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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알파고 시대’를 슬기롭게 대처하는 법 

‘3차원의 시선’으로 더 큰 세상을 보라 

신기율 직관의 철학자, 작가
기계가 발달할수록 인간은 자신만이 선도할 수 있는 ‘직관의 무대’를 택할 수밖에 없는 숙명(宿命)
몇 달 전 인간과 기계의 자존심을 건 세기의 대결이 있었다. 인공지능 알파고와 세계 최고의 바둑기사 이세돌 간의 대국이었다. 다섯 번의 대국에서 3번째 패배를 이어오던 이세돌은 마침내 4국에서 ‘직관’의 78수를 두며 인공지능을 넘어선 최초 인간이 됐다. 인공지능에 인간이 승리할 수 있는 힘이 바로 직관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다. 그 직관은 무엇일까?


▎이세돌 9단은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대국을 앞두고 “인간의 직관을 인공지능이 따라오기는 무리다”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현존하는 최고 바둑고수가 깨달은 ‘직관’은 과연 무엇일까?
벌써 시간은 20분 가까이 흐르고 있었다. 대국을 지켜보는 관중의 표정도 점점 어두워져갔다. 이번에 지면 5번의 대국 중 4번째 패배. 그야말로 인류의 완전한 패배였다.

인공지능 알파고와 바둑기사 이세돌 9단의 바둑 대국을 두고 세간에서는 ‘인간과 기계의 자존심을 건 세기의 대결’이라 불렀다. 때문에 패배가 누적될수록 이세돌의 어깨도 점점 무거워 보였다. 대국 초반부터 알파고는 기선을 제압하는 듯 보였고 이세돌은 뚜렷한 돌파구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까지 부족해 초읽기에 들어간 상황. 그야말로 사면초가였다. 해설장에서 “이번에도 틀렸다”는 한숨이 나올 무렵, 마침내 그의 백돌이 등장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중앙 흑돌 사이에 내리 꽂힌, 훗날 ‘신의 한 수’라 불리게 될 이세돌의 78수였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이것이 ‘묘수’인지 ‘악수’인지 전문가 사이에서도 논란이 분분했다. 당장 이 수가 어떻게 판을 바꿀 것인지 읽어낸 사람이 많지 않았던 탓이다. 이는 상대인 알파고도 마찬가지였다. 78수 직후 알파고가 계산한 승률은 70%였다고 한다. 그러나 ‘회심의 한 수’는 조금 뒤 진면목을 드러냈다. 갇혀있던 백돌을 구출하고 판세를 역전시킨 것이다.

이후 87수에 이르자 알파고의 승률은 50% 이하로 떨어졌다. 알파고는 이해할 수 없는 ‘떡수’를 남발하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알파고는 결국 180수에서 불계패를 선언했다. “AlphaGo resigns(알파고 기권).”

알파고가 인간에게 패배를 당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 승패의 원인이 ‘이세돌의 묘수가 아닌 알파고의 버그’라는 식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알파고를 만든 구글 딥마인드 측은 이세돌의 78수가 완벽한 패인임을 인정했다.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이 78수를 그곳에 놓는다고 계산한 확률은 1만분의 1에 불과했다.

알파고가 학습한 수십만 개의 기보나 데이터에는 이런 수를 둔 경우가 0.01%였다. 이에 대해 ‘알파고의 아버지’ 하사비스는 “이세돌의 78수는 알파고를 충격과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자가학습 중 그 위치는 공부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30초에 10만 수 보는 컴퓨터가 놓친 ‘신의 한 수’

그 얘기는 무엇인가? 30초에 10만 수를 계산해내는 알파고가 미처 보지 못한 수를 이세돌 9단이 보았다는 말이다. 그는 대국이 끝난 뒤 기자회견에서 “그 수밖에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수많은 바둑 전문가도, 1202개의 컴퓨터 중앙처리장치(CPU)를 가진 인공지능도 보지 못한 ‘신의 한 수’를 이세돌은 찾아낸 것이다.

그는 이 놀라운 능력에 대해 ‘직관’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세돌은 알파고와의 대국 전부터 “인간의 직관을 인공지능이 따라오기는 무리다”라며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바둑이 직관의 게임이라고 불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9×19 반상에서 펼쳐지는 바둑은 경우의 수가 10의 170승에 달한다.

