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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폴리탄이 사랑한 도시⑪] 스웨덴 스톡홀름 | 차갑지만 우아한 ‘북유럽의 베네치아’ 

거친 환경에서 배운 ‘평등의 가치’ 빛난다 

허정연 이코노미스트 기자
물과 숲이 풍부한 글로벌 환경수도 1번지… 인도주의적 이민정책으로 난민 수용에 적극적

▎발트해와 멜라렌 호수가 만나는 지점에 자리한 스톡홀름은 북유럽의 베네치아로 불릴만큼 아름답다. 고풍스러운 건물과 자연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도시를 사람에 비유하자면, 스톡홀름은 기품 넘치는 공주와 같다. 고상한 아름다움을 면면히 간직했지만 결코 뽐내는 법이 없다. 바다와 호수가 만나는 지점에 흩뿌려진 14개의 보석이 알알이 박혀 탄생한 도시. ‘북유럽의 보석’이 가장 화려하게 빛날 때는 여름이다. 그러나 그 빛의 진가는 춥고 어두운 겨울에 드러난다. ‘겨울왕국’ 스톡홀름의 계절은 이미 시작됐다.

스톡홀름을 처음 찾았을 때는 7월의 여름날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자랑하는 북구의 한여름은 한국의 초가을처럼 선선하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상쾌한 공기가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마치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숨 쉬는 법을 깨달은 아기처럼 행복감과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 대한 첫 인상은 그날 느꼈던 바람과 햇살의 온도와 같다. 차가우면서 따뜻하고, 낯선 듯 익숙했다. 현대와 과거가 공존하는 거리 분위기는 여느 유럽 도시와 별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건물 양식과 빈 공간을 자연스럽게 메우는 호수와 숲의 조화에서 다른 도시에는 없는 기품이 느껴졌다.

‘애틋한 연인’. 스톡홀름 사람들이 이 도시에 붙인 애칭이다. 격정적인 사랑은 끝났다. 연인을 향한 불타오르던 감정은 이제 마음속 깊이 가라앉아 추억 속을 유영할 뿐이다. 부드럽게, 천천히. 이 도시는 첫사랑의 기억처럼 강렬하진 않지만, 끝사랑의 영원(永遠)을 닮았다.

처음에는 몰랐다. 스톡홀름 특유의 묘한 분위기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어느 날 시 외곽으로 나가는 기차를 타고 창 밖의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다 비로소 깨달았다. 물그림자였다. 스톡홀름 전체를 감싸고 흐르는 멜라렌 호수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수중도시. 고요한 수면 위에 은은하게 퍼진 풍경화가 도시의 고상한 분위기를 극대화했다. 스웨덴 전역에는 9만5700여 개의 호수가 있다. 스톡홀름도 예외가 아니다. 발트해와 멜라렌 호수가 만나는 지점에 생겨난 14개 섬이 57개의 다리로 이어져 있다. 스톡홀름이 ‘북유럽의 베네치아’로 불리는 이유다. 물이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이탈리아 베네치아 못지않게 아름답다.

‘물의 도시’에는 숲도 많다. 스톡홀름 내에는 1천개가 넘는 공원과 7개의 자연보호구역이 있다. 주민의 95%가 녹지의 300m 이내에 거주한다. 스웨덴에서 가장 크고 번화한 도시임에도 2010년 유럽환경수도로 지정될 만큼 풍부한 녹지공간과 쾌적한 자연환경을 자랑한다. 특히 날씨가 좋은 여름철의 도심 숲은 ‘광합성’을 하러 나온 시민들로 붐빈다. 이때는 시내 한복판 공원에서도 비키니 차림이나 웃통을 벗은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유르고르덴 섬은 ‘도심 속 오아시스’로 불린다. 1천만㎡(약 300만 평)의 넓은 대지에 펼쳐진 이곳은 시립공원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유르고르덴은 스웨덴어로 ‘동물 정원’이라는 의미인데, 과거 왕실의 사냥터로 이용됐기 때문이다. 18세기 후반 구스타브 3세가 왕실 영지를 대중에게 개방한 후 지금까지 스톡홀름 시민의 여가 장소로 사랑받는다. 이곳에는 드넓은 숲은 물론 놀이공원, 박물관, 요트 선착장 등 다양한 시설이 갖춰져 있다. 그 가운데 하나인 스칸센은 세계에서 가장 큰 야외 민속박물관이다. 스웨덴 정부가 과거 생활사를 보존하기 위해 마을 전체를 민속촌으로 지정한 것이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150 채의 가옥을 비롯해 수공예품점, 동물원을 구경할 수 있어 가족 소풍 장소로 제격이다.

