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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폴리탄이 사랑한 도시⑬] 프랑스 파리|사랑과 열정, 예술과 낭만의 고향 

파도에 흔들려도 가라앉지 않는 빛의 도시 

홍소라 파리8대학교 한국어 강사
지난 11월 13일 테러의 참상 극복하려는 시민의 의지 굳건… 국민의 10% 차지하는 무슬림 향한 편견 심화 우려돼

▎지난 11월 13일 파리 테러에서 부상당한 시민들과 유가족 등 2천여 명이 11월 27일 파리 앵발리드 군사박물관 앞 광장에서 열린 국가 추도식에 참석해 희생자들을 추도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시민들이 두려워하고 서로를 증오하는 것이야말로 테러집단의 노림수다. 파리지엥은 더욱 긴밀히 연대하여 일상의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삶이 전개된다는 파리. 파리의 광장을 할퀸 상처는 깊지만, 치유를 시작한 시민의 다짐은 분노보다 더 강하다.

파리는 그 이름만으로도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전체 면적이라고 해봐야 서울의 6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이 작은 도시는 도대체 어떤 매력이 있어 수많은 이들을 꿈꾸게 하는가. 드가, 고갱, 빈센트 반 고흐, 피카소, 마네, 모네, 르누아르, 살바도르 달리, 헤밍웨이, F. 스콧 피츠제럴드,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 볼테르, 루소, 거트루드스타인…. 마음먹고 세보려 해도 결코 그 수를 다 헤아릴 수 없는 예술가와 학자들이 파리를 거쳐갔다. 이들에게 파리는 그저 단순히 몸을 뉘인 도시가 아니라 사랑과 열정의 둥지 그 자체였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점령 하에 있던 파리가 연합군과 자유 프랑스군에 의해 해방되기 직전, 아돌프 히틀러는 파리에 주둔한 독일군 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 중장에게 파리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콜티츠는 그러나 “나는 히틀러의 배신자가 될지언정, 파리를 불바다로 만들어 인류의 죄인이 될 수는 없다”며 상관의 명령을 거부했다. 이른바 ‘예술과 낭만의 도시’, 파리는 수십 년째 세상사람들이 가장 가보고 싶어 하는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2015년 1월 파리에서 신년맞이 행사로 개선문을 장식하며 선보인 화려한 구조의 설치미술 작품.
우디 앨런의 2011년 작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는 파리를 방문한 한 미국인 소설가가 이 도시와 진정으로 사랑에 빠지면서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가는 모습을 담은 영화다. 영화 작가 우디 앨런만의 색채와 파리의 매력을 듬뿍 담아, 보는 이로 하여금 화면 속 파리로 들어가고 싶게 만든다. 이 영화의 인트로는 말 그대로 파격적이다. 영화 시작 4분이 지나도록 관객은 배우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카메라는 영화의 배경인 파리의 곳곳을 원 없이 쫓아갈 뿐이다.

‘낭만과 예술’이라는 이름의 마법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를 하루 앞둔 지난 11월 29일 파리 에펠탑이 은은한 녹색 조명으로 행사 시작을 알리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1889년 세계만국박람회를 위해 지어져 지금은 파리의 상징이 된 에펠탑, 온갖 명품 부티크가 모여 있는 몽테뉴가, 니콜 키드만의 영화 <물랑 루즈>의 배경이 된 물랑 루즈, 세느 강 위를 유유히 지나는 바토 무슈, 가난하지만 삶을 즐길 줄 아는 예술가들의 아지트 몽마르트르, 파리지앵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카페 테라스, 햇빛을 즐기러 나온 파리지앵이 즐비한 뤽상부르그 공원, 파리 곳곳의 꽃집과 거리에서 여유로이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 콩코드 광장과 루브르 박물관 앞의 피라미드, 부르주아 예술의 상징 오페라, 세계인권선언의 장(場) 트로카데로, 파리 지식인들이 철학과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라탱 지구. 마치 스틸컷인 양 카메라가 라탱 지구에 위치한 크고 작은 영화관들을 비추면 파리에는 비가 오기 시작한다.

