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현장취재] 서울 토박이 동네 25년 굴곡사 - 우리들의 청춘이 머문 자리 ‘서촌’ 

느림의 미학’이 담긴 판타지적 공간이 몰락하기까지… 대형자본 침투는 젊은이들을 끌어들이던 문화적 매력과 동력을 상실케 했다는 목소리도 

글 김포그니 월간중앙 기자 / 사진 김현동 기자
서울 사대문 안 강북의 옛 감성을 고집스레 움켜쥐고 있는 유일한 동네 ‘서촌’. 약 2~3년 전부터 외부 자본이 유입된 기성 체인점들이 즐비해지더니 어느새 강북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거듭났다. 이를 두고 토박이들은 ‘문화의 붕괴’라 하고 외지인들은 ‘자본의 성공’이라 한다.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주인공 해원은 서촌의 사직공원에서 자신의 연인이자 유부남인 이 교수와 고단한 사랑을 속삭인다.
“주고 싶은 만큼 주면 제가 너무 드러나잖아요.”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서 주인공 해원은 서촌의 필운동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원하는 만큼 돈을 내고 책을 집어가도 된다”는 카페 주인의 말에 자조적으로 답한다.

또래의 친구들보다 조금 더 성숙하고 그래서 어느 무리에서나 튀었던, 늘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하며 자신을 드러내는 해원. 그랬던 그녀가 ‘제가 너무 드러난다’며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언제부턴가 자신의 연인 앞에서는 ‘숨겨진’ 여자가 되어야 했기에.

그녀는 100년의 시간을 간직한 배화여자중학교 앞 찻집에서 곧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날 친어머니와 마지막으로 차 한잔을 나눈 후 사직공원에서 자신의 연인이자 유부남인 이 교수와 고단한 사랑을 속삭인다. 종로도서관에서 내려오는 길목엔 그와 첫날밤을 보낸 오래된 여관이 있다. ‘유명장’, 유명한 여관이라는 뜻을 가진 이 공간에서 해원은 무명(無名)의 사랑을 시작해야 했다. 그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는.

이 교수가 해원에게 “우리 이런 식으로 오랫동안 만나자”는 시퍼렇게 이기적인 제안을 미소에 담는 순간 그녀의 가슴엔 수백 개의 금이 갔다. “아저씨는 아무것도 포기하려고 안 하잖아.” 해원은 고된 마음을 움켜잡고 정처 없이 서촌을 걷는다. 통인동의 고불고불한 골목, 효자동의 한옥 처마 밑, 청운동의 초록 풀잎 사이를 돌고 돈다. 생명을 잃고 화장된 백골 가루가 허무하게 지천에 뿌려지듯 애초부터 공정하지 못했던 사랑에 힘없이 부스러지고만 그녀의 마음 조각들이 한동안 서촌 이곳 저곳에 흩뿌려졌다. 그녀의 오래된 사랑은 오래된 동네에 담담하게 편입됐다.

‘힙스터’와 ‘느림 지향’…기묘한 이중주


▎서울 사대문 안의 옛 감성을 간직하고 있는 서촌. 2012년 무렵 예술가들이 모여들면서 독특한 스타일의 가게와 갤러리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관객은 불륜으로 심연의 상처를 입은 여대생 해원과 그녀가 다녀간 서촌의 공원, 카페, 식당, 여관을 기억했고 이내 영화 속 문제의 이 동네를 찾기 시작했다. 사랑의 감정이 오랫동안 남아 있듯이 오랜 시간 그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사직동·적선동·통인동·효자동 등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동네… ‘서촌’을 말이다.

서울 사대문 안의 옛 감성을 움켜쥐고 있는 동네 서촌. 2012년 비주류 예술가들이 삼삼오오 모여들더니 홍상수 영화감독이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우리 선희>를 비롯한 자신의 주요 작품에 배경으로 선택해 더욱 유명해졌다. 이후 대형자본은 휴대폰 대형 매장, 유명 체인점의 이름으로 하나둘씩 이곳에 자리 잡았다. 불과 2~3년 만에 서촌은 전국적으로 이름난 관광지가 됐다.