지친 일상에 위로를 건네는 피카(fika)


▎스웨덴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번씩 커피를 마시는 휴식시간을 갖는다. 바쁜 일상에도 여유를 잊지 않는 스웨덴 특유의 문화다.
‘공원 천국’인 이 도시에서도 최고를 꼽자면 스톡홀름 왕립공원이다. 규모가 크진 않지만 중심가에 위치해 가벼운 마음으로 언제든지 들를 수 있다. 공원 벤치에 앉아 바라보는 호수의 전경이 멋지다. 봄철에 특히 아름다운데,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길을 걸을 때면 이 소담한 공원에서 왕실의 향기가 느껴진다. 여름에는 각종 콘서트로 열기를 더하고, 겨울에는 스케이트장이 열려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공원을 둘러싸고 세련된 카페와 레스토랑이 늘어선 것도 내가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다. 왕립공원 근처의 노천 카페에 앉아 즐기는 커피 한잔의 여유야 말로 이 도시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다.

인구 200만 명 남짓한 스톡홀름은 스웨덴 최대 도시이지만 서울에 비하면 소박한 규모다. 그러나 카페 수만큼은 서울에 뒤지지 않을 듯하다. 번화가는 물론 조용한 골목 귀퉁이에서도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실제로 스웨덴의 1인당 연간 커피 소비량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국제커피협회(ICO)의 발표에 따르면 스웨덴 국민 한 사람이 한 해에 마시는 커피 양은 8.2㎏으로 6위를 차지했다. 우리가 흔히 “밥 한번 먹자”라는 안부 인사를 건네며 ‘밥심’을 중요시 여기듯 스웨덴 사람은 ‘피카(fika)’라고 부르는 커피 타임을 중시한다. 피카는 스웨덴어로 커피를 뜻하는 카페(Kaffe)에서 유래됐다. 카페는 종종 카피(kaffi)라고도 불리는데, 단어를 거꾸로 읽는 것이 유행하던 19세기에 카피를 거꾸로 말해 피카라고 부른 것이 시초다.

스웨덴 사람들은 수시로 피카를 즐긴다. 처음 스웨덴에 와서 친구는 물론 교수와 이웃까지 만나는 사람마다 커피를 권하던 바람에 하루에도 네댓 잔 씩 커피를 마시곤 했다. 스웨덴 사람에게 피카는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행위 그 이상이다. 그래서 친구를 사귈 때는 물론이고 데이트나 직장생활, 학교 과제 모임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바쁜 일상에서도 과감히 쉼표를 찍을 줄 아는 스웨덴 사람들의 여유와 배려가 느껴진다. 종종 문제가 풀리지 않아 끙끙대면서도 조급한 마음에 쉬지 못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조용히 다가와 피카를 제안하는 친구의 존재는 방해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작은 위로가 되곤 했다.

