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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브렉시트와 영국인의 내면 탐구] 영국 시민권 가진 한 영문학자의 현지 리포트 

“인류 보편애로 브렉시트의 출구 찾을 것” 

이석광 국립경상대 영문학과 교수
앙겔라 메르켈의 주권 침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찬성)… 탈퇴 찬성표 던진 계층이 가장 큰 피해볼 것(반대)
영국인들은 대체로 다른 사람의 눈총을 의식해 자신의 행동을 삼간다. 그러나 이제 영국 젊은이들은 당혹스러워 한다. 영국인이 총체적으로 무지했음을 전 세계에 드러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번 국민투표는 ‘거짓정보’에 호도돼 치러졌다고 여긴다. 그렇다면 앞으로 희망은 있는가? “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그 근거는 영국 청년들의 코스모폴리턴적 지혜와 진취적 기상이다.


▎영국 런던의 옥스퍼드 서커스 거리. 영국 정치인들은 브렉시트를 쟁점화하여 국민의 속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필자는 지난 6월 23일에 행해진 EU 국민투표에서 ‘잔류’에 한 표를 더했다. 직장인이나 학생들이 참여하기 어려운 낮 시간이었던 이유도 있겠지만 투표소에는 거동이 불편해 보이는 어르신들을 포함한 대다수의 노년층이 눈에 띄었다. 투표일 다음 날인 24일에는 출근 전 시간을 활용해 지역 동문 모임이 오전 7시부터 열렸다. 필자는 모임 장소에 도착해서야 투표 결과를 알았다. 대부분의 동문이 사업가였다. 이들은 밤사이 결정된 투표결과를 놓고 환율, 증시의 움직임을 언급하며 불안에 떨었다.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동문 모임에 초청된 토리당(보수당)의 지역 국회의원인 크리스 화이트(Chris White)는 최종 투표결과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도 개인적 평가를 일절 덧붙이지 않았다. 잔류에 표를 던진 청중 중 그 누구도 투표결과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다. 모두 예민해진 상황에서 불안해 하는 사람들을 배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전 9시쯤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라디오에서는 투표결과에 따른 전국적 동요상황이 보도되고 있었다. 데이빗 캐머런(David Cameron) 총리의 사임 표명 소식과 함께 보리스 존슨(Boris Jonson)이 당장 보수당 당수가 될 것이라는 예측 보도가 나왔다. 하지만 존슨 자신이 UKIP(극우 독립당)가 표방하는 영국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도 동시에 들려왔다. 불현듯 투표일 하루 전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UKIP 당수 나이젤 파라지(Nigel Farage)의 EU 탈퇴 캠페인 슬로건이 떠올랐다. ‘가슴으로 투표하십시오!(Vote with your heart!)’

직설적인 목소리로 세계를 뒤흔들다


▎헤이버링의 롬퍼드 시장의 생선가게에서 일하는 데이비드 크로스비. 강한 EU 탈퇴 지지자인 그에게 브렉시트는 국경 문제뿐 아니라 영토와 영해 문제와도 관련 있다.
그의 막힘 없는 연설은 위기에 봉착한 국민의료보험(NHS)의 운영문제와 진전이 없는 실업문제로 점차 인내심을 잃어가던 국민들의 마음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모호하게 불편한 마음을 안고 살던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특히 그랬다. 애써 정확한 정보를 찾아서 분석하는 수고를 거치지 않고도 권리행사를 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는 냉정한 사람이나 감정적인 사람이나 동일한 한 표를 보장한다.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취하더라도 일상에서는 자연스럽게 융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번 투표 결과를 접하고 새삼 되새김한 생각이었다.

이번 투표는 정치투표(political vote)가 아닌 항의투표(protest vote)의 성격이 강했다. 무엇에 대해 항의를 한 것인가? 외국인 유입에 대한 항의다. 이번 브렉시트 투표결과에 상당한 공헌을 한 노동자 계층은 분노했다. 지금까지의 선거에서 자신들의 삶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총리가 되고, 그 여파로 자신들이 삶이 원하지 않은 방식으로 일그러졌다고 생각했다. 정치인은 언제나 국민을 배신했다고 그들은 믿었다. 정치인과 돈 많은 사람들 위주로 사회가 움직여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국민투표는 복잡한 정치적 해석이 필요 없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직설적으로 표출하면 그뿐인 찬반투표였다. 모처럼 주어진 특별한 기회에 사람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그대로 내질렀고, 그 결과가 고스란히 전 세계를 흔들었다. 자신들의 목소리가 즉각적으로 받아들여졌고, 세상의 반응을 한눈에 보게 되는 짜릿한 경험을 했다. 증시하락, 파운드 가치의 폭락, 전문가들의 부정적인 경제 전망이 잇따랐다. 전국 곳곳에서 인종차별적 폭력행위 등의 혼란을 보면서도 그들은 당장의 승리를 움켜쥐려는 의지를 내려놓지 않았다. EU 탈퇴에 투표한 유권자 중 7%만이 자신의 투표 행위를 후회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많은 사람이 EU 탈퇴에 얼마나 결연한 태도를 보였는지 잘 알 수 있다.

