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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토플러식 미래주의의 종언 

엘리트 관점 버려야 미래가 보인다 

서용석 한국행정연구원 연구위원
대중의 생각, 가치, 행동을 바라보는 관점이 부족했던 토플러… 저출산, 고령화, 기후변화, 저성장 등 미래문제의 해법 우리 스스로 찾아야
아직도 한국 미래학은 토플러식 미래예측의 자장 안에 있다. 오직 하나의 미래, 하나의 정답만을 찾고자 한다. 그러나 많은 미래학자가 정확한 미래예측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는 미래가 예측의 대상이 된 순간 인간의 반응에 의해 굴절되기 때문이다. 토플러는 인과적 논리성에만 치중해 ‘미래학의 미래’에 악영향을 끼쳤다는 비판도 받는다.


▎앨빈 토플러는 미래학의 대중화에 기여했지만 단선적, 기계적 관점에 머물렀다는 비판도 받는다.
얼마 전 앨빈 토플러가 8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많은 한국의 신문이 그 어느 나라의 언론들보다 앞다퉈 토플러의 타계 소식을 전했다. 미국의 전직 대통령이 사망한 것 이상으로 토플러의 사망 소식은 한국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처럼 많은 한국인의 관심을 모았던 토플러는 도대체 어떠한 인물인가?

최근 들어 많은 사람이 미래학자로 소개되고 있지만, 토플러만큼 ‘미래’와 ‘미래학’을 대중들의 인식 속에 각인시킨 인물은 없을 것이다. 토플러야 말로 미래학의 대명사이자, 20세기에 가장 성공한 미래학자이기도 하다. 많은 이가 토플러를 미래학자라고 칭하지만, 정작 미래학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토플러를 ‘미래학자’라고 부르기를 주저한다. 토플러가 정식으로 ‘학자’의 과정과 훈련을 받지 않은 것도 있겠지만, 그가 ‘미래학(Futures Studies)’ 발전에 별다른 공헌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토플러가 갖고 있는 5개의 박사학위는 모두 명예박사학위다. 어쩌면 토플러는 아카데미의 틀에 박힌 훈련과정을 거치지 않았기에 더 많은 상상력에 기반한 미래진단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토플러는 1970년에 발간된 <미래 쇼크>라는 책 한 권을 통해 일약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이후 그는 컨설턴트로 활동하면서 세계 각국의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강연과 자문, 컨설팅 등을 수행해왔다. 그렇다고 토플러를 단순한 컨설턴트로 취급하기엔 그가 이루어놓은 ‘미래’와 관련한 업적들이 너무도 크다. 혹자는 토플러를 미래를 팔아 장사하는 기회주의자라 폄하하기도 한다.

토플러는 기술결정론적 한계를 간과했다


▎2008년 11월 서울 워커힐 호텔 아트홀에서 열린 이노비즈 글로벌포럼에서 앨빈 토플러가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플러는 미래를 내다보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방법론과 탁월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토플러는 대중들의 미래에 대한 이해와 ‘미래 의식(future consciousness)’을 고취하기 위해 평생을 인터뷰하고, 자료를 모으고, 미래를 예측했다. 어쩌면 토플러에게 ‘미래학자’라는 수식어보다는 ‘미래주의자(futurist)’나 ‘미래운동가(future activist)’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토플러가 일관되게 강조했던 것은 세상이 급속도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토플러는 이러한 그의 생각을 <미래 충격> <제3의 물결> <권력 이동> 등의 저서를 통해 극적이면서 설득력 있게 설명했다. <미래 충격>에서는 급속히 변화하는 미래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면 충격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제3의 물결>에서는 세 가지 유형의 사회를 ‘물결’에 비유하면서 제1의 물결을 농경사회, 제2의 물결을 산업사회, 제3의 물결을 정보사회로 명명했다. <권력 이동>에서는 산업사회의 권력체계를 대신해 정보사회의 새로운 권력체계가 등장하고 있음에 초점을 맞추었다.

토플러는 위의 저작들을 통해 사람들이 변화에 대해 인식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으며, 대중들의 미래의식을 제고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토플러식 미래주의, 혹은 미래예측이 남긴 부작용 또한 간과하기 어렵다. 토플러식 미래주의의 특징과 함께, 그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는 것도 우리 미래학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다.

