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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럴 아츠의 심연을 찾아서] 글로써 세상을 그린 화가 

고흐, 다빈치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고흐, 그림에 앞서 주제와 형식에 관한 얘기를 편지로 남겨 ... 다빈치, 글로 표현된 생각을 구현하는 수단으로서의 그림에 주목

▎고흐는 30여 점에 달하는 자화상을 남겼다(왼쪽). 다빈치 스스로가 그린 유일한 자화상.
“모마(MOMA·뉴욕현대미술관)를 찾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들르는 곳이 여기다. 단일 작품으로는 미국 내에서 가장 많은 관람객을 갖고 있을 듯하다.”

맨해튼 53가 뉴욕현대미술관(www.moma.org) 갤러리 1호실. 경비 스텝이 큰소리로 던져준 말이다. 주인공은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이다. 돈 맥글린의 노래, ‘빈센트(Vincent)’를 통해서도 알려진, 그림에 무심한 사람이라도 눈에 익었을 듯한 작품이다. 지난해 모마를 찾은 사람은 전부 300만여 명. 관람객 규모 순위로 봐선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이 1위로 920만, 모마는 13위에 해당된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고흐나 피카소는 맥도널드 햄버거 같은 존재로 글로벌 문화계를 압도하고 있다. 특히 고흐는 명화 복제용 화가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고흐는 생전에 800여 개의 유화와 1200여 장의 데생을 남겼다. 이 가운데 팔린 그림은 단 한 점에 불과하다. 숨지기 6개월 전에 벨기에 브뤼셀에서 팔린 유화 <붉은 포도밭(La Vigne rouge)>이다. 생전과 생후에 나타난 이 같은 모순을 하늘나라의 고흐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뉴욕에 처음 들르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문화 여정은 극히 간단하다. 자유의 여신상,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견학은 워밍업, 애피타이저에 해당한다. 최근에는 9·11 기념관도 추가됐다. 이어 메인 디시로, 메트로폴리탄 뮤지엄과 모마 나아가 브로드웨이의 뮤지컬이 필수다. 하렘의 재즈나 메트로폴리탄의 오페라도 있지만, 시간·돈 그리고 특별한 교양과 관심을 필요로 하는 메뉴들이다. 모마의 갤러리 1호실은 뉴욕 명소 하이라이트라 하겠다. 파리 루브르의 모나리자라고 보면 된다. 모마보다 두 배 이상의 관람객을 끌어모으는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이 있지만(2014년 기준 620만 명) 특별한 ‘스타’가 따로 없다. 볼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단 하나만의 최정상 작품을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고흐 그림만 해도 무려 20여 점이 걸려 있다. 그 같은 과정 속에서 모마 스스로가 간판으로 내세우고 있는 <별이 빛나는 밤>이 독보적 위치에 오르게 된다.

갤러리 1호실은 바깥쪽 입구부터 이미 터져 나간다. 그림은커녕, 액자의 흔적도 보기 어려울 지경이다. 미국은 민주주의의 대형(大兄)이다. 그 같은 이념에 걸맞게 그림 앞에 안전선도 없다. 루브르 모나리자처럼, 10여 명의 경비원과 5m 안전선에 의해 보호되는 명화라는 개념이 없다. 직접 손을 대지 않는 한, 10㎝ 눈앞에까지 다가가 감상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림 주변은 사람과 카메라가 뒤엉켜 있다.

고흐의 편지를 분석하는 사람들


▎1. <별이 빛나는 밤>에 관한 구상을 밝히는 고흐의 편지. / 2. 고흐가 정신병원에 입원해서 그린 <별이 빛나는 밤>.
이곳을 동대문시장 판으로 만드는 최대의 요인은 중국인에 있다. 일제 대형 카메라를 들고 찾아온 중국 관광객의 행렬이다. 지난해 뉴욕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1220만 명이다. 그중 중국인은 74만 명으로 가장 많다. 이들은 모마를 찾는 순간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으로 달려간다. 고흐의 유명세도 있겠지만, 중국인 입장에서 볼 때 ‘특별한 의미’를 갖는 화가이기 때문이다. 현재 글로벌 명화 복제 대국은 중국이다. 벽에 걸린 짝퉁 명화의 대부분은 중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 속의 세계다. 따라서 명화 복제용 화가 1위인 고흐를 엄청나게 싼 가격으로 재 창조해내는 곳도 바로 중국이다.