30년 넘게 서촌에서 나고 자란 기자의 시선에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광화문 지역 재개발로 사직동, 내자동 일대에 오피스텔 단지들이 즐비하게 세워질 무렵 통인동·내자동·효자동 일대로 비주류 예술인들이 모여들더니 독특한 스타일의 가게와 갤러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서촌의 통인동 골목 초입에 생겨난 한 휴대폰 대형 매장. 대형자본의 유입은 서촌 토박이들의 터전을 하나둘씩 밀어냈다.
내자동에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2층 가정집이 하나 있었는데, 한 노의사가 자신의 거처에 마련한 소박한 병원 ‘영화의원’이었다. 1980년대 중반 서촌의 아이들이 감기에 걸리면 으레 찾던 곳이다. 현재 이 병원은 리모델링 후 고급 와인바로 바뀌었다. 검은 테 안경을 쓰고는 “아이스크림이나 찬 걸 먹으면 감기 걸린다”며 다정한 조언을 건네던 노 의사의 행방을 아는 이는 없다.

매동초등학교 정문 앞에는 문방구 두 곳과 한 피아노학원이 나란히 있었다. ‘윗 문방구’ ‘아래 문방구’라 불리던 이곳은 현재 티베트 커피를 판매하는 문화공간으로 바뀌었고 피아노학원 역시 커피숍이 들어섰다. 필운동에 있었던 어릴 적 친구의 2층 집은 팬시용품점으로 바뀌었다. 물론 다 변한 건 아니다. 종로도서관과 통인동의 한옥마을처럼 이전 모습 그대로 묵묵히 본래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곳도 있다.

이렇듯 변화와 머무름, 여기에 비주류 예술인들의 감수성이 더해져 묘한 공존을 이루고 있는 동네가 바로 서촌이다. 이곳을 찾는 방문자들의 성향도 극과 극이다. 이른바 유행을 쫓는 ‘힙스터(hipster)’와 느린 삶을 지향하는 ‘킨포크(Kinfolk)’족이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서촌을 유행의 한 재료로 삼는 방문객과 서촌의 느림을 간직하고자 하는 이들의 심적 의도가 교차되며 묘한 이중주를 이루고 있다. 이에 대해 도시전문가 홍성태 상지대 교수는 “다른 곳에서 느끼기 어려운 서촌 만의 분위기가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 기존에 낙후된 곳이라고 여겨졌던 한옥촌을 낭만으로 여기게 된 인식의 전환도 주요했다”며 힙스터와 같은 트렌디세터들로부터 서촌이 각광받게 된 원인을 설명했다. 이어 홍 교수는 “인간적인 크기, 재현할 수 없는 시간의 축적, 몸으로 느끼는 살아 있는 자연 등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대표되는 서울에 대한 거부와 도피 역시 서촌을 향했다”고 덧붙였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저서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좋은 도시는 산책하는 사람이 만든다”고 했다. 그렇다. 벤야민의 주장대로라면 서촌에 내재된 힘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걷고 싶게 만든다는 것에 있다.

통인동 골목에서 옷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서촌 토박이 A씨(34)는 “서촌은 느림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설명한다. 자본으로 상징되는 강남의 개발 속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란다. 실제로 서촌 열풍의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른바 비주류 예술인 다수는 서촌에 정착하게 된 이유에 대해 ‘느림’, ‘예스러움’, ‘오래됨’을 꼽았다. 이들은 말한다. “강남의 빠른 개발에 기인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공간에 있노라면 영원히 동심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른의 ‘판타지’로 시작된 공간


▎(왼쪽) 필운동에 위치한 매동초등학교의 전경. 작가 박완서는 단편소설 ‘엄마의 말뚝’에서 “친척집 주소를 빌려가면서 사직동에 있는 매동학교에 다녔다”고 회상했다. / (오른쪽) 일부 서촌 토박이들은 “오래된 건물들이 시멘트로 새로 지어지고 있다”며 동네의 예스러움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이 비주류 예술인들과 오묘하게 조합된 서촌의 느림을 체험하기 위해 방문하는 이들은 100년도 더 된 혈관같이 이어진 골목길을 순환하는 의식을 치른다. 자칭 개발의 빠른 속도에 지쳐 튕겨져 나온 사람들이라는 이들의 착시효과로 만들어진, 어른의 판타지로 시작된 공간이 바로 서촌인 것이다.

