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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소리의 마술, 콘서트홀의 미학] 음향의 절정… 세계 7大 콘서트홀 

대중과 클래식을 협주하다 

노승림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음악 칼럼니스트
교향곡을 연주할 수 있었던 유일한 공간… 악성 베토벤은 콘서트 문화의 대표적 ‘수혜자’

▎독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홀 대공연장 내부. 1970년 당시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예술감독이었던 쿠르트 마주어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빈야드 구조로 설계되었다. / 사진제공·노승림
콘서트홀은 근대 문화의 산물이다. 귀족들이 독점했던 고급음악을 대중도 향유할 수 있게 됐다. 가장 유서 깊은 콘서트홀은 뛰어난 음향과 함께 스토리의 전통을 담고 있다. 문명이 진보하는 순간을 기록하는 현재진행형의 문화유산이다.

콘서트홀은 근대 시민문화와 함께 등장했다. 초창기 귀족들이 점유하던 클래식 음악은 소규모 살롱 음악회 아니면 오페라 공연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발판으로 형성된 시민문화는 보다 다양한 유형의 음악과 문화적 소집단을 요구했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동호회를 조직하여 음악을 향유했다. 이 과정에서 직업 연주가들의 활동도 자연스럽게 활발해졌으며, 대편성 공연을 제대로 연주할 수 있는 공간에 대한 요구가 바로 콘서트홀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콘서트홀 연주는 평민계급이었던 작곡가들의 주요 수입원이기도 했다. 작곡가들이 자신을 후원하던 귀족들의 취향에 맞추는 대신 저마다 자유로운 표현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대중을 상대로 한 콘서트 덕분이었다. 베토벤은 콘서트 문화의 대표적인 수혜자다.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치 가문의 하인으로 숨을 거뒀지만, 그의 제자인 베토벤은 대중의 지지를 발판으로 성공한 프리랜서 작곡가로 이름을 남겼다. 당시 교향곡을 연주할 수 있었던 유일한 공간이었던 콘서트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콘서트홀은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회 전체와 더불어 존재했다. ‘민주주의’, ‘통합’, ‘재생’, ‘자치’와 같은 의미 있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가치를 생산해왔다. 전 세계의 유서 깊은 콘서트홀은 단지 그 사운드가 훌륭해서, 그 외관이 아름다워서 유명해진 것이 아니다. 이 건축물들은 모두 문명이 진보하는 순간을 기록하는, 현재진행형의 문화유산이다.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 독일 근대 클래식 음악의 요람


▎게반트하우스 홀 외관. 1944년 2차대전 중 연합군 공습으로 파괴되는 바람에 1968년 완전 해체됐다. 지금의 게반트하우스는 1981년 개관한 세 번째 건축물이다. / 사진제공·노승림
콘서트홀의 역사는 그 공간을 둥지로 쓰는 오케스트라 혹은 음악동호회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선두주자는 독일 라이프치히였다. 괴테가 라이프치히에 체류하던 18세기 중반, 이 도시는 상인과 학자의 도시였다. 도시를 지배하는 귀족이나 제후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음악가에 대한 지배계급의 재정적 지원도 전무했다. 이는 오히려 시민계급을 중심으로 한 음악문화를 형성하는 데 유리한 입지조건을 형성했다.

1743년부터 16명의 중산계급 후원자와 16명의 연주가로 구성된 연주단이 매주 ‘세 마리 백조’라는 식당에서 연주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공연은 인기가 높아서 연주단원도 곧 두 배로 늘어났고 청중 수는 매번 400명에 육박했다. 1780년 식당은 밀려드는 청중을 더 이상 수용할 수 없다고 시의회에 호소했고, 이에 의회는 당시 버려져 있던 직물거래소 건물을 보수해서 콘서트홀로 사용하는 안건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것이 오늘날의 게반트하우스(직물거래소)다.