필자의 판단이지만, 예술은 독식의 대상이다. 정치나 운동처럼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닥에 울리는 자신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혼자서 오감을 총동원하면서 세심하게 느끼는 것이 예술의 세계다. 고흐에 대한 중국인들의 특별한 애정 때문이겠지만, 폐관 시간이 가까워져도 빈틈이 없다. 주변을 빙빙 돌며 기회를 노리던 중 구석에 앉아 뭔가 열심히 기록하는 20대 중반의 백인 여성을 발견했다. 2시간 전에 왔을 때도 고흐 그림을 쳐다보면서 뭔가에 열중하던 사람이다. <별이 빛나는 밤>이 관람객들에게 가려져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텐데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이상하다. 옆으로 다가가 무엇을 하는지 슬쩍 살펴봤다. 만년필로 채워진 긴 글과 인물 데생이 눈에 들어온다. 프랑스어다. 필자처럼 혼자만의 시간을 기다리는지, 모사를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사람들로 가려진 <별이 빛나는 밤>을 열심히 보는지, 두 시간 이상 뭘 그렇게 열심히 쓰는지에 대해 물어봤다.

“주변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는 중이에요. 부모, 친구, 직장 동료들 말이에요. 아메리카 대륙을 여행 중이지만, 고흐 그림을 만날 때마다 꼭 근처에 앉아서 편지를 씁니다. 얼굴 데생은 내가 보낼 사람의 모습이고요. 일기라고 봐도 좋을지 모르겠어요. 그림 자체가 아니라, 고흐가 그림을 그리기 전후에 쓴 편지를 음미하려고 여기에 왔어요.”

프랑스 니스에서 관광통역원으로 일한다고 한다. 인터넷을 통하면 고흐가 그림을 그릴 전후에 쓴 편지 내용을 간단히 알아낼 수 있다는 정보도 알려줬다. 고흐 편지만을 모아 분석하는 웹사이트가 유럽에 10여 개 가까이 된다고 한다. 그림이 아니라, 편지를 통한 고흐 순례로 느껴진다.

필자 개인의 체험을 말하자면, 모마의 <별이 빛나는 밤>은 인간 고흐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 첫 번째 계기가 됐다고 회고해본다. 좀 더 부연 설명하자면, 자신이 믿고 추구하는 삶에 모든 것을 건, ‘아름다운 신념’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 출발점이다. 그러나 그 같은 단초(端初)는 고흐가 표현한 그림 그 자체에서 얻어낸 것이 아니다. 고흐가 남긴 편지를 통해 발견해낸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명화 <별이 빛나는 밤>과 관련된 편지를 읽으면서 인간 고흐의 진면목과 세계관을 알게 됐다. 화가로서의 고흐가 아니다. 무려 884통의 편지를 남긴 문장가, 문학가로서의 고흐의 흔적이 ‘아름다운 신념’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 계기다.

정치가는 입으로, 학생은 공부로, 군인은 행동으로, 연인은 사랑으로, 화가는 그림으로 자신의 세상을 펼쳐나간다. 필자에게 고흐는 화가에 그치지 않는다. 화가를 넘어선, 보다 근본적인 삶의 지표를 제시하는 인생의 길라잡이로 해석된다. 프랑스 여성에게 고흐를 대하는 필자의 생각을 전해주자 오랜만에 동지를 만났다며 반가워했다.

정신병동에서 그려진 <별이 빛나는 밤>


▎뉴욕현대미술관 갤러리 1호실 내 고흐의 그림을 감상하는 인파
<별이 빛나는 밤>은 1889년 6월 중순에 완성됐다. 고흐는 그림 제작을 전후해 자신이 의도하는 주제와 형식에 관한 얘기를 편지로 남겼다. 그림에 임하는 자세를 동생인 테오(Theo)나 주변의 몇 안 되는 지인에게 전했다. 테오에게 보낸, 1889년 6월 17일 편지를 보자.