토플러는 그의 저서에서 많은 실증적 수치와 사례를 제공하면서 미래변화에 대한 풍부한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전 세계의 많은 독자와 학생들이 토플러의 서적을 읽으면서 미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고, 또 미래학이라는 생소한 학문에 입문했다. 그러나 기술 지상주의, 물질주의, 합리주의, 객관주의로 향한 토플러의 편향된 사고는 미래학 연구방법의 다양성을 저해하는 결과를 낳았다. 토플러는 사실과 트렌드 등 외적 환경의 합리성과 경험적인 관찰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사회구성원들이 갖고 있는 세계관, 이념, 가치 등 내적 환경의 중요성을 간과했다.

호주의 미래학자 리차드 슬로터(Richard Slaughter)는 세상의 본질과 미래의 변화는 종종 외적 환경보다는 내적 환경에 더 많은 영향을 받고 있으며, 실증과 과학적 이론을 통해 충분히 정의되고 묘사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단순히 외부환경의 사실들에 대한 정보만으로 미래연구의 자료가 되기에는 부족하며, 미래를 구성하고 이해하는 개개인들의 경험과 인식, 가치 등 내적 요인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토플러가 간과했던 내적 변화의 요인들이 최근 들어서 미래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이 이를 반영한다.

토플러는 그의 여러 저서에서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추동력은 기술에 있으며, 기술발전이 사회변동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토플러는 기술 발전을 과거와는 단절된 새로운 사회를 출현시키는 주요 원동력으로 보았다. 특히 정보기술의 발전에 따라 경제활동, 사회구성, 정치형태, 생활양식, 가치판단의 기준이 급격히 변화하고 있음에 주목했다. 문제는 토플러가 새로운 기술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기술과 사회와의 관계를 단선적으로만 설명했다는 것이다. 즉, 기술과 개인, 또는 사회 집단들 간의 상호작용이 사회변화에 미치는 영향을 간과했으며, 기술개발과 선택 그리고 확산에 미치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 및 사회적 조건들을 무시했다.

이러한 오류는 마샬 맥루한(Marshal Mcluhan), 다니엘 벨(Daniel Bell) 등 다른 여러 미래학자에게도 공통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이들의 논리는 인간의 생각과 행동이 인간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기술발전에 의해 변화하며 인간의 삶의 양식뿐 아니라 의식과 사회구조까지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즉, 기술은 사회와 무관하게 자율적으로 발전하는 것이며, 인간은 기술 자체의 발전에 적응하고 또 그것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사회의 변화를 모두 기술의 속성과 영향력으로만 설명하기도 한다. 세상의 여러 가지 변화는 모두 기술발전에 따른 부산물에 지나지 않으며, 사회는 그저 기술의 종속변수일 뿐이라는 것이다.

정보사회의 도래가 토플러의 독창적인 예측이라고?


▎저 아이는 자라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미래의 변화는 외적 환경과 함께 개개인의 인식과 경험에도 큰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기술발전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기술을 만들고, 수용하고, 활용하고, 운영하는 개인과 사회 집단에 대한 이해이다. 토플러는 기술 자체가 갖고 있는 변화의 추동력에만 집중한 나머지 기술발전을 사회적 맥락에서 형성되는 사회적 구성물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드러냈다. 기술의 변화와 발전은 일종의 가시적이고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라는 점을 간과했던 것이다.

토플러는 1980년에 발간한 <제3의 물결>에서 기술발전으로 인한 거시적 사회변동을 설명했다. 토플러는 정보관련 기술이 눈에 띄게 발전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면서, 이러한 기술의 발전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양한 장면에 침투하면서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혁명적 변화를 농경사회와 산업사회에 이은 제3의 물결인 ‘정보사회’로 규정한 바 있다.