최근 유행하는 ‘북유럽 디자인’ 열풍의 중심지가 바로 스톡홀름이다. 수많은 패션·인테리어 디자이너가 이 도시에서 탄생했지만, 시내 풍경은 화려하기보다는 단순하고 정갈하다. 겉모습보다는 실속을 우선하는 스웨덴 문화와 닮았다. 추운 겨울 외풍을 막기 위해 지은 건물 대부분은 크고 단단하며, 창문 크기를 최소화했다. 그 가운데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시청사는 유독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왕의 섬’으로 불리는 쿵스홀멘에 자리한 시청사는 스톡홀름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1911년 스웨덴의 유명한 건축가 라그나르 오스트베리의 설계로 건설되기 시작해 12년 만인 1923년 완성됐다. 베네치아 궁전의 영향을 받아 시청 건물이라기보다는 우아한 궁전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건물 내 106m 높이의 탑에 오르면 멜라렌 호수와 어우러진 스톡홀름 시내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청사지만 시의회의 활동뿐 아니라 콘서트를 비롯한 각종 행사가 자주 열린다. 가장 유명한 행사가 바로 매년 12월 10일 열리는 노벨상 수상 축하만찬회다. 공간 중 일부는 매주 토요일마다 시민들에게 결혼식장으로 개방한다. 시청사의 최대 볼거리는 황금의 방. 1900만 개의 금박 모자이크로 장식된 화려한 벽면 앞에 서면 눈이 아찔해진다. 노벨상 수상 파티의 무도회장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시청사에서 다리를 건너면 이어지는 리다르홀멘 섬에는 감라스탄 지구가 있다. 13세기에 형성돼 ‘살아 있는 박물관’으로 불리는 감라스탄은 스웨덴은 물론 유럽 전체에서도 중세시대 모습이 가장 잘 보존된 마을로 꼽힌다. 작은 섬이지만 고딕 양식부터 바로크, 로코코 등 다양한 양식으로 건축된 고풍스러운 건물이 즐비하다. 감라스탄에는 스톡홀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인 대성당과 왕궁이 있다. 13세기에 지어진 왕궁은 1697년 화재로 큰 피해를 입은 후 오랜 공사를 거쳐 1750년경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현재는 스웨덴 왕족의 공식 집무실이자 스톡홀름을 방문하는 국빈의 연회 장소로 사용된다. 3층 높이의 건물 안에는 유명한 장인과 예술가들의 손길로 아름답게 장식된 방 1430개가 있다.

지붕에서 본 물안개 낀 중세 마을


▎건물 지붕을 걸으며 감라스탄 지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투어가 있다. 위에서 내려다 보는 중세 마을의 풍경이 아름답다.
구시가의 중심인 대광장에는 노벨박물관과 노벨도서관, 증권거래소 등 주요 명소가 들어섰다. 1776년 세워진 증권거래소의 맨 위층에는 노벨상 수상자를 뽑는 스웨덴 아카데미 본부가 있다. 역사적인 건물이 빼곡히 들어섰지만 사실 광장 규모는 아주 작다. 기념품 가게와 카페, 레스토랑이 혼재된 이곳은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겨울에는 광장을 중심으로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기도 한다.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길을 따라 마을을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중세시대에 들어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건물 지붕을 따라 걸으며 마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루프탑 투어’도 있다. 이른 아침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안개가 자욱이 깔린 중세 마을을 내려다 보면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역사가 숨쉬는 감라스탄 지구와 달리 이웃 쇠데르말름 섬은 현대적인 감각으로 중무장했다. 1990년대 후반 스톡홀름 남쪽 쇠데르말름 지역에 조성된 소포 지구는 젊고 트렌디한 뉴욕 소호 지구를 연상케 한다. 디자이너 부티크와 빈티지 숍, 갤러리는 물론 작지만 멋스러운 카페와 바가 골목골목 자리해 젊은 아티스트들이 아지트로 삼는 곳이다. 매달 마지막 주 목요일은 ‘소포의 밤’이 열려 숍이나 갤러리가 밤 9시까지 문을 열고, 곳곳에서 라이브 연주와 각종 공연이 벌어진다. 오후 5~6시면 거의 모든 가게가 문을 닫고 인적조차 드문 스톡홀름에선 놓칠 수 없는 ‘일탈’인 셈이다.

이 세련된 도시에서는 지하철역도 갤러리가 된다. 스톡홀름 시내에 뻗어있는 총 길이 108㎞의 지하철 노선은 스톡홀름만과 해협 아래를 지난다. 에스컬레이터를 타면 지하로 빨려 들어가듯 수십 미터 아래 땅속으로 들어가는데, 서늘한 공기가 밀려 올라와 무서운 놀이기구를 타는 기분이다. 아찔함도 잠시, 플랫폼에 다다르면 거대한 현대미술 작품이 눈앞에 펼쳐진다. 견고한 암반을 깎아내고 콘크리트를 칠해서 만든 벽면은 다양한 예술가들이 참여해 만든 벽화와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어 플랫폼 전체가 미술관 같다. 전 노선 100개 역 중 66개 역에서 이러한 장식미술을 볼 수 있는데, 제각각 다른 모습의 역에 내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스톡홀름에는 유난히 멋쟁이가 많다. 태생적으로 큰 키에 흰 피부, 금발머리를 갖춘 것도 한몫을 한다. 아무리 특이한 옷을 걸쳐도 뛰어난 신체 비율로 평범한 거리를 런웨이로 만든다. 한번은 길가던 또래 여성의 옷이 예뻐 눈여겨본 일이 있다. 우연히 시내 옷 가게에서 똑같은 옷을 발견하고 신이 나서 얼른 갈아입었다. 그런데 막상 입고 보니 아까 그 멋진 옷이 별볼일 없는 옷이 돼있었다. 마치 마법이 풀린 신데렐라처럼 빈 손으로 가게를 나와야 했다.