비가 오는 파리엔 그 비를 피해 뛰는 사람이 없다. 그저 유유히 가던 길을 갈 뿐이다. 비가 파리를 적시면 도시는 또 다른 매력을 발산한다. 마치 비가 도시를 진정한 파리로 만드는 ‘낭만과 예술’이라는 이름의 마법을 부리는 것만 같다. 비가 개면 더욱 선명해진 연둣빛의 물푸레나무와 그 나무가 비치는 연못가를 배경으로 몽소 공원을 달리는 파리지앵의 모습이 보인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면 파리는 다시 한 번 변신한다. 빛의 도시, 파리의 또 다른 이름이다. 개선문 앞에 시원하게 뚫려 있는 샹젤리제는 그 빛을 밝히고, 에펠탑도 한 시간에 한 번씩 불을 반짝여 파리의 매력을 마음껏 뽐낸다. 여기에서의 빛은 사전적 의미 말고도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와 함께 파리의 지성을 상징한다. 이렇게 도시의 풍경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미드나잇 인 파리>의 인트로는 4분이 넘는 시간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꿈을 꾸게 한다. 영화 속 파리는 환상 속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파리 역시 세계의 다른 도시와 같이 현실의 일부분이다. 그리고 현실 속에는 행복과 함께 불행도, 즐거움과 함께 슬픔도 존재한다.

2015년 11월 13일 밤 9시 30분경, 파리에 총성이 울려 퍼졌다.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테러는 13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350여 명이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순간 파리는 따뜻하고 밝은 빛을 잃었고, 슬픔과 분노가 마치 안개처럼 짙게 퍼져나갔다.

파리는 이미 한 번 테러로 인해 상처를 입은 적있다. 2015년 1월 이슬람 급진주의자 쿠아시 형제가 벌인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을 기억하는 독자들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가 무함마드를 모욕한 것에 대한 복수로 자행된 것이라면, 이번 파리 테러는 무차별적으로 더 많은 인명에 사상을 입힘으로써 프랑스 사회에 공포를 심어주는 것을 목표로 했다. 목적 달성을 위하여 IS 테러리스트들이 고른 레퓌블리크 지역은 지하철 다섯 개 선이 지나는 교통의 중심지이자 저녁 시간을 즐기려는 이들로 항상 북적이는, 말 그대로 핫(hot)한 동네 중한 곳이다.

굳이 한국과 비교하자면 홍대앞 정도 될까? 일명 ‘보보(Bobo)’ 동네. 보보는 부르주아(Bourgeois)의 ‘Bo’와 보헤미안(Boheme)의 ‘Bo’가 합쳐져 만들어진 신조어로 2000년 출간된 미국 작가 데이비드 브룩스의 책 에서 유래한 말이다. ‘보보’는 기존의 부유층을 뜻하는 부르주아와는 상당한 차이를 보여 새로운 사회 계급으로까지 구분되는데, 이는 그들이 부르주아 계급에 해당하면서도 전통적 부르주아와 다른 사상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사회를 대하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는 좌파 성향이 비교적 강하고 환경에 관심이 많은 것도 그들의 특징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번 테러가 발생한 레퓌블리크 지역은 보통의 시민들, 그중에서도 젊은 감성을 지닌 파리지앵들이 주말이면 삼삼오오 모여 식사와 음주를 즐기는 대표적인 동네다.

인간애는 공포 속에서 더 빛났다


▎테러가 발생한 11월 13일 레퓌블리크 광장을 중심으로 한 파리 시내 곳곳은 총성과 함께 패닉 상태에 빠진 시민들의 대피 소동이 이어졌다. / 사진·중앙포토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이 동네의 이름. 레퓌블리크, 바로 ‘공화국’이라는 뜻이다. 레퓌블리크 광장은 본래 동네의 작은 공터 정도의 크기에 불과했고 이름도 급수탑을 뜻하는 ‘샤토도’ 광장이었다. 그러다 1879년 이름이 레퓌블리크 광장으로 바뀌고, 광장 중앙에 공화국에 헌정하는 작품들이 대규모로 세워지면서 프랑스 공화국을 상징하는 곳으로 재탄생했다. 그 이후로 레퓌블리크 광장은 그 이름이나 역사가 지니는 상징성과 교통의 요충지라는 지리적 요건에 힘입어 여러 집회가 벌어지는 주요 장소로 기능하고 있다.