영국에서는 인도나 파키스탄 이민자들 다음으로 폴란드인들의 인구 비율이 높다. 대체로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이라는 평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주 이민문제의 도마에 오르곤 한다. 2004년 9만5000명에 불과했던 폴란드인의 수는 현재 100만 명을 웃돈다. 영국에 거주하는 EU 회원국 국민 전체의 절반에 해당한다. 그러니 확연하게 이들의 존재가 영국인들에게 각인된 것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폴란드인들을 만날 기회가 별로 없다. 그들과 이웃해 살고 있는 지역 사람들에게 폴란드인들이 범죄에 연루되거나 사회복지제도를 남용하는 경우를 직접 본 경험이 있느냐고 물은 적은 있다.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미디어를 통해 들은 적이 있다는 답을 들었다.

그들은 <채널 5>에서 방영된 ‘Benefits Britain: Life On the Dole(보조금으로 먹고 사는 영국)’이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보조금에 의존해 사는 폴란드인을 포함한 EU 이민자들의 생활 태도를 보았다고 했다. 영국인의 사례가 대부분이지만 드물게 루마니아인과 같은 EU 이민자의 사례가 방영됐다고 한다. 11명의 자녀와 11명의 손주로 구성된 가족이 정부보조금에 의존해서 살고 있는 내용이다. 이들은 폴란드 사람이 아님에도 시청자들은 루마니아인을 폴란드 사람과 동일시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해당 프로그램이 최근에 재방송됐다. EU 국가로 편입돼 회원 국가 간에 인구이동이 자유로워진 때가 2004년이다. 그 후, 영국으로 이주해 온 폴란드인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수난을 겪고 있는 것이다.

‘인(In)은 해로운 것, 아웃(Out)은 유익한 것’


▎엘리자베스 여왕이 참석하는 영국 상원 개원식. 일부 영국 보수주의자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영국의 일에 관여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영국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15년 해외로 이주한 영국민의 수보다 국내로 들어온 EU 이민자 수가 18만 4000명 더 많았고 비 EU 이민자의 수는 영국민의 해외(비EU 국가) 이주자 수보다 14만 9000명이 더 많았다. 그러나 지난 5월 미디어에서는 EU 이민자뿐 아니라 비EU 이민자까지 포함한 33만3000명을 해외 이주 영국인 수와 비교한 국내거주 초과 이민자 수로 보도했다. 결국 이 수치는 EU 회원국가 간 자유이동으로 인한 국내 인구유입 통제권을 찾아오자는 주장을 불러왔다. 이를 이용한 보리스 존슨(Boris Jonson)이나 나이젤 파라지(Nigel Farage)와 같은 정치인들의 단순화법에 의해 ‘인(In)은 해로운 것, 아웃(Out)은 유익한 것’이라는 의미로 이분화되었고, 결국 이번 브렉시트 국민투표의 판단 기준으로 활용됐다. 폴란드인들을 사례로 이용해 유럽에서의 인구유입 통제권을 찾아오자는 선거 전략이었지만 이들은 암묵적으로 전 외국인을 대상으로 삼았다. 일반 유권자들도 전체 외국인 유입 통제권 회복을 염두에 두고 투표장으로 나선 것이다.