1781년 건축가 요한 프리드리히 칼 다우테와 미술가 아담 프리드리히 외저에 의해 콘서트 전용홀로 탈바꿈한 게반트하우스는 19세기 즈음 노화된 본래 건물을 버리고 아예 새로운 공연장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베를린 출신의 유명 건축가 마르틴 그로피우스와 하이노 슈미덴의 공동작업으로 1884년 12월에 문을 연 두 번째 게반트하우스는 음향과 아름다운 외관으로 찬사를 받았지만 1943년 2차대전 중에 폭격을 맞았다. 1970년 세 번째 게반트하우스 건축 기획안이 통과되었고 1981년, 마침내 2000여 명의 청중을 수용하는 대 콘서트홀과 500석 규모의 다용도 홀을 가진 오늘날의 게반트하우스가 세상에 소개되었다.

게반트하우스를 거쳐간 거장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독일 근대 클래식 음악사를 거론하는 것과 똑같다. 최초의 수퍼스타는 <노래의 날개 위에> 작곡가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멘델스존이다. 그는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카펠마이스터로 재임하며 지휘자로서의 통솔력과 음악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또한 라이프치히 토마스 교회에서 바흐에 의해 단 한 번 연주된 이후 사장되어 있던 <마태수난곡> 악보를 재 발굴해서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대중 앞에서 공연했다. 게반트하우스에서 부활절마다 바흐 <마태 수난곡>을 연주하는 전통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독일 통일의 과정에서 게반트하우스는 다시 한 번 세계 언론의 초점이 되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정확히 한 달 전인 1989년 10월 9일, 독일 통일의 단초가 된 ‘월요일의 시위’가 동독 라이프치히에서 벌어졌다. 수십만 명의 시위대가 군과 충돌하기 직전 당시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이었던 쿠르트 마주어는 ‘라이프치히 6두’로 불리던 유명 인사를 소집해 폭력을 자제하는 공동호소문을 낭독했다. 이어서 10월 22일에는 게반트하우스를 평화통일을 위한 토론의 장소로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지휘자 마주어가 진행한 게반트하우스 토론은 그대로 전파를 타고 독일 전역에 방송됐다. 이때 보여준 사회적 영향력으로 마주어는 한때 통일 동독의 대통령 후보로까지 거론됐다. 하지만 그는 사태가 일단락되자 정계 입문을 단호히 뿌리치고 게반트하우스로 복귀했다.

빈 무직페라인 홀 | 마이크가 필요 없는 최고 음향


▎오스트리아 빈 무직페라인 홀의 야경. 프란츠 요제프 대공이 하사한 부지에 세워졌다. 외관은 당시 유행하던 신고전주의 그리스 건축 스타일로 덴마크 건축가 테오필 한젠이 디자인한 것이다.
매년 빈 필 신년 음악회가 개최되는, 콘서트고(concertgoer)들의 성지로 추앙받는 빈 무직페라인(Musikverein) 홀 또한 음악동호회의 주도로 설립된 콘서트홀이다. ‘무직페라인(Musikverein)’은 아직 베토벤이 건재하던 1812년 그를 추종하던 중산계급 애호가들이 오페라 중심으로 돌아가던 당시 음악문화를 견제하고자 결성한 아마추어 동호회 이름이다. 우리말로 ‘악우협회’ 또는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의미다. 이 집단은 구성원들의 걸출한 사회적, 경제적 신분으로 빈 음악문화를 주도했다. 베토벤의 제자였던 루돌프 대공의 적극적인 비호와 후원 아래 이들은 음악회를 주최했다. 또한 음악원을 설립했으며 고유의 잡지를 창간 운영하며 언론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들의 활동은 당시 음악 애호활동의 모범으로 각광을 받았으며 세계 각지에 유사한 음악협회가 발족했다. 1870년, 이들은 마침내 자체 콘서트홀을 건립하기에 이르렀는데 그것이 바로 무직페라인 홀이다.

무직페라인 홀은 콘서트홀 가운데에서 가장 호사스럽기로도 유명한 장소다. 웅장한 그리스 신전을 연상시키는 건물 내 외의 분위기다. 디자인을 맡은 데오필 폰 한젠이 그리스 유학파였기 때문이다. 온통 화사한 황금색으로 치장되어 ‘황금홀’이라고 불린다. 1774석 규모의 대 연주회장에는 프란츠 멜니츠키가 조각한 32개의 여신상이 발코니 석을 떠받치고 있다. 천정에는 아우구스트 아이젠멩거가 아폴로와 아홉 명의 뮤즈를 그려 놓았다. 좌우 벽면에 나 있는 40여 개의 창문과 20여 개의 발코니석 출입문 사이사이는 화려한 인테리어 장식으로 치장되어 있다.