지난 1월 <샤를리 에브도> 테러 이후 있었던 자발적 집회와 대규모 행진도 바로 이곳에서 이뤄졌다. 테러리스트가 자기 조직의 위력을 보여 주고 대상에게 위협을 가하고자 한다면, 테러 장소의 상징성 또한 필연적으로 계산에 넣었을 것이다. 이것저것 따져봐도 레퓌블리크 지역은 이들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 중 최상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레퓌블리크, 프랑스 공화국은 다시금 피로 물들었다.

당시 사건 현장을 목격한 작가 장 하츠펠드는 “현장에는 그 어떤 인종혐오도, 이슬람 혐오도 없었다. 그런 것들은 테러 위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술집이나 다른 곳에서나 들리는 이야기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사건 현장에서는 타인을 살리고 목숨을 잃은 이들이 무수히 많았다. 바타클랑 공연장에서는 자살폭탄을 터뜨리려는 범인을 덮쳐 주변의 인명 피해를 막고 죽어간 시민이 있었는가 하면, 생면부지의 여성을 소파 아래에 숨겨 주고 총알을 몸으로 막은 후 죽어간 남성도 있었다.

아들과 함께 공연장을 찾았던 어머니는 아들을 온 몸으로 감싸 안아 자신은 총을 맞을지언정 아들을 살리는 것으로 삶을 마감했다. 파리 시내 테라스에 무차별 총격이 가해질 때 어떤 이는 여성 앞으로 몸을 날려 총을 대신 맞았다. 바타클랑 공연장 근처에 사는 이자벨은 부상을 입고 탈출한 남성을 집으로 데리고 와 응급조치해 그의 목숨을 살렸다. 영웅은 그곳에 있었다. 사건 직후 소셜네트워크에서는 사건 현장에서 미처 귀가하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근처의 자기 집을 열어 놓겠다는 글들이 속속 올라온다. #Porte Ouverte(문 열렸어요)를 단 글들이 바로 그것. 11월 14일 자정 직후, 이 해시태그를 단 글이 20만여 건에 달했다. 이를 통하여 몸을 피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지나가는 시민들의 차는 대중교통 운행 중단으로 집에 돌아가지 못하게 된 이들을 실어 날랐고, 택시 역시 요금과 상관없이 손님을 태웠다.

파리지앵의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 바로 이것이 사상 최악의 테러를 이겨 내기 위해 파리가 택한 방법이다. 테러 다음날부터 소셜네트워크에는 #Je Suis En Terrasse(나는 테라스에 있다)를 단 글과 사진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사진에는 카페테라스에 앉아 음료와 술을 마시며 미소 짓는 프랑스인들의 여유로운 모습이 담겨 있다. 이는 테러는 ‘우리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며, 우리는 여전히 삶을 즐기며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파리의 식당들은 테러 이후 3일간의 애도기간 종료를 기념하며 17일 화요일 저녁 시민들에게 외출할 것을 권했다. 물론 그 어떤 훌륭한 음식도 지난 13일 테러로 인한 슬픔과 분노의 쓴맛을 없애주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좋은 사람들과 즐기는 맛있는 식사, 그리고 거기에 곁들여진 한잔의 와인은 시민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줄 것이며, 충격에 빠진 사람들에게 활기를 되찾아줄 것이다.

요리 경연 프로그램으로 유명해진 한국인 입양아 출신 요리사 피에르 상도 여기에 적극 동참했다. 물론 자본주의적 마케팅이란 시선에서 이 이벤트를 바라볼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시민은 이를 #Je Suis En Terrasse(나는 테라스에 있다)의 연장선으로 바라본다. 아직 두려움이 가시지 않은 시기, 레스토랑과 바의 문을 열고 테라스에 손님을 받고 저녁과 밤의 축제를 계속하는 것 자체가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이 자행한 테러에 대응하는, 파리지앵이 택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국민에게 국기 게양 요청한 프랑스 정부


▎지난 11월 14일 파리의 한 병원 앞에서 시민들이 헌혈을 하기 위해 줄을 서 있다. 파리 시민들은 헌혈을 위해 세 시간 이상 기다리는 불편을 무릅쓰며 연대감을 과시했다. / 사진·중앙포토
파리 6구의 콩투아 뒤 를래 식당의 주인은 “저녁 9시, 우리는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길가로 나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에, 또한 그 나라의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인 관용에 건배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쇼킹한 제안을 한 남성이 있다. 방송 일을 하는 27세의 메흐디 미첼은 이슬람 급진주의 단체가 프랑스를 타락의 땅으로 보는 데에 창안하여,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그들에게 한 방 먹이자’는 뜻으로 레퓌블리크 광장에서 나체로 난교 파티를 벌일 것을 제안했다.

