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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분석] 친박계發 개헌론 ‘5일천하’ 전말(顚末) 

‘집권세력의 재생산’ 역풍에 일단 후퇴는 하지만… 

권력기반을 다지고, 정국주도권 강화하는 등의 다목적 효과 거둬… 이원집정부제, ‘호남 총리론’ 등 영호남 연립정부 카드로도 거론

▎개헌론은 그동안 여당의 비주류, 야당 진영에서도 제기했지만 탄력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친박계가 논의에 가세하면서 핫 이슈로 다시 떠올랐다. / 사진·중앙포토
반쯤 열리던 개헌이라는 ‘판도라 상자’가 다시 닫힌 걸까?

새누리당 친박계가 제기한 분권형 개헌론이 같은 친박계에 의해 연일 부정당하는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박근혜 대통령의 철학과 원칙을 모든 정치적 판단의 준거로 삼는 친박계가 개헌이라는 국가적 현안에 두 갈래 목소리를 내는 것도 전에 없던 현상이다. 어쨌거나 ‘반기문 대통령+친박계 총리’를 요체로 하는 이원집정부제 개헌론은 청와대와 친박 핵심의원들이 시기상조론을 펴면서 일단 수면 아래로 잠복하는 양상이다.

여기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정무특보를 지낸 친박계 김재원 새누리당 의원의 단호한 입장표명이 주효했다. 11월 16일 여권 내 개헌논쟁 진화(鎭火)의 결정판이라 할 만한 입장을 밝혔다. 그는 이날 MBC <신동호의 시선집중>에 출연 “현재 상황에서 개헌을 주장할 단계도 아니고 또 가능하지도 않다”면서 “이원집정부제가 우리 정치체제에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분권형 개헌 자체에 대한 반대입장을 조목조목 피력했다. 또 “국민의 직접 선거로 선출된 대통령과 의회에서 뽑힌 국무총리가 대결 양상을 보이는 경우 이를 중재할 아무런 수단과 방법이 없다”며 거듭 이원집정부제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밝혔다. 특히 남북대치 상황에서 외교나 국방 등 외치도 총리가 담당하는 내치와 연결돼 있어 영역 다툼으로 정부가 마비될 가능성도 있다고 전제하면서 “이원집정부제는 우리나라에서는 채택해선 안 되는 제도”라고 낙인을 찍기도 했다.

개헌론 이슈 선점한 새누리당


▎박근혜 대통령이 11월 14일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차 해외로 출국했다. 이날 이병기 대통령 비서실장은 분권형 개헌론이 청와대와 무관하다고 밝혔다. / 사진·중앙포토
김 의원은 개헌 관련 친박계 내 공감대 형성과 관련해서도 “내가 있는 어떤 모임이든 사적인 대화든 한 번도 개헌의 필요성을 말하는 분들이 없었고 또 그런 논의를 해본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나아가 “이원집정부제로의 개헌 주장이 나오면 꼭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연결을 짓는데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원집정부제 개헌론 자체의 순수성이 의심받는다”고 못을 박았다.

하루 전인 15일 이병기 대통령 비서실장도 개헌론 진화에 합류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터키로 떠나는 서울공항에서다. 이 비서실장은 박 대통령을 배웅하러 공항에 나온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에게 분권형 개헌론과 관련해 “청와대와 무관하다. 이 시점에서 무슨 개헌이냐”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시계를 며칠 전으로 돌리면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진다. 친박계 핵심인 홍문종 의원은 11월 12일 라디오에 출연해 ‘개헌론’을 제기했다. 그는 “개헌이라는 이야기는 항상 국회의 밑바닥에 있다”며 “5년 단임제 대통령 제도는 이미 죽은 제도가 된 것 아니냐, 이제는 새로운 제도가 필요하다는 데 거의 모든 국회의원이 공감대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나아가 “외치를 하는 대통령과 내치를 하는 총리가 현재 5년 단임제 대통령제보다 훨씬 더 정책의 일관성도 있고, 그것들이 좀 탄력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이원집정부제 개헌론을 제기했다. ‘반기문 대통령에 친박 총리 조합이 일각에서 회자되고 있다’는 사회자의 질문에 “옳고 그름을 떠나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라고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

이원집정부제 아래의 차기 총릿감으로 지목돼온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개헌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그는 11월 4일 한 행사장에서 “5년 단임제 정부에서는 정책의 일관성과 지속성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현행 권력구조 문제를 거론했다. 그는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하면 정책의 일관성, 지속성을 유지할 것인가 하는 부분을 고민해야 한다고 덧붙여 개헌의 필요성을 우회적으로 제기했다는 관측을 낳았다. 내년 총선 출마를 기정사실화한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도 개헌론자다. 입각 전 한국헌법학회장 시절엔 “대통령직선제와 의원내각제를 한국상황에 맞게 혼용해야 한다”는 지론을 폈었다. 결국 현행 대통령 중심제 권력구조에 손을 대야 한다는 입장인지라 정 장관도 개헌 국면에서 주요 플레이어가 되리라는 추측을 낳는다.