아일랜드가 고향인 Y는 더블린에 갈 때마다 급격히 늘어난 외국인 수에 고향이 낯설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영국도 EU에 계속 남아 있으면 곧 더블린처럼 외국인 수가 홍수처럼 늘어나게 되어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모두 잃게 되지 않을까 두렵다고 했다. 영국인 남편을 만나 50년 이상을 영국에서 살면서도 자신의 국적을 바꾸지 않았던 그녀다. 브렉시트가 이뤄지면 다소 불편을 겪게 될 것을 알면서도 ‘탈퇴’를 선택했다. 자손들이 살아갈 미래를 위해 자신이 믿는 한 도움이 될 만한 일에 힘을 실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M은 직장 일은 물론 가족을 돌보는 일로 바쁜 일상을 보낸다. 그녀는 자녀 한 명 없이 혼자 살아오다 병을 얻은 이웃집 중년을 보호자처럼 돌본다. 이웃을 위해 하루에도 몇 차례씩 병원을 드나드는 그는 기본적인 문제들로 병원 관계자들과 입씨름하는 일에 지쳤다. ‘방치’에 가까운 병원 측의 무성의에 대해 수없이 항의도 해보았다. 이 모든 문제가 제한 없이 받아들여진 외국인들로 인해 야기된 것이며, EU 규정에 묶여 대책 없이 이용당하는 무력한 정부 탓이라 당당히 주장한다. 현재 일어나는 부정적인 현상들은 일시적인 것이어서 점차 안정을 찾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결국엔 강한 브리튼의 저력을 발판으로 최상의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이란 확신이다. M은 ‘탈퇴’에 힘을 실은 자신에게 쏟아질 수도 있는 비난을 일축했다. 어떤 이유로든 이번 투표결과가 존중되지 않는다면 분노에 찬 사람들이 거리폭동을 일으킬 것이고 사회는 더욱 혼란에 빠질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브렉시트는 절대로 되돌려져서는 안 되며, 이 일로 영국의 경제가 어려워지게 된다하더라도 그것을 감당하겠다는 태도가 결연하다. 그 결연함을 가지고 투표장에 나간 것이다.

D는 투표 당일 공교롭게도 EU 국가인 스페인에 머물고 있어서 투표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EU 탈퇴에 뚜렷한 명분을 가지고 있다. 그 명분은 앙겔라 메르켈이 조국 영국에 대한 주권 침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독일은 조상이 살던 곳을 침범해 폭격을 가했던 국가다. 영국의 적국이었던 나라의 수상이 어떻게 영국의 일에 관여할 수 있단 말인가? 그건 모순이다. 이젠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이 단계에서 일단 EU와의 관계를 끊고 조국의 내부를 정돈해야 한다는 것이다.

D는 현재와 과거의 독일을 통시적으로 연관지어 EU 탈퇴의 명분을 ‘주권회복’으로 내세우고 있다. D가 생각하는 조국 영국은 그녀의 조상 때부터 살아오던 곳이었다. 그녀 말에 의하면 혹 영국이 망할 경우 타국에서 온 이민자들은 돌아갈 곳이 있겠지만 자신은 이곳에서 조국과 함께 망해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산다는 것이다. EU 탈퇴 이후 스페인에 가기 위해 비자를 받는 수고는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D와 같은 명분을 가진 사람들이 투표장으로 간 것이다.

무슬림 출신인 새 런던시장 사디크 칸(Sadiq Khan)은 브렉시트 투표 전 웸블리 구장에서 벌어진 공개토론에서 이번 브렉시트 투표를 ‘project hatred(분노 표출)’라고 규정했다. 며칠 전 캔터베리 주교 저스틴 웰비(Justin Welby) 역시 본인이 수년간 목도해온 ‘증오와 독’을 표출하는 계기로 이번 국민 투표가 이용됐다고 지적했다. 브렉시트 국민투표의 다른 다른 한편에는 제노포비아(xenophobia: 외국인 혐오)가 배경으로 깔려 있음을 인정한 셈이다.

브렉시트 배경엔 영국의 계급전통이 있다


▎파키스탄계 이민자 출신으로 노동당 후보로 나서 런던시장에 당선된 사디크 칸(45).
다른 사회 계층은 이번 투표결과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중산층 이상의 계층이 이번 사태를 보는 관점은 간단하다. 그들의 대다수가 유로 잔류에 동의한 것은 경제적, 상업적 이유가 크다. 인구의 자유 유입(이동이 아니고)은 제어해야 하지만 국경을 통제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차기 영국 총리로 내정된 테레사 메이가 현재 영국에 거주하는 200만 명의 EU 국민이 협상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중산층 평당원을 의식한 발언으로 보인다.

EU 탈퇴 후에도 중상층 이상의 국민은 자신들의 완충장치를 이용해 경제위기를 잘 극복할 것이다. 그러나 중간계층과 그 이하 계층은 순간 혼란스러워 했고 자책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J는 투표 결과를 보고 경청(listen)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말이 쌍방 소통을 의미하는 것인지, 자신이 어려운 계층의 소리를 듣지 않았다는 자책의 의미인지 물어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영국의 사회구조상 소통이 쉬운 것은 아니다.

