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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기획] 영남 한의학의 대가 고(故) 김정식 후손들의 유별난 집념 

한방(韓方)가업 잇고자 2대(代)가 1년째 한의대 도전 

박성현 기자 park.sunghyun@joongang.co.kr
7수 끝에 손든 아들 이어 손자도 4년째 입시 준비… 아들 원곤 씨, 십전대보초 아로마 사업에도 기대감

▎1. 1990년대 한 잡지에 소개된 김정식 옹. 함양에서 한방 명의로 이름을 날렸다. / 2. 1960년대 말 함양의 한약방에서 김정식 옹(오른쪽 셋째)과 가족·친지들이 함께 찍은 기념사진. 앞줄 왼쪽에서 둘째가 아들 원곤 씨다.
경남 함양에 사는 김원곤(55) 씨 부자(父子)는 두 사람이 합쳐 올해로 11년째 한의대 입시에 도전한다. 김 씨가 1980년대에 7수(修)를 끝으로 한의대 입학의 꿈을 접었는데, 이번에는 그의 아들(22세)이 그 꿈을 되살리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다. 2014년 고교를 졸업한 아들의 한의대 입시는 올해가 네 번째다. 이번 입시에서도 떨어지면 군대에 입대해야 할 처지라서 온 가족이 합격을 응원하고 있다. 김씨는 “지난해 입시에서 수도권 한의학과에 도전했다가 마지막 문턱을 넘어서지 못했다”며 “올해에는 수도권이 아니더라도 꼭 한의대 진학을 이룰 것”이라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한의대 입학이 뜻대로 된다면 누군들 쉽게 덤비지 못했을까? 김씨 부자는 그 가능성을 반신반의하면서도 오랫동안 여기에 매달려왔다. 누가 그 험로를 가라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택한 길이다. 할아버지 대에서부터 시작한 가업(家業)을 잇기 위함이다. 김씨의 선친인 고(故) 김정식 옹은 1980~90년대 함양 일대에서 한약재 처방과 신비의 침술로 커다란 명성을 얻었다.

한약 처방과 무통침으로 이름난 지역 명의(名醫)


▎김원곤 씨는 십전대보초 분재를 특허등록해 새로운 사업을 타진하고 있다.
지금은 헐리고 새 건물이 들어섰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 함양군청 근처에 김 옹이 운영하던 ‘명성한약방’이 자리하고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한약사에 해당한다. 한약사는 한약 및 한약 제재의 전문가로 2000년부터 한약사 국가고시를 통해 배출된다. 1950년대 전란 때 이 일대에서 자리를 잡았으니 50년 가까이 이 지역 사람들을 치료해왔다.

그의 약재 처방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집안에서 유일하게 아버지의 유지에 따라 대학에서 한의학을 공부한 맏딸 김춘애(61) 서울 지성한의원장은 “아버지께서 대학 교재에 없는 처방을 하시는 것을 보고 참 특이하다고 느꼈다”고 돌이켰다. 통증 부위를 바로 치료하는 게 아니라 근원이 되는 부위나 증상을 고치는 쪽으로 약재를 활용했다는 게 김 원장의 설명이다.

당시만 해도 의료전달이 체계화되고 법제화된 시절이 아니라 명성한약방은 주로 지역 주민들을 상대로 진료·처방을 함께 제공했다. 이를테면 본업은 한약재 처방이지만 팔·다리를 삐거나 탈골된 환자까지도 치료했다는 것이다. 탈골 환자라도 김 옹의 손길이 닿으면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툴툴털고 걸어나가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간질, 중풍, 결핵 등 당시 시골에서는 고치기 어려운 질환도 다스렸다는 게 김 원장의 설명이다.

가족들의 기억과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김정식 옹은 약재를 통한 치료에도 일가견이 있었지만 침술은 거의 신기에 가까웠다고 한다. 이른바 ‘무통(無痛)침’이 그것이다. 고통은 물론이고 사소한 느낌마저 주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침을 놓는 기술이 있어 환자가 효험은 보면서도 침이 몸에 닿은 것조차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진맥을 하고 침을 이미 놓았는데도 환자가 “침은 언제 놓느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김 옹은 침을 놓을 때면 온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을 정도로 진을 뺐다고 한다.

약재 처방과 침술에서 ‘기적’을 경험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수술을 앞둔 위암 환자가 지인의 권유로 한약방을 찾았다가 나았고, 후두암으로 고생하던 제주의 한 호텔 사장은 이곳에서 병을 고쳤다. 완치의 대가로 호텔 연중 무료 이용권 선물을 받기도 했다고 아들 원곤 씨는 돌이켰다.

그의 의술이 용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환자들이 새벽부터 집 앞에 줄을 서던 시절도 있었다. 짧게는 1~2분의 진료를 받으려고 서울과 대구 등 도회지에서 찾아온 사람도 많았다. 많은 환자에 몸이 지친 부친의 건강을 염려해서 아들이 한약방 문을 걸어 잠그는 일까지 있었을 정도란다.

김 옹은 주변에 베푸는 삶으로도 유명했다. 가난한 학생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배움의 길을 터주는가 하면 시골 노인들을 위한 복지사업에도 거금을 내놓았다. 함양군에서 승용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전북 남원시 아영면 청계리 광평마을 노인회관 앞에는 그의 선행을 기리는 공덕비가 있다. 1993년 아영면 노인회가 세운 것이다. 임한수 전 아영면장은 “김정식 옹은 원래 남원에서 태어나서 함양에서 뜻을 이룬 분”이라며 “공덕비를 세울 당시 김정식 옹은 노인회에 기부도 많이 하고 좋은 일에 늘 앞장을 섰다”고 전했다.