우주의 원소보다 많은 경우의 수를 제한된 시간 내 논리적으로 계산해 최적의 수를 놓는 것은 제아무리 슈퍼 컴퓨터라도 쉽지 않다. 때문에 직관은 디지털 시대에도 인간이 기계보다 뛰어날 수 있으며 기계와 다름을 증명하는 불가침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이세돌의 이 승리는 그것이 여전히 가능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결과적으로는 1승 4패. 알파고의 압승이었지만 그럼에도 이세돌은 지난 5월 인터뷰에서 ‘인공지능은 인간의 직관을 따라올 수 없다’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글 딥마인드 데미스 하사비스 대표의 얘기를 들어보니 인간의 직관을 데이터로 분석해서 70% 정도를 구현을 해놓았답니다. 물론 굉장한 거죠. 그것도 대단한 것이지만 인간의 100과 기계의 70, 아주 큰 차이가 나지 않겠습니까?”

이세돌은 다섯 번의 대국을 치르는 동안 분명히 뭔가를 본 것이다. 100과 70사이에 존재하는 30이라는 간극 말이다. 얼핏 보면 사소한 차이로 볼 수 있지만 그의 말마따나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거대한 차이’이기도 하다. 현존하는 최고의 바둑 고수가 깨달은 ‘인간 고유의 직관’은 과연 무엇일까?

‘견(見)’, ‘시(視)’, ‘관(觀)’. ‘보다’를 의미하는 대표적인 한자다. 견(見)은 사람의 눈을 강조한 상형에서 유래됐다. 보이는 대로 보는 것. 어떤 인위적인 판단 없이 말 그대로 1차원적으로 ‘보는’ 것이다. 시(視)는 파자(破字)하면 ‘제단을 보다’라는 뜻이다. 각자가 자신의 제단, 즉 자신이 믿는 것대로 보는 것이다.

자신의 논리와 판단대로 보는 ‘시’의 세계는 평면적인 2차원이다. 논리는 인과가 명확하고 계산이 딱 떨어져야 한다. 어떤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데이터가 필요하고 계산과 추론의 과정을 건너뜀 없이 일일이 지나야만 한다.

관(觀)은 황새(雚)의 상형에 눈(目)이 결합된 글자다. 황새가 날아올라 높은 곳에서 내려 보듯 세상을 조망하는 것을 뜻한다. 높이를 갖는다는 것은 3차원의 입체적 시각을 갖게 됐음을 의미한다. 직관(直觀)의 관(觀)은 이런 3차원적 시각을 말한다. 마치 새가 하늘 위에서 땅을 내려다보듯 한눈에 전체의 지도를 보는 것이다.

이세돌이 78수에서 발견한 직관도 바로 이것이다. 그의 지성은 찰나의 순간 날아올랐고, 가장 높은 곳에서 판세를 조망했다. 수많은 바둑전문가와 알파고가 2차원의 미로 속에서 눈앞에 보이는 수천 개의 수를 계산하고 있을 때 그는 3차원의 시선으로 숨은 탈출구를 찾아냈다.

평면적 시각으로 보는 세상은 막혀있는 것 투성이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 이상은 볼 수 없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인공지능은 빠른 연산속도를 가졌다. 남이 가보지 못한 낯선 길을 재빨리 가보고 결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구글 측은 인공지능을 개발하면서 인간의 직관을 모방하기 위해 특별한 알고리즘을 만들었다. ‘가치망’과 ‘정책망’이라는 2개의 신경망이다. ‘정책망’을 통해 확률이 높은 위치로 탐색의 범위를 좁힌 다음 다시 ‘가치망’을 가동시켜 각각 위치의 승률을 계산하는 식이다. 이는 인간이 모든 경우의 수를 검토하지 않고 돌을 둘만한 곳을 찾아 수를 읽는 모습과 흡사하다.

천재 발명가의 노하우 ‘경계 뛰어넘기’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대국에서 이세돌이 첫 수를 두고 있다. 3연패를 이어가던 그는 제 4국에서 1202개의 컴퓨터 중앙처리장치(CPU)를 가진 알파고가 보지 못한 ‘신의 한 수’를 찾아내며 승리를 거머쥐었다.
구글은 알파고에게 이 2개의 신경망을 훈련시키기 위해 인간의 바둑대국 데이터 10만 건을 입력시켰다. 그 후 알파고로 하여금 약 3000만 번의 대국을 치르도록 함으로써 자체적인 가치망과 정책망을 발전시켰다. 훈련과 실패의 경험을 통해 스스로 진화하게 만든 셈이다.