“나는 지금 올리브 나무를 볼 수 있는 풍경을 접하고 있다. 그리고 별이 빛나는 하늘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최근에 고갱과 베르나르(Bernard)의 그림을 본 적은 없지만, 두 가지 부분(올리브 풍경과 별이 빛나는 하늘)에 관한 내 생각은 (그들의 화풍과) 비슷할 것이라 믿는다…. (네가) 두 가지 부분에 관련된 그림과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소나무를 본다면 내가 말로 표현하려는 것들 이상의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고갱·베르나르와 함께 그 같은 느낌을 이미 토의한 적이 있지만, 로맨틱하거나 종교적인 부분과 무관하다는 것을 밝혀둔다.(…) (그림의 구성은) 컬러나 스타일 측면에서 드라크로와(Delacroix)의 화풍을 참고로 했을 뿐, 정확한 묘사에 관한 부분은 스스로의 방식으로 행했다. 파리의 교외가 아니라, 자연 그 자체인 시골의 순수함을 표현한 그림이라 보면 될 것이다.”

인생 전체를 통틀어 고흐의 편지 상대는 10명 내외다. 동생 테오와 여동생 윌(Wil)을 포함한 가족, 친구인 고갱·베르나르·라파드(Anthon van Rappard)가 전부다. 고흐는 네덜란드어·프랑스어·영어에 능통했다. 친척은 네덜란드어, 친구들은 프랑스어로 소통했다. <별이 빛나는 밤>에 관한 편지는 네덜란드어로 된 것이다. 언제나처럼 작은 데생을 편지 마지막 부분에 그려 넣어 이해를 돕고 있다. 고흐는 화가로 전업한 27세부터 숨지는 37세까지 10년 동안 전적으로 동생 테오에 의존해 살았다. 수입은 제로다. 동생은 결코 부자가 아니었다. 고흐 편지의 대부분은 생활비에 대한 얘기와 테오가 보내준 돈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메워져 있다. 파리에서 그림 중개상을 하는 동생에게 자신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알리면서 그림 제작에 들어갔다. 형의 그 같은 생각과 편지에 대해 테오는 단 한 번도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지 않았다. 고흐의 그림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파리에서 어떤 화풍이 유행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전달했다.

<별이 빛나는 밤>에 관한 구상은 초기 단계에서부터 테오에게 전달됐다. 1889년 6월은 고흐가 프로방스 정신병동(Saint Remy de Provence)에 자진 입원해 있던 시기다. 1888년 12월 23일 고갱과 다툰 뒤, 자신의 귀를 자른다. 이후 정신분열 증세가 심해진다. 1889년 5월 8일 정신병동에 찾아간다. <별이 빛나는 밤>은 입원 중이던 병실 2층 동쪽 창문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당시 병원측은 1층에 고흐를 위한 화실을 제공했다. 자신의 병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은 금지했지만, 데생은 허용됐다. 따라서 <별이 빛나는 밤>은 직접 보고 그렸다기 보다, 1층에 내려가 기억에 의존하면서 제작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정신병동에 입원한지 15일 뒤인 1889년 5월 23일, 고흐는 병실 안에서 본 바깥모습에 대한 생각을 테오에게 알린다.

“비록 두꺼운 유리창이 가로 막혀 있지만, 나는 밀밭으로 둘러싸인 풍경을 눈앞에 하고 있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태양이 그 영광을 과시하듯 밀밭을 뚫고 솟아오른다.”

인상파 화가들이 연작 시리즈에 주목한 이유


▎1889년 겨울 고흐가 정신병원 창문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을 그린 그림.
19세기 말 파리의 인상파 화가들은 연작 시리즈에 주목했다. 같은 소재나 주제지만, 다양한 앵글이나 다른 분위기로 표현하는 작품이다. 연작 시리즈는 소비자가 다수 존재한다는 의미다. 시간도 줄이고 돈도 벌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슷한 그림을 양산한다. 고흐는 그 같은 분위기를 동생을 통해 알게 된다. 고흐 자신이 돈을 벌기 위해 연작 시리즈에 주목했을 것이라고 생각지 않지만, <별이 빛나는 밤>은 유화와 데생을 포함해 전부 20종류의 시리즈를 갖고 있다. 모마의 작품은 그중 가장 유명하다. 1889년 6월 25일, 고흐는 부분적으로 끝낸, <별이 빛나는 밤>에 대한 자신의 소회를 테오에게 이렇게 전한다.