‘느림’의 영화이자 다큐멘터리식 촬영을 하는 것으로 유명한 홍상수 감독이 자신의 작품마다 서촌이나 이와 비슷한 강북의 동네들을 배경으로 삼는 이유도 이와 맥을 함께한다. 현재의 서촌 이미지를 대중에게 알린 것으로 평가받는 홍 감독의 시선에는 강남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 왜일까? 일반적으로 영화감독은 익숙한 공간에 카메라를 들이대곤 한다. 카메라 앵글을 들이대는 행위는 어떤 공간을 지배해 영상에 담고자 하는 것. 그런데 그 공간이 낯설 경우 감독이 풍광에 압도되고 만다. 결국 홍 감독에게 서촌은 자신의 세대가 경험했던 익숙함이다. 서촌은 이들의 청춘이 기억하는 가장 익숙한 공간인 것이다.

이에 대해 부동산 전문가 정승일(48) 씨는 “홍상수 감독을 위시한 이 세대가 표현한 서촌의 기억이 현재의 젊은이들에게 신선한 감수성으로 다가왔던 게 ‘서촌 열풍’의 한 축이 됐다”고 설명했다.

서촌은 지난날 우리네 부모의 헌신과 40~50대의 청춘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작가 박완서는 자신의 유년 시절을 단편 연작 〈엄마의 말뚝〉에 담았다. 이 연작에서 박완서의 어머니는 사대문을 지탱하는 성곽 안에서 집을 얻어 자신의 아이를 키우는 게 주요한 소망이었다. 박완서는 이 단편에서 “문밖에서 살면서 신여성이 되라는 엄마의 요구 때문에 문안에 사는 친척집주소를 빌려가면서 사직동에 있는 매동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도성 안으로 들어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회상한다. 그의 어머니는 서촌과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둔 서대문형무소 근처에 머물다 종종 인왕산에 올라 반대편 서촌을 지그시 바라보곤 한다. 결국 노력 끝에 서촌의 사직동으로 이사 오게 되자 그는 뛸 듯이 기뻐한다.

이처럼 자신의 자녀를 신여성으로 키우고자 했던 우리네 부모세대를 지나 이들의 손자 뻘인 지금의 40~50대에게 서촌은 자신의 청춘이 담겨 있는 공간이다. 당시 서울에 있는 대부분의 대학이 강북의 사대문 근처에 삼삼오오 모여 있던 시절 서촌 근처 대학을 다녔던 이들은 이 동네를 두고 ‘나의 청춘을 기억하는 곳’ ‘내가 상상했던 편안함이 이뤄지는 고향’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사직공원을 걸으며 이전에 비둘기밥을 주던 자신의 어린 시절과 사직 공원을 가로지르며 흐르던 시냇물을 기억한다. 그래서일까? 서촌 토박이들은 좀처럼 외지로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강남 열풍으로 부동산이 들썩일 때에도 자리를 지켰던 이가 많다.