때문에 일부 전문가는 ‘이미 알파고가 인간의 직관을 따라잡았다’고 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알파고는 ‘직관’하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직시(直視)’하는 기계일 뿐이다. 방대한 데이터와 높은 성능의 연산능력을 직관 그 자체로 보는 것은 협소한 분석이다. 알파고의 인식 수준은 정책망과 가치망이라는 두 좌표가 만들어내는 평면적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눈앞의 배구공을 보고 똑 같은 배구공을 만들어본다고 생각하자. 알파고는 종이에 2차원의 원을 그리면서 배구공을 표현하고 있다. 반면 인간이 3차원의 시선으로 손에 잡히는 배구공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직관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경계를 뛰어 넘는 것’에 있다.

우리는 종종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시대의 크리에이터(creator)를 목격할 때가 있다. 경험과 학습의 고수인 이들이 만들어내는 창조물은 정교한 데이터를 뛰어넘을 때가 많다. 기존의 데이터와 정보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완전히 새로운 발상을 하는 것은 3차원적인 직관의 눈이 떠졌을 때 가능한 일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천재 발명가’ 니콜라 테슬라다. 그가 만들어낸 것은 하나 같이 이전에 없던 것이었다. 일례로 그는 이제 20세기 초반 오늘날 상용화 단계인 무선 전기송전 기술을 연구해 수백 개의 전등을 무선으로 밝히기도 했다. 이 밖에도 원격조종 로봇을 구상했으며 무인 자동차를 연구하는 등 당시의 기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상천외한 연구를 시도했다.

테슬라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그는 평소 ‘꿈을 꾸지 않고도 눈앞에서 뭔가를 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말했고 이를 ‘시각화(visualization)’라고 표현했다. 그는 자신의 발명품 대부분이 이런 시각화 과정을 거쳤다고 말했다.

어느 날 테슬라는 부다페스트 공원을 산책하다가 갑자기 막대기를 집어 들고 모래바닥 위에 정교한 이미지를 그려냈다. 몇 년간 연구에 매달렸지만 끝내 답을 찾지 못했던 전동 장치의 모터의 설계도였다.

“그 아이디어는 마치 번갯불처럼 나타났고 그 순간 진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본 그 이미지는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고 명료했으면 견고했다.”

이 일화는 사실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몇 년을 고민해도 풀리지 않던 문제가 한 순간 번갯불처럼 눈앞에 펼쳐졌다니 이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인가? 그러나 그 순간 테슬라가 3차원의 날개를 펼쳤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껏 날아올라 그간 2차원적 논리로는 볼 수 없었던 그의 발명품을 세부적으로 ‘직관’했을 수도 있다.

그도 처음에는 스스로의 기행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차츰 이를 조절하는 방법을 터득해 자신의 연구에 적극 활용했다. 어쩌면 그가 워커홀릭으로 살았기 때문에 직관이 발달한 게 아니라 직관이 보여준 것을 현실로 만드느라 워커홀릭이 됐는지도 모른다.

꿈속에서 시작된 창조의 역사


▎천재 발명가 니콜라 테슬라. ‘직관의 창조’에 능통했던 그는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일례로 20세기 초반 무선 전기 송전 기술을 연구해 수백 개의 전등을 무선으로 밝혔다.
천재 발명가였던 테슬라에게는 아마도 타고난 직관의 날개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날개로 논리와 정보의 경계를 넘어 시대를 앞서는 완전한 창조를 보여줬다. 그것은 방대한 데이터와 연산능력으로 결코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가만히 주변을 살펴보면 그와 비슷한 체험을 하는 이가 적잖다. 주로 창조적인 활동을 하는 예술가나 크리에이터가 그렇다. 이들 중 많은 이가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험을 했다. 세계적인 가수 ‘비틀스’의 멤버 폴 매카트니는 꿈속에서 들은 선율을 그대로 받아 적어서 그 유명한 명곡 ‘예스터데이’를 만들었다.

러시아의 화학자 멘델레예프는 꿈을 꾸는 과정에서 정확한 주기율표를 떠올렸다. 그가 주기율표를 처음 만든 1869년은 아직 원자의 구조가 밝혀지지 않았을 때였다. 때문에 원소간의 규칙성을 발견해 주기율표를 만든 것은 말 그대로 경이로운 사건이었다.

