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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취재] 법정으로 간 천경자 <미인도> 위작논쟁 

첨단과학으로 25년 묵은 미스터리 밝힌다 

문병주·유길용 기자 moon.byungjoo@joongang.co.kr
천 화백 차녀 친자확인 소송 이어 위작 논쟁 법정다툼 예고… 국과수 미술품 위작 분석 경험 있어 종지부 찍을 가능성 높아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아래) 위작 논쟁이 새 국면을 맞게 됐다. 천 화백의 차녀가 위작 논쟁에 종지부를 찍겠다고 나섰다. 미인도 미스터리는 결국 법정에서 가려질 전망이다. 작품에 몰두했던 천 화백의 생전 모습. / 사진·중앙포토
지난해 8월 별세한 천경자(1924~2015) 화백의 <미인도> 위작 시비의 진실이 법정에서 가려지게 됐다.

지난 2월 18일 천 화백의 차녀 김정희(63·미국 몽고메리칼리지 미술과 교수) 씨가 법정 대리인을 통해 천 화백의 법적인 자녀로 인정해달라는 친자 확인소송을 내면서다. 대리인인 배금자(55) 변호사는 “정희 씨가 어머니 천 화백의 명예회복을 위한 법적 절차를 진행하기에 앞서 권리행사를 위한 자격이 필요해 소송을 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친자확인 판결이 나는 대로 <미인도>를 천 화백의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국립현대미술관에 대해 명예훼손 및 저작권법 위반으로 소송을 제기할 방침”이라며 “이번 기회에 작품의 위작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천 화백은 네 명의 자녀를 뒀다. 첫 남편과 사이에서 장녀 이혜선(72) 씨와 장남 이남훈(69) 씨를 낳았고, 이혼 후 고 김남중 씨와 만나 정희 씨와 정우(작고) 씨를 낳았다. 김남중 씨는 당시 다른 여성과 법률상 혼인 상태였기 때문에 정희 씨와 정우 씨는 김남중 씨의 가족관계 등록부에 이름을 올렸고 법률상 어머니도 천 화백이 아닌 김씨의 부인으로 돼 있었다. 배 변호사는 “모자 관계의 입증은 출산했다는 증거만 있으면 가능하다는 판례가 있다”며 법원이 친자임을 받아들일 것으로 내다봤다.

작가는 “위작”, 전문가들은 “진품” 주장


그동안 천 화백의 유품에 대한 권리는 장녀 이혜선 씨가 행사했다. 이씨는 다른 형제들에게 알리지 않고 부산 부경대에 천 화백의 작품 및 소장품 4000여 점을 기증하고 미술관 건립의 뜻을 밝히기도 했다. 만약 법원이 김정희 씨가 천 화백의 친자임을 인정하면 천 화백의 유품을 둘러싼 가족간 분쟁이 발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배 변호사는 “재산 때문이 아니라 ‘미인도’의 진위를 밝히려는 게 목적”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이혜선 씨는 <미인도> 위작 논란과 관련해 진위를 가리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김정희 씨 부부는 지난해 12월 21일 “국립현대미술관은 고 천경자 화백과 유족에게 <미인도>가 위작이었음을 시인하고 부당한 방법을 동원하여 <미인도>를 진품으로 만들려 했던 과오와 그로 인해 고인과 유족에게 끼친 심적 고통에 대해 진지하게 사과하라”는 통보문을 보냈다. 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의 응답이 없자 예고한 대로 형사 고소를 진행키로 한 것이다.

김정희 씨가 끝장을 보려는 <미인도> 진위 논쟁의 시발점은 25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은 ‘움직이는 미술관’ 전시를 기획했다. 이때 10여 년간 미술관 수장고에 있던 <미인도>가 서울 계동 현대그룹 사옥에 전시됐다. <미인도>가 처음 대중에 공개된 것이다. 당시 언론 기사에 따르면 <미인도>는 1979년 천 화백이 오모씨에게 줬고, 오씨가 다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게 준 걸 정부가 압류해 문화공보부를 거쳐 국립현대미술관에 이관됐다. 천 화백은 당시 어떤 그림인가를 오씨에게 준 건 맞지만 <미인도>는 아니라고 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미인도>가 맞다”고 했다.