“유명해지면 붕괴한다” 토박이의 ‘몸살’


▎통인동 골목에 위치한 카페와 서점의 모습. 토박이와 가난한 비주류의 예술가들이 일궈놓은 문화적 산물이 서촌 만의 매력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최근 이들 토박이의 시선에서 ‘서촌이 붕괴되고 있다’는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다. 이를테면 앞서의 홍상수적인 앵글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2012년 서촌 특유의 매력에 자본이 응답한 결과 초기자본이 유입됐다. 이후 통인동의 한 가게의 월세는 2~3년 사이에 3배 이상 훌쩍 뛰었다. 초기자본이 토지가를 올리고 인근의 땅값의 표준이 되기 시작했고, 거대자본들의 개발 바람이 들이 닥쳤던 것이다. 조용한 동네가 개발의 전쟁터가 된 결과 전쟁의 승리는 자연히 건물주, 토지주가 차지했으며, 주택임차인·상가임차인은 높아진 월세에 허덕여야 했다. ‘느림’의 서촌에 ‘빠른’ 광풍이 들이닥친 것이다.

실제로 현지 반응은 이중적이다. 건물주는 콧노래를 부르고, 그렇지 않은 토박이들은 떠날 채비를 한다. 강북 토박이 사이에서 ‘아는 사람만 알던’ 소박한 이 공간에 자본이 밀려들자 서촌 토박이 다수는 ‘서촌이 붕괴되고 있다’고 자조하기 시작했다. 왜 토박이들은 자본이 성공한 현장을 부정적으로 평했을까? 서촌의 통인동에서 나고 자란 A씨(32)는 “미용실, 정육점, 쌀가게, 세탁소가 최근 죄다 없어졌다. 동네가 뜨니까 집주인들이 월세를 올려서 다 나갔다. 결국 관광 온 사람들을 위한 카페, 식당만 넘쳐나게 됐다. 삶의 터전을 여기에 갖고 있는 사람들만 힘들다. 소수의 건물주를 제외하고는” 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효자동 토박이 B씨(58)는 최근 자신이 운영하던 세탁소를 닫아야 했다. 월세가 두 배 이상 뛰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래된 건물들이 시멘트로 새로 지어지고 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건지 모르겠다. 옛 것을 보러 사람들이 오는 건데 주민 스스로가 자꾸 없앤다”며 “토박이 중 건물주들은 광풍에 휩쓸려 새것으로 바꾸려고만 한다”며 안타까워했다. 이렇듯 ‘문화’로 떴다가 ‘문화 황무지’로 변질되고 있다는 토박이들의 우려는 일리 있는 지적일까?

2년 전부터 서촌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예술가 C씨(27)는 서촌을 찾는 이들을 ‘화전민’이라 칭하며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는 “유입된 자본을 막을 수야 없겠지만 이런 상업화에 손뼉을 쳐주는 방문객들도 문제다. 자기 취향이 없으니 우르르 유행 따라 메뚜기 떼처럼 밀려와 화전민처럼 모든 걸 다 태우고 가버린다”고 말했다.

서촌을 두고 이중적 시선이 교차하는 가운데 프랑스 출신 예술가 지아(35) 씨는 프랑스의 ‘벨빌(belleville)’의 사례를 소개했다.

프랑스의 서촌이라는 벨빌. 살롱 문화가 창궐하던 시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방가르디스트 예술가들은 그들만의 소규모 모임 장소를 필요로 했지만 재정적으로 어려웠던 이들은 그 도시의 가장 오래된 곳으로 침투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벨빌의 경우 몰려든 이민자의 억양, 정제되지 않은 분위기는 문제될 것 없이 오히려 영감의 원천이었다. 강남과 같이 계획된 도시발달 과정과는 다른, 접근성이나 편의성과는 무관한 문화적 차원에서의 이동이 이루어진 것이다.

프랑스의 ‘서촌’ 벨빌(Belleville)의 굴곡사


▎서울 토박이 동네의 변질을 놓고 “임대차 보호와 개발제한의 강화가 대자본 주도의 문화 파괴적 개발을 막는 1차 방안”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지아 씨는 “벨빌은 가격이 싼데다 다문화적 분위기를 동력으로 예술가들의 아틀리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를 신호탄으로 지금은 카페, 술집, 갤러리들이 운집하기에 이르렀다”면서 “자연히 다시 땅값이 치솟았고 벨빌 토박이들과 가난한 예술가들은 다시 짐을 싸야만 했다”고 전했다.

