을 타 비엔티안을 정복했다. 이때 씨암 군대를 이끌고 온 사람이 바로 프라야 차크리 장군. 오늘날 태국 차크리 왕조의 시조가 된 인물이다. 그는 비엔티안을 불태우고 에메랄드 불상을 씨암으로 가져가 새로운 왕조 개창의 상징물로 삼았다.

비엔티안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827년 비엔티안의 아누웡 왕은 자신들을 무시하는 씨암에 대해 앙심을 품고 전쟁을 일으켰다. 그는 한때 승기를 잡기도 했지만 결국 막강한 씨암 군대에 패하고 말았다. 왕과 왕족은 씨암으로 끌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비엔티안은 도시 전체가 전소되다시피 했다. 이때 살아남은 유일한 건축물이 왓 씨사껫 사원이다. 씨암 양식으로 지어진 데다 씨암 군대가 주둔했던 사원이었기 때문에 위기를 모면했을 것이다. 현재 비엔티안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관광 명소가 되어 있다.

비엔티안은 1893년 프랑스 보호령을 기점으로 식민지 수도로 전락했으며 2차대전 시기에는 일본군의 군홧발 아래 놓이기도 했다. 이후 라오스는 왕당파와 빠뗏 라오로 대표되는 공산혁명주의자들과의 내전으로 몸살을 앓았다. 1975년 베트남전쟁의 종식과 함께 마침내 빠뗏 라오가 수도 비엔티안을 점령함으로써 란쌍 왕국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라오스는 공산혁명 초기에 강력한 통제경제를 실시했으나 1986년 신경제제도를 도입, 베트남과 비슷한 시장경제 체제를 지속해오고 있다.

사람들은 비엔티안을 ‘달의 도시’라고도 한다. 멋진 시적 표현이다. 비엔티안의 달은 유난히도 커 보인다. 저녁노을을 딛고 떠오르는 달을 보노라면 ‘세상에! 달이 어떻게 이처럼 클 수가 있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라오스의 국기 한가운데에도 달이 그려져 있다. 그만큼 라오스인들은 달을 사랑한다. 하긴 매일 뜨거운 태양을 머리 위에 이고 살아야 하는 그들이기에 태양보다는 달을 사랑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비엔티안은 ‘달의 도시’가 아니라 ‘백단향의 도시’라고 하는 게 옳다. 라오스인들이 부르는 위양짠(Vieng Chan)은 인도 고대어인 팔리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위양’은 도시를, ‘짠’은 백단향나무를 뜻한다. 이 도시에 백단향나무가 많았다는 얘기다. 이 ‘짠’의 발음이 산스크리트어에서 달과 유사해 달의 도시라고 이름을 붙인 경우다.

하긴 사람들이 달과 닮은 점은 많다. 그들은 적극적이 아니라 소극적이다.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남을 이해하고 배려할 줄 안다. 한 예로 비엔티안 거리에서는 자동차 경적을 듣기 어렵다. 서로 싸우거나 화내는 모습도 좀처럼 보기 어렵다. 죽음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므로 장례식에 가도 우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라오스를 경적 소리, 싸우는 소리, 곡(哭) 소리가 없는 ‘3무성(無聲)의 나라’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딱밧’으로 시작되는 비엔티안의 하루


▎비엔티안의 아침은 탁발로 시작된다. 탁발 공양은 라오스인들의 가장 중요한 일상 중 하나다
메콩강은 라오스의 젖줄이다. 무려 1811㎞나 라오스를 흐르면서 농업용수와 어족 자원, 수력 발전에 이르기까지 먹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라오스를 먹여 살리는 강이다. 라오스 말로는 ‘매남콩’ 혹은 ‘남콩’으로 불린다. ‘매’는 어머니요, ‘남’은 물이니 메콩강은 모든 강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메콩강은 티베트 고원에서 발원하여 중국·미얀마·라오스·태국·캄보디아·베트남을 거쳐 남중국해로 빠져나가는 다국적 하천이다. 상류인 중국에서 서서히 힘을 키워 강수량이 많은 라오스 땅에 들어와 강으로서 위용을 갖춘다. 라오스 북부에서 남으로 태국과 국경을 이루며 내려오다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내륙인 루앙프라방으로 흘러 들어간다.