91년 전시된 미인도는 포스터로도 제작돼 일반인에게 판매됐다. 총 900장을 인쇄해 일부는 홍보용으로 사용하고 일부는 5만원에 판매했다. 이때 일이 터졌다. 한 사우나에서 액자에 걸린 미인도 포스터를 본 천 화백의 지인이 천 화백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천 화백은 인쇄물을 보고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미술관에 전했다.

“내 작품은 내 혼이 담겨 있는 핏줄이나 다름없습니다. 자기 자식인지 아닌지 모르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나는 결코 그 그림을 그린 적이 없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에 화랑협회 감정위원회에 감정을 의뢰했다. 결론은 ‘진품’이라는 거였다. 화풍과 천 화백 작품을 주로 표구한 동산방화랑의 표구가 장부에 기록돼 있는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하지만 천 화백은 그해 4월 절필을 선언하며 이렇게 소회를 밝혔다.

“붓을 들기 두렵습니다. 창작자의 증언을 무시한 채 가짜를 진짜로 우기는 풍토에서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습니다.”

천 화백은 ‘자기 그림도 몰라보는 정신 나간 작가’라는 말까지 들어가며 정신적 고초를 겪은 것으로 전해졌다. 천 화백은 98년 자신의 주요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큰딸 이혜선 씨가 살고 있는 미국으로 떠났다. 천 화백은 2003년 병환으로 쓰러지기 직전까지도 ‘미인도’가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91년 사건 이후 <미인도>는 다시 국립현대미술관 수장고에 보관됐고 위작 논란도 잊혀지는 듯했다. 잠복했던 논란은 99년 서화 위조범 권춘식(69) 씨를 검찰이 수사하는 과정에서 다시 떠올랐다. 권씨가 “<미인도>는 내가 그렸다”고 주장한 것이다. 미술계에서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소장품이었다가 국가에 환수된 <미인도>를 국립현대미술관이 인수한 건 80년 5월인데 권씨가 그렸다고 주장한 시점이 84년이어서 권씨 주장이 설득력이 없다고 보았다. 검찰은 공소 시효가 지난 사건이라며 수사를 접었다.

천 화백 사망과 함께 다시 살아난 논란


▎천 화백은 꽃과 나비를 자주 활용했다. 그는 눈동자를 그릴 때 크게 열린 동공을 하얗게 해 격앙된 감정을 표현했다. 왼쪽은 <사월>(1974), 오른쪽은 <두상>(1982) / 사진·중앙포토
이렇게 또 16년이 흐른 지난해 10월, 천 화백이 두 달 전 타계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다시 <미인도> 위작 논란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천 화백의 삶을 조명하면서 언론에서 이 작품 위작 논란까지 끄집어냈다. 특히 둘째 딸 김정희 씨와 그의 남편 문범강(62·미국 조지타운대 미술과 교수) 씨가 언론 회견을 통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이들은 “한국 미술사에서 커다란 사건이었는데 미술사 연구자들이 밝혀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감정에 참여했던 감정위원 중 한 명이 그 분위기에 마지 못해 수긍했다는 증언을 들었다”며 “한 개인, 작가를 여러 기관이 누르기는 쉽다. 대한민국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은 큰 수치다”고 강조했다. 이들 유족은 위작이라고 추정할 만한 증거로 ▷<미인도> 소장 과정에 관한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직원의 자필 증언 ▷<미인도>에 쓰인 물감이 널리 사용된 물감이라는 점 ▷위작 감정에 참여한 위원의 증언 ▷다른 천 화백의 작품과 비교한 미학적 분석 등을 들었다.