▎빈 필의 신년음악회. 매해 신년 초 빈 무직페라인 황금홀에서 개최된다.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클래식 이벤트 중 하나로 전 세계에 중계된다. / 사진제공·노승림
근대 기술이 전혀 도입되지 않은 이 콘서트홀의 음향은 여전히 세계 최고로 꼽힌다. 지휘자 브루노 발터는 음악이 그토록 아름다운 것임을 무직페라인 홀에서 지휘하고 나서야 깨달았다고 극찬했다. 1970년 개관 100주년 기념식에서 오스트리아 작가 한스 바이겔은 “세상 모든 홀이 황금홀만큼만 지어졌다면 마이크의 발명은 필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직페라인 홀의 상주 악단은 빈 필이다. 빈 필은 19세기 오페라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빈 음악문화에 반기를 든 궁정악단 단원들이 결성했다. 궁정이나 귀족들로부터 독립한 일종의 오케스트라 자치 공화국이다. 즉, 단체의 행정 및 운영과 관련한 모든 결정이 단원들의 투표로 좌우된다. 본래 케른트너토어 오페라극장을 본거지로 활동하던 이들은 무직페라인 홀이 개관하자마자 미련 없이 둥지를 옮겼다. 인기가 급상승한 그들의 청중 수를 오페라극장의 객석이 감당하지 못한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극음악을 배제한 순수 기악음악을 지향하는 그들의 이념에는 콘서트 전용홀인 무직페라인 홀이 더 적합했다. 이처럼 무직페라인 홀은 단순한 공연장이 아니라 연주단체와 청중이 공유하는 이데올로기가 최고로 사치스럽게 승화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허바우 | 빌럼 케스의 열정이 헌정된 뮤직홀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허바우 대공연장. 어느 좌석에 앉아도 최고 수준의 음향으로 감상할 수 있어 대부분의 경우 모든 티켓을 같은 가격대로 판매한다. 무대의 측면 계단은 연주자와 지휘자의 입장을 위한 것이다.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의 본거지인 암스테르담의 콘세르트허바우는 앞의 두 공연장과 출생 배경이 살짝 다르다. 활동하고 있는 악단의 공연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공연장이 지어진 게 아니라 콘서트홀이 먼저 세워지고 뒤늦게 상주 악단을 창단했다. 1880년대 상업적으로 번창한 인구 30만 도시 암스테르담은 오케스트라 문화가 미미했다. 대부분 가정에서 개최되는 실내악 또는 야외 음악회를 선호했다. 가끔 급조된 오케스트라 공연이 개최됐지만 기존 공연장은 시설이 불편했고 연주는 형편없었으며 무엇보다 음향이 최악이었다. 암스테르담을 방문한 브람스는 음악회를 제대로 보려면 네덜란드의 수도보다 변방인 유트레히트에 가는 편이 낫다고 비아냥거렸다.

1881년 한 시사주간지에 이러한 열악한 음악환경을 대대적으로 고발하는 기사가 실렸다. 일국의 수도이면서 제대로 된 콘서트홀도, 오케스트라도 하나 없어 문화적 후진국임을 개탄하는 내용이었다. 이 기사는 ‘예술은 정부 소관이 아니다’라는 정부 입장까지 폭로했다. 충격을 받은 암스테르담 음악애호가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고자 자발적으로 팔을 걷고 나서기 시작했다. 은행가 등 암스테르담을 대표하는 중산계급 음악애호가 6명을 주축으로 한 ‘콘서트하우스 건립을 위한 임시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듬해 콘세르트허바우(=콘서트 하우스) 재단이 설립됐다. 이 움직임은 곧 범시민운동으로 확산됐다.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예산을 확보한 재단은 1882년 주식회사 ‘콘세르트허바우’를 설립하고 1883년 공모전에 우승한 설계도를 바탕으로 공사에 들어갔다. 불충분한 예산과시 의회의 비협조 탓에 공사 중단이 거듭된 끝에 1888년 4월 11일 콘세르트허바우는 마침내 문을 열었다.