영국은 계급사회다. 한 계급 안에서도 스스로 셀 수 없는 또 다른 계층을 나눠 경계를 만든다. 영국에서 상류층과 노동자 계층은 서로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상류층은 현 상태에서도 큰 변화 없이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방어책이 있다. 노동자 계층은 좀처럼 계층이동을 기대할 수 없지만 현 상태라도 유지하며 만족할 수 있는 환경에 살고 있다. 상대적으로 중간계층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잃을 것도, 얻을 것도 많은 사람들이다. 일반적으로 이들은 상류, 또는 하위층과 어울리는 것을 가능한 한 피한다. 이것이 영국의 계층 현실이다. 쓰는 말도 다르고 억양도 달라 서로들 쉽게 알아차린다. 브렉시트는 이런 환경에서 벌어진 일이다.

하층민들이 이번 경우처럼 대거 투표소에 나와 EU 탈퇴에 몰표를 던질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잃을 것이 상대적으로 많은 중간계층은 하층민을 등한시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정치게임으로 시작된 브렉시트


▎보리스 존슨 전 런던시장과 함께 브렉시트 운동을 이끈 마이클 고브 법무장관
실제로 브렉시트가 현실화되어 경제가 어려워지면 피해를 보는 사람은 노동계층과 중간계층이다. 그러나 이 두 계층 간 소통의 기회가 더 많아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노동계층은 어차피 다른 계층에 기대하지 않는다. 특히 중간 노동계층은 수입범위가 사회안전망 보조금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계층이다. 따라서 이들은 열심히 많이 일해야 그나마 휴가라도 갈 수 있다. 늘 바쁘고 피곤한 삶이다. 다른 계층이 다가가지 않으면 소통할 기회는 거의 없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타격을 제일 먼저 받을 계층이 이들이다. 지난 토요일에 한 은행가를 만났다. 그의 가족은 영국에 살고 본인은 스위스에서 일한다. 그 스스로가 투자자들의 자금을 관리해주고 비용을 받지만 그 역시 그 직업으로 인해 중상위층의 삶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그는 이번 브렉시트의 경우 타블로이드지가 노동자층을 오도했다며 등을 나열하며 격분을 토로했다.

그는 “브렉시트가 효력을 얻게 되면 EU 탈퇴에 찬성표를 던진 계층이 가장 큰 피해를 본다”고 말했다. 자금의 흐름을 예의주시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 근거가 있다고 생각했다. 즉 본인이 겪는 일은 아니겠지만 그는 자금 흐름을 통해 노동자계층의 어려움은 예측할 수 있다. 브렉시트로 인한 자금 거래의 장애를 가장 예민하게 느끼는 잔류파 계층의 촉이다.

한 모임에서 은퇴 부부와 이들의 일상에 대해 담소를 나눈 적이 있다. 이들의 일상이 각종 자선사업으로 분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부인에 의하면 “받은 것이 많으니 다시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부부와 같은 계층은 브렉시트가 현실화되어도 뚜렷한 타격 없이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자선행위의 수혜를 받는 계층과는 일상을 나누거나 소통할 기회가 거의 없다. 충격을 분산시킬 수 있는 방책이 서둘러 마련돼야 하는 이유다.

브렉시트를 쟁점화해서 국민들의 속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한 것은 정치인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브렉시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협력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야당은 분당(分黨)의 위기를 겪고 있고, 여당에선 3명의 30년지기 친구들이 서로에게 배신을 당하며 “Et tu, Brute?(부르투스 너마저?)”를 연일 외치고 있다. 보리스 존슨은 암묵적으로 차기 총리로 예정되어 있었고 그의 친구 캐머런은 작년 총선 승리 후 보리스를 내각회의에 참석하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보리스는 EU 잔류를 주장하는 친구 데이빗을 저버리고 EU 탈퇴 진영을 구성했다. 마이클 고브마저 친구 데이빗을 배신하고 존슨과 합류해 이들 둘이 EU 탈퇴를 성사시킨 것이다. 투표 다음날 캐머런은 총리직 사퇴를 언급했고 모두가 예상한 대로 보리스가 총리 경선에 출마하려 했다. 마감시간 전에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고브가 친구 보리스를 배신하고 총리경선에 나섰고 결국 보리스가 경선 포기를 선언했다. 그리고 나서 무명에 가까웠던 앤드리아 레드섬 의원이 총리 경선에 나서자 고브에게 배신당한 보리스가 레드섬을 지지하며 고브 복수전에 나섰으나 레드섬이 경선을 포기하자 소극(笑劇)으로 끝나고 말았다. 국민 안녕에 대한 근심보다 권력 확장에 대한 관심이 이들의 동선을 결정하고 있다고 지인 J는 꼬집었다. 이것이 브렉시트의 실제 현상이다.