여권 핵심부의 이런 난기류는 이원집정부제 개헌론이 국익보다는 정파의 이익을 우선시한다는 비판론에 따른 것이다. 이원집정부제는 내각제와 함께 분권형 권력구조로 평가받다가도 친박계가 제기하는 순간 집권 연장을 노린 정략적 수단쯤으로 격하된다. 역대 정권마다 되풀이돼온 계파 집권전략의 재판으로 간주되기도 했으며 심지어 계파의 보스를 내세워 권력을 유지하려는 방식은 일본의 파벌정치를 떠올리게 한다는 힐난도 받았다. “여권 핵심부의 개헌 구상이 생각보다 일찍 공론화되면서 ‘집권세력의 재생산’이라는 여론의 역풍에 직면한 것”이라고 황태순 정치평론가가 진단했다.

친박계와 박 대통령의 종착역은 같을까?


▎지난해 3월 새누리당 원내대책회의에 참석한 친박계 핵심 인사들. 최경환 기획재정부 장관(왼쪽)과 홍문종 의원(가운데)은 최근 이원집정부제 등 개헌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 사진·중앙포토
가뜩이나 새누리당이 내년 총선에서 180석을 얻는다는 등의 자체 목표치가 공개된 마당에 개헌론까지 더해지면 유권자들 사이에서 견제심리가 발동해 득표와 의석 확보에도 차질을 빚을 수 있다. 그래서 친박계가 질서정연하게 일시 퇴각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으리라는 게 여권 내부 기류에 정통한 한 인사의 진단이다. “친박계에서 여론 탐색용으로 개헌을 띄웠다가 숨 고르기에 들어간 것 같다. 개헌은 친박계에서도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어 언제든지 정국의 쟁점으로 급부상할 수 있다. 친박계 핵심 의원들끼리도 분권형 개헌 구상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총선에 즈음해 야당이 개헌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어 여권 입장에서는 개헌론 관련 이슈를 선점하는 효과를 누렸다고 하겠다. 내년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이기면 그때는 역풍을 무릅쓰고서라도 개헌에 나설 공산이 크다.” 이원집정부제 개헌론은 올해 초부터 친박계 내부에서 논의됐다고 한다. 심지어 지금 개헌론을 비판하는 의원 중에서도 친박계 총리의 등장을 전제로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언급하는 일도 있었다고 몇몇 여권 관계자가 전했다.

개헌론은 친박계끼리 ‘북 치고 장구 치는’ 양상이다. 비록 정두언·김용태 의원 등 당내 비박계 인사가 현 시점에서의 개헌론은 정치적 무력시위, 정략적 접근이라며 신중론을 개진하고 있지만 대세와는 무관하다. 청와대와 김재원 의원 등이 진화에 나섰다고 해서 여권 내 개헌론이 완전 소멸하거나 종지부가 찍혔다고 보기도 이르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박 대통령이 2014년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개헌론에 대해 ‘경제의 블랙홀’이라며 반대 입장을 표명한지도 벌써 2년이 다 돼간다. 유효기간이 지나는 중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친박계 중진 인사들이 11월 들어 개헌론을 들고 나온 것 자체가 달라지는 여권 핵심부의 기류를 일정부분 반영하는 것이라고 서성교 바른정책연구원 원장은 말한다. 서 원장은 “친박계 개헌론은 ‘내년 총선과 차기 대선은 친박 그룹이 주도적으로 만들어간다. 전쟁이 시작됐으니 선택하라’는 시그널을 발산한다”고 지적했다.

고려대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정한울 교수도 성사 여부를 떠나 개헌론은 그 자체로도 여러 가지 부수적인 효과를 낸다고 말한다. 예컨대 개헌이나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같은 갈등 이슈는 새누리당 내 친박계를 더 뭉치게 한다. 중간층 내지는 동요 세력들도 딴 마음을 품다가도 판이 어떻게 짜일지 모르기에 관망하게 된다. 외부의 적을 향해 내부 결속을 다지는 마당에 비박계가 공천과 같은 내부의 얘기를 꺼냈다는 눈총을 사기 십상이라 엄두도 못 낸다. 반면, 친박계는 자유롭다. 국정교과서와 개헌론 등으로 여권 내 비박계의 활동반경을 극도로 줄여놓고 자신들은 마이웨이에 나선다. 박 대통령의 청와대 참모 출신, 각료 출신들은 이른바 ‘TK물갈이론’, ‘총선 심판론’이라는 우산을 받쳐들고 속속 영남과 수도권으로 뛰어든다. 정한울 교수는 “개헌론을 통해 박 대통령과 친박계는 차기 총선 관련 주도권을 쥐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처럼 개헌론은 집권세력의 권력 기반을 다지고 정국 주도권을 강화하는 다목적 카드로 정치권에서 이해된다. 청와대의 제지와 친박계 내부의 이견으로 개헌론이 수그러지는 분위기지만 친박 의원들은 개헌의 당위성에 힘을 실어줬다. 개헌의 필요성, 개헌에 대한 관심도를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개헌이 예열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지적이다.