이어서 재단은 상주할 오케스트라를 창단해줄 지휘자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최고 악단을 목표로 베를린에서 한참 이름을 날리던 지휘자 한스 폰 뷜로를 섭외했다. 신흥 공연장도, 아직 형체도 없는 악단을 신뢰할 수 없던 뷜로는 자국 출신의 지휘자를 물색해보라며 점잖게 거절했다. 이에 재단은 네덜란드 출신의 지휘자 빌럼 케스를 영입했다. 56명 규모의 콘세르 트허바우 재단 오케스트라가 그 형체를 갖춘 것은 공연장이 개관한 지 반년 후의 일이었다.


▎콘세르트허바우 외관. 1884년 라이프치히에서 개관한 ‘노이에스 게반트하우스’를 모델로 해서 설계했다. / 사진제공·노승림
케스는 다행히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오케스트라를 조련했을 뿐 아니라 암스테르담 음악 문화를 통째로 개혁했다. 살롱 콘서트 아니면 야외음악회 위주로 열리던 암스테르담 음악회는 당시만 해도 자유분방하고 캐주얼한 분위기였다. 공연관람 중 음료와 다과를 겸하는 것은 물론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즉 공연장은 배경음악이 연주되는 사교 공간이었다. 하지만 케스는 공연장 내에 다과 테이블을 모두 치우고 웨이터 출입도 금지시켰다. 지각한 청중들의 입장도 금지시켰다. 프로그램 또한 베토벤, 바그너와 같은 중후한 레퍼토리 위주로 구성해서 단원들을 피나게 훈련시켰다. 가벼운 분위기를 즐기던 암스테르담 시민들은 이러한 진지한 변화에 처음에는 반발했지만 곧 적응했다. 콘세르트허바우 공연장은 곧 최고 수준의 악단과 관객을 가지게 되었다.

2대 상임지휘자로 취임한 빌렘 멩겔베르크 또한 네덜란드가 낳은 세계 최고의 독재 지휘자로 유명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난해하기로 소문난 동시대 작곡가 말러 교향곡을 연주하며 악단과 청중들을 더욱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1920년에는 말러 페스티벌을 개최해 말러가 작곡한 교향곡을 모두 연주했다. 그중 4번 교향곡은 말러가 직접 찾아와 지휘했는데, 이때 그가 두고 간 자필 수정 악보가 암스테르담에 아직도 남아 있다.

순식간에 조련된 악단과 청중과 달리 공연장은 처음부터 훌륭한 사운드를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 무대 경사가 심해 악기들의 밸런스는 엉망이었다. 금관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 현악기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1899년 멩겔베르크의 요청으로 건축가 판 헨트는 무대 높이를 낮추고 기울기도 완만하게 수정했다. 콘세르트허바우의 명물인 두 갈래 계단도 이 당시 보수공사 중에 추가로 설치된 것이다. 무대 정상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이 계단들은 각각 지휘자와 독주자의 등장을 위한 것이다.

런던 로열 앨버트 홀 | 빅토리아 여왕의 사부곡이 메아리


▎로열 앨버트 홀에서 열린 BBC 프롬스 공연. ‘영국문화의 심장’이라 불리는 로열 앨버트 홀은 특히 매년 여름 100회 이상의 콘서트가 펼쳐지는 영국 최대의 음악 페스티벌 BBC 프롬스의 본거지로 유명하다.
민간 주도의 콘서트홀 역사를 말할 때 런던을 빼놓을 수는 없다. 런던은 음악이 자본주의에 적응하는 속도가 그 어느 곳보다 빠른 도시였다. 런던의 음악 문화를 주도한 단체는 1813년 결성된 필하모닉 협회였다. 고작 3명의 직업 연주가의 발기로 출범한 이 협회는 불과 3년 만에 유료회원들의 회비만으로 수익을 낼 만큼 급성장했다. 콘서트 흥행을 조장하는 공연매니저가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도시도,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청중들을 감당하기 위해 최초의 전용 콘서트홀이 세워진 곳도 런던이었다. 1690년 런던 찰스가에 세계 최초로 근대적 의미의 콘서트홀이 들어섰으며 1775년에는 1000석 규모의 하노버 스퀘어 룸이 위풍당당하게 개관했다.(이 콘서트홀은 1900년에 철거됐다) 대형 콘서트홀의 등장으로 입장료는 더욱 저렴해진 반면 공연진행은 더욱 전문적으로 진화하는 효과가 따라왔다.