“얼마나 무지한지 깨달은 계기”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왼쪽·당시)가 6월 28일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EU) 정상회담에 참석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마이클 고브는 이제 영국 정치사에 웃음거리가 될 것 같다.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고 자라 영문학을 전공한 그다. 아마도 스코틀랜드를 배경으로 한 셰익스피어의 <멕베스>를 각별한 감흥을 가지고 읽었을 것이다. <멕베스> 1장에 마녀들이 나와 장차 멕베스 장군이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멕베스 부인은 남편의 미래에 불확실한 어떤 것도 참지 못하는 여인이다. 그녀는 남편을 종용해 던컨 왕을 죽이고 마녀들의 예언대로 왕좌에 올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멕베스는 거사를 벌이고 왕이 되지만 본인도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고브는 생후 4개월 만에 노동당 지지자인 고브 부부에게 입양되어 자랑스러운 아들로 성장했다. 임종 전 그의 양할머니는 마이클이 장차 영국의 총리가 될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어린 고브는 그 말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옥스퍼드를 졸업한 후 <더타임즈> 등에서 칼럼니스트가 되었고 같은 회사에서 현재의 부인 사라 바인(Sarah Vine)을 만났다. 직업상 필자는 고브가 2010년부터 2014년까지 교육부 장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그와 관련된 기사를 줄곧 읽게 되었고, 그가 이번 국민투표로 당내에서 견고한 기반을 마련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아내 사라는 남편의 정치전선에 불확실성을 감지하였고 총리 경선에 나서는 보리스를 지원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일깨워주었다.(사실 고브와 보리스 간에 공통분모는 아주 미미하다) 그녀는 남편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보리스로부터 명확한 언질을 받아내야 한다. 그 전엔 어떤 것도 따르지 마라. 고집을 부려야 한다”라고 했다.

고브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움직인 것은 “평당원들은 보리스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언론계는 본능적으로 보리스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사라의 조언이었다.(어투가 엄마가 아들에게 말하는 듯했다) 남편의 용기를 자극하는 사라의 부추김은 (“Be your stubborn best”) 남편 맥베스 장군의 남성적 용기를 자극하려는 맥베스 부인의 그것과(“Be so much more than a man”) 매우 유사하다. 결국 고브는 총리 경선에 나섰고 사실상 총리직 턱밑까지 이른 동지 보리스를 내쳐버렸다. 그리고는 최종 두 명을 선발하는 당내 경선에서 동료의원들이 등을 돌려 수치스러운 파국을 맞이했다.

임종 전 고브의 할머니가 손자 마이클이 영국 총리가 될 것이라고 한 것과(여기서 필자는 그 할머님이 마녀라는 의미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내 사라의 종용, 거사를 벌여 동지이자 선배인 보리스의 꿈을 죽이고 본인도 평생 지고 가야 할 불명예와 상처를 입은 일련의 여정이 <멕베스>의 스토리라인과 유사하다. 셰익스피어가 다시 살아난다면 <레이디 고브>라는 작품을 구상하려 할지도 모를 일이다.

영국인들은 대체로 다른 사람 눈총을 의식해서 자신의 행동을 삼간다. 그러나 이제 영국의 젊은 대학생들은 영국인이 총체적으로 무지했음을 전 세계에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젊은이들은 이번 국민투표를 ‘거짓’에 호도돼 치러진 투표로 여긴다. 이들은 스스로 거짓에 의존해서 스스로를 교육했다. 정보가 충분히 있었지만 그 정보를 이용해 자신을 교육시키지도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브렉시트를 선택했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무지한지 깨달아야 할 계기가 필요했다”라고 개탄하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이 세대가 더 신중하고 지혜로워질 것이라고 기대해도 될까? 브렉시트 시대에 대학을 다니고 있는 자신들의 세대를 신뢰한다고 말하는 젊은이들이 있다. 필자도 이들 세대의 새로운 인식에 기대를 걸고 싶다.