무심한 듯 세련된 ‘스톡홀름 스타일’


▎스톡홀름 지하철역 플랫폼. 다양한 예술가가 참여해 거대한 현대미술 갤러리로 변신했다.
스톡홀름이 스웨덴 유행을 선도하는 도시이긴 하지만 사실 스웨덴 사람은 유행에 크게 민감하지 않다. 자신의 개성을 살리면서도 세련된 옷차림을 잘 소화하는 탓에 이방인의 눈에 멋져 보일 뿐이다. 오히려 내가 아는 스웨덴 친구 중 상당수는 비싼 브랜드의 신상품보다 벼룩시장에서 고른 빈티지한 옷을 선호했다. 싸고, 실용적이면서도 독특한 개성을 살릴 수 있다는 게 그들의 설명이다. 꾸미지 않은 듯 세련된 멋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스톡홀름 스타일’이다. 애써 유행을 따르거나 과하게 멋을 내기보다는 청바지에 줄무늬 티셔츠처럼 소박하고 편안한 스타일을 추구한다. 제3국가의 인권이나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아 명품백 대신 에코백을 들고, 조금 멀더라도 공정무역 커피를 파는 카페를 찾는 ‘진짜 멋쟁이’가 많다.

허례허식을 싫어하고, 실용을 중시하는 분위기는 젊은이뿐 아니라 전 세대에 걸쳐 형성돼 있다. 2012년 출장 차 방문한 스톡홀름에서 스웨덴 보건사회부 장관을 인터뷰한 적 있다. 우리로 치면 보건복지부 장관쯤으로 볼 수 있다. 건물 1층에서 간단한 신분 확인절차를 거치고 건물을 올라 장관실로 향했다. 순간 건물을 잘못 찾았나 하는 착각에 빠졌다. 알록달록하게 꾸민 복도 양쪽에는 안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도록 큰 유리창을 낸 방이 여러 개 있었다. 방안 가구는 책상 하나와 벽면 책꽂이, 작은 커피 테이블이 전부였다.

복도 끝에 있는 장관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느 가정집 서재보다 소박하고 단출했다. 장관은 인사를 건네곤 직접 휴게실로 가 손수 끓인 차를 내왔다. 기자 생활을 하며 직접 차를 내온 장관은 처음 본다고 놀라움을 표하자 그는 오히려 “차 한잔 제 손으로 못 타는 사람이 어떻게 장관이 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한 나라의 장관이 스스로 하는 일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40분가량 걸리는 출퇴근길에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고 했다. 일시적인 ‘쇼’가 아니다. 내가 만난 장관뿐 아니라 많은 스웨덴 정치인과 공무원이 ‘자출족(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이다. 스톡홀름은 자전거를 타기 좋은 환경이기 때문이라는 게 명쾌한 이유다. 덕분에 스톡홀름 의원회관 앞 자전거 보관소는 늘 만원이다. 주차장 자리가 듬성듬성 빈 것과 상반된 모습이다.

유학을 다녀간 지 4년 만에 스톡홀름을 찾았을 때가 11월이었다. 당시 만나는 사람마다 “왜 하필 지금 왔느냐”고 진심으로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그렇다. 스톡홀름, 아니 스웨덴의 11월은 최악의 달이다. 북유럽 나라답게 짧은 여름을 보내고 나면 이미 최저 기온이 영상 1~5도 수준으로 뚝 떨어진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으슬으슬하게 추운 날씨가 반복된다. 차라리 12월은 눈이 내려 바깥이 좀 더 밝을뿐더러 크리스마스 휴가라도 있으니 견딜 만한데, 11월은 그야말로 1년 중 우울함이 절정에 달하는 계절이다. 11월 한달 동안 일조시간을 합해봐야 17시간 남짓이다. 하루 평균 40분이 채 되지 않는 셈이다. 오후 2~3시경 잠깐 밝아지나 싶으면 이미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다. 학생 시절 오후 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갈 때면 한밤중처럼 깜깜해져 밖을 나가기가 두려울 지경이었다. 스웨덴의 겨울은 추위가 아닌 어둠 때문에 가혹하다. 반면 여름에는 백야 현상으로 밤 10시가 넘도록 해가 지지 않는다. 커튼 사이로 햇빛이 들어오는 통에 잠을 설치기 일쑤다.

