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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책 읽는 영화관’] ‘오래된 친구’ 모녀 관계가 삐걱대는 이유 

“엄마는 신(神)이 아니다” 

강유정 영화·문학평론가
‘모성’(母性)이 판타지일 수 있다? 엄마도 상처받을 수 있는 존재… 때론 그녀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

▎영화 <친정엄마>의 한 장면. 엄마와 딸은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다투다가도 어려울 땐 가장 먼저 발 벗고 나서주는 오랜 친구 같은 관계다. / 사진·중앙포토
많이 읽힌 소설이 드라마나 영화화가 되는 일은 흔하다. 실패한 경우도 많지만 폭발적인 흥행을 한 사례가 적지 않다. 원작이 영화로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테크놀로지와 콘텐트의 다양한 변주가 이뤄진다.

영화 <사도>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우리는 이런 말을 하곤 한다. ‘부자 간의 싸움에는 화해가 없다’라고 말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싸움은 남자들의 싸움이다. 승자와 패자가 나뉘어야 한다. 그것이 나눠지기 전까지 혹은 누군가 스스로 패자임을 선언하기 전까지는 싸움이 그치지 않는다. 그래서 싸움이 끝나도 화해는 없다. 아버지가 자신의 뼈와 살로 만들어낸 아들을 뒤주에 가둬 마침내 주검을 거두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엄마와 딸 사이의 싸움은 관계다. 그래서 싸움 자체가 언어인 경우가 많다. 엄마와 딸 사이에서는 부부 혹은 친구 사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비난과 비판까지 오간다.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다투기도 하지만 어려울 땐 가장 먼저 두 발 벗고 나서준다. 엄마와 딸의 관계란 그래서 아주 오래된 친구이자 아주 오래 묵은 숙원이기도 하다. 영화 속 엄마와 딸의 관계도 대개 그렇다.

특히 한국영화 속 엄마와 딸 가운데에는 어떤 전형이 있다. 한국 소설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대개 엄마는 억척스럽고 딸은 그런 엄마를 애증한다.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그런 엄마를 지키고 싶어 하면서도 엄마의 삶을 닮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 사랑으로 이해하고 화해하고 서로에게 기댄다. 영화 <친정엄마> <엄마를 부탁해> <애자>와 같은 숱한 한국의 모녀 서사들이 지향하는 바이며 닿는 목적지이다.

모녀관계라고 해서 어찌 언제나 화해할 수만 있을까? 이미 인류의 명작이 된 두 작품, 소설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작품 <연인>과 소설가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작품 <피아노 선생>을 통해 회복되기 힘든 모녀 관계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열 달 동안 몸을 빌렸던 딸, 그리고 그 몸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또 다른 여자의 삶을 살아가는 여자의 이야기 말이다. 같은 여자라서 더 이해하기 힘들고 같은 여자라서 더 혐오스러웠던 감정의 찌꺼기에 대한 서사가 펼쳐진다.

15세 프랑스 소녀, 늙은 중국 남자와 만나다


▎영화 <애자>의 한 장면. 주인공 엄마는 억척스럽고, 딸은 그런 엄마를 애증한다. 딸은 엄마를 보호하면서도 엄마의 삶은 닮고 싶지 않아 한다. / 사진·중앙포토
소설 <연인>은 작가와 문청들 사이의 필독서이다. 하지만 이 소설이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바로 영화감독 장 자크 아노의 영화 <연인> 덕분이다. 이 영화는 열다섯 살 프랑스 소녀와 그 소녀가 프랑스령 식민지인 차이나 반도에서 알게 된 한 중국인 부호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영화와 소설의 시작은 동일하다. 소녀다운 옷을 걸칠 돈도 없는 그녀는 엄마의 오래된 드레스와 남자들이나 쓰는 모자 그리고 남자들의 벨트를 허리춤에 아무렇게나 걸치고 있다. 그녀를 고급 승용차 안의 한 남자가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어마어마한 돈을 가진 이 남자는 아버지의 돈으로 부유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는 소녀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다. 돈이다. 그래서 그는 소녀를 유혹한다.