긴 여정에 지쳤음일까. 이윽고 메콩강은 서(西)에서 동(東)으로 숨을 고르며 비엔티안으로 들어선다. 여기가 바로 450여 년 전 란쌍 왕국의 새 수도이자 현재 라오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의 수도이다. 메콩강은 비엔티안에서 한나절 호흡을 가다듬은 뒤 다시 남쪽으로 흘러가며 태국과 라오스 간 국경을 이룬다. 메콩강 건너편, 지금은 태국 소유가 되어버린 거대한 땅이 과거 라오스(란쌍 왕국) 땅이었다는 역사는 강물 속에 묻혀 사라졌다.

비엔티안의 하루는 딱밧으로 시작된다. 딱밧은 탁발을 뜻하는 라오스 말이다. 새벽 여섯 시쯤이면 여기저기 골목마다 사람들(주로 여자)이 자리를 깔고 무릎을 꿇은 채 스님들을 기다린다. 붉은 가사를 입고 긴 행렬을 이룬 스님들은 맨발에 발우를 메고 간단한 독경을 하기도 한다. 이 모습을 보고 있으면 누구나 경건해진다.

사람들은 준비해 온 찰밥(카오니아오)을 조금씩 떼어 스님들에게 공양하는데 이 찰밥과 음식을 준비하고 몸을 정갈하게 하려면 새벽 5시면 일어나야 한다. 탁발은 비엔티안만이 아니라 라오스 모든 도시에서 행해지는 일상적인 일이다. 특히 불교 사원이 많은 루앙프라방의 탁발 행렬은 사진 작품에 자주 등장할 정도로 유명하다.

흔히 라오스 불교를 소승불교로 분류하지만 그들은 대승, 소승으로 분리되기 전의 원형 불교라는 뜻에서 테라바다(Theravada, 상좌부) 불교라고 한다. 승려들은 아침과 점심 두 끼만 먹을 뿐 낮 12시 이후에는 먹지 않을 정도로 금욕적이다. 여성은 승려의 옷자락에도 닿아선 안 된다.

불교 사원은 교육기관이기도 하다. 교육시설과 교사가 부족한 라오스에서 학식이 높은 계층인 승려들은 선생님으로 부족함이 없다. 사원 옆에 초등학교가 바로 붙어 있는 곳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라오스에는 49개 종족이 있고 불교는 주류 민족인 라오족의 종교이긴 하다. 그러나 불교는 라오스인의 삶과 정신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어려서부터 두 손을 모아 합장하는 인사법(‘놉’이라고 함)을 배우면서 남을 공경할 줄 알게 되고, 일상적인 공양을 통해 남에게 베푸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파티의 나라, 피로연은 화려하다


▎1. 10월 옥판싸 축제 때 라오스인들은 ‘까통’이라는 이름의 배를 만들고 강물에 띄워 보내며 소원을 빈다. / 2. 메콩강변에서 벌어지는 보트 레이싱. 라오스 사람들이 모처럼 속도감에 몸을 맡기고 하루를 즐길 수 있는 기회다.
비엔티안 사람들은 크고 작은 파티를 즐긴다. 파티는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가정마다 생일, 집들이, 결혼 파티는 기본이고 무슨 일만 있으면 사람들을 초대해서 음식을 나누고 놀기를 좋아한다. 집들이도 한 번에 끝나지 않는다. 매년 한 번씩, 3년에 걸쳐 하는 게 상례다. 회사도 가정의 연장이나 마찬가지여서 가끔 파티를 열어주어야 근무의욕이 지속된다. 무미건조한 회사 생활은 이들에겐 전직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회사 일을 자기 일처럼 충성을 다하는 직원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파티 때가 되면 누구랄 것도 없이 하나가 되어 열심히 준비한다.