이와 별개로 개헌론이 갖는 심모원려를 친박계 의원들조차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다는 평가도 나온다. 개헌은 친박계의 권력연장이나 집권기반 확충용에만 국한되진 않는다는 것이다. 민감한 사안이라며 익명을 요구한 여권의 한 소식통은 “이원집정부제 개헌이 영호남 지역 화합의 매개가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냐”고 운을 뗐다. 개헌이 친박계 일각이 거론해온 ‘반기문 대통령+친박계 총리’ 구도를 뛰어넘는 영호남 연대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걸 권력 구조로 보장하는 게 바로 이원집정부제 개헌이라고 했다. 이원집정부제 개헌론이 호남을 소외시키는 일본식 장기집권 모델로 비치는 건 사실이다. 또 개헌이 성사된다면 최초의 조합은 ‘반기문 대통령+친박계 총리’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도 맞는 말이다. “일부 친박계마저 호남 배제에 기초한 영남-충청 연대론에 기운 것도 사실이지만 이는 박근혜 대통령의 심중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근시안적인 해석”이라며 다음과 같은 기류를 전했다.

대통령이 독주하면서까지 권력기반 다진 이유

“여권 내부에서 분권형 개헌을 영호남 화합에 연계해야 한다고 내놓고 말하는 이는 아직 못 봤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집권 후반기인 내년부터는 영호남 문제를 푸는 계기가 필요하다는 얘기는 있다. 같은 맥락에서 지난 4월 ‘성완종 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이완구 총리가 사의를 표명했을 때 후임 총리 물색 과정에서 호남 인사 발탁론이 제기됐다. 당장은 아니라고 해서 성사되지 못했다. 박 대통령의 권력기반이 아직 공고하지 않다는 판단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솔직히 새누리당을 비박계가 장악한 마당에 총리마저 호남에 줘서는 박 대통령이 신뢰할 만한 안정적 기반 조성이 어렵다는 시각이 우세했다. 그래서 내부를 더 강력하게 단속하고 나서 다음 단계로 가자고 한 것이다. 그 카드가 지금의 황교안 총리다.”

그 사이 많은 일이 벌어졌다. 새누리당은 물론 여권 전반에 대한 박 대통령의 장악력이 확고해졌다. 독주한다는 비판을 무릅쓰면서까지 권력기반을 엄청나게 다져온 것이다. 여당이 내년 총선에서 원내 다수의석을 차지하면 박 대통령이 영호남 화합 카드를 꺼내들 것이라는 게 이 소식통의 추론이다. “그게 박 대통령이 지명하는 호남 총리가 될 수도 있다. 나아가 이원집정부제 개헌이 성사된다면 두 번째 총리는 호남 인사를 등용해 정치지형을 바꾸는 선택도 불가능하진 않다.”

개헌론은 이처럼 정치적 상상력을 한껏 자극하는 요소를 갖추고 있다. 영호남 정치권이 손잡고 국정을 운영하는 구상도 그래서 나온다. 홍문종 의원의 개헌론이 정치권에 일파만파의 파장을 몰고 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황태순 정치평론가는 “개헌은 대선 게임의 룰을 바꾸는 문제인 까닭에 한국정치에서 가장 인화성이 강한 의제가 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야당에서도 개헌 필요성에 군불을 지핀다. 박지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같은 이는 박 대통령이 성공한 대통령으로 남으려면 개헌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11월 16일 YTN라디오 <신율의 출발 새아침>에 나와 “박 대통령 임기가 3년이 지나고 있는데 얼른 생각나는 업적이 뚜렷하게 없다”면서 “성공한 대통령이 되자면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국회에서는 개헌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나아가 “현재 일부 친박에서 얘기하는 그런 정략적, 집권 영향력을 연장하는 그런 개헌은 국민들로부터 지탄을 받게 된다”는 입장도 함께 피력했다. 여당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 다시 야당이 개헌을 얘기한다. 개헌론의 재점화는 시간 문제라는 게 여야의 속내이기도 하다.

- 박성현 월간중앙 취재팀장

201512호 (2015.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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