평범한 우리도 때때로 밤에 경계를 넘는 경험을 한다. 심지어 3차원을 넘어 4차원을 넘나들기도 한다. 아이가 생기기 전에 태몽을 꾸고 자신과 가족에게 힘든 일이 닥치기 전에 이를 암시하는 꿈을 꾸는 이도 있다. 4차원이라는 시간의 경계마저 단번에 넘어 삶의 큰 그림을 엿보고 오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을 좌지우지하는 2차원의 이성이 고이 잠든 밤에 3차원의 날개가 펴진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물리학에서 차원은 곧 ‘자유도’를 뜻한다. 차원이 높아질수록 운동의 자유 역시 점점 커진다. 당연히 2차원인 평면일 때보다 3차원인 입체의 세상에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보고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종이에 그린 원이 감히 배구공의 세상을 상상하지 못하듯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3차원의 직관은 2차원의 눈으로 보면 더 이상 자유가 아니다. 알 수 없는 미신 혹은 신비의 영역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성이 잠든 다음에야 우리는 움츠러든 직관의 날개를 조심스럽게 펼쳐 보이는 것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우리에게는 경계를 넘나드는 직관의 날개가 있다. 아담한 참새의 날개냐, 거대한 독수리의 날개냐 식의 성능 차이는 있을지언정 지구상 모든 인간에게는 직관의 날개가 있다. 인간에게 자연의 일부인 ‘몸’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은 그 자체로 인간을 포함한 자연과 공명하는 센서다. 라디오처럼 자신이 가진 주파수로 다른 곳에 있는 동일한 주파수와 반응하는 현상을 과학에서는 ‘공명(共鳴) 현상’이라고 한다. 물리학에서는 세상만물이 스스로 진동하고 있다고 말한다.

창 밖의 나무, 그 밑의 바위, 바위 위를 기어가는 벌레도 자기만의 리듬으로 떨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세상의 모든 존재가 마치 라디오 방송국처럼 자신만의 고유한 주파수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이 세상은 수많은 파동으로 가득 차 있다.

동물은 본능적으로 그 파동과 공명한다. 2011년 일본에 쓰나미가 왔을 때 땅과 바다의 심상치 않은 파동을 느낀 동물은 모두 산으로 내달렸다. 반면 언어를 배우고 수많은 인위적인 신호에 길들여져 자연과 소통할 필요성이 없어진 인간은 그 파동과 공명하는 능력을 대부분 잃고 만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있는 공명의 힘이 있다. 바로 ‘공감 능력’이다. 가끔씩 나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의 소식을 접하며 슬퍼할 때가 있다. 얼마 전 접한 시리아 난민의 사진도 그랬다. 창백한 시신으로 해변에 밀려온 세 살짜리 아기의 시신을 보고 오랫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충격은 나만 받은 게 아니었다. 이 아이의 사진은 전 세계적인 공분을 일으켰고 유럽 몇 개국은 난민 정책을 손봐야 했다. 난민에 부정적인 국가를 압박하기 위한 ‘정치적 쇼’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분명한 건 그 사진 한 장이 많은 사람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는 사실이다.

비록 내 가족이나 지인이 아닐지라도 타인의 처지에 연민을 느낄 수 있는 것. 우리는 이를 ‘공감’이라고 말한다. 공감이란 타인의 생각이나 행동 속에 자신을 대입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체험하는 공감은 알고 보면 매우 특별한 능력이다.

지구상의 대부분의 생물은 나와 타자를 한 몸처럼 동기화 시키지 못한다. 누군가와 더불어 기뻐하고 슬퍼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능력인 게 이런 이유 때문이다. 공감의 과정은 길고 장황한 설명이나 해석을 요구하지 않는다. 아무런 설명을 듣지 않아도 보거나 듣는 순간 내 몸이 먼저 반응한다.

인간이 세상과 공명하는 힘 ‘공감’


▎인공지능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기계와 경쟁할 수 없는 2차원의 시각에서 벗어나 3차원의 직관에 점점 눈을 돌리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기계적인 논리보다는 주관에 입각한 자유로운 결정이 중요해질 것이다.
슬픔에 젖은 선율을 듣는 단 몇 분만에 청중의 눈에도 눈물이 고인다. 나와 타인 앞에 놓인 수많은 장벽과 경계를 단번에 뛰어 넘는 장면이 연출된다.