가라오케와 춤은 파티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다. 보통 파티는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시끄러운 가라오케를 틀어 놓기 때문에 이웃 주민은 쉽게 잠을 자기 어렵다. 하지만 아무도 이를 문제 삼지 않는다. 일종의 문화인데다 어차피 자기도 그렇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라오스에서 가장 일반적인 춤은 람봉 춤이다. 동남아 사람들이 즐겨 추는 손가락 춤으로 남녀가 서로 마주보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돌아간다. 여자들은 맵시가 필요하지만 남자들은 대충 춰도 상관없는 쉬운 춤이다.

결혼 피로연은 가장 중요한 파티다. 모계상속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라오스에서는 결혼식을 신부집에서 오전에 가족 위주로 치른다. 손님을 위한 파티는 비엔티안의 중류 이상 가정이라면 대형 음식점이나 피로연 전용 건물에서 저녁에 치른다. 초대장은 보통 400장 쯤 뿌리지만 실제 오는 손님은 800명이 넘고 1000명을 넘는 경우도 많다. 부부와 아이들이 함께 오기 때문이다. 그래도 음식 값은 당초 정한 숫자대로 받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다.

피로연은 화려하다. 라오스 전통복장에 꽃단장을 하고 온 여자들이 음악에 맞춰 군무를 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눈이 휘둥그레진다. 라오스가 후진국이라는 생각은 멀리 달아나고 오히려 우리는 왜 이들처럼 놀지 못할까 하는 부러움과 부끄러움이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라오스 사람들은 항상 축제를 기다린다. 축제에는 분(Boun)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국가적으로 큰 축제인 탓루앙 축제는 분 탓루앙(Boun That Luang)이고 집안에서 하는 소소한 축제는 흐안 분(Heuan Boun; 흐안은 ‘집’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비엔티안 사람들의 축제는 4월 삐마이(Pi Mai)에서부터 시작된다. 삐마이는 신년을 의미한다. 아홉 개의 절을 순방하며 복을 기원한다. 라오스인의 모든 행사에 등장하는 바시(Basi)는 삐마이 행사에서도 중요하다. 바시는 일종의 축원 의식으로 하얀 실을 풀어 서로의 손목에 감아주며 행운을 기원한다. 그들은 이런 의식을 통해 가족 간 또는 사회 구성원 간 유대감을 확인한다.

삐마이 축제는 물의 축제다. 가장 더운 시기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서로가 물을 뿌려주며 축복한다. 맥주 소비량은 급격히 늘어난다. 1년 맥주 소비량의 3분의 1이 이 시기에 집중될 정도다.

5월에는 분 방파이(Boun Bang Fai)가 기다린다. 로켓을 만들어 하늘로 쏘아 올리는 행사다. 비를 부르고 한 해 농사가 잘되기를 기원하는 기우제 성격의 축제다. 7월에는 승려들의 하안거를 의미하는 카오판싸(Khao Phansa)가 찾아온다. 이때부터 석 달 동안 음주 가무를 삼가고 결혼도 하지 않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핑계삼아 술을 마시며 즐긴다.

축제의 열정은 뜨겁다


▎탓루앙 축제 때의 공양 행사. 라오스인들은 이곳에서의 새벽 공양을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 밤을 새운다.
10월에는 하안거를 벗어나는 옥판싸(Ock Phansa)가 시작된다. 사람들은 메콩강가에 나와 바나나 잎과 노란 꽃으로 장식한 까통(Kathong)을 강물에 띄워 보내며 행운을 기원한다. 봇물 터지듯 여기저기서 결혼식이 시작된다.

옥판싸와 함께 비엔티안 메콩강에서 열리는 보트 경기는 전 국민의 관심사다. 지역대회를 거쳐 결승경기가 열리는 이 대회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대통령을 비롯한 각료들도 관중석에 자리를 잡는다. 시간도, 사람도 천천히 가는 라오스에서 유일하게 속도감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보트 경주다. 좀처럼 생중계를 하지 않는 라오스 TV도 이때만큼은 비용을 아끼지 않으니 그 열기를 짐작할 수 있다.