99년 미술품 위조범 권춘식 씨를 서울중앙지검에서 검사 신분으로 조사했던 최순용(53) 변호사는 비슷한 시기 공개 강좌에서 “<미인도>는 권씨가 위조한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그는 최근 기자에게 “권씨의 진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며 “검찰의 수사 대상은 고서화 위조와 유통이었고 <미인도> 등 현대화는 대상이 아니었는데도 권씨가 나서서 자신이 위조했다고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 변호사는 “그걸 왜 나한테 얘기하느냐고 했더니 천 화백이 절필선언을 하시고 미국으로 떠나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말하는 거라고 하더라”며 “법률 적용을 검토했는데 공소시효(3년)가 이미 지난 시점이어서 결국 권씨의 진술이 있었다는 사실만 발표하는 것으로 종결했다”고 말했다. 최 변호사에 따르면 당시 <미인도>에 대한 권씨의 진술은 A4용지 10장이 넘는 분량이었지만 진술 기록 보존기간(불기소의 경우 공소시효 완성 때까지)이 지나 파기됐다. 권씨 역시 지난해 말 한 언론 인터뷰에서 “가까운 곳에서 화랑을 하던 사람이 선물용으로 줄 거라고 부탁하더라. 그 사람이 달력도 가져왔기에 세 점을 그려줬다. 선물용으로 쓴다고 하니까 가격도 저렴하게 10만원씩 받아서 줬다”고 밝혔다.

하지만 최근 권씨는 자신의 말을 뒤집었다. 권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천경자 <미인도>는 생각해 보니 내가 그린 그림이 아니다. 99년 당시 검찰 수사과정에서 <미인도> 위작 여부에 대한 확인을 요구받았을 때 혹시 수사에 협조하면 감형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우물쭈물하다가 시인했고, 그것이 굳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여러 위작을 만들어 확신이 없는 가운데 그렇게 말한 것이다. 참담한 마음으로 경솔했던 점 깊이 사죄드린다”고도 했다.

법정으로 향한 진위 논란


▎천 화백은 자신과 딸들의 모습을 토대로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그림은 자신과 가족의 자화상인 셈이다. 무표정하게 앞을 응시하는 천 화백의 얼굴이 그가 그린 그림 속 여인의 표정과 닮았다. / 사진·중앙포토
미술평론가 정준모(58)도 논란에 가세했다. 그는 90년 1월 금성출판사에서 출간된 <한국근대미술선집> 중 11권인 ‘장우성-천경자편’에 <미인도>가 흑백 도판으로 수록돼 있다는 점을 들어 <미인도>가 진품이라고 주장했다. 정씨에 따르면 이 선집에는 <나비와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데 77년에 둘째 딸을 모델로 그린 것이었다. 이 작품은 작가가 자신의 작품 중 중요하다고 판단해 편집자와 의논해서 수록했을 것이고, 이 과정에서 천 화백은 위작이라고 봤다면 도록에서 작품을 뺐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미인도> 공개 자체를 꺼리고 있다. 91년 위작 사건이 불거진 이후에 천 화백이 공개하지 않는 조건을 내세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배 변호사는 “분명 무슨 내막이 있다. 과거에 갑작스러운 상부의 수사 중단 지시도 그렇고, 이번에 고소해서 모든 진실을 밝혀낼 수 있는 기회를 앞두고 갑자기 권씨의 진술 번복 기사가 나온 것도 시점이 석연치 않다”며 “우리가 모르는 어떤 세력이 움직이고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법정에서는 25년을 끌었던 진실이 밝혀질까. 법조계에서는 가능한 일로 본다. 실제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2005년 서울중앙지검은 이중섭 화백의 둘째 아들 이태성(67·일본명 야마모토 야스나리) 씨가 그해 3월 경매시장에 내놓은 작품들과 ‘이중섭 50주기 기념 미발표작 전시준비위원회’ 김용수(77) 회장이 소장한 그림 57점에 대해 위작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태성 씨가 부친의 작품을 위작이라고 주장한 한국미술품감정협회 소속 위원들을 상대로 한 명예훼손 사건과 박수근 화백의 장남 박성남(69) 씨와 김용수 회장 간 맞고소 사건을 수사하면서였다. 검찰의 의뢰를 받아 그림을 감정한 곳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와 서울대 기초과학교육연구 공동기기원,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이었다.