“내가 생각하는 유일한 것은, 밀밭과 (하늘로 치솟은) 사이프러스 소나무를 가까이서 보는 것이 정말 가치가 있다는 사실이다. (…) 지금까지 내가 그린 그 어떤 작품보다도 밝고 노란 빛깔의 밀밭을 눈앞에 두고 있다. 사이프러스 소나무가 나의 뇌리 속에 꽉 차 있다. 내가 해바라기를 그릴 때와 같은 기분으로 (밀밭과 소나무를) 다루고 싶다. (밀밭과 소나무는) 마치 이집트의 오벨리스크 태양탑처럼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 편지를 보면, 프로방스 자연을 대하는 고흐의 정열이 너무도 선명하게 와 닿는다. 필자는 고흐가 삶에 대해 강한 애착을 갖고 있었다고 확신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다고 느꼈기에 삶에 대한 욕구가 그 누구보다도 강했으리라 판단된다.

“나는 힘이 다시 솟아오르는 것을 느낀다. 앞으로 어려움이 있지만, 나는 다시 일어설 것이다. 나는 연필을 깎고 다시 한번 그림에 도전할 것이다. 그 순간 내 인생이 새롭게 변해온 것처럼 느껴진다.(1880년 9월 24일. 테오에게)”

고흐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확신한 인물이다. 그 같은 사랑을 위해 자신의 영혼을 바친 신념의 화가이기도 하다. 삶에 대한 강렬한 욕구는 바로 정신적 만족을 확대하려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다. 사랑으로 채워진 정신이라는 목적을 구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생존이다.

“여러 가지를 전부 사랑하는 것이 좋다. 그것이 진짜 힘이 될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하고 많은 것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사랑으로 이뤄진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1883년 3월 테오에게)”

“만약 우리가 정직하게 산다면, 아무런 문제 없이 잘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슬프고 실망스럽고 잘못된 일을 저지를지도 모르지만, 마음을 항상 곧게 갖게 나아가는 것이 좋다.(1885년 7월 테오에게)”

“사랑은 언제나 어려움을 낳을 뿐이다. 그러나 (사랑의) 중요한 점은 엄청난 정열을 만들어준다는 부분이다.(1884년 3월 테오에게)”

“어떤 사람의 영혼이 불처럼 뜨겁다 해도 그 누구 하나 (뜨거운 영혼에 의해) 따뜻해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지나가다가 굴뚝 위로 솟아오르는 연기만 볼 뿐 무심하게도 그냥 지나간다.(1880년 6월 테오에게)”

꿈과 감동은 고흐의 예술세계를 지배한 두 개의 키워드다. 적극적으로 느끼면서 배우고 익히는 자세로 세상을 살아간다. 작은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했기에 스스로의 정신상태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살이라는 극단적 행동에 나섰는지 모르겠다.

“나 스스로에게 선언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하늘의 별은 항상 나에게 꿈처럼 와 닿는다.(1888년 7월 테오에게)”

“우리 인생의 좌표가 될지도 모를 마음속의 작은 감동을 잊지 말자. 무의식적이지만, 그 같은 감동에 의해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1889년 7월 테오에게)”

“나는 스스로가 실행할 수 있을 때까지 (내가) 모르는 것을 계속해서 배워나갈 것이다.(1885년 9월 테오에게)”

<별이 빛나는 밤>의 시점은 아침 5시경


▎프로방스에 머물던 고흐가 우체부 로린의 부인과 어린 자식을 모델로 한 그림 <로린과 자식>.
<별이 빛나는 밤>이 그려진 구체적인 시간대는 대부분의 사람이 오해하기 쉬운 부분이다. 밝은 별과 함께 둥근 달이 환하게 그려진 것을 보면, 어두운 심야에 그려진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고흐 전문가들은 <별이 빛나는 밤>이 아침 태양이 떠오르기 직전의 모습이라 진단한다. 프로방스의 6월 중순의 일출은 아침 5시50분쯤에 이뤄진다. 고흐의 병실 창문을 통해 아침 5시 정도 시간대의 모습이 <별이 빛나는 밤>의 풍경이다. 천문학자는 고흐가 그림을 그릴 당시의 달은 보름달이 아니라, 초승달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심야가 아닌, 새벽녘인데도 별이 엄청나게 빛난 것은 사실이었다고 한다.