시민들의 주도로 활성화되던 클래식 공연문화가 국가에 주도권을 이양하는 계기가 된 것은 19세기 빅토리아 여왕이 세운 로열 앨버트 홀이었다. 1851년 런던 하이드 파크에서 만국박람회를 성공리에 개최한 앨버트 공은 박람회 정신을 후손에게 전하기 위해 ‘산업 및 문화교육’을 위한 건물을 짓고자 했다. 책임을 맡은 재상 헨리 콜은 부족한 건립 기금을 꾸리고자 객석을 하나당 100파운드에 파는 아이디어를 짜냈다. 오늘날 공연장 객석 기증문화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이 아이디어로 10만 파운드를 모은 콜은 객석 수 5500석의 영국 최대 규모의 콘서트홀을 지을 수 있었다. 이 공연장 규모는 무직페라인 홀, 보스턴 심포니 홀, 암스테르담의 콘세르트허바우 홀에 비해 무려 5배가 넘는다.


▎로열 앨버트 홀의 외관.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 앨버트 공의 주도로 1853년 착공되어 1871년 개관했다. / 사진제공·노승림
하지만 앨버트 공은 공연장이 완공되기 전인 1861년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1867년 정초식에 참석한 빅토리아 여왕은 남편의 뜻을 기려 건물 이름을 ‘로열 앨버트 홀’로 명명했다. 1871년 3월 29일 개관식이 거행되던 날 남편 생각에 목이 멘 여왕을 대신해서 아들 에드워드가 개관을 선언했다. 한데, 당시 왕실 기록을 보면 이 에드워드의 선언이 홀 여기저기에 메아리 쳐서 청중들에게 두 번씩 들렸다고 적혀 있다. 이 때문에 앨버트 홀에서는 메아리를 포함해서 연주를 두 번 들을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생겼다. 지나친 잔향효과 때문에 생기는 이 메아리는 사실 개관 전 음향 테스트에서 이미 발견되었다. 여왕은 고인이 된 남편에게 민망하다는 이유로 보수공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여왕이 사망한 후 앨버트 홀은 다양한 아이디어를 동원해 음향을 개선하고자 노력했다. 1969년에는 메아리를 흡수하고자 강화유리 섬유로 만든 원판을 천정에 달았다. 이번에는 거꾸로 음압이 줄어들어 사운드가 빈약해지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이 원판은 ‘버섯’ 또는 ‘비행접시’라는 별명으로 로열 앨버트 홀의 또 다른 굴욕적인 명물이 되었다.

빅토리아 여왕이 앨버트 홀의 음향문제를 무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공연장이 클래식 음악 전용홀로 건립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산업 및 문화교육’을 위한 공간이라는 앨버트 공의 유지가 있었기에 그동안 콘서트 이외에도 다양한 행사가 치러졌다. 모르스 부호 시연회와 전기조명 시연회, 자전거 전시회가 이곳에서 개최되었다. 음식과 와인 박람회도 열렸다. 1908년 런던올림픽 중에는 권투 경기가 치러졌고 이듬해에는 실내 마라톤 대회라는 실로 창의적인 스포츠 행사가 이곳에서 개최됐다. 이 대회에 초청된 유럽의 내로라하는 마라토너들은 공연장을 무려 524 바퀴나 돌아야 했다.

그럼에도 클래식 콘서트와 로열 앨버트 홀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바로 영국 최대의 클래식 축제인 프롬스(The Proms)가 매년 이곳에서 개최되기 때문이다. 프롬나드 콘서트(Promenade Concert)의 준말인 프롬스의 역사는 18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축제는 본래 1893년 개관한 3000석 규모의 퀸즈 홀에서 개최됐다. 2차대전 중 이 공연장은 독일군의 공습으로 파괴된 뒤 앨버트 홀로 본거지를 옮겼다. 매년 여름 세계 각국의 유명 오케스트라가 찾아와서 100회 내외의 공연을 펼치는 프롬스는 세계 최대 규모이자 가장 대중적인 클래식 페스티벌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대중적’이란 의미는 객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메인 무대 앞 객석에는 의자 대신 플로어가 설치되어 있다. 이곳은 공연 당일 매표소 앞에 줄을 서서 5파운드짜리 티켓을 끊고 입장한 관객들이 선착순으로 차지할 수 있는 자리다. 여기서 청중들은 피크닉을 온 것처럼 돗자리를 깐다. 저마다 자유분방하게 자리를 잡고 공연을 코앞에서 펼쳐지는 공연을 감상할 수 있다. 공연관람 문화가 엄격한 콘세르트허바우와는 상반된 분위기를 바로 앨버트 홀에서 경험할 수 있다.