검찰은 수사를 지속해 2007년에는 김용수 씨를 사기 등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검찰에 따르면 김씨는 지난 2005년 2∼3월 <물고기와 아이> <두 아이와 개구리> <사슴> 등 작품 8점을 이중섭 화백의 작품이라고 속여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서 매물로 내놓은 뒤 이 가운데 5점을 팔아 9억3000만원을 챙겼다. 김씨의 구속기소와 함께 검찰은 2005년 불거진 이중섭·박수근 화백의 그림 2827점의 위작 논란과 관련해 이 작품들 모두가 위작이라는 판단을 내렸다고 밝혔다. 수사를 담당했던 변찬우(56) 당시 서울중앙지검 형사7부장은 “2년에 걸친 수사 끝에 실체를 규명했다”며 “물감성분분석 등 과학감정 기법을 최초로 개발· 활용해 한 점 한 점 모두 분석을 해 나갔었다”고 설명했다. 특히 작품들에서 두 화백이 사망한 뒤인 1960년대에 개발된 ‘펄’ 물감이 상당부분 쓰였다는 점이 중요한 증거가 됐다. 변 전 검사는 “이번 이슈가 된 <미인도> 진위 논쟁 역시 그때의 분석방법을 동원한다면 어느 정도 실체에 다가설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2007년 기소된 김용수 씨에 대한 1, 2심 선고에서 법원은 검찰의 위작 판단을 받아들였다. 김씨는 사기 등의 혐의로 2009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고, 2013년 항소심에서도 형량이 바뀌지 않았다. 각 선고를 위해서 법원도 자체적인 검증을 실시했다.

과학적 분석’이 결정적인 판단 자료


▎2007년 검찰이 압수한 이중섭, 박수근 화백의 위작들. 검찰은 2007년 11월 두 화백의 그림 2834점을 과학감정기법으로 분석해 위작으로 규명하고 관련자를 구속했다. / 사진·뉴시스
판결문에는 법원이 왜 김씨가 소유했던 이중섭·박수근 작가의 작품을 위작으로 인정했는지 상세하게 나와 있다. 재판부는 미술품의 진위 감정을 안목감정·과학감정·자료감정 등에 의한다고 보았다. 안목감정은 해당 작가의 작품을 20∼30년 이상 오랜 시간 접한 전문가의 작품을 보는 풍부한 지식과 경륜을 바탕으로 그 작가의 필력·습성·주제·구도 등 화풍과 색감 등을 해당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서 감정한다. 자료감정은 작품의 출처를 밝히기 위해 감정 대상이 되는 작품과 관련된 작가의 일기·작업일지·작품의 판매기록·소장이력 등 문서형태의 자료를 조사하는 방법이다.

재판부는 특히 과학적 검증에 신뢰를 보냈다. 과학감정은 현미경 관찰·적외선 촬영·자외선 촬영·X선 촬영 등에 의존한다. 현미경 관찰은 육안으로 판별이 힘든 작품의 세부를 확대해 손상된 형태 등을 정확히 파악한다. 적외선 촬영을 통해서는 작품 표면 아래에 있는 드로잉(연필, 목탄 등 밑그림)을 볼 수 있다. 제작 후 수정했는지 등을 알 수 있다. 자외선 촬영은 작품의 재료 성분을 보여준다. 작가가 사용했던 재료와 동일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X선 촬영은 작품의 단층 분석과 캔버스, 프레임 등이 해당 작가만의 고유한 것인지를 확인하는 데 이용된다. 또한 그림에 사용된 안료의 재질분석을 위해 XRF(X선 형광분석기), FT-IR(적외선 분광분석기), EDX(에너지 분산형 X선 분석기) 등 다양한 재질분석 기기도 활용된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당시 박수근 그림 9점에 대해 X선 형광분석기에 의한 성분확인 시험을 실시했다. 9점 중 3점에서는 전체적으로, 4점에서는 부분적으로 산화티타늄의 주성분인 티타늄과 운모의 주성분인 규소가 공통적으로 검출됐다. 재판부는 이를 근거로 그림에 산화티탄피복운모가 존재한다고 추정했다. 산화티탄피복운모는 80년 미국 리키텍스사와 골든사의 연구실에서 미술용 물감 소재로 개발돼 84년경부터 미술용 물감으로 생산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박수근이 사망한 65년에서 19년 뒤 개발된 물질이 그림에 포함된 것으로 판단했다.

