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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혜련의 인생 이모작(마지막 회)] 회계사에서 요가 강사로 변신한 민진희 ‘자이요가’ 원장 

“벼랑끝에 내몰렸던 인생… 요가 만나 행복을 찾았죠” 

최재필 월간중앙 기자 글 고혜련 월간중앙 기획위원, 제이커뮤니케이션 대표 / 사진 오상민 기자
어릴 적 트라우마로 마음의 문 닫은 채 미국서 회계사로 홀로서기… 죽음 목전에 두고 만난 요가 통해 마음의 상처 깨끗이 씻고 새 출발

▎세계적인 회계법인에서 세무분야 전문가로 치열하게 활동했던 세월을 먼 기억 속에 갈무리한 채 지금은 요가 트레이너로 변신해 명상에 잠겨 있는 민진희 씨. 그 모습 그대로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아, 참 예쁘시군요.”

절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그녀를 본 순간 사람의 선입견이라는 게 참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서 자란 명문대 출신에 세계적인 회계 법인에서 쟁쟁한 회계사들과 치열하게 부대끼며 살았다고 하니 사뭇 전투적일 것이라는 막연한 편견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의외였다.

마치 ‘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자이요가’ 민진희(47) 트레이너 얘기다.

긴 머리칼에 편안한 옷차림, 맨발로 사뿐사뿐 걷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늘씬한 키와 시원한 이목구비가 분위기 있는 자태를 한껏 뽐냈다. 요가를 하는 여성에 대한 일반인의 막연한 기대에 꼭 들어맞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외모까지 겸비했으니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건네자 긍정과 부정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희 요가인들은 매일 꾸준히 스스로 마음의 주인이 되는 방법을 깨우쳐요. 부정적인 마음에서 벗어나 긍정적인 마음을 키워내기 위한 ‘마음의 지혜’를 부단히 배우고 또 명상을 연습합니다. 사랑과 감사함으로 충만해지기 위해서죠.”

사람의 겉모습 역시 속마음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는 얘기로 들렸다. 맞는 말이리라. 마음이 험하면 몸도 얼굴도 그에 따라 일그러지게 마련이니까.

한낮인데도 적당히 어둡고 넓은 분당의 자이 요가원 실내. 눈을 가린 채 마루바닥에 드러누워 명상 중인 사람들, 슬쩍 신비감을 자아내는 이질적인 분위기 속엔 방문객의 심기조차 차분하게 만드는 조용하고 낮은 파동이 냇물처럼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몸이 건강해지려면 건강한 음식이 필요하듯 마음이 행복해지려면 건강한 생각이 필요합니다. 마음에도 그런 건강식을 자꾸 주는 연습을 하면 건강한 생각을 하는 버릇이 생기죠. 마음에 줄 수 있는 최고의 건강식이 바로 감사인 것 같아요.”

그녀 역시 그 건강식인 감사함을 얻기 위해 멀고도 험한 길을 헤쳐왔다고 했다.

“남을 탓하면 편리합니다. 저 사람, 저 상황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면 책임질 것이 하나도 없으니 아주 편리하죠. 편리한 대신 불행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그 편리함의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고 말한다.

그녀는 여섯 살에 부모의 이혼으로 세상에 홀로 내동댕이쳐졌다. 가까운 친구들마저 ‘이혼한 집 애랑 놀지 마라’는 부모의 주의를 듣고 하나둘 곁에서 멀어졌다. 놀림과 따돌림을 당하며 상처가 깊어졌다. 부모의 보살핌과 사랑을 받아야 할 시기에 그는 할머니댁에 맡겨지기도 했다.

가정불화 상처 잊으려 독종의 길 선택


▎가끔은 요가의 본고장인 인도의 요가원을 찾아가 강사·학생들과 함께 견문을 넓히려고 노력한다는 민진희 원장.
그의 어머니는 아픔과 상흔이 깊은 민씨를 보호하기 위해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로 결심했다. 이것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그런 아픔의 원인을 제공한 미운 아버지로부터 얻은 상처는 한국을 떠나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그녀를 수시로 괴롭혔다. 쉽게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를 온몸으로 감내해야 했다.

그녀는 먼 이국땅에서 자라면서 “강한 사람이 돼 갚아주리라”는 말을 수시로 되뇌었단다. 그렇게 결심한 뒤부터 자신을 혹독하게 몰아갔다. 당시 가진 것 없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열심히 공부해 그럴듯한 직업을 갖는 것, 그 다음은 최고로 인정받으며 명예와 부를 함께 누리는 거였단다.