<제3의 물결>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토플러는 ‘정보사회’의 주창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1960년대 초반부터 일부 선각자들은 산업사회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경제사회 현상에 주목하고 있었다. 미국 예일대학의 사회학자 다니엘 벨은 이러한 현상을 ‘후기-산업사회(Post-Industrial Society)’라 명명한 바 있다. 이후 벨은 그의 연구를 종합하여 1974년 ‘후기산업사회의 도래(Coming of Post-Industrial Society)’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한다. 경영학의 그루 피터 드러커도 1960년대부터 과거와는 단절되는 소위 ‘지식사회(Knowledge Society)’라는 새로운 경제사회의 도래를 예견한 바 있다.

후기산업사회의 특성을 ‘정보사회’라는 이름으로 처음 규정한 것은 일본의 학자들이었다. 1963년 일본의 생태학자이자 미래학자인 우메사오 타다오가 <정보산업론(情報産業論)>이란 책을 출간하면서 ‘정보산업’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1968년 일본 노동성 관료 출신인 마스다 요네지의 <정보사회입문: 컴퓨터는 인간사회를 바꾼다>가 출간되었고, 1969년에는 경제기획청 관료인 하야시 유지로의 <정보화사회>라는 책이 출간되면서 ‘정보사회’가 후기산업사회를 규정하는 주요 용어로 정착되기에 이른다. 이후 정보사회의 특성을 표현하는 여러 용어들이 등장하였는데, 디지털사회, 네트워크 사회, 지식정보사회 등이 대표적이다. 종종 ‘사회’를 ‘시대’로 대체한 용어들도 일부 등장했다.

앞서 언급한대로 이미 1960년대 초반부터 ‘정보사회’에 대한 선구적인 연구가 시작됐고, 1970년대부터는 본격적으로 관련 연구들이 단행본으로 출간되기 시작했다.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은 이러한 선구적 연구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미국의 미래학자 짐 데이터(Jim Dator)는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을 기존에 논의됐던 사회변동에 관한 현상과 이론들을 대중적으로 설득력 있게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 의미를 축소한 바 있다.

복잡한 미래사회에 소외된 대중의 목소리 반영해야


▎미국 하와이 대학의 미래학자 짐 데이터 교수. 필자의 은사이기도 한 그는 “미래를 예측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원하는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란 지론을 편다.
토플러의 미래예측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그가 활용한 방대한 인터뷰 자료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기자 출신으로 누구에게 어떠한 질문을 던져야 할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저서들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그가 원하는 사람들과 인터뷰를 따내는 데 거의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았다. 토플러도 스스로 자신의 미래 통찰력은 수없이 만난 다양한 사람과의 ‘만남’ 덕분이라고 했다. 특히, 토플러가 만난 사람들은 주로 세계 각국의 지도자나 오피니언 리더였다. 토플러는 전 세계를 누비면서 정계·재계 인사, 언론인, 과학자들과 대화를 나눴으며, 그것을 뛰어난 통찰력으로 정리하는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만큼 의사결정권을 지닌 엘리트층의 미래에 대한 생각이나 계획을 알아내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그의 미래예측이 무리 없이 먹혀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미래학을 점성술과 구분해 주는 가장 큰 근거는 현실의 인간 활동에 기반한 논리적 예측일 것이다. 토플러의 미래학에는 인과적 논리성에 따른 예측은 있지만, 실제 삶 속의 대중의 생각·가치·행동을 바라보는 관점은 부족하다. 그의 인터뷰와 연구 자료가 주로 엘리트층에 근거함으로써 일상적 삶을 영위하는 일반 대중의 맥락이 결여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경제 시스템의 거시적 변화를 지적하는 것에 비해, 일반 대중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포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기술정책 등과 같이 의사결정이 엘리트층에 집중돼 있거나, 한 국가의 미래 경쟁력이 그 나라의 대기업의 수준만을 반영할 경우 미래예측은 한결 수월할 수 있다. 이렇듯 토플러의 미래예측과 진단은 이러한 외부환경, 즉 대세에만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다.

최근의 미래연구 동향은 대중과의 소통을 통해 보다 참여적이고 민주적인 미래비전 수립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정부가 국가차원의 미래비전을 제시하고 새로운 기능을 수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개개인과 사회 각층에 산재한 미래의 여러 이미지를 수렴해 미래비전을 만들어나가려는 노력이 요구되고 있다. 획일성이 아닌 다양성이 넘쳐나는 미래사회를 조망하기 위해서는 미래연구에 고도로 가변적이고 복잡한 미래사회에 소외된 대중의 목소리를 반영해야 한다. 향후 우리나라를 포함한 미래연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은 토플러식 엘리트주의 미래연구가 아닌 대중과 함께 소통하는 미래연구가 돼야 할 것이다.

