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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책 읽는 영화관’(마지막 회)] 시(詩)에 수놓은 독립의 꿈… 영화 <동주> 

“부끄러운 순간에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강유정 영화·문학평론가
일제강점기에도 순수를 사랑했던 한 청년의 감성은 자연스레 빚어지는 ‘정체성의 누설’이 아니라 간절히 지켜내고자 했던 ‘혁명의 문학’이었음을 기억해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 ‘自畵像’)


늘 흔들리고 망설인 시인 지망생


▎영화 <동주>의 한 장면. 주인공 윤동주는 일제강점기 일본군으로부터 억압받은 끝에 ‘히라누마 도쥬’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했다. 당시 느꼈던 욕된 기억과 참회의 감정을 자신의 시 ‘별 헤는 밤’에 오롯이 새겨 넣었다.
윤동주의 시를 읽으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바로 시인 동주이다. 무릇 시적 자아가 워낙 시를 쓴 시인과 가깝다고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시적 자아와 실제적 작가의 사이가 가까운 것, 그것이 윤동주 시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 특징을 살펴보자면 두 개의 명사로 압축된다. 하나는 ‘부끄러움’이고 다른 하나는 ‘망설임’이다. 명사이기는 하지만 부끄러움과 망설임은 동사에서 파생됐다. 즉 단순한 상태나 이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작게나마 움직임을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윤동주 시의 매력은 그 움직임에 있다. 부끄러움과 망설임 사이에서 어딘가 조금씩, 조금씩 느린 걸음으로 움직이는 호흡, 그 호흡이 윤동주 시의 매력인 것이다. 그래서 시 ‘자화상’에 등장하는 우물 속의 한 사나이는 아마도 그, 동주일 확률이 높다.

그는 자신을 들여다보다, 미워하다, 그리워하다, 또 가엾어한다. 사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역시 스스로의 어떤 모습은 무척이나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고, 가엾어 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시의 제목인 ‘자화상’이 단지 윤동주라는 시인의 고백에 머물지 않고 우리에게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윤동주는 매력적인 인물이다. 특히 그의 시는 시인의 삶과 시대적 환경에 맞물려 더 큰 빛을 발한다. 작가 구효서의 소설 <동주>와 작가 안소영의 소설 <시인 동주>에 그려진 윤동주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는 이 두 작품의 영향력 아래에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동주 본인보다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통해 입체적으로 재현했다는 점에서는 소설 <동주>와 더 가깝고, 송몽규와 고향 간도, 연희전문 시절을 소상히 다뤘다는 점에서는 소설 <시인 동주>에 더 가깝다.

아카데미 수상작과 대형 오락영화 사이에서 영화 <동주>가 조용하고도 강력한 흥행에 성공하고 있다. 이 흥행의 모습은 어쩐지 윤동주의 첫 시집과 닮아 있다. 이번 영화를 통해 대중적으로 잘 알려졌지만 사실 동주는 시인으로 정식 데뷔한 적이 없다.

그의 시는 대부분 발표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작성된 게 많은데 윤동주의 시가 특히나 일기처럼 고백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윤동주의 작품은 그의 친구 강처중에 의해 사후에 발표됐다. 그리고 이렇게 발표된 시집은 그 어떤 등단시인의 작품보다 큰 반향을 얻게 됐다. 그 결과 사후 7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큰 울림을 주고 있다.

흔들리고 망설이는 것 자체가 우리 삶에 진실한 방향성을 준다고 동주는 말한다.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滿)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나의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윤동주, ‘참회록’ 중)


영화 <동주>는 흑백영화다. 흑백을 통해 우리는 이미 70여 년의 시간 너머로 사라진 과거를 감각적 이질감으로 경험하게 된다. 이는 현재의 시간을 바라보는 한편 과거를 살아가는 이율배반적 감정을 전해준다.

배우 강하늘과 박정민의 연기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되는 감성과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1940년대 일제강점기 치하의 상황이 묘한 공감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윤동주의 일대기를 거의 십대부터 훑어오면서 그때마다 그가 썼던 시를 삽입하는 영화적 방식이다.

흑백영화에 담긴 시(詩)의 호흡


▎윤동주에게 모국어란 마치 어머니의 젖처럼 자신의 영혼을 살찌운 원동력이다. 그런데 일어로 시 ‘자화상’을 옮겨 쓸 것을 강요받자 이 젊은 시인 지망생은 형언할 수 없는 참담함을 느낀다.
영화에서 카메라는 윤동주라는 인물의 일기를 훔쳐보듯 그의 삶에 새겨진 갈등과 함께 서정적인 시를 나열한다. 그만의 곡절은 시의 특별한 각주가 됐고 그의 시는 당시 비참했던 시대를 반영하는 지평이 됐다.