보스턴 심포니 홀 | 콘서트홀의 스트라디바리우스


▎보스턴 심포니 대공연장. 하버드 대학 물리학자 새빈이 설계에 참여해 현대적인 음향학 이론이 최초로 도입된 콘서트홀이다. ‘콘서트홀의 스트라 디바리우스’라는 별명을 얻었다. / 사진제공·노승림
19세기 중반 유럽의 오케스트라 문화가 미국에 전파됐지만 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다. 과거 유럽 귀족들의 실내악 공연처럼 부유층을 위한 ‘그들만의 리그’로 정착한 것이다. 보스턴 출신의 기업가 히긴슨은 이런 상류 계층의 폐쇄적인 향유 방식에 불만이 많았다. 음악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던 그는 스스로 피아니스트가 되고자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불운하게도 손가락 부상을 당해 꿈을 접어야 했다. 하지만 유럽에서 경험한 오케스트라 문화를 미국에 제대로 꽃피우고자 마음먹었다. 1881년 경영 일선에서 은퇴한 뒤 그는 지휘자 조지 헨첼을 영입해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이 악단은 1852년 문을 연 보스턴 뮤직홀을 거점으로 삼았다.

보스턴 심포니의 출현은 보스턴 시민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전에 터무니없이 판매되던 음악회 티켓과 달리 보스턴 심포니 공연은 5 달러에서 10 달러 안팎으로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었다. 이지 리스닝 프로그램도 꾸준히 개발하여 애호가 층을 확대하면서 보스턴 심포니는 친서민 악단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1893년 이들에게 날벼락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보스턴 도심을 가로지르는 고가 철도공사 계획안이 통과되었다. 이 철로가 지나가는 경로에 뮤직홀이 포함되어 있었다. 뮤직홀이 철거 위기에 놓이자 누구보다 반발한 것은 바로 보스턴 심포니 유료 회원인 시민들이었다. 철도 건설 찬반을 묻는 투표에서 시민들은 압도적으로 반대표를 행사했다. 뮤직홀은 구제되었지만 정작 히긴슨는 새로운 콘서트홀을 세울 결심을 굳혔다. 기존의 뮤직홀은 상가 중심지에 위치해 주변 환경이 더러웠다. 무엇보다 오케스트라 공연 이외에 종교 집회며 강연, 권투경기 등도 함께 치러지는 다목적 홀이었다.

불황의 와중에도 히긴슨의 집념이 빛을 발했다. 1900년 개관한 보스턴 심포니 홀은 미국인 특유의 검소함과 실용성이 반영된 건축물이다. 당시 건축디자이너로 영입된 미국 최고의 건축가 맥킴은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프로젝트에 뛰어들었다. 그의 설계도에는 화려한 장식과 조각상으로 치장한 그리스 신전과 같은 콘서트홀이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예산부족과 건축비를 절감하라는 히긴슨의 끊임없는 잔소리 속에 매킴은 자신의 꿈을 접어야 했다. 슬레이트 대신 동판으로 마감된 지붕을 가진 콘서트홀은 멀리서 보아서 그냥 관공서 빌딩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외적인 화려함을 희생하는 대신, 히긴슨은 음향에 아낌없이 투자했다. 하버드대 물리학자 새빈을 전격적으로 초빙했다. 공간의 잔향시간을 과학적으로 분석, 계산하여 완성된 심포니 홀은 현대 음향악 이론을 도입한 최초의 콘서트홀이다. 이후 새빈은 ‘현대 건축 음향학의 선구자’라 칭송받았다. 보스턴 심포니 홀은 ‘콘서트홀의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별명을 얻었다.