물론 정말로 레퓌블리크 광장에서 난교 파티가 열린 것은 아니다. 그저 테러로 인하여 끔찍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파리지앵들에게 조금이라도 웃음을 선사하려는 의도로 해본 농담이었다. 2만여 명이 페이스북에서 참가 의사를 밝혔으니 그의 의도는 일단 성공한 듯싶다. 정말이지 파리다운 저항 방법이 아닌가 싶다. 세상 그 어떤 나라의 사람들도 프랑스인처럼 삶을 즐기지는 못한다고 한다. 그 중심에 파리가 있다. 파리지앵들은 오늘밤도, 그리고 내일 밤도 어디엔가 모여 와인을 즐기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일상을 계속해갈 것이다.

재미있는 반응이 더 있는데, 테러 발생 2주일이 지난 11월 27일, 프랑스 정부는 테러 희생자 추모식을 진행하면서 프랑스 시민들에게 이날 각 가정에 프랑스 국기의 게양 요청했다. 이 요청에 파리지앵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화답했다. 프랑스를 상징하는 파랑, 하양, 빨간색의 속옷을 걸어 놓는가 하면, 세 가지 색깔의 티셔츠, 털실, 의자, CD 등 각종 소품이 등장했다. 사실 각종 공기관이 모여 있는 파리에서 삼색기를 발견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보통은 심지어 국가기념일에도 각 가정에 삼색기를 게양하는 일은 드물다.

1944년 독일의 점령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1970년 샤를 드골이 사망했을 때, 혹은 더 최근에는 1998년 월드컵에서 프랑스가 우승의 환희를 맛보았을 때 정도가 돼야 프랑스의 가정에 삼색기가 내걸렸다. 혹은 열렬한 스포츠 팬인 경우, 국가 대항전이 있을 때는 승리를 기원하며 삼색기를 달기도 한다. 1968년의 5월 혁명으로 이른바 엄숙주의가 타파된 이후, 국가 상징물은 애정의 대상이 될지언정 신성시되어 프랑스 시민의 삶 너머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국기 게양 정도는 국가에 대한 맹세와 국기에 대한 경례 등을 일상화하며 자란 대한민국 국민들의 관점에서는 어찌 보면 새삼스러울 것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프랑스 삼색기의 역사는 그리 간단치 않다. 참고로 유럽에서의 민족주의는 흔히 극우 혹은 나치와 직접적으로 연결돼 다뤄진다. 프랑스 국기의 세 가지 색은 나폴레옹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1848년 혁명주의자들은 삼색기보다는 빨간색 깃발을 선호했다. 실제로 삼색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은 우파 민족주의자들이었다. 비시 정권이 그러했고, 그 뒤를 이어 현재까지 극우 국민전선이 프랑스 국기의 세 가지 색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다.

프랑스의 삼색기는 드골주의에 반대하는 68혁명 세력으로부터 치욕을 당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프랑스에서는 특히 좌파들이 삼색기의 상징을 꺼렸다. 그렇기 때문에 좌파인 사회당 정부의 수장 프랑수아 올랑드가 이번에 삼색기에 보이는 반응이 더욱 흥미로운 것이다. 하지만 파리 시민들은 이런 소모적인 논란에 참여하는 대신, 저마다의 재치로 특유의 유머 감각을 잃지 않은 채 희생자들을 애도했다.

현재 프랑스 국민의 10%가량이 무슬림이란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프랑스 사회의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무슬림이 자신의 정체성의 근간을 종교에 두고 있다는 점은 프랑스 사회에 지금껏 적지않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라이시떼(lacité: 국가의 비종교성)’로 인한 논란을 들 수 있겠다. ‘라이시떼’는 비종교성을 뜻하며, 이는 프랑스 국가경영의 기본 이념 중 하나다. 비종교성은 원래는 카톨릭의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한 방책 중 하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북아프리카의 모로코, 튀니지, 알제리(이들 국가는 모두 이슬람 국가다)의 이민자가 프랑스 사회에 유입되면서 점차 무슬림을 타깃으로 삼기 시작한다.