비단 외국의 사례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서촌의 ‘전초전’격으로 분류되는 ‘홍대앞’의 경우에서 서촌의 앞날을 점쳐볼 수 있다. 국내 유명 디자이너 프릭스 김태훈(39) 씨는 97년부터 홍대앞에서 살며 홍대앞의 문화적 흥망성쇠를 지켜본 주민이기도 하다. 그는 서촌의 앞날을 우려하며 “홍대가 고유의 특색으로 입 소문이 나기 시작하자 자본가들의 돈이 몰려들고 곧바로 대기업들이 진입해왔다”고 회상했다.

이어 그는 “특색 있는 공간을 창조해왔던 예술가와 토박이들은 자본가들의 부동산 값을 띄워주는 액세서리로 쓰이고 말았다”며 “지역 문화를 이끌어 온 소상공인들이 건물주의 횡포로 억울하게 쫓겨 나는 일은 없도록 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제도적으로 보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토박이와 가난한 예술가들이 일궈놓은 문화적 산물에 대형자본이 침투해 변질된 사례는 더 있다. 이런 변화는 1980년대 중반 대학로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대학로는 전두환 정권에 의한 공간정치 사업이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다. 정부의 주도가 아닌 토박이와 외부인의 선택으로 이런 변화가 이루어진 것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젊은이들이 흥겨운 놀이공간이나 낭만적인 분위기 등의 문화적인 이유로 특정 장소를 즐겨 찾게 되면서 부터다.

임대차 보호, 지역문화 자본 지킴이


▎통인시장 내부의 모습. 일부 주민은 서촌 열풍을 두고 “시장 안에 생필품 가게는 줄어들고 관광 온 사람들을 위한 식당만 넘쳐나게 됐다”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민주화 이후 서울에서는 정부나 기업, 투기꾼이 아닌 새로운 공간문화의 주체가 등장했고 그 욕망을 적극 추구한 결과 1990년대 초 압구정동(카페), 1990년대 중반 홍대 앞(클럽), 2000년대 초 삼청동, 2000년대 중반 부암동, 2000년대 후반 가로수 길, 경리단 길, 최근 서촌에 이르기까지 토박이 굴곡사가 거듭됐다.

이렇듯 대형자본이 유입된 결과 압구정동과 홍대앞은 집세의 상승에 따른 과도한 상업화로 젊은이들을 끌어들이던 문화적 매력과 동력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최근 서촌의 경우 통인시장에는 먹을 거리만 팔고 생필품을 파는 곳은 크게 줄었다. 서민층 주거지가 중상층 소유의 상업지로 바뀌면서 원래 살고 있던 서민층 주민과 상인들이 추방 됨은 물론 그 공간의 질도 ‘상업화(상업적 타락)’되어 본래의 문화적 가치를 잃게 되는 것이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방지할 방법은 없을까?

이에 대해 홍성태 상지대 교수는 서촌에는 지난 시기별로 상당한 변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예전에 비해 서울 곳곳에 다양한 문화 지역이 생겼지만 이런 문화적 욕망들이 단일한 경제적 논리에 포획되고 말았다”며 “탈개발주의적 가치가 박정희식 개발주의와 이명박식 신개발주의에 의해 계속 억압되고 왜곡되는 것이 문제의 근원”이라 언급했다.

이어 홍 교수는 “임대차 보호와 개발제한의 강화가 일차적 방안”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자본에 잠식되는 한편 상업화가 강화되는 것을 우려하며 “대자본 주도 파괴적 개발을 막고 지주들의 불만을 완화하기 위한 정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대 토박이’ 김태훈 디자이너는 도시개발과 관련해 지역 시민들과 소상공인들이 상생을 위한 지속적인 대화를 이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역 신문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대형자본에 밀린 특색 있는 가게들을 간접홍보해주고 이들이 재활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 글 김포그니 월간중앙 기자 / 사진 김현동 기자

201506호 (2015.05.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