베를린 필하모닉 홀 | 빈야드 음악홀 혁명의 발생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콘서트 홀의 기준으로 우뚝 선 베를린 필하모닉 홀. 한스 샤로운의 설계를 카라얀이 적극 지지해 세운 연주회장이다.
2차대전 이후 콘서트홀의 새로운 기준으로 우뚝 선 것은 단연 베를린 필하모닉 홀이다. 골든실버 금속판을 이어 만든 굽이쳐 흐르는 천막 모양의 외관이다. 콘서트홀은 물론 포스트 모더니즘 건축의 백미로도 일컬어진다. 1882년 창단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본래 직물거래소를 개조해 만든 게반트하우스 홀처럼 폐장 직전의 롤러스케이트장을 콘서트홀로 개축한 필하모니 홀을 본거지로 삼고 있었다. 그럼에도 음향은 매우 훌륭했다고 한다.

이 공연장은 1944년 연합군의 폭격으로 무너졌다. 종전 뒤 상임지휘자 푸르트뱅글러가 나치에 협력한 혐의로 활동이 금지되면서 베를린 필은 집도, 지도자도 잃은 떠돌이 처지에 직면했다.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정신적 자존심만은 잃지 않았던 베를린 시민들은 폐허가 된 도시의 그 어떤 건물보다도 필하모닉 홀 복구를 우선시했다. 끼니를 굶어가며 콘서트 홀 재건을 위한 복권을 샀고 모금도 순조롭게 진행됐다. 1970∼80년대에야 복구된 독일 내 다른 콘서트홀들과 달리 베를린 필하모닉 홀이 1963년 일찌감치 개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협조 덕분이었다.


▎1963년 재건된 베를린 필하모닉 홀은 당시 통념을 뒤집는 ‘빈야드 스타일’로 건축됐다. / 사진제공·노승림
현재의 베를린 필하모닉 홀은 공모전에 당선된 한스 샤로운의 작품이다. 샤로운의 설계는 당시 통념을 뒤집는 혁명적인 ‘빈야드 스타일’이었다. 이 용어는 무대를 중심으로 비스듬히 경사져 올라가는 객석의 모양이 서양의 계단식 포도밭(vineyard)을 연상케 하는 것에서 유래됐다. 이러한 공간 구성에는 두 가지 철학이 반영됐다. 첫째, 음악을 중심으로 연주자와 관객 사이에 일체감을 형성할 것, 둘째, 어느 좌석에 앉든 최고의 음향을 즐길 수 있게 하여 부자와 가난한 자의 구분을 없애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샤로운의 설계는 몹시 파격적이라 당시 심사위원들의 반감을 샀다. 코너에 몰린 샤로운을 지지하며 힘을 보탠 것은 카라얀이었다. 샤로운의 음악 철학과 디자인에 깊은 감흥을 받은 카라얀은 급기야 샤로운의 설계가 아니면 베를린 필을 떠나버리겠다고 폭탄선언까지 던졌다. 카라얀의 혜안은 틀림없었다. 이후 세워진 내로라하는 콘서트홀은 모두 샤로운의 디자인을 따랐다. 그의 디자인은 콘서트홀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았고, 이 설계가 제시하는 ‘2초 잔향’은 오늘날 콘서트홀 음향의 표준으로 거론되고 있다.(종전 뒤 재건된 세 번째 게반트하우스 또한 베를린 필하모닉 홀을 모델로 삼았다)

우여곡절 끝에 샤로운의 작품이 채택된 뒤에는 부지 선정 문제가 또 불거졌다. 본래 서베를린 중심 시가지에 세워질 예정이었던 콘서트홀은 ‘서독만이 아닌 독일 전체의 베를린 필’을 주장하던 시민들의 요청에 따라 당시 서베를린 변두리인 베를린 장벽 근처에 세워졌다. 장벽이 무너진 오늘날 이 홀은 통일 베를린의 한가운데에서 찬란하게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미래를 내다본 탁월한 결정이 아닐 수 없다.