‘비종교성의 가치’에 저항하는 무슬림


▎파리 시민들은 “흔들릴지언정 가라앉지 않는다”는 문구를 실천하듯 한마음으로 상처 회복에 나섰다. 11월 15일 파리의 테러 현장에는 추모 행렬이 줄을 이었다. / 사진·중앙포토
일례로 프랑스에 거주하는 무슬림 가족 중 일부가 자녀가 학교에 다니면서 히잡을 벗게 되자 종교적 신념에 어긋난다며 학교에 보내지 않기를 결정한 적이 있다. 이로 인해 종교의 자유와 비종교성의 가치가 정면으로 부딪치기에 이르렀고, 또한 십자가 액세서리는 허용하면서 히잡은 왜 안 되느냐 하는 형평성 문제로까지 논의가 발전하여 두 편이 팽팽하게 맞섰다. 결국 2004년 모든 종교 상징물의 공립학교 내 소지가 금지되었고, 2010년에는 얼굴 전체를 가리는 부르카 착용이 금지되면서 프랑스는 비종교성의 가치에 손을 들어준다.

사실 비종교성 원칙의 적용은 다른 종교에도 똑같이 적용되므로 특별히 무슬림을 차별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문제는 프랑스 사회 전반에 무슬림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이 짙게 깔려 있다는 데에 있다. 이를 이해하려면 프랑스 이민의 역사를 봐야 한다. 프랑스로의 이민 물결은 프랑스 대혁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때는 정치적인 망명으로 인한 이민이 많았다. 현재 프랑스 이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경제 이민은 1차대전을 기점으로 하여 프랑스 내 노동력 부족 및 전쟁 이후 사회 재건을 목적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주로 북아프리카의 모로코, 튀니지, 알제리 등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국가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긴 식민기간 이들 국가에서 프랑스어가 공식 언어로 교육되면서, 언어적인 소통이나 문화적인 충돌이 비교적 적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제 이민은 1945년부터 73년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하지만 1970년의 오일쇼크로 인해 프랑스 역시 경제 침체기에 접어들자 더 이상 경제적 이민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고, 프랑스 정부는 이민자들을 대폭 수용하던 정책을 변경했다. 이에 따라 1974년부터는 가족재결합을 위한 이민 이외에는 일체의 이민을 제한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프랑스에 자리 잡은 가족과 합류하기 위해 유입되는 이들의 수는 만만치 않았고, 거기다 불법체류자도 늘어나면서 프랑스 사회의 다문화 흐름은 끊이지 않고 지속됐다.

프랑스의 이민정책은 흔히 미국과 비교된다. 미국은 다문화주의를 표방하는 반면, 프랑스는 동화주의 모델을 취한다. 보통 프랑스 공화주의 통합모델이라 하는데, 이는 1789년 대혁명 이후부터 내려오는 공화주의 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공화주의 가치라 함은 제5공화국 헌법 전문 1조에 나타나는 “프랑스는 단일하고 분리될 수 없는, 비종교적이고 민주적이며 사회적인 공화국이다. 프랑스는 출신, 인종, 종교의 구분 없이 모든 시민이 법 앞에서 평등함을 보장한다”라는 문구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니까 프랑스 이민자는 출신국의 인종, 문화, 종교적 정체성을 포기하고 프랑스 사회에 완전히 통합되는 것을 요구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상이 잘 실현된다면 정말 너무 좋겠지만, 불행하게도 이민자들의 현실은 그와는 거리가 있다.

먼저 교육 부문. 북아프리카 출신 무슬림 2세 남학생의 중퇴율은 40%, 여학생은 32%에 이른다. 그중에서 알제리 출신 이주민(15세 이상)의 70.8%는 어떠한 학위도 없거나 초등학교만 졸업했고, 3.1%만이 고등학교 졸업장 정도가 있다. 참고로 프랑스 통계청에 따르면 2013년 프랑스 인구 전체에서 어떤 학위도 없거나 초등학교만 졸업한 이들은 24.3% 정도이고, 고등학교 졸업 이상은 전체의 48.5%에 해당한다.