11월은 탓루앙 축제의 계절이다. 탓 루앙은 부처님 사리를 모신 라오스 최고의 사원이다. 탓 루앙 광장에는 단 한 번의 새벽 공양을 위해 전국에서 수십만 인파가 모여든다. 트럭 짐칸에 실려 수백 ㎞를 달려오는 행렬을 보면 열성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메콩강변에 가까운 비엔티안 거리를 여행자 거리라고 일컫는다. 길어 봐야 2~3㎞다. 이 거리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자들을 언제나 볼 수 있다. 게스트 하우스·카페·레스토랑·포장마차·선물 가게가 널려 있다. 요즘 한국 사람이 늘긴 했지만 원래 이곳은 서양에서 온 여행자의 둥지나 마찬가지다. 동남아 여행자는 단기 체류형인 반면 유럽이나 미국, 호주에서 온 여행자는 비엔티안에서 비교적 길게 머물며 자전거나 뚝뚝을 타고 현지생활을 즐긴다.

여행자 거리에는 프랑스 식민지 시대의 영향으로 유럽식 건물에 레스토랑을 연 꼽짜이더 레스토랑 같은 명소가 있다. 간판에 ‘세계인이 모이는 곳’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운다. 이곳에는 언제나 수백 명의 외국인이 북적인다. 처음 비엔티안을 방문한 사람은 거리에 서양인이 많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한다.

라오스인은 외국인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다.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는다. 언제든 웃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라오스를 ‘미소가 아름다운 나라’로 부르기도 한다. 마음의 여유가 있기 때문에 그런 미소가 생겨났을 것이다.

여행자 거리에서 메콩강변으로 나가면 매일 저녁 열리는 야시장을 볼 수 있다. 수많은 가게가 진을 치고 있어 여행자는 물론 현지인에게도 볼거리를 제공한다. 과거에 밤 9시면 조용했던 이 거리가 야시장이 등장한 덕에 환하게 불을 밝혔다.

이 야시장을 포함한 메콩강 주변 공원은 한국의 원조로 만들어졌다. 메콩강이 범람하는 바람에 수도가 물에 잠기는 일이 두어 차례 있었고, 이를 방지하기 위한 제방공사를 한국이 맡아 진행하면서 한강 공원처럼 공원도 만들었다. 한국의 대외원조사업 중 가장 성공한 프로젝트로 점수를 줘도 무방할 것이다. 그 덕분에 흙먼지 풀풀 날리던 메콩강변은 어디에 내 놓아도 부럽지 않을 시민의 명소로 탈바꿈했다.

음식 순례에만 1주일 이상 걸려


▎1. 비엔티안에는 재래시장이 많다. 시장 상인들과 대화를 주고받다 보면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솟아나 푸근한 기분에 휩싸인다. / 2. 프랑스 식민지배의 영향으로 탄생한 카오찌. 바게트를 반으로 갈라 여러 가지 재료를 꽉 채운 것으로 서민의 사랑을 받는 음식이다.
음식 맛이 없는 도시는 갈 맛이 안 나는 법이다. 비엔티안은 라오스의 정치·경제·문화·교육의 중심 도시지만 음식의 수도라고 해도 무방하다. 한국에서 온 관광객들은 눈에 띌만한 관광지가 없다는 이유로 비엔티안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방비엥이나 루앙프라방으로 떠나지만 음식점 순례만 해도 일주일은 충분히 보낼 수 있는 곳이 비엔티안이다.

비엔티안에는 라오스인들이 옛날부터 즐겨 먹은 빠덱(젓갈), 땀막훙(파파야 샐러드), 카오니아오(찹쌀밥), 삥빠(생선구이), 삥까이(닭구이), 카오삐약(쌀국수) 같은 음식들이 있다. 향은 그다지 심하지 않고, 오히려 맵고 짠맛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입맛에 맞다.