<별이 빛나는 밤>은 고흐가 세상을 뜨기 1년 1개월 전, 즉 숨지기 400여 일 전에 완성된 그림이다. 아를(Arles)에서 그린 것과 같은 한밤중의 작품이 아니다. 400여 일 뒤에 닥칠 비극적인 죽음이 아니라, 사랑과 감동으로 채워진 아름다운 신념이 그림 속에 투영돼 있다.

<첫걸음(The First Step)>은 800여 점에 이르는 고흐의 그림 가운데 가장 성스럽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1890년 1월 완성된 작품으로,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전시돼 있다. <첫걸음>을 접할 때마다 느끼지만, 착한 사람은 왜 일찍 저세상으로 떠나가는지에 대한 아쉬움이 묻어난다. 막장 세상에 관한 뉴스가 넘칠수록 마치 부적을 이마에 붙이듯, 고흐의 <첫걸음>을 머리에 떠올린다. 밭을 갈던 아버지가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자식에게 팔을 벌리는 모습이다. 어머니는 똑바로 서서 앞으로 걸어 나아가려는 아이를 뒤에서 지지해주고 있다. 철저한 보호가 아니라, 스스로 걸어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모습이다. 어린 자식은 오른손을 들어 아버지에게 걸어가려고 한다. 엷은 파스텔톤으로 그려진 <첫걸음>에는 자식을 통한 가족의 행복이 화폭 전체에 담겨 있다.

21점에 달하는 밀레 그림을 모사한 고흐


▎1. 고흐가 동생에게 보낸 밀레의 <씨뿌리는 사람>에 관한 모사 구상. / 2. 밀레의 <씨뿌리는 사람>을 모사한 고흐의 그림. 고흐는 밀레의 화풍과 그림의 주제 모두를 존경했다.
땀을 흘리는 신성한 노동을 통한 가정이란 느낌도 충분히 와 닿는다. 21세기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세속적 가치와 전혀 무관한, 지난 세기 중반까지 한국인이 중요하게 여기던 삶의 의미와 이상이 <첫걸음>이란 고흐의 명작 속에 고스란히 배어있다.

1890년 1월은 고흐가 세상을 떠나기 6개월 전이다. 어린이를 중심으로 한 그림은 고흐의 일관된 테마이기도 하다. 생의 마지막까지 어린이를 주제로 한 그림에 집중한다. 1889년 9월 19일, 고흐는 <첫걸음>에 관한 구상을 동생에게 전한다. “나는 (근처) 학교에 밀레의 작품을 걸어두고 싶다. 밀레가 남긴 좋은 그림을 보면서 화가가 되기를 원하는 어린이도 나타날 것이다.”

<첫걸음>은 밀레의 그림을 모사한 것이다. 고흐는 무려 21점에 달하는 밀레의 그림을 모사한다. 고흐는 모사를 작곡가의 음악을 재생하는 지휘자의 재 창조로 해석했다. 같은 소재라도 다르게 표현하면서 다르게 느끼게 만드는 식이다. 농민과 자연에 주목한 밀레는 고흐의 우상이기도 하다. 밀레는 고흐의 화풍에 큰 영향을 준다. 고흐는 정식으로 미술공부를 한 적이 없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천재화가는 더더욱 아니다. 새로운 것에 민감하게 대응하면서 스스로 배우면서 갈고 닦는 노력형 캐릭터다. 감동을 일으킬 만한 주제나 화풍을 접할 경우 곧바로 흡수한다. 고흐는 밀레의 화풍만이 아니라, 테마에도 주목한다. 밀레가 그린 <첫걸음>은 마리아에게 달려가는 어린 예수를 염두에 둔 작품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림을 그릴 것이다. 삶의 따뜻한 유대감을 최대한 그림 속에 투영시킬 것이다.” 1858년 <첫걸음> 제작에 들어갈 당시 밀레가 남긴 말이다. 테오는 밀레의 작품을 사진으로 찍어 보낸다. 고흐는 사진 속의 밀레 작품을 보면서 모사한다.