극과 극을 오가는 계절을 나는 스웨덴 사람들은 그래서 날씨에 민감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창가에 붙은 온도계를 확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지만 유난스럽진 않다. 추우면 추운 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더울 일은 거의 없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기온이 영하를 밑돌던 어느 겨울 날이었다. 집을 나선지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볼이 얼얼해지는 강추위였다. 그런데 주택가 곳곳에 아기를 태운 유모차가 나와 있었다. 일조량이 적은 탓에 이곳 사람들은 잠깐이라도 해가 나면 아무리 추운 날도 집밖으로 나간다. 갓난아기도 예외는 아니다. 적당한 추위가 아이의 면역력을 키우는데 좋다고 여긴다. 어지간히 추운 날이 아니고서야 거리 요람에서 담요로 꽁꽁 싸맨 채 곤히 자고 있는 아기를 볼 수 있다.

하루에 40분 해가 뜨는 스톡홀름의 11월


▎스웨덴 부모들은 추운 날씨가 면역력을 기르는 데 좋다고 여긴다. 북유럽 나라에서는 어린 아이도 방한복을 입고 추위를 즐긴다.
스웨덴 사람은 낯을 많이 가린다. 버스에 올랐는데 한 사람이 타고 있다면 그 사람과 될 수 있는 한 멀리 떨어진 좌석부터 앉는 게 일반적이다. 만약 너무 가까운 곳에 앉으면 대개 ‘무섭다’는 반응을 보이며 자리를 피하기 일쑤다. 낯선 이에게 먼저 말을 거는 일도 좀처럼 없다. 스웨덴에 살면서 나는 큰소리로 말하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스웨덴어는 높낮이가 다양해서 얼핏 노랫소리로 들린다. 조용조용하게 리듬을 타며 대화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마치 일부러 볼륨을 줄인 오디오를 듣는 기분이다. 스웨덴인이 말하는 스웨덴인은 태생적으로 부끄러움이 많고, 타인과의 적당한 거리를 중요시한다고 했다.

스톡홀름 시내 아파트에 살던 리드그렌 가족은 5년 전 외곽의 주택가로 이사를 왔다. 주변에 30여 가구가 옹기종기 붙어사는 전원마을이다. 그런데 이 가족이 마을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집에 초대하기까지 2년 넘는 시간이 걸렸다. 미국에서 산 적 있는 이 부부는 “우리가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고, 개방적인 편이라 일반적인 경우보다 이웃과 친해지는 시간이 빨랐다”고 설명했다.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사는 이웃이라도 친해지기까지는 보통 4~5년이 걸리는 게 일반적인 스웨덴 사람의 모습이다. 때로는 아예 모른 채 평생을 살아가기도 한다. 스톡홀름과 같은 대도시는 예외지만 인구밀도가 낮은 이 나라에선 이웃의 존재조차 낯선 지역도 많다. 만약 스웨덴에 살며 이웃이 집으로 초대한다면 얼른 응하고 봐야 한다. 좀처럼 오지 않는 기회이니까. 물꼬를 트긴 어렵지만 한번 친해지고 나면 한 가족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표현에 서툴지만 누구보다 깊은 정을 지닌 민족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춥고, 어두운 날이 많고, 집 밖에 나가도 놀 거리가 거의 없는 환경에 사는 덕분인지 남녀 구분 없이 가정에 충실한 모습이다. 늦어도 오후 5시가 되면 온 식구가 한자리에 모인다. 우리나라에선 최근에서야 각종 요리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지만 스웨덴에서 요리는 이미 오래된 ‘국민 취미’다. 오죽하면 베스트셀러는 대부분 요리책이 점령한다. 집안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인테리어에도 굉장히 신경을 쓴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북유럽 인테리어가 인기를 끌게 된 데는 스웨덴 사람들의 ‘방콕’ 기질이 한몫을 했다. 흔히 북유럽 인테리어는 심플한 흰 벽에 벽지나 가구로 포인트를 주는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하나 빠진 것이 있다. 바로 조명이다. 겨울에 오후 3~4시면 해가 지는 스웨덴 가정에선 형광등 대신 은은한 조명과 촛불을 켠다. 창가는 물론 거실, 침실, 화장실까지 온통 양초를 놓는다. 처음 스웨덴 가정에 초대받아 갔을 때 나를 위해 깜짝 이벤트를 준비한 건가 착각할 정도로 집안 전체가 촛불로 일렁여 놀란 적이 있다. 함께 간 프랑스인 친구는 “이 집에 누가 죽기라도 했어? 누가 불 좀 켜줘”라며 농담할 정도였다. 밝은 형광등 불빛 아래에선 촛불 하나가 별 힘이 없지만 칠흑같이 어두운 겨울날 집안에선 온기를 더하는 일등공신이다.