그뿐 아니다. 비엔티안의 여행자 거리에는 프랑스식, 이탈리아식, 일식, 인도식, 중국식 요리점이 즐비하다. 현지인에겐 비싼 편이지만 외국인이라면 그리 큰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서양 음식값은 한국에서 먹는 가격의 반도 안 되는 착한 가격이다. 라오스 음식은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이웃 나라인 태국과 베트남,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태국과 국경을 접한 비엔티안은 태국 음식과 비슷하다.

시내 뒷골목에 가면 현지인들이 즐기는 야시장이 있다. 여행자 거리에서 가까운 시홈 지역의 딸랏 아누 야시장이나 관광지인 탓루앙 광장 앞에는 매일 야시장이 선다. 매캐한 연기와 허접한 시설은 감내해야 하지만 닭고기, 생선구이에서부터 메뚜기, 귀뚜라미, 번데기까지 싸게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 현지인이 즐기는 음식 가운데 메콩강 생선구이는 단지 소금만 치고 불에 구웠을 뿐인데 향긋한 맛이 난다. 꼭 한 번 시식해 볼 만하다.

한국 음식점도 서른 개 가까이 된다. 특히 한국식 불판을 이용한 불고기가 라오스에서는 ‘씬닷’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해 라오스인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불고기는 베트남전 이후 라오스에 건너온 한국인이 전파한 것으로 알려진다.

프랑스 식민지 시대의 유산이지만 바게트 빵을 갈라 여러 가지 재료를 꽉 채운 카오찌는 별미다. 유명한 카오찌 가게에는 사람들이 하루 종일 진을 친다. 라오스 전통 쌀국수인 카오삐약도 좋지만 베트남식 쌀국수(‘퍼’라고 함)도 라오스 사람들에겐 일상적인 음식이다. 나름대로 깊은 맛을 자랑하는 비엔티안의 어느 쌀국수집은 하루 손님이 500~1천 명씩 드나드는 식당을 세 군데나 운영한다.

그들이 즐겨 마시는 비어라오 맥주는 일품이다. 현지인뿐 아니라 외국인들도 맛과 품질을 인정한다. 라오스에 살다 간 사람들에게 라오스의 추억을 물으면 단연 비어라오를 꼽는다. 해질녘 메콩강변에 앉아 비어라오를 마시며 담소하는 시간은 행복 그 자체다. 비어라오는 특이하게도 쌀로 만든 맥주다. 그래서 맛있는 건지, 물이 좋은 건지는 모르지만 비어라오 ‘짱’이다.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새벽 3시에 문을 여는 시장이 비엔티안 한복판에 있다. 딸랏 꾸아딘으로 비엔티안의 대표적인 재래시장이다. ‘딸랏’은 시장을 뜻한다. 관광객들에게 널리 알려진 딸랏 싸오(아침 시장)는 재래시장과 백화점의 중간 정도 되는 시장이고, 재래시장 가운데 가장 큰 딸랏 통칸캄은 2년 전 대화재로 전소되어 지금은 딸랏 꾸아딘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꾸아딘 시장에서 채소를 파는 캄손(50) 씨는 새벽 2시에 눈을 떠 차를 몰고 시장으로 간다. 전날 저녁 미리 준비해놓은 야채를 보기 좋게 진열해야 하기 때문이다. 새벽 3시부터 4시 사이에는 비엔티안 인근지역에서 시장에 물건을 대주는 소형 트럭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시내에서 음식업을 하는 상인들이 시장에 몰려들어 좋은 물건을 고르느라 정신이 없다. 소매업자들도 이 시장에서 물건을 떼어다 팔아야 한다. 덕분에 시장 주변에는 물건 운송용 뚝뚝이 장사진을 이룬다. 뚝뚝은 오토바이를 개조해 만든 삼륜차로 요란하게 ‘뚝뚝’ 소리를 내며 달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남아 여러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서민의 교통수단이다.