<연인>은 여러 면으로 흥미로운 작품이다. 우선 프랑스와 베트남의 식민관계가 프랑스 소녀와 중국인 부호의 관계에서 역전된다는 것이다. 대개 동양은 서양의 식민지였지만 돈 앞에서 프랑스 국적과 중국인 국적은 무관해진다. 돈이 중요한 세상에서 가진 자가 식민자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피식민자이다. 그래서 남자의 육체는 유린하고 빼앗고 수탈하는 몸이 되고 소녀의 몸은 빼앗기고 유린당하고 수탈당한다. 겉으론 그녀가 지배자이지만 관계 속에선 소녀가 지배당한다.

하지만 이 관계는 마음이라는 수준으로 넘어가면서 또 달라진다. 남자는 점차 소녀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다. 소녀는 몸은 주지만 마음은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남자는 소녀를 가질수록 갈증이 난다. 반대로 소녀는 몸을 줄수록 그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소녀는 망가지기 위한 수단으로 그를 선택했음을 알게 된다. 그녀는 지금 천천히 자맥질을 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영화는 그렇게 ‘그를 사랑하지 않노라’고 확신하는 소녀가 베트남을 떠나며 그때서야 자신의 감정을 눈치 채는 것으로 끝난다. 그렇게 사랑의 확신은 시간차를 두고 급습한다. 되돌릴 길 없이 늦었을 때 사랑한다는 고백은 독백으로 공전할 뿐이다.

딸의 연애(戀愛), 엄마를 떠나겠다는 신호


▎‘ 엄마’는 모성의 화신이자 완벽한 이상형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엄마도 결국 보통사람이다. 때로는 이해와 치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 사진·중앙포토
그런데 소설을 읽게 되면 영화에서 그다지 드러나지 않던 하나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로부터 파생된 상처가 드러나게 됨을 알 수 있다. 그 상처의 중간엔 바로 ‘엄마’가 있다. 엄마는 늘 맏아들만을 사랑하고 그 아래 남동생이나 주인공인 소녀에겐 눈길을 주지 않는다. 큰아들은 과부하된 사랑을 영양으로 받고 자라나 엄마의 품을 벗어나선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

엄마의 옷 속과 통장을 뒤져 원하는 것이라곤 뭐든 채우려고만 하는 큰오빠, 그 큰오빠의 모습은 미처 젖을 떼지 못한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다. 큰 오빠는 엄마가 계속 퍼부어주니 참을 줄도 미룰 줄도 끊을 줄도 모른다. 그런 큰 오빠에게 눈먼 엄마는 모든 것을 다 내주어도 부족해 한다.

어떤 점에서 소녀의 행동은 한 번도 제대로 사랑받지 못한 소녀의 비명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엄마의 눈길을 끌기 위해 소녀는 몸부림치고 엄마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줄 돈을 가져다준다. 이 왜곡된 사랑의 흔적은 사랑을 사랑이라 보지도 부르지도 못하는 소녀의 텅 빈 마음으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영화 <연인>은 섹스와 성애로 가득 찬 섹슈얼리티의 드라마처럼 보이지만 사실 부재와 외로움으로 흐르는 공백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도는 그 공허한 눈빛은 바로 그녀가 엄마에게서 배운 공허다. 엄마는 세상의 딸들에게 빛이기도 하지만 끝까지 알 수 없는 깊은 우물이기도 한 셈이다

영화감독 미카엘 하네케가 엘프리네 옐리네크의 소설을 영화화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작품 <피아노 치는 여자>에서의 ‘그녀’는 정반대이다. 주인공인 피아노 선생 에리카는 얼핏 보면 금욕적인 강박주의자처럼 보인다. 그녀는 평생 사랑도 낭비도 사치도 해본 적 없고 단 한 번 연습도 거른 적 없어 보인다. 그런 그녀 뒤에는 ‘딸아이의 성공을 위해 내 인생은 모두 버렸어요’라고 말하는 엄마가 있다.