부모에게 미움 받지 않으려면 경제적으로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에 십대 초반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벌었다. 명문 보스턴대에 들어가 심리학과 회계학을 전공했다. 세상이 뭐든 안개처럼 불투명하다고 여겼던 그녀에게 회계학은 흑과 백이 뚜렷한 투명한 세계로 안내하는 아주 재미있고 매력적인 학문이었다.

대학 졸업 후 보스턴에 있는 대형 회계법인 여섯 군데, 이른바 ‘빅 6’에 지원했다. 보란 듯이 5개 회사로부터 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는 미국 최고, 최대 회계법인인 ‘쿠퍼스 앤 라이브랜드’ 회계법인을 선택했다. 1200여 명의 엘리트 회계사가 각축을 벌이는 곳이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일하는 유일한 한국 여성이었다. 처음 3주는 너무 힘들고 외로워 집에 돌아와 베개를 적시며 울다 잠이 들곤 했다. 스스로 낯설고 각박한 환경에서 잘 버텨낼 수 있을까 조바심이 났다.


▎민 원장이 자신이 공부했던 인도 요가원에서 스승을 만나 얘기를 나누고 있다.
살아남는 길은 자신만만한 사람,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전투적이 되는 거였다. 하지만 첫 평가 때에 들은 얘기는 “너무 소심하고 수동적”이라는 거였다. 그리곤 서슴없는 인종차별적 발언에 수시로 시달렸다. 때로는 면담을 위해 고객회사를 찾아가면 상대 회사 측이 “나이 어린 동양여자 말고 백인남성 회계사를 보내달라”고 요구하는 등 문전박대를 당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그녀는 그때 남자를 이기려면, 그리고 동양인에 대한 편견을 없애주려면 그들보다 열 배는 더 일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잠자는 시간을 줄여 하루 20시간씩 일하면서 나날이 공격적이 돼갔던 그녀는 몸이 상해가는 느낌을 받았지만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마냥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한국인 부서가 따로 있어 인종차별이 덜할 것으로 여겨 로스앤젤레스의 대형 회계법인 ‘언스트 앤 영’으로 자리를 옮겼다. 600여 명의 소속 회계사 중 한국인은 세무분야 전문인 민씨를 포함해 20명이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도 동양인 부서에 대한 차별은 상존했다.

그는 전쟁 같은 일상을 보내면서도 여전히 어머니와 아버지에게는 ‘잘나가는 딸’로 인정받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스스로 자신을 혹독한 채찍질을 맞으며 매일 경주에 출전하는 경주마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무조건 열심히 뛰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지칠 대로 지쳐 몸과 마음이 모두 피폐해진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은 한국으로의 유턴이었다. 한국에 있는 컨설팅 회사인 앤더슨에 입사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한국말과 글을 잘 모르는 그녀 앞에 정체성 혼란이라는 또 다른 장벽이 버티고 있었다. 오랜 고심 끝에 이번에는 창업을 결심했다. 국제회계학원을 설립해 강의를 하면서 학원운영에 전념했다. 동시에 연세대 국제대학원과 국세청 등 다양한 기관에서 국제회계법을 강의하기도 했다.

기왕에 사업을 시작했으니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생각에 다시 자신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한창 젊음이 무르익을 30대 초반 때의 일이다. 사업과 강의를 병행하면서 대표에 걸맞은 위상과 모습으로 변해야 한다는 생각에 더 센 척, 더 강한 척하는 모습이 일상화됐다. 성공하려면 무슨 짓이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감에도 시달렸다. 아침 8시 출근해 밤 12시까지 운동은커녕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면서 일에 파묻혀 살았다.

생명의 위협 느낀 뒤 요가로 새 인생 설계


▎수업 중 요가수강생들에게 ‘스스로 마음의 주인이 되는 방법’인 명상과 요가의 원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업을 시작한 후로 그에게는 부드러움이나 웃음은 오간 데 없이 사라져갔다. 사업에 걸림돌이 되는 상황과 직원들, 지인들에게 가차없이 정리하고, 이별을 고했다. 그 당시를 돌이키며 민씨는 스스로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 분노중독자처럼 여겨졌다”고 토로했다. 자신에게 아픔을 준 타인과 상황을 탓하는 버릇이 계속됐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잠자리에서 눈을 뜬 그녀는 온몸이 마비돼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때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눈을 깜빡이는 것뿐. 그전에도 어지럼증과 하혈 등의 증상이 있긴 했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이 일을 키우고야 말았다.