이 새벽시장에는 한국산 포터 트럭도 한몫을 톡톡히 한다. 비엔티안 인근에 있는 생산 농가들은 거의 대부분 포터에 짐을 싣고 온다. 포터는 다른 어느 차종보다도 라오스 경제 규모와 도로 사정에 딱 맞는다. 라오스 국민의 75%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포터가 수입되기 전에는 농촌에서 생산된 채소와 육류를 시장에 신속하게 내다 팔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포터는 라오스 경제 발전의 공신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과 사람 속에서 쉽게 행복 찾아

비엔티안에 살면서 가끔 현지인들에게 묻는다. 행복하냐고. 그들은 주저함이 없이 ‘행복하다’고 대답한다. 처음에 그런 대답을 들을 때면 ‘정말 행복할까’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살다 보니 이해가 간다.

그들이 느끼는 행복의 중심에는 가족이 있다. 라오스가 사회주의 체제라서 사람들이 경색된 분위기에서 살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접어도 된다. 그들의 최고 가치는 국가가 아니라 가족이다. 직장인들은 오버타임(초과근무)을 기피한다. 분명히 임금을 갑절로 더 받을 수 있는데도 ‘칼퇴근’이다. 집에 가봐야 특별한 일이나 낙(樂)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가족과 함께 TV를 보거나 맥주를 마시며 노닥거릴 뿐이다.

어찌 보면 라오스 사람들 전체가 가족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혈연으로 얽혀 있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말하는 친척의 범위는 종잡기 어렵다. 우리가 보기엔 사돈의 팔촌쯤 되는데도 친척이라며 가까운 가족처럼 대한다. 대가족제도 전통과 함께 과거 일부다처제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씨족사회의 전통도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하다. 라오스에서는 마을과 마을을 묶어 만든 군(郡)이나 구(區)를 ‘므앙(Meuang 또는 Muang)’이라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국가로서의 라오스도 ‘므앙 라오’라고 부른다는 점이다. 가끔 라오스라는 나라를 현대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는데 마을과 마을을 합친 므앙이라고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라오스에서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사람들은 급할 이유가 없다. 약속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탓하지 말라. 시간은 언제나 라오스 사람들의 편이다. 이곳에서는 기다림의 미학을 배워야 한다.

식민지 시대에 한 프랑스인은 유명한 조크를 남겼다. “베트남 사람들은 벼를 심고, 캄보디아 사람들은 벼가 자라는 것을 보며, 라오스 사람들은 벼 익는 소리를 듣는다.” 라오스는 베트남과 같은 어수선함을 떠나 조용히 관조하며 살기에 적당한 땅이라는 뜻일 게다.

시간의 포로가 되지 않고 사는 그들, 잘못을 탓하기보다 인내할 줄 아는 그들. 라오스 사람들은 어쩌면 한국과는 정반대인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빨리빨리’는 없고 ‘천천히’만 있다. 무한경쟁이 아니라 무(無)경쟁이다. 지나친 욕망 대신 절제가 있다. 헛된 미래보다 오늘의 삶을 즐긴다.

행복을 수치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들은 우리보다 행복하게 사는 듯하다. 한국인은 늘 쫓기는 시간 속에서 겨우 행복을 찾아내지만 그들은 사람과 사람 속에서 쉽게 행복을 찾는다. 그들은 돈으로 행복을 사지 않는다. 행복은 바로 소소한 일상에 있기 때문이다.

한명규 - 2009년부터 라오스 현지 기업인 코라오그룹 부회장을 맡고 있다. 1983년 <매일경제신문> 기자로 출발, 편집국장과 논설위원실장을 지냈으며 세계한상대회 창립을 주도했다. 2007년에는 전라북도 정무부지사로 지방경제 활성화에 주력했다. 전북대 법학과와 고려대 언론대학원을 졸업했다. 저서로는 <50달러로 억만장자가 된 한상> <광속시대의 논리> <비밀의 라오스>가 있다.

201508호 (2015.07.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