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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책 읽는 영화관’] 새로 만나는 낯익은 이야기 <어린왕자> 

“삶은… 기억이 아닌 추억이다” 

강유정 영화·문학평론가
사랑은 길들임이며 누군가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 어른으로 성장하며 얻게 된 ‘상처의 기억’은 이제 ‘따스한 흉터’로 남아 생(生)을 완성한다

▎뮤지컬 <어린왕자>의 한 장면. <어린왕자>는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사랑받아온 작품이다. 최근 개봉된 애니메이션 <어린왕자>(2015)는 원작에는 없는 인물을 등장시켜 친숙한 이야기를 새롭게 재해석했다.
소설 <어린왕자>는 동화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동화가 아니다. 이 소설의 첫장을 펴면 한 그림이 등장한다. 소설의 화자는 이 그림을 보여주며 독자에게 묻는다. “이게 뭐로 보이세요?”

독자 대부분은 이 그림을 보고 머리에 쓰는 모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 이 그림은 모자가 아니라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다. 그래서 소설의 화자에게는 무척이나 무서운 그림이지만 독자에겐 그렇지 않다.

아무리 똑똑해 보이는 어른을 만나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이른바 ‘어른’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굉장히 흐뭇하게 여긴다. 어른이 되면 더 이상 보아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들’이 선호하는 이야기만 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브리지 게임이니 골프, 정치, 넥타이 같은 종류에 대해서 말이다.

어른이 된 이상 우리는 모자처럼 생긴 그림을 두고 ‘이것일까? 저것일까?’ 하고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다. 이윤이 생기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일에 시간을 투자하는 건 어른답지 못한 행동이다. 어른의 세계에서 돈이 되지 않는 일은 필요치 않는 일이 돼버린 지 오래다.

그 때문에 소설 <어린왕자>는 일반적으로 어른이 흐뭇해 하는 이야기와는 다르다. 반면 보아뱀이니, 원시림이니, 별이니, 장미와 같은 이야기를 귀담아들을 수 있는 사람에게 소설 <어린왕자>는 단순히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지표가 된다. 마치 길을 걷는 자에게 걸어가야 하는 방향을 알려주는 북극성처럼 인생의 방향을 알려주는 어떤 지표 말이다.

소설을 만화화한 애니메이션 <어린왕자> 역시 이런 추억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끼리 알아들을 수 있는 얘기만 했던 어른이 어느새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수상한 동네, 이상한 할아버지의 등장


▎소설 <어린왕자>의 화자는 이 그림을 보여주며 독자에게 묻는다. “이게 뭐로 보이세요?” 처음에는 머리에 쓰는 모자로 보이지만 사실은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다. / 사진·중앙포토
말하자면 <어린왕자>는 신화와 같은 작품이다. 이 소설을 단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있을지라도 <어린왕자>의 주인공 어린왕자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어린왕자의 외양을 모르는 사람도 없다. 삐죽삐죽 막 자란 금발의 짧은 머리와 스카프를 맨 그 모습을 말이다. 이 밖에도 장미, 여우, 바오밥 나무, 보아뱀과 같은 몇몇의 단어도 함께 떠오를 것이다. 비행기, 비행사라는 단어도 떠오른다. 그렇다. 구체적인 기억이나 문장이 떠오르지 않더라도 이렇듯 어린왕자의 이미지는 우리의 뇌리 안에 분명하게 자리 잡고 있다.

영화감독 마크 오스본의 애니메이션 <어린왕자>(2015)는 소설 <어린왕자>의 내용을 새롭게 해석한 데서 출발했다. 소설 <어린왕자>를 고스란히 영화화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대에게 들려줄 새로운 모험담으로서의 어린왕자를 재탄생시킨 것이다. 그 이야기의 중심에 한 소녀가 있다.

기존의 내용과 다르게 이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은 남자아이가 아닌 여자아이다. 그녀에게 유일한 삶의 길은 엄마가 일찌감치 짜놓은 시간표 안에 모조리 들어 있다. 명문 초·중·고등학교로 이어지는 시간표 안에서 소녀에게 주어진 것이라고는 없다. 또래의 아이에게 허락돼야 할 꿈꿀 시간이나 공상할 시간조차 허락 받지 못한다.