투표 다음 날 동문회 모임에서 필자가 두려움을 느꼈다고 언급했지만 영국의 민초들도 두려움을 피력한다. 필자는 억압된 인종차별 행위들이 이제는 과감히 표출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낀다. 실제로 브렉시트 이후로 연일 인종관련 방화사건 소식이 들려온다. 이들 영국인은 외국인이 두렵다고 한다. 외국인들이 그들의 문화를 가져와서 그들의 권리를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문화는 보호받고 존중받는데 그들은 우리 것을 존중하지 않고 규칙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우리는 다 보여주는데 그들은 그렇지 않으니 무섭다고 한다. 남의 집에 와서 그곳을 집으로 삼으려면 그 집의 것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그들은 유니온 잭(영국 국기)을 불태우면서도 그 집의 보호를 받으려 한다. 여기에 소극적인 정부가 원망스럽고 외국인이 무섭다고 한다. 제노포비아(zenophobia)가 ‘외국인 혐오증’과 ‘외국인 공포증’ 두 가지로 모두 읽혀질 수 있다면 이 말을 사용하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다른 의미로 전달될 것이다. 두려워서 싫어지는 것과 싫어서 두려워지는 것은 양면적이다. 그렇다면 외국인이든 내국인이든 함께 살아가기 위한 피차의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브렉시트는 브렉시트… 회귀는 없다”


▎1. 데이비드 캐머런에 이어 영국의 신임 총리로 취임한 테리사 메이 총리. 브렉시트 이후의 영국을 연착륙시켜야 하는 막중한 책무를 짊어졌다. / 2. 바르샤바 소재 폴란드 문화과학궁전. 국민투표 전날인 6월 22일 영국의 EU 잔류를 지지하는 의미로 영국국기를 내걸었다.
사디크 칸 신임 런던시장은 취임연설을 통해 “런던 시민이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고 말했다. 필자는 칸 시장이 두 문화를 비교적 완벽하게 체화한 공직자라고 생각한다. 그가 지닌 정치적, 행정적 힘을 사용하면 제노포비아는 경감할 수 있을 것이다. 불가능할 것 같은 자신의 런던시장 선출을 가능하게 했던 런던 시민들의 선택이 옳았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오늘(한국시간 7월 12일)에야 새 총리로 테리사 메이가 결정됐다. 이로서 정부가 브렉시트라는 지옥 상태에서 점차 벗어나 협상안들을 제시할 것이다. 오래전 옥스퍼드 유니언(옥스퍼드대 재학생 토론클럽)을 방문한 메이는 자신이 “지리학을 전공했기에 지리 파악과 방향 제시에 능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이 적절한 시점이 지금이다. EU 잔류파였기 때문에 오히려 EU 측과 협상이 순조로울 수도 있다. 특히 메르켈 수상을 상대로 협상하기에 적절한 총리라고 생각한다. 카리스마와 원칙이 있고 그 원칙으로 일을 추진하는 스타일이다. 주변 사람들이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일 수 있으나 동료가 아닌 국민에게는 오히려 신뢰를 얻고 있는 것 같다. 또한 니콜라 사르코지가 다시 프랑스 대통령이 되면 협상이 더욱 쉬워질 수도 있다. 중산층이 원하는 바를 제공하고 전체 브렉시트를 무력화하는 협상을 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인식해선지 “브렉시트는 브렉시트다”라고 못박았다. 하지만 매우 완화된 형태의 EU 탈퇴로 마무리가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민문제를 수년간 다루어 온 메이가 어떤 식으로 협상을 하든 궁극적으로 인구의 이동은 막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증오/두려움이라는 의미가 있는 제노포비아를 약화시키기 위해 외국인과 내국인이 피차 섬세하게 배려하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 결국 인류는 인간종이라는 하나의 종뿐이다. 같은 종끼리는 다른 종보다 공통점이 많다. 그것을 나에게서 찾아 상대에게 보여주면 제노포비아도 점차 없어지거나 줄어들 것이다. 그것이 브렉시트를 극복하는 출구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브렉시트의 출구는 있다!

이석광 -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영국 워릭대 영문학과 석사. 서섹스대 영문학과에서 아이리스 머독과 임마누엘 레비나스를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옥스퍼드대 PGCE 과정을 졸업하고 영국 중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현재 국립 경상대의 영어영문학과 전임교수로 있다.

201608호 (201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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