국과수는 김씨가 소유했던 이중섭 그림 39점을 각 기재된 ‘ㅈㅜㅇㅅㅓㅂ’, ‘둥섭’, ‘대향’ 등 서명의 필적과 국립현대미술관 및 리움미술관에 보존된 이중섭 그림 18점에 기재된 서명이 동일성 여부를 감정해 하였는데 감정하지 못한 1점을 제외한 38점에서 서명이 위조된 것으로 파악했다. 사건 그림들에서 발견된 지문과 머리카락에 대한 감정도 실시했지만 이중섭 본인의 지문이 확보되지 않아 지문감정할 수 없었고, 머리카락 1점은 핵 유전자(DNA)가 검출되지 않아 신원확인을 할 수 없었다.

법원의 이 같은 검증에 앞서 검찰수사 단계에서 이중섭·박수근 작품의 위작 규명작업에 참여한 최명윤(69) 국제미술과학연구소장은 안목 감정을 배제하고 철저하게 증거 위주로 위작 여부를 검증해나갔다. 그가 밝힌 방법은 ▷서체(서명, 사인) 분석 ▷종이의 산화도(酸化度) ▷물감의 개발 연도 등이었다. 특수촬영을 동원한 서체 분석을 통해서는 먹지를 대고 서체를 복사한 게 드러났다. 종이 산화도의 경우 작가가 생전에 큰 종이를 잘라 썼다면 4면이 산화가 되어야 하는데 2면만 산화된 그림들이 많이 나왔다. 위조자가 옛 종이를 잘라서 그림을 그렸다는 이야기다. 법원이 결정적 증거로 받아들인 물감 분석도 최 교수에 의해 먼저 행해졌다.

<미인도> 위작 논란의 핵심은 천 화백 스스로가 “내가 그린 그림이 아니다”라고 밝혔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진품임을 주장하는 미술계 인사들은 “천 화백의 명예에 관련된 내용이라 자세하게 말할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한 인사는 “천 화백은 과거에도 <인도 무희도>를 가짜라고 한 적이 있었지만 출처가 밝혀진 뒤 조용해진 적이 있다”고 전했다.


“작가 주장과 배치되는 결과도 가능”

최명윤 소장 역시 “작가의 말을 100% 신뢰할 수 없는 경우도 종종 있다. 어떤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의도적으로 부정하는 경우도 있고, 착오에 의한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작품 원본이 아니라 복사 과정에서 크기와 색감 등이 변형돼 작가가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며 “다만 작가의 의견을 존중할 뿐”이라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우환(80) 화백의 작품 12점에 대한 위작 의혹 수사도 관심을 끌고 있다. 경찰은 지난해 이 화백의 위작이 유통되고 있다는 첩보를 확보해 이 작품들을 유통시킨 의혹이 제기된 화랑들을 압수수색했다. 이후 최명윤 소장 등에 감정을 의뢰한 결과 해당 작품 12점이 모두 위작이라는 의견을 받았다. 이 작가 측은 “정작 작가 본인은 그 그림들이 어떤 그림인지 사진조차 볼 수 없어 위작인지 여부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며 “작가를 배제한 채 제 3자들에게 감정을 하도록 하거나 예술작품을 국과수에 감정 의뢰하는 수사방식을 작가로선 이해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법원의 판례에 따르면 여러 가지 객관적인 증거로 위작 여부를 확인해 봐야 한다는 대목이 있다”며 “필요시 작가의 의견도 들어볼 것”이라고 밝혔다. 경찰도 결국은 이중섭·박수근 위작 사건의 법원 판결문에 나와 있는 과학적 검증 방법에 가장 큰 무게를 둔다는 의미다.

- 문병주·유길용 기자 moon.byungjoo@joongang.co.kr

201604호 (2016.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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