고흐가 밀레의 <첫걸음>에 주목한 가장 큰 이유는 동생의 부인 죠(Jo)에서 비롯된다. 1889년 10월, 테오는 형에게 죠의 임신 사실을 알린다. 10월 25일, 고흐는 답장을 보낸다.

고흐와 다빈치의 공통점, ‘Van’과 ‘Da’


▎고흐가 임신한 동생 부인을 위해 만든 작품 <첫걸음>.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엿보인다.
“죠가 임신했다고 말했지만, 아마도 너는(테오) 지금쯤 아주 기쁜 마음으로 지낼 듯하다. 죠의 임신은 자연의 풍경보다도 한층 더 흥미롭고 중요하겠지.” 고흐의 <첫걸음>은 죠의 출산에 즈음한 축하 선물이라 볼 수 있다. 평소 존경하던 밀레의 그림을 통해, 어린 예수와 같은 새 식구를 맞이하기 위한 신성한 의례일 듯하다. 테오는 형의 생각과 배려에 대해 깊이 감사한다. 정신병동에서 생활하는 형이지만 격려하고 고맙다고 전한다. “형이 그린 밀레의 모사는 최고의 작품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1890년 5월 3일, 테오가 고흐에게 보낸 편지다. 고흐가 세상을 뜨기 2개월 전이다.

37세 인생의 고흐를 생각하면, 그와 너무도 비슷한 인생을 살아간 또 다른 예술가를 떠올리게 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다. 비슷하다고 말한 근거로, 먼저 이름에서 비롯된 ‘공통분모’가 떠오른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중간에 있는 ‘Van’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이름 가운데의 ‘Da’가 갖는 공통점이다. Van과 Da는 상류층은커녕 안정된 집안이나 직업과는 거리가 먼 이름이다. 영어의 ‘of’에 속하는 접속어로, ‘폰(Von)’과 ‘드(De)’에 대립되는 이름이 Van과 Da이다. 프로이센을 통일한 명재상 비스마르크의 풀네임은 ‘오토 폰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부(代父)로 불리는 메디치의 원래 이름은 ‘로렌조 드 메디치(Lorenzo de Medici)’다. 이름 중간에 Von이나 De가 아닌, Van과 Da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밑바닥 인생이다. 출신 배경 자체가 이미 돈, 권력과는 무관한 사람이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근본적 한계에서 벗어나려 애썼지만, 생전에는 ‘많고 많은 그들 중 한 명’에 불과했다. 경제·사회적으로 궁핍하게 생활하면서, 따뜻한 박수 한 번 받아보지 못한 인생들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으로 내세울 수 있는 두 번째 근거는 기록이다. 둘 다 모두 엄청난 기록광이다. 고흐가 편지라고 할 때 다빈치는 그 유명한 노트다.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볼 때, 다빈치는 전부 1만3천 쪽에 달하는 노트를 남기고 있다. 15세기 노트라는 것은 지금처럼 튼튼한 제본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엉성하게 얽혀져 있기 때문에 다빈치가 남긴 노트는 여기저기 분산된다. 가끔씩 다빈치 노트 중 일부가 유럽 도서관에서 발견됐다는 뉴스가 전해지지만, 앞으로도 다빈치 노트의 발견이나 발굴은 계속될 것이다.

앞서 고흐를 문장가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해석했지만, 다빈치야말로 화가가 아니라 저술가로 받아들여지기에 충분한 인물이다. 고흐의 연구대상은 고흐 그 자신이다. 세상과 신을 대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고 발전시켜나가자는 것이 고흐 삶의 전부다. 무려 30점 이상에 달하는 고흐의 자화상은 자아발견을 위한 집념이라 볼 수 있다. 자아도취로서의 자화상이 아니다. 결혼·가정·사회생활 모든 것을 접고 프랑스 시골을 전전하며 인생의 의미를 찾아나선다.