그래서 소녀는 용기를 냈다. 새롭게 친구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을 엄마에게 표현한 것이다. 마지못해 엄마는 소녀의 시간표를 조정해 ‘1년 반마다 30분간의 시간을 내줄 수 있다’며 조건부로 허락한다.

엄마의 일상은 소녀를 따라간다. 매일 아침 소녀의 시간표를 짜놓고는 직장에 나가는 엄마, 그녀는 퇴근 후 소녀의 하루 일과를 확인하며 잠든다. 그렇다면 소녀의 하루는 어떠할까? 예상대로 엄마가 짜 준 시간표를 절대적인 것이라고 믿고 꾸역꾸역 그녀의 지시에 따라가기 바쁘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일이 터졌다. 소녀에게 엄청난 변화가 등장한 것이다. 늘 고정적이었던 일상에 생긴 한 가지 변화, 바로 이사를 가게 된 것이다. 순전히 명문학교 입학에 좀 더 유리할 것으로 보이는 동네에 가기 위한 게 그 속사정이었다. 다만 문제는 그 동네가 어쩐지 이상했다는 것이다. 그토록 훌륭한 동네면서 ‘오직 딱 한 집만 입주 가능하다’는 동네의 방침이 특히 수상했다.

조만간 그 이유가 밝혀졌다. 소녀가 이사 올 집의 한 이웃이 별나고 유난스럽기 때문이었다. 그 이웃은 다름 아닌 무명의 할아버지였는데 소녀의 이사 첫날부터 수선스러웠다. 반듯하게 현대화돼 똑같은 외양을 지닌 다른 집과는 너무나도 다른 외양을 가진 집 형태도 이상했지만 그 집에 수많은 새가 드나드는 것도 지저분하고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난 너무 어려서 사랑할 줄 몰랐어”


▎주인공 어린왕자는 친구인 ‘장미’가 많은 것을 요구하자 자신의 고향인 행성 ‘B612’를 떠나버린다. 이후 우연히 만난 비행사에게 “난 너무 어려서 장미를 사랑할 줄 몰랐다”고 털어놓는다. / 사진·중앙포토
오래지 않아 이웃 할아버지가 사소한 사고를 치는 바람에 옆집과 소녀의 집 담벼락 사이엔 소녀가 드나들만한 구멍이 생겨나게 됐다.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할아버지는 소녀에게 자꾸만 그림이 그려진 편지를 비행기로 접어 날린다. 이름하여 ‘종이비행기 편지’.

편지의 시작은 ‘양 한 마리’였다. 사막에 떨어진 비행사 앞에 나타난 의문의 소년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소년은 이윽고 비행사에게 ‘양을 그려 달라’ 부탁한다. 눈치 챘다시피 할아버지가 그림과 곁들여 보내준 이야기는 바로 소설 <어린왕자>의 줄거리다. 뒷이야기가 궁금해진 소녀는 담벼락 사이의 구멍을 통해 옆집에 가게 된다. 그리고 할아버지로부터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듣고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에 빠져든다.

할아버지의 집은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관점에서나 어수선한 거지, 할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 ‘엉망진창’을 두고 할아버지는 ‘쓰레기 수집’이 아니라 ‘추억의 저축’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어른은 돈을 모으지만 어른의 모습을 한 할아버지는 추억을 모은다. 모든 것을 쉽게 버리지 않는다.

언뜻 보면 깔끔하게 정리돼 있지만 어쩐지 추억이라 부를 만한 것은 하나도 없는 소녀의 방과 달리 할아버지의 공간은 지저분하지만 따뜻하고 알록달록하니 다정하다. 소녀는 그 공간에서 지금껏 잊고 지냈던 어떤 ‘공간’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 공간은 추억의 형태로 환기된다. 이 공간이야말로 소설 <어린왕자>가 우리의 일상 속에 파고들었던 일종의 ‘잠언(箴言)’적 공간이기도 하다.

소녀는 엄마가 짜놓은 시간표 바깥으로 걸어 나와 다른 삶을 경험하고 싶어 한다. 소녀의 이야기와 소설 <어린왕자>는 서로 교차되면서 우리가 일상 속에서 잊고 살아가는 어떤 가치를 환기시킨다. 그런 점에서 애니메이션 <어린왕자>는 작가이자 비행사였던 생텍쥐베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라기보다는 재창조된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소녀와 할아버지의 관계는 소설 <어린왕자>에서 드러난 비행사와 어린왕자의 관계와 비슷하다. 소녀의 삶에 있어서 할아버지는 추락한 비행사의 눈앞에 갑작스레 나타났던 어린왕자의 등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 비행사가 어린왕자를 만나 삶의 보이지 않는 가치를 깨달았듯이 소녀 역시 할아버지를 만나 새로운 삶의 의미들을 발견하게 되는 내용이 흡사하다.