토플러는 미국이나 유럽에서보다 아시아, 특히 한국에서 더 많은 유명세를 탔다. 그의 서적들이 미국에서보다 아시아에서 더 많이 판매된 것이 이를 증명한다. 왜 유독 한국인은 토플러에게 열광했을까?

미국의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토플러는 한국을 방문했을 때 마치 ‘록스타(Rock Star)’ 같은 대접을 받았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토플러의 이러한 유명세를 그가 미래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그것이 정확히 들어맞았다는 이유만으로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유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토플러가 말한 ‘제3의 물결’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했고, 또 정보화의 물결에 가장 성공적으로 진입한 나라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일약 IT강국으로 부상하며, 정부가 직접 나서서 제3의 물결을 주도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1990년대 말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연설은 마치 토플러가 연설하는 것으로 착각이 될 정도로 ‘미래’와 ‘정보화’를 강조했다. 아마도 한국사회는 이러한 성취를 토플러를 통해 확인하고 싶었던 심리도 작용했을 것이다.

우리 스스로 토플러가 돼서 묻고 답해야 할 때


▎삼성전자 수원 사업소의 어린이 집. 저출산 문제는 미래학이 고민해야 할 한국사회의 긴급한 과제 중 하나다.
한국의 적극적인 정보화 정책 이후 토플러는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했으며, 정관계·언론계·재계의 인사들을 만나 한국이 나아갈 길을 조언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의 많은 엘리트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토플러에게 미래를 물어보기도 했으나, 토플러는 이들의 질문에 명쾌한 해답을 주지는 못했다. 토플러는 미래의 변화에 대해 소개할 뿐, 이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저서에서도 미래의 변화에 관한 많은 아이디어만 제시할 뿐, 이를 어떻게 실질적인 행동으로 옮길지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결국 미래에 대한 해법은 우리 스스로 찾았어야 했다.

토플러라는 미래주의자는 한국사회에 무엇을 남겼을까? 토플러가 한국인들로 하여금 ‘변화’에 대한 인식과 ‘미래 의식’을 고취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미래는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라는 잘못된 인식을 남긴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21세기 들어 한국사회에 미래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면서 많은 단체나 기관에서 미래에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연구자와 정책결정자들은 아직도 토플러식 미래예측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직도 우리는 미래를 단선적인(linear) 세계로 바라보면서 하나의 정답만을 찾고자 한다. 많은 미래학자가 정확한 미래예측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는 미래가 예측의 대상이 된 순간 인간의 반응에 의해 굴절되기 때문이다. 미래학, 미래연구는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변화에 대해 탐구하고 이에 대한 대안적 해법을 찾는 데 존재가치와 목적이 있다.

현재 우리 사회는 저출산, 고령화, 기후변화, 저성장 등 거시적이고 구조적인 미래의 도전과제들에 직면해 있다. 토플러에게 미래를 물으면서 정작 우리 스스로 미래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고, 해법을 찾기 위한 투자를 게을리한 결과이다. 지금도 제2의, 제3의 토플러들이 ‘미래학자’라는 타이틀을 걸고 한국을 방문하고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우리는 이들에게 우리의 미래를 묻고 있다. 이제는 우리 스스로가 토플러가 돼야 한다. 한국적인 맥락에서 미래 변화의 속성과 방향성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해법을 우리 스스로가 찾아내야 할 때이다.

서용석 - 미국 하와이 대학의 미래학자인 짐 데이터(Jim Dator) 교수의 사사를 받았으며, 현재 한국행정연구원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 분야는 인구구조변화와 세대간 상생, 사회변동론 등이며, 다수의 정부 미래전략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현재 카이스트문술미래전략대학원의 겸임교수와 기획재정부 중장기전략위원회 민간위원 및 서울시 미래전략 위원회 민간위원 등으로 활동한다.

201608호 (201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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