난민에 자국민 수준의 복지혜택 제공


▎연말이면 감라스탄 지구 대광장에서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린다. 노벨박물관, 증권거래소 등 역사적인 건물이 많다.
최근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내전과 빈곤을 피해 유럽으로 향하는 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스웨덴은 이미 오래전부터 적극적인 난민수용정책을 펼치고 있다. 특히 시리아를 비롯한 중동 지역 출신의 난민이 많다. 난민이라 하더라도 자국민 수준의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고, 인종 차별이 없어 스웨덴 난민 신청을 하는 사람은 나날이 늘고 있다. 이민자 대부분은 그나마 일자리가 많은 스톡홀름에 모여든다. 특히 최대 번화가인 드로트닝가탄 거리를 걸을 때면 ‘이 도시에 정말 다양한 민족이 살고 있구나’라는 사실에 새삼 놀라곤 한다. 그동안 스스로를 국적이나 인종에 대한 편견이 없는 사람이라고 믿어왔다. 자만이었다. 나를 반성하게 한 사람은 스톡홀름에서 만난 이라크 출신 이민자였다.

스톡홀름에서의 짧은 여행을 끝내고 원래 살던 지역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는 날 아침이었다. 숙소에서 기차역으로 가는 버스 시간표를 확인하고 나왔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차가 오지 않았다. 알고 보니 평일 시간표를 잘못 본 것이었다. 버스는 오지 않고, 기차 시간은 다가왔다. 다급한 마음에 큰 길로 나가 무작정 히치하이킹을 시도했다. 인적이 드문 도로에 그나마 보이는 차들마저 무심하게 나를 지나쳤다. 이웃과 친해지는데도 수년이 걸리는 사람들 아닌가. 낯선 이에게 차 옆자리를 내어줄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거의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 낡은 차 한 대가 내 앞에 섰다. 커피색 피부에 턱수염을 기른, 아마도 이름이 모하메드일 것 같은 중년의 남자가 타고 있었다. 내 사정을 들은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차에 타라고 말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두려운 감정이 번뜩 스쳤다. ‘혹시 테러리스트 출신은 아닐까. 납치라도 당하면 어쩌지?’ 먼저 거리에 뛰어들어 차를 잡은 사람은 난데 우습게도 걱정이 앞섰다. 만약 금발의 백인이었다면 그런 의심은 애초에 들지 않았으리라.

알고 보니 그는 기차역과 전혀 다른 쪽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도 날 위해 기꺼이 방향을 틀어줬다. 내전을 피해 이라크에서 온 그는 작은 호텔에서 청소일을 한다고 했다. 백미러에 붙은 가족 사진과 뒷좌석에 굴러다니는 장난감을 보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 20분 남짓 걸려 무사히 역에 도착한 나는 고마운 마음에 얼마 안 되는 돈을 쥐어주려 했다. 그는 돈을 받으려고 한 일이 아니라며 한사코 거절했다. 너무 미안하던 차에 전날 산 사탕 봉지가 생각났다. “그럼 이거라도 딸에게 갖다 주세요.” 그제서야 그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스웨덴은 유럽에서 독일과 프랑스 다음으로 가장 많은 난민을 받고 있다. 지난 5년간 23만 명에 달하는 난민이 스웨덴으로 들어왔고, 지금도 스톡홀름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난민캠프 설치가 한창이다. 한 해에도 수만 명의 난민을 받는 스웨덴 내에서도 이민정책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가뜩이나 얼어붙은 경제 상황 속에서 이민자에게까지 무상의료·교육 등 각종 복지 혜택을 주는 것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여전히 국민 대다수는 이민정책을 시행하는 것이 옳다는 입장이다.