마비가 시작된 뒤 무려 3시간 동안 혼자서 온몸을 뒤척이며 사투를 벌인 끝에 그는 전화를 걸어 외부에 도움을 청할 수 있었다. 병원에서 “극심한 스트레스가 원인이니 무조건 쉬어야 한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담당의사는 “당분간 하던 일을 놓아버리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도 했다. 그는 ‘이러다 죽겠구나’하는 공포감이 엄습했다고 그때를 돌이켰다.

“학원은 가파르게 성장해 대박이 났고 저는 젊은 나이에 누가 봐도 능력 있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자였어요.” 하지만 건강을 잃은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은 자격증과 몇 줄의 이력서, 통장에 들어있는 돈 몇 푼이 전부라는 생각에까지 미치게 됐다. 치료를 하고 증세가 좋아지자 학원을 정리하기로 결심했다. 회사를 설립한지 4년 반 만에 그는 미국 하와이로 돌아가 건강을 위해 휴식과 여행으로 소일했다. 그 과정에서 만난 것이 요가였다.

“처음 요가를 따라 하는데 난데없이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거예요. 저도 깜짝 놀랐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내기 위해, 갖고 싶은 것을 갖기 위해 내 몸을 얼마나 막 굴리고 무시했는지…. 요가와 명상을 알기 전까지는 그저 눈에 보이는 바깥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한 거죠.”

‘그래 너 잘났어, 너 능력 있구나, 넌 착한 사람이야’라고 인정받는 게 목표였던 지나간 삶에 대한 성찰이 한동안 계속됐다.

“명상에 몰입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점차 복잡한 마음이 명료해지고 상처에서 회복되고 사랑과 감사 같은 긍정적인 마음이 샘솟기 시작했어요. 쉽게 말해 나 자신과의 관계가 편안해지고 내가 나를 점차 좋아하게 됐다고나 할까요? 생애 처음으로 비로소 행복이 이런 거구나 하고 느꼈지요. 내 삶의 새로운 방향이 정해지는 전환점을 맞이했다고나 할까요?”

인간관계가 회복되자 요가사업도 나날이 번창


▎1. 민 원장은 순탄치 않았던 자신의 개인사와 경험담을 담아 지난해 <마음의 주인으로 살아라>라는 책을 출간했다. 2. “글솜씨 또한 프로 작가에 버금갈 정도로 예사롭지 않다”고 하자 환한 웃음을 보였다.
민씨는 그때 체계적으로 요가를 배워보겠다며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된다. 그 뒤 LA의 빅크람 요가원, 맨해튼의 크리팔로 요가원 등 4군데의 지도자과정에 입문해 3년여 동안 공부했다. 더 깊은 명상의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요가의 본고장인 인도 여행도 시도했다. 인도 남부 원월드 요가아카데미에 들어가 전통요가, 반야사 요가, 요가 테라피에서부터 임산부 요가, 어린이 요가 등 다양한 요가를 익혔고 물리치료, 타이마사지, 칼라 테라피 등을 배웠다. 수업에 참여하고 명상을 계속하면서 “남은 인생 나 자신을 아껴주며 내가 마음으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을 삶에서 다 경험하고 싶다”는 것을 목표로 살겠다고 마음을 굳히게 된다.

“삶은 나를 알아가는 여정이고 자각은 삶이라는 여행길을 지혜롭게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최고의 도구입니다. 친구를 알아가듯 내 마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내가 나를 더 잘 이해할수록 남들도 더 잘 이해되고 내가 나와 편해질수록 남들과도 편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삶을 바라보는 시야가 더 넓어지고 사는 게 훨씬 더 수월해집니다.”

스스로 ‘마음잡는 법’을 깨우쳤다고 느낀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요가사업에 뛰어들었다. 요가를 생활화하고 널리 전파하겠다는 신념이 생겨 2004년 서울 압구정동에 요가원의 문을 열었다. 치열하게 일했던 국제 회계사의 삶을 내려놓고 요가인으로 평생을 살기로 작정한 것. 그리고 움직이는 명상이라고 하는 빈야사 요가, 산전산후 요가 등을 국내에 소개했다. ‘내 마음의 주인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지금도 수시로 인도의 요가 아카데미를 찾아나서는가 하면 자매결연을 맺고 그곳의 스승들과 수시로 화상회의를 하면서 조언을 구한다. 인도 현지에서 학생 체험수련회도 갖는다.