소설 <어린왕자>에서 주인공 어린왕자는 친구인 ‘장미’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자 자신의 고향인 행성 ‘B612’를 떠나고 만다. 그리고 너무 늦게서야 “난 너무 어려서 꽃을 사랑할 줄 몰랐던 거야”라고 깨닫는다. 그렇다. 사랑은 그렇게 뒤늦은 깨달음으로 다가오곤 한다.

여우를 길들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여우의 말을 따르면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관계를 맺는다는 건 무슨 뜻일까? 바로 수많은 존재 중 유독 한 존재만이 내게 특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삶을 산다는 것도 그런 셈이다. 어린왕자와 특별한 관계를 맺었던 여우의 말을 들어보자.

“넌 내게 아직은 수없이 많은 다른 어린아이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한 아이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나는 널 별로 필요로 하지 않아. 너 역시 날 필요로 하지 않고. 나도 너에게는 수없이 많은 다른 여우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한 마리 여우에 지나지 않지.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되는 거야. 너는 내게 이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거야. 난 네게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될 거고.”

‘길들임’이라 쓰고 ‘설렘’이라 읽는다


▎여우는 어린왕자에게 ‘길들인다’는 것은 바로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라고 가르쳐준다. 수많은 이들 중 유독 한 존재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픈 감정을 우리는 사랑이라 말한다. / 사진· 중앙포토
애석하게도 우리는 이 말을 이해하게 될 즈음이면 이미 하나 이상의 ‘특별한’ 관계를 잃고 난 이후일 테다. 소중했던 장미를 잃어버리고 난 이후에야 여우의 말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깨달음은 언제나 시간차를 두고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에게 다가온다. 어린 시절 ‘설렘’으로 읽었던 여우의 ‘길들임’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인생의 어느 시점을 지나 혼자 간직하고픈 상처와 추억으로 재탄생된다.

추억은 따뜻한 흉터가 됐다. 다른 발소리와 구분하게 만들었던 ‘그이’의 발소리, 그리고 이제는 ‘그’를 떠올리지 않고는 도무지 바라볼 수 없는 추억의 정경은 개인의 삶 속에서 각각 다른 언어로 길들여져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눈동자일 테고 누군가에게는 깃발 혹은 바람 소리로 남았을 테다. 이렇게 각각의 사적인 기억 속에 소중한 길들임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그 공통분모를 통해 <어린왕자>의 세계와 접속한다. 물론 이는 잃어버린 언어의 흔적만큼이나 간절하고도 쓸쓸한 행위로 치환된다. 우리가 언젠가 잊고 있었던 <어린왕자>의 마지막 장면을 생각해도 그렇다. 어린왕자는 다시 행성 ‘B612’로 돌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어떤 이별의 포즈를 취한다.

우리에게 그 포즈는 죽음과 너무나도 닮아 있다.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은 단지 껍데기일 뿐이다. 사막을 걷다가 풀썩 주저앉는 어린왕자의 모습은 어쩐지 쓸쓸하다. 죽어버린 삶, 그것은 쓸쓸하다. 하지만 죽음 역시 삶에 대한 한순간의 오해가 아니라 결국 삶 그 자체의 속내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미와 여우, 그리고 어린왕자가 있는 별과 이들이 존재하지 않던 사막은 얼마나 다르던가? 언젠가 우리 모두 잊게 될 게 분명한 어린 시절의 꿈이라고 할지라도 이미 기억을 잃어버린 추억에 불과한 어머니의 따뜻한 자궁, 그 속에서의 완전한 일체감에 대한 추억의 흔적일지라도 어쩌면 우리는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월과 함께 사라질 흔적이라도 그 흔적에 기대어 보이지 않는 가치들을 찾으면서 말이다.

강유정 - 영화·문학평론가. 강남대 국문과 교수. 2005년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동시 당선돼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KBS <박은영, 강유정의 무비부비2>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저서로 <스무살 영화관> <사랑에 빠진 영화, 영화에 빠진 사랑> 등이 있다.

201602호 (2016.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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