‘보통사람들’이 사는 특별한 도시


▎바사호 박물관에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전함이 전시돼 있다. 출항 직후 침몰해 보존 상태가 훌륭하다.
국가나 민족을 넘어서는 온정주의적 태도의 배경은 바이킹 시대로 거슬러올라가 찾을 수 있다. 춥고 척박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이들에게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 열악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콩 한 쪽도 나눠먹는 배려가 필요했다. 스웨덴어 ‘라곰(lagom)’은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게 적당한’ 혹은 ‘딱 좋은’이라는 뜻이다. 옛 바이킹의 술 문화에서 유래됐는데, 큰 사발에 술을 부어 돌려 마시던 바이킹이 다음 차례를 생각해 각자 적당히 마신 것에서 나온 말이다. 모든 것이 풍족한 상황이었다면 결코 몰랐을 깨달음이다. 라곰 정신을 계승한 바이킹의 후손들은 지금도 모든 이가 평등하게 누릴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적당히 일하고, 적당한 돈을 벌며 적당히 행복한 것이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이라면 그 정도가 ‘딱 좋다’는 것이다. 그 모두가 되는 길에 국적이나 인종은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스톡홀름 앞바다에는 기묘한 박물관이 있다. 내부에 거대한 배 한 대가 꽉 들어찬 바사호 박물관이다. 스웨덴 국력이 막강하던 17세기 구스타프 2세 아돌프왕 시대에 건조한 바사호는 독일의 30년 종교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제작됐다. 길이 62m, 높이 50m, 배수량 1300t에 달하는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전함이다. 전함이라고는 하지만 배 전체가 180개에 이르는 조각으로 장식돼 있고, 꼬리 부분은 모두 금색으로 칠해 화려한 위용을 자랑한다. 1628년 8월 10일, 1200㎡ 크기의 돛을 펼친 웅장한 전함이 437명의 승무원을 태우고 스톡홀름 항구를 출발했다. 그런데 출항과 거의 동시에 강풍을 만나 그대로 수심 32m에 가라앉았다. 이 거대한 배가 한순간에 침몰한 정확한 원인은 아직까지 미스터리로 남았다. 정부는 침몰 330여 년만인 1956년 첫 인양작업을 시도해 1961년 4월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수백 년이 흐른 지금 스톡홀름에서 바이킹의 기상을 찾긴 힘들다. 영겁의 세월을 이겨낸 바사호를 바라보며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다. 호방한 기세를 자랑하던 바이킹은 사라졌지만 거친 환경에서 배운 평등의 가치는 여전히 살아 숨쉰다.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사회에 내려오는 관습법이 있다. 일명 ‘보통사람들의 법칙’이라 불리는 ‘얀테의 법’이다. 이 법의 제 1 원칙은 ‘당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마라’는 것이다. 거꾸로 말해 모든 사람이 똑같다는 평등사상을 강조한다. 스스로 남들보다 잘나지도, 똑똑하지도 않다고 말하는 ‘보통사람들’이 만들어낸 도시, 그곳이 바로 스톡홀름이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이 사는 도시의 풍경은 그러나 결코 평범하지 않다. 길가에 자란 풀 한 포기도 화려한 궁전 못지않게 아름다워 보이는 건 스톡홀름만이 가진 특별한 힘이다.

허정연 - 경희대학교에서 사회학과 신문방송학을 전공했다. 대학 3학년이던 2007~8년 교환학생 자격으로 스웨덴 옌쉐핑대학교에서 1년간 공부했다. 학기 중에도 틈날 때마다 스웨덴 곳곳을 누볐다. 입사 후 첫 해외출장지도 스톡홀름이었다. 현재 <이코노미스트>에 북유럽 4개국 기업 이야기를 다룬 ‘스칸디나비안 파워’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다.

201511호 (2015.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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