김 옹은 슬하에 4남1녀를 두었다. 딸인 김춘애 지성한의원 원장이 다행히 가업을 잇고 있지만 아들 중에서는 아버지의 유업을 잇지 못했다.

네 아들 중에는 4남인 원곤 씨가 한의학에 대한 애착이 가장 강했다. 함양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서울에서 유학한 원곤 씨는 1981년 대학 입시에서 고배를 마셨다. 그 뒤로 6년을 더 한의대 입시에 매달렸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그는 “한의대 입학은 어린 시절부터 나의 로망이자 숙명과도 같았다”고 말했다.

세상에 대한 기억이 시작되는 시점부터 원곤 씨의 주변에는 늘 한약, 약초가 자리했다. 부친은 집 마당에 한약재와 약초 등을 손수 길렀다. 한약방을 차린 때가 6·25 전란이 있던 즈음이라 형제들이 모두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다. 원곤 씨가 자연스럽게 한방을 자신의 미래 직업으로 여긴 이유다. 고교시절 공부를 곧잘 했던 원곤 씨는 고3 입시에서 실패했지만 재수를 하면 한의대 진학이 무난하리라 자신했다. 하지만 삼수 끝에도 낙방하자 무슨 심산에서인지 부친에게 사업 자금을 받아 당시 유행했던 비디오테이프 대여점을 차렸단다. 한 번 딴 데에 곁눈질을 해서 그랬을까? 그 뒤로 치른 입시에서 그는 번번히 낙방했다. 김씨는 “가게를 하면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의치 않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 그 시절 불어 닥친 한의대 입시 열풍도 그의 꿈을 더욱 멀어지게 한 장애물이 됐다.

지금은 고향 함양에서 오곡밥 전문 한식집을 운영하는 원곤 씨는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으로 가득한 듯하다. 한식집은 식단에 몸에 좋은 한약재를 가미해 지역에서 잘나가는 맛집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늘 마음 한켠이 허전하다. “내가 못 간 길을 아들이라도 갔으면 했는데 다행히 아이가 적성에 맞다며 기꺼이 호응해줬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해(1996년)에 태어난 아들이 할아버지의 유업을 잇겠다고 하니 더욱 기특하다.” 세 번의 실패를 거쳐 올해 네 번째 도전이지만 요즘 아들은 성적도 올라 자신감에 차 있단다. 그는 “올 상반기 모의고사에서 모든 과목에 걸쳐 1등급을 받았을 정도”라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한의사의 꿈은 접었지만 원곤 씨도 한약재를 이용한 사업을 벌인 적이 있다. 2000년 초 여러 가지 약초를 심어 만든 사군자초, 사물초, 십전대보초 등을 분재로 개발한 것이다. 남자들의 건강에 좋다는 ‘사군자초’(인삼·백출·백복령·감초), 여성들이 즐겨 찾는다는 ‘사물초’(당귀·천궁·작약·숙지황), 일반에 널리 알려진 십전대보초의 상업화를 시도했다. 특히 십전대보초는 2004년 특허 출원해, 3년 만에 특허 등록에 성공했다. 당초 특허청에서는 아이디어는 기발하지만 특허 대상이 될지 긴가민가해 했단다. 원곤 씨는 “줄잡아 100번 넘게 설명하고 또 설명했다”고 어려웠던 과정을 되짚었다.

십전대보초 개발해 특허등록


▎전북 남원시 아영면 광평마을 노인회관 앞에 세워진 김정식 옹 공덕비.
원곤 씨는 대나무 줄기를 잘라 만든 화분에다 보약 성분을 지닌 십전대보초를 심어 판매했다. 10년 전에 이 제품을 처음 시중에 내놓았을 때는 불티나게 팔렸다고 한다. 원곤 씨는 “어릴 적에 아버님이 집 마당에 약초를 키우던 옛 기억을 모티브 삼아 약초의 아로마향을 판매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말했다. 환자들이 머무는 병원이나 약초의 아로마 효과를 기대하는 가정에서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방송을 통해 십전대보초 사업이 전파를 타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인기가 식어버린 일이 생겼다. 약초가 열흘을 못 버티고 시들어버리는 문제가 발생해 반품과 함께 항의가 빗발친 것이다. 토양에 양양분을 제대로 공급해주지 못한 탓이었다. 보완책 마련이 차일피일 미뤄져 십전대보초 아로마 사업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원곤 씨는 요즘 들어 다시 신발끈은 조여 맨다. 기술 보완에 자신감이 붙었기 때문이다. 토양의 영양분을 보충하고 그늘에서 일사량을 관리해준다면 석 달 정도 약초를 푸르게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집 근처 10여 평 크기의 비닐하우스에서 오랜 실험과 시행착오 끝에 얻은 결과다. “3개월 후에 교환하는 약초는 돈을 받고 제공하므로 공급자와 수요자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다.”

김 옹의 한방 철학과 치료법은 어쩌면 후대에서 끊길지도 모른다. 유일한 계승자격인 김춘애 지성한의원장의 자녀들은 한방에 관심이 없다. 그래서 조카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선친은 생전에 이런 얘기를 자주 하셨다. ‘환자의 지갑을 보지 말라. 환자를 도와줄 방도를 고민하라.’ 마음으로 환자를 치유하는 법을 강조하신 것이다. 집을 찾은 걸인과 겸상을 하면서 불편함을 덜어주고자 했던 선친의 인술(人術)을 조카에게 물려주고 싶다.” 3대에 걸친 꿈은 결실을 맺을 것인가?

- 박성현 기자 park.sunghyun@joongang.co.kr

201609호 (201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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