이슬람 이민자에 대한 차별은 심각

이렇게 설명해 보면 어떨까 한다. 당장 먹고 살기 바쁜 부모는 자식 교육에 신경쓰기 쉽지 않을 것이다. 신경을 쓴다 하더라도 부모 역시 교육수준이 낮은 경우가 많고(이민을 어떤 사람이 오는지 생각해 보라!), 특히 프랑스 사회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상황이다. 결국 자녀의 사회화 과정에 부모의 역할이 극히 한정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학교에서는 프랑스를, 가정에서는 부모의 모국을 접하며 이들은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비슷한 사정의 또래집단과의 연대를 미리부터 굳건히 쌓는다. 이들의 성적은 나쁘기 마련이고, 학교에서도 교사들과 다른 문화를 지니고 있는 이민자 2∼3세는 쉽사리 인정받지 못한다. 부모는 자식들이 서둘러 직업교육을 받아 직업 전선에 뛰어들어 가정경제에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고용 부문도 그렇다. 보통 이민자 2∼3세의 높은 실업률의 주된 요인으로 낮은 교육수준을 꼽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무슬림 출신 중에는 고학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실업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 프랑스의 경우 이력서에 사진을 넣지 않는 것이 정상이다. 모델과 같이 극히 외모가 중시되는 직업군을 제외하고는 피부색, 몸매, 얼굴 등 업무와 관계없는 모든 외형적 요인이 그 사람에 대한 적법하고 명확한 판단을 방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프랑스 노동법 1132조 1항은 “출신, 성별, 관습, 성적 지향성, 나이, 가족관계, 임신, 유전적 요소, 정치적 성향, 노조활동, 종교적 신념, 외모, 성(이름), 건강 상태 및 장애 등을 이유로 고용 및 재계약을 거부하는 일체의 행위를 엄격히 금지한다”고 규정한다.

2006년 실시된 파리 1대학 사회학 교수 장 프랑수아 아마디유(Jean- Francois Amadieu)의 연구 결과를 보면 현실은 이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력서에 사진을 넣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름 및 성을 통하여 지원자의 출신을 알 수 있는 경우, 다른 나라 출신의 지원자가 ‘프랑스’ 이름 및 성을 지니고 있는 지원자에 비하여 서류심사를 통과하는 확률이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아랍 이름 및 성을 가진 지원자의 경우 서류심사 통과 확률이 5분의 1로 더 낮다.

안 그래도 교육 수준이 낮아 저임금 일자리도 찾기 어려운데, 어쩌다 고학력인 경우에도 상황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소득 수준이 낮아 자녀교육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 저학력과 저소득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속되는 상황이다. 그야말로 빈곤의 대물림이다. 그래서 이력서에 사진뿐 아니라 성명까지 기재를 하지 않도록 하는 법안이 심사 중에 있다.

다음은 주거 문제다. 이민자 가족은 보통 게토를 형성하여 살아가고 있다. 지인 및 가족이 이미 정착해 있는 곳에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것이 이주자들의 일반적인 특성이다. 이민자들은 아는 사람이 살고 있는 곳으로 모이고, 그에 따라 원래 지역 주민들이 다른 곳으로 떠나버리면서 자연스럽게 게토가 형성된다. 보통 일자리를 쉽게 구할 수 있는 파리에서 멀지 않은 교외에 밀집하여 살아가고 있는데, 이런 곳을 방리유(Banlieu)라 한다. 방리유 지역은 이전에는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다. 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이주민 노동자들이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주거 밀집지역으로 변모했다. 주거에 드는 비용이 보다 저렴한 곳을 찾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몰려든 이주자로 인해 야기된 주거공간의 부족을 타개해보고자 프랑스 정부에서는 1949년부터 72년까지 약 100만 세대의 공공주택을 비교적 땅값이 저렴한 방리유 지역에 건축했다. 주거비용이 비교적 저렴한 이곳에 이주민들이 몰려들었다. 공공주택 건설 초기에는 중산층도 많이 거주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이곳을 떠났다. 건물의 노후화, 획일적인 공간, 실내의 소음 등의 불편함과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건물기능 등으로 이민자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이 됐다. 자연히 월세나 집값이 하락했고 이민자나 실업자, 불법체류자들이 모여들면서 슬럼이 형성됐다. 프랑스의 주류집단에게 부정적 이미지로 고착될 수밖에 없었다. 현재까지 공공주택은 방리유의 주요 주거형태다. 프랑스 20대의 전체 실업률은 12%인데 반해 이민자 출신이 주로 거주하는 파리 교외지역의 20대 실업율은 33%에 이른다.