도쿄 산토리 홀 | ‘소리의 보석상자’로 카라얀 극찬


▎도쿄 산토리 홀의 내부. 빈야드 스타일로 건축된 이 홀은 기획 단계부터 카라얀이 자문위원으로 참여해 주목을 끌었다. / 사진제공·노승림
1986년 도쿄에 개관한 산토리홀은 주류 제조 및 판매로 이름난 산토리사가 창립 60주년을 기념해 건립한 클래식 전용 콘서트홀이다. 기획단계에서부터 카라얀이 자문위원으로 참여해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카라얀의 소개로 베를린 필하모닉 홀을 디자인한 샤로운이 건축에 가담해 빈야드 홀을 다시 한 번 완성했다. 완공 직후 카라얀은 ‘소리의 보석상자’라며 산토리 홀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개관 기념 콘서트에 초청받은 빈 필은 산토리홀의 뛰어난 음향에 매료되어 매년 산토리 홀에서 연주를 하기로 산토리사와 협정을 맺었다. 이것이 매년 10월마다 산토리 홀에서 개최되는 ‘빈 필하모닉 위크’다.

유럽의 콘서트홀이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세워진 것과 달리 산토리 홀은 기업의 메세나 정신으로 건립됐다. 산토리 기업은 ‘메세나’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1960년대부터 문화 기부에 깊은 관심을 보여왔고 이를 사회와의 소통방법으로 적극 활용했다. 이익의 3분의 1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의미의 ‘이익 삼분주의’는 창업자 신 이치로 회장의 경영 이념이었다. 이익 삼분주의는 산토리 메세나 활동의 근간이다. 이를 바탕으로 1975년 문화 활동을 전문으로 다루는 사회업무부라는 부서를 신설했다. 1979년에는 ‘생활문화기업’을 기업이념으로 내세우며 적극적으로 문화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산토리 홀을 개관한 이후인 1987년에는 기존의 메세나 활동을 총괄하기 위해 사회업무부를 ‘문화사업부’로 확대 개편했다.

산토리 홀은 이러한 산토리의 문화적 이미지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브랜드다. ‘산토리 홀 효과’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로 시민들은 산토리 브랜드를 문화와 결합시켜 인식하고 있다. 산토리 홀에서는 매년 약 80회의 콘서트가 산토리재단 자체 기획공연으로 개최된다. 덕분에 유럽의 내로라하는 오케스트라와 저명 아티스트들이 대부분 산토리 홀에 족적을 남겼다. 또한 대중에게 등한시되는 동시대 음악을 후원하기 위해 세계적인 작곡가에게 신작을 위촉하여 연주하기도 한다.

1986년 개관과 더불어 국제 작곡 위촉 시리즈에 초청된 첫 번째 작곡가는 다름아닌 윤이상이었다. 창업 70주년에 설립된 산토리 음악재단이 수여하는 산토리 음악상과 아쿠다가와 작곡상은 일본 최고 권위의 음악상으로 유명하다. 이와 같은 산토리의 문화지원은 1990년대 말 시작된 경제위기 속에서도 수억 엔의 적자를 감수하는 와중에도 축소되지 않아 세간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산토리 위스키는 산토리가 파는 것이 아니라 문화가 판다”라든가, “산토리는 위스키가 아닌 문화를 판다”는 말이 회자된다.

이처럼 반듯한 이미지와 달리, 산토리 그룹의 기업구조는 사실 썩 건전하지 못한 축에 속한다. 그룹 주식의 90%를 소유주의 친인척들이 소유하고 있는 지극히 폐쇄적인 가족회사다. 흥미로운 사실은 산토리가 그들의 폐쇄적인 경영체제의 이유를 문화지원 사업을 위해서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주식을 상장하면 이익을 우선시하는 주주들 때문에 문화예술 지원이 축소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산토리 그룹의 입장에 일본 사회는 별 이의 없이 수긍하고 면죄부를 주고 있다. 그만큼 산토리의 문화혜택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노승림 - 공연예술전문지 <월간 객석> 기자와 성남아트센터 홍보과장을 거쳐 대원문화재단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숙명여대에서 공연예술 사회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및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이화여대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영국 워릭대에서 문화정책 석·박사과정을 공부했다. 저서로는 <나와 당신의 베토벤>(공저), 옮긴 책으로는 <페기 구겐하임> 등이 있다.

201609호 (201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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