모든 것이 <연인>의 모녀와는 반대이다. 이 엄마는 지나치게 딸에게 집착하고 사랑한다 말한다. 딸이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도 강조한다. 한편 딸 에리카는 남자를 만나고 섹스로 마음에 구멍을 만들지도 그렇다고 격렬한 사랑을 통해 정신적 망명을 꿈꾸지도 않는다. 어쩌면 두 사람은 그럴싸한 이인삼각 경기를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미래도 꿈도 내일도 과거도 없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옭아맨 밧줄의 이름 그것이 바로 모녀관계이니 말이다.

영화 속에 묘사된 에리카의 모습은 변태성욕자와 다를 바 없다. 그녀는 지나치게 엄격하게 학생들을 혼낸다. 그녀가 내뱉는 말은 거의 무기와 다를 바 없다. 격려를 한다거나 따뜻하게 배려할 줄도 모른다. 재주가 없으면 모욕을 당해도 싸다는 듯이 아이들을 몰아친다. 그런데 이 냉정함은 자기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싹둑 잘라내고자 한다.

그녀는 욕망이 생길 때면 날카로운 면도칼로 자기 살을 베어 차라리 고통과 맞바꾼다. 욕망, 그러니까 아름다운 옷을 입거나 잘생긴 남자와 데이트를 한다거나 그런 남자와 잠자리를 갖고 싶은 욕망을 갖는 것은 엄마를 떠나겠다는 신호이며 엄마를 배신하겠다는 다짐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마흔 살 딸을 여고생 다루듯 하는 이유


▎영화 <연인>에서 주인공 소녀는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그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늙은 중국 남자를 유혹한다. / 사진·중앙포토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에리카가 외출하고 돌아오면 가방을 뒤진다. 혹시나 나 모르게 산 옷이나 화장품이 있다면 모두 꺼내 깨버리고 발기발기 찢어버린다. 음악을 열심히 해도 모자랄 판에 딴 데 정신이 팔렸다면서 비난한다.

겉으로 보기엔 이 모든 것이 딸을 훌륭한 음악인으로 키우기 위한 노력이다. 하지만 이미 그녀는 마흔이 훌쩍 넘었다. 더 나은 인생을 살기 위해 스스로 절제하는 시간도 어느 새 지나고 이제는 그 결실을 따야 할 시기이지만 엄마는 여전히 그녀를 여고생 다루듯 통제하고 가둔다. 오히려 딸이 없으면 살아갈 이유가 없는 쪽은 바로 엄마이기 때문이다.

설마 이런 일이 있을까 싶지만 영화 <피아노 치는 여자>의 엄마는 우리가 자칫 방심하면 될 수도 있는 그런 부모의 모습이기도 하다. 부모는 내 몸을 빌려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들을 소유하고자 한다.

더 많이 살았다는 이유로 내가 살아온 길이 정답이라고 믿기도 한다. 하지만 때론 엄마도 병들 수 있다.

병이 든 엄마 곁에서 자라난 아이들에겐 영혼의 상처가 생길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엄마가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모든 것의 정답은 아니라는 것 말이다. 물론 <연인>의 엄마, 그리고 <피아노 치는 여자>의 엄마는 엄마의 한 극단일 것이다. 사랑을 너무 많이 주는 것도 너무 적게 주는 것도 모두 문제다. 그렇게 일방향적인 것은 우리가 말하는 사랑의 순기능이 아니라 역기능에 속해 있는 셈이다.

우리는 영화 속에서 이상적인 모녀 관계를 보곤 한다. 세상의 모든 엄마는 신과도 같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엄마도 하나의 상처 입은 영혼일 수 있다. 그러므로 나쁜 엄마와 좋은 엄마가 아니라 상처받기 쉬운 엄마와 그렇지 않은 엄마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상처는 잘못이 아니다. 그것은 이해와 치유의 대상일 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완벽한 이상형으로 현실을 덮을 게 아니라 따뜻한 연민으로 상처부위를 찾아야 할 것이다. 엄마라는 그 흔한 명사 안에서 말이다.

강유정 - 영화·문학평론가. 강남대 국문과 교수. 2005년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동시 당선돼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KBS <박은영, 강유정의 무비부비2>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저서로 <스무살 영화관> <사랑에 빠진 영화, 영화에 빠진 사랑> 등이 있다.

201512호 (2015.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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