존 레논의 ‘이매진’ 연주하며 평화 기원

사건 다음날인 11월 14일 오후 지난 ‘샤를리 에브도’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이 레퓌블리크 광장에 모여 희생자를 추모했다. 프랑스 정부가 그 다음 월요일까지 많은 시민이 한곳에 모이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지만,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하나둘씩 모여 추모 행렬을 이루었다. 준비해 온 꽃을 광장에 놓고 희생자들의 죽음을 애도했다. 레퓌블리크 광장에 나온 시민 중 한 사람은 “테러를 벌인 세력이 겁나기보다는 프랑스 사회의 이슬람 혐오 분위기가 더욱 확산 될까 봐 걱정된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한 남자는 거리에 피아노를 들고 나와 존 레논의 ‘이매진’을 연주하며 평화를 기원했으며, 해가 진 저녁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전날 참극의 현장을 방문해 꽃과 초를 놓으며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기도 했다.

한 시민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계속 살아야 합니다. 더욱 용감하고 더욱 담담하게…. 우리가 집에 머물며 두려움에 떠는 것이야말로 테러리스트가 원하는 모습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슬픔과 고통을 우리는 살아낼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이야기는 파리시의 표어 ‘플룩투아트네크 메르기투르(Fluctuat nec mergitur)’를 떠올리게 한다. 이번 테러에 대한 저항의 슬로건이 된 이 라틴어 구절은 ‘파도에 부딪치지만 가라앉지 않는’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프랑스는 또한 이번 테러를 아동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시민교육의 소재로 삼았다. 실제로 이곳에서는 “애들은 알 필요 없어” 하는 식으로 아이들을 사회에서 배제시키지 않는다. 아동과 청소년이 온전한 사회구성원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그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미 사건 다음날부터 “내 아이에게 이번 테러를 어떻게 말할 것인가” 혹은 “내 학생에게 이번 테러를 어떻게 말할 것인가” 등을 주제로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프랑스 교육부는 테러 다음날, 각 학교에 지침을 전달하며 이 사건에 대한 학생들의 이해를 돕는 교육활동을 요청했다. 초등학교에서는 그림 그리기 수업이 주로 실시되었으며, 중고등학교에서는 토론 수업이 이뤄졌다. 이웃에 사는 열 살짜리 꼬마 마야도 에펠탑과 하트, 그리고 꽃과 하트에 쓰러지는 테러리스트를 그림으로 그렸다고 했다. 마야는 ‘쿨하게도’ 지금은 긴박한 상황이니까 모두가 연대해야 한다는 말을 해주었다. 열 살에게서 듣는 ‘연대’라니, 여기가 정말 파리구나 싶었다.

‘파도에 휩쓸리지만 가라앉지 않는’ 파리. 테러를 당한 파리 시민들은 두려워하고 서로 증오하는 것이야말로 테러집단이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더욱 강고히 연대하여 지금까지의 삶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말한다. 파리지앵들이 삶을 대하는 그들 특유의 여유로움과 유머러스함, 그리고 사회를 대하는 진중한 자세를 잃지 않는 한, 그리고 미래 세대를 향한 진지한 교육이 계속되는 한, 이번에 발생한 사상 최악의 테러는 파리라는 배를 휘청거리게 하는 파도는 될지언정, 이 배를 전복시키기에는 역부족일 것으로 보인다. 파리는, 그래서 파리다.

홍소라 - 연세대학교에서 한국학협동과정의 박사과정을 밟고 프랑스로 유학했다. 프랑스 사회고등과학연구원(EHESS) 한국연구센터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파리8대학교에서 한국어 강사로도 일한다. 프랑스 정치·경제·사회·문화를 두루 연구하며 국내 언론에 관련 기사를 쓰고 있다.

201601호 (201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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