이를테면 윤동주가 창씨개명을 해 히라누마 도쥬가 되던 순간의 비참함과 일본군인에게 머리카락을 잘리는 장면을 통해 그의 시에서 마주쳤던 참회와 욕된 순간을 선명한 감각으로 체험할 수 있다. 마치 박제처럼 새겨져 있던 상투어 ‘일제강점기’가 현재적인 굴욕으로써 가슴 깊이 새겨지는 것이다.

구효서는 ‘민족 저항시인’으로서의 윤동주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었다면 ‘시인’ 윤동주는 이미 시모가모 경찰서에서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평했다. 일본 형사가 모국어로 시를 쓴 윤동주에게 그 시들을 모두 일본어로 번역해 적으라고 강압했기 때문이다.


▎살아생전 윤동주의 모습.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그는 일제강점기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실을 시로 표현했다. / 사진·중앙포토
윤동주에게 있어 모국어란 마치 어머니의 젖처럼 자신을 키우고 영혼과 몸을 살찌운 원동력이다. 그런데 모국어를 버리고 일본어로 자신의 ‘고백’, ‘참회’와 ‘자화상’을 옮겨 써야 했다면 그토록 부끄러워하고 망설였던 이 젊은 시인 지망생은 과연 어떤 참담함을 느꼈을까?

우리는 윤동주 시인이 한 권의 시집을 남기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바닷물 주사를 맞다가 사망한 사실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대단한 독립투쟁을 한 것이겠거니 민족 저항이라는 무거운 말처럼 대단히 혁명적인 운동가이겠거니 여겼다. 하지만 그의 인생과 시의 미학이 가진 정점은 그의 고뇌와 망설임 그 자체에 있었다.

영화는 윤동주와 그의 친구 송몽규의 삶을 병렬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두 가지 삶의 방식을 질문한다. 송몽규는 탁월한 운동가이자 열정적인 혁명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시대의 암흑에 대해 조용히 고뇌하는 것 자체가 비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송몽규는 언제나 적극적으로 시대의 어둠에 항거하고자 했다. 한편 윤동주는 엄혹한 세상일지라도 유혈의 혁명이 아니라 문자로 이뤄진 문학 안에 삶의 진실을 담아 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진실을 문학 안에서 찾고자 했다. 몽규는 이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주의 순결한 정신성을 존중했다.

동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몽규를 전폭적으로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의 선택에는 나름의 중요한 이유가 있음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동주>는 뜻이 다른 두 사람이 세상을 해석하는 과정을 전개하며 정말이지 멋진 우정이란 무엇인지를 잘 표현해냈다. 훌륭한 우정이란 뜻을 나누는 게 아니라 꿈을 공유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러했다.

영화 <동주>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곧 윤동주의 시에 닮긴 그 깨끗하고 고아한 내면에 대한 동시대 관객의 갈망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노래했던 동주에 비해 어쩌면 우리는 얼마나 자유롭고도 아름다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가?

참혹했던 시절 그토록 치열하게 모국어 조선어로 스스로를 돌아보고 부끄러워하면서도 그는 결코 자신이 사랑했던 것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 시절 순수를 간직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한 용기이자 의지라고 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사라진 ‘순수성’의 복권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그는 엄혹한 세상일지라도 유혈의 혁명이 아니라 문자로 이뤄진 문학 안에 삶의 진실을 담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 사진·중앙포토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순수를 사랑하는 청년의 감성은 자연스레 빚어지는 감성의 누설이 아니었다. 간절히 수련하고 무던히 지켜내야만 훼손되지 않을 수 있었던 그만의 문학이었다.

손바닥에서 발바닥으로 닦아낸 구리거울 속에 자신의 얼굴을 비출 수 있듯이 부단히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 세계는 금세 다른 것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진심으로 순수한 것은 변질과 왜곡에 더 취약하기 때문이다.

2016년 다시 윤동주의 시가 읽히고 있다. 그의 삶이 복원되고 순수한 언어에 관심이 기울어지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 윤동주의 어떤 것이 필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부끄러움과 순수, 내면과 망설임, 인간의 이런 조심스러운 감정이 점점 더 희박해지고 있다.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순간 부끄러울 수 있도록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만 한다.

강유정 - 영화·문학평론가. 강남대 국문과 교수. 2005년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동시 당선돼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KBS <박은영, 강유정의 무비부비2>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저서로 <스무살 영화관> <사랑에 빠진 영화, 영화에 빠진 사랑> 등이 있다.

201604호 (2016.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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