다빈치의 경우 일생의 연구 대상은 우주 만물이다. 삶을 둘러싼 자신에 대한 고민보다 바깥세상에 대한 의문이 다빈치의 평생에 걸친 관심사였다. 다빈치는 화가로서만이 아니라, 건축·공학·해부학·군사학 심지어 패션과 요리·이벤트·기획에도 능한 인물이다. 간단히 말해 모든 것에 관심이 있고, 모든 것에 특별한 재능을 보인 천재다. 내면의 인생에 대한 연구가 아닌, 다빈치의 눈에 비친 모든 세상이 주된 관심사다.

고흐처럼 남을 모사하는 인생이 아니다. 혼자 앞서 나가면서 새롭게 개척해나가는 삶이다.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같은 그림은 다빈치가 갖고 있던 흥미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다빈치 노트는 바로 그 같은 폭넓은 세계관을 집대성한 결과물이다. <모나리자>가 아니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거꾸로 쓰는 이른바 ‘거울 문장(Mirror Writing)’에 의한 노트 작성이 다빈치의 전부다.

10여 개국에 나눠 보관된 다빈치의 기록물


▎1. 인간헬리콥터 구상이 자세하게 기록된 다빈치 노트. / 2. 팔과 어깨의 근육을 입체적으로 표현한 다빈치 그림. 그는 인체의 구조를 알기 위해 시신을 해부하기도 했다.
“역사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을 제대로 묘사하려면 먼저 원근법에 대한 이해가 확실해야 한다. 개개 인물의 동작이나 구성 요소를 전부 기억하면서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그려나가야 한다. 그림 속의 등장인물들의 말하는 모습, 웃고 싸우거나 논쟁하는 장면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행동하는 사람과 상대방, 방관자의 모습도 구별해서 정확히 묘사해야만 한다. 그 같은 모든 상황은 이동형 작은 노트에 기록하면서 기억해나가야만 한다.”

최후의 만찬에 응용된 예수 제자들의 모습을 데생으로 그리면서 기록한 다빈치 노트의 내용이다. 다빈치는 그림 자체를 위한 글이 아니라, 글로 표현된 생각을 구현하는 수단으로서의 그림에 주목했다. 그 같은 천재의 유품은 현재 영국 황실과 프랑스·스페인 등 전 세계 10여 군데에 흩어져 보관되고 있다. 1만3천 쪽에 달하는 기록물이 여기저기 갈라지면서 분산된 것이다. 1994년 빌 게이츠는 그중 일부를 3천만 달러에 구입한다. 2015년 시세로 10억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을 대표한다는 남자배우가 결혼식 도중 자신의 신부에게 손편지를 전달했다고 한다. 편지가 아니라, 손편지라는 말이 눈에 띈다. 인터넷 이메일을 염두에 두고 손편지란 표현을 썼을 법하다. 편지 쓴다는 것 자체가 드물고, 그나마 쓴다고 해도 이메일로 이뤄진 편지가 대부분이다. 간밤을 홀딱 세우며열심히 쓴, 잉크로 얼룩진 편지는 멸종 천연기념물처럼 받아들여지는 시대다.

편지·노트·일기는 자신과의 대화에 주목하는, 일종의 명상에 해당되는 것이다. 글을 통해 마음을 가다듬고 스스로의 의미와 위치를 파악하게 된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글을 쓰면서 상황을 풀어나갈 경우 무리수를 두지 않게 된다. 그러나 그 같은 방식은 이미 과거의 추억에 불과하다.

고흐와 다빈치 두 사람은 자신과의 대화에 평생을 바친 인물이기도 하다. 두 사람이 창조해낸 삶의 궤적은 고독하고도 조용하며 자신을 객관화하면서 살아간 시간들로 채워져 있다. 고흐와 다빈치에 관련된 작품 전시관은 최고의 흥행 성적을 보장하는 글로벌 이벤트다. 전 세계 웬만한 큰 도시에 가면 고흐나 다빈치에 관련된 전시가 이뤄지고 있다. 셀카를 통한 사진 찍기도 좋다. 스스로의 영혼을 따뜻하게 만들어줄, ‘자아(自我)로의 순례’쯤으로 해석하면서 찾아가길 권한다. 인간과 세상을 대하는 삶의 나침반으로서의 의미를 두 사람을 통해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1509호 (2015.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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