“마음의 힘을 갖게 되면 마음의 포용력이 생겨나 인간관계도 아주 편해집니다. 내가 편해지니 사람들이 자연히 가까이 오지요.”

‘마음 다스리기’를 목표로 시작한 것이지만 요가사업도 엄연한 사업이다. 물론 회계사 경험이 사업을 키우는 데에 큰 도움을 줬지만 사업이 안정되기까지는 2년간의 험로를 거쳐야 했다. 결국 스스로 마음의 세계를 자각하고 외부세계의 자극을 처리하는 마음자세와 방법이 바뀌자 사업도 점점 상승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남과 상황을 탓하는 마음을 멈추려 하기보다는 그 마음을 관찰하며 이것이 나와 주변을 얼마나 괴롭히고 있는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를 마음에게 충분히 알려주고 인지시켜 주면 마음은 스스로 멈추기를 선택하거든요.”

일상에서 스스로 마음의 주인 되는 법’을 전파


▎한때는 국제회계학원을 설립해 대박을 터뜨렸고 대학에서 국제회계법을 가르치기도 했던 그녀는 요가를 만나 삶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고, 비로소 행복을 찾았다고 토로했다.
많은 사람에게 ‘내 마음을 지키는 법’을 알려 서로 사랑하고 돕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드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싶다는 민씨가 그동안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배출한 요가 제자는 1만3천 명에 이른다. 그중에 1200여 명은 명상지도자로 활동한다.

현재 서울 청담동과 경기도 분당에 자이요가 본점과 분점을 두고 있다. 대구에는 프랜차이즈 요가원을 두었다. 직원은 강사 25명을 포함해 40명 정도. 자신의 요가원은 물론 학교· 사회단체· 백화점 문화센터 등에서 ‘일상 속에서 스스로 마음의 주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전파하는 민씨는 지난해 자신의 개인사와 실제 경험담을 섞어 그 방법을 소개하는 저서 <마음의 주인으로 살아라>(민진희 지음, 쌤앤파커스)를 발간하기도 했다. 깊은 깨달음 뒤에 써낸 글이어서 그런지 글 솜씨 역시 프로작가에 버금갈 정도로 예사롭지 않다.

현재 한국요가협회에 등록된 요가센터의 수는 전국적으로 130여 개. 협회는 최근 몇 년 새 요가 관련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요가 시설은 전국적으로 1만 개가 넘을 것으로 추산한다. 백화점 문화센터, 복지회관, 스포츠센터, 각 지역 주민센터에까지 요가 프로그램이 개설되어 있는 점을 감안하면 국내 요가 수련 인구는 5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민씨는 처음 만나는 이들에게도 자신의 요가철학을 적극적으로 설파한다.

“예전에는 삶이라는 전쟁터로 나간다는 생각을 갖고 살았지만 지금은 달라요. 식단도 옷차림도 달라졌고 저 자신을 대하는 방식도 달라졌습니다. 식사를 하더라도 끼니를 때우듯이 먹는 게 아니고 내가 나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과 태도로 먹습니다. 감사함이라는 건강식을 함께 먹으니까요. 요가를 아직 모르는 분이든 이미 요가를 접하신 분이든 저처럼 삶의 긍정적인 변화를 체험하게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녀의 요가원을 찾는 많은 이가 그녀가 말한 대로 ‘휘둘리지 않고 방전되지 않고, 중독되지 않고 마음을 지키는 법’을 많이 깨우치길 바란다.


▎1. 민 원장이 함께 일하는 트레이너들과 요가 교육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다. 2. 민 원장이 업무협약을 맺고 있는 인도의 한 요가원의 트레이너와 화상통화를 하고 있다.
고혜련 - 칼럼니스트. 이화여대에서 국문학, 미국 뉴저지 주립대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했다. 중앙일보 기자를 거쳐 파이낸셜뉴스 문화부장과 런던특파원을 지냈다. 저서로 <신문, 취재와 기사작성> <자연에 산다> <매스커뮤니케이션개론> 등이 있다. 홍보 및 콘텐트 기획사 ‘제이커뮤니케이션을 운영하고 있다.

201512호 (2015.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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