‘공감’이야말로 우리에게 있는 가장 친숙하고 소박한 직관의 날개다. 이 날개를 펴고 새처럼 날아올랐을 때 비로소 우리는 각자의 길을 지도처럼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길에서 마주하는 서로 다른 풍경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상대를 공감할 때 온전히 타인의 세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가장 공감해야 할 대상이 있다. 바로 ‘나’ 자신이다. 알파고처럼 순발력 있고 빠르게 성과를 내는 것이 노력의 기준이 되어버린 시대에서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자기비하와 중노동의 이중고를 겪고 있다.

내가 왜 아침마다 일어나기 싫은지 공부를 위해 책을 펼 때마다 왜 자꾸 졸음이 쏟아지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본 적 있는가? 자신과의 속 깊은 대화 없이 남의 목표, 남의 꿈을 가져와 끊임없이 명령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결과가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게으르고 멍청하다’고 자기 비하하는 일은 얼마나 비극인가?

나 역시 그런 비극에 놓인 적이 있다. 아홉 살 무렵 내게 무대 공포증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책을 읽으려고 하는데 별안간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팔다리가 떨려 왔다. 경험해보지 못한 공포감이었다. 아이들은 수군거렸고 선생님은 내게 벌을 주셨다.

집에서는 몇 권이고 줄줄 읽어대는 책이 공개적인 자리에서면 이상하게 말문이 막혔다. 부모님은 내게 크면 좋아질 거라고 했지만 시간이 흘러도 공포증은 치유되지 않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안 써본 방법이 없었다. 심리치료와 약물치료도 받아보고 틈만 나면 관중 앞에서 말하는 연습을 했지만 좀처럼 차도가 없었다.

어느 날 주제 발표를 망치고 화장실에 숨어들어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 세면대의 거울에는 한없이 작고 초라해 보이는 내가 있었다. 문득 내가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 자신을 공감한 순간이었다.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을까? 최선을 다했고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숨어 있어야 하는 걸까?’

그때부터 더 이상 공포증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고 두려워하는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 뒤로 내 인생의 지도는 바뀌기 시작했다. 굳이 많은 사람 앞에 서려고 하지 않았다.

자아를 직관하자 전체를 상대로 소통하는 것 대신 소수를 향해 최선을 다하게 됐다. 오랜 시간 타인과 깊은 얘기를 할 수 있었다. 이런 대화의 기록은 나를 작가로 만드는 밑거름이 됐다. 가는 길을 바꾸니 어느새 지독히 따라다니던 공포증도 점점 옅어져 갔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남보다 잘하기 위해 나를 재촉하고 다그치는 목소리가 내면의 소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만들어낸 가상의 소리일 뿐 진정한 내면의 소리는 아닐 수도 있다. 돌이켜보면 나를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했던 그 공포증이야말로 자아의 충고였을지도 모른다.

‘독점’ 아닌 ‘공유’가 새로운 권력으로 등극

내가 가야 할 곳은 큰 무대가 아닌 홀로 있는 사람의 작은 방이라는 것. 큰 무대로 가는 길은 막혀있으니 돌아가야 한다는 충고가 그것이다. 그토록 나를 괴롭히던 두려움이 오히려 내가 가야 할 진로를 알려줬던 것이다.

결국 공감한다는 것은 그렇게 몸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때가 바로 삶의 지도를 조망할 수 있는 직관의 날개가 펴지는 순간이다. 선과 악, 흑과 백으로 구분되던 2차원의 평면적 지도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되고 세상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일상에서부터 공감의 작은 날갯짓을 하다 보면 종국에는 직관이라는 더 큰 날개를 달 수 있다. 그리고 그 날갯짓은 삶을 바꾸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알파고와의 경기 후 이세돌이 보여준 삶의 행보 역시 그랬다.

그는 자신이 속해 있던 프로기사회의 탈퇴를 선언하며 관행과 악습에 온몸을 던져 반기를 들었다. 그 와중에도 메이저 대국에서 9연승을 거두며 바둑기사로써의 본분도 잊지 않았다. 유명세를 타고 편안하게 살아도 됐건만 그는 자신의 삶에서도 여전히 78수를 던지고 있다.

아마도 그는 알파고의 대국 과정에서 직관의 눈을 뜨며 자신의 삶을 제대로 보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직관의 눈을 뜬다는 것은 내 안의 영성이 눈을 뜬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직관을 갈고 닦은 수행자는 차원의 경계를 넘어 우주적 관점으로 삶을 관조한다. 가장 높은 곳에서 우주와 자연, 나와 너와의 연결성을 온 몸으로 깨닫는 것이다.

그런 아름다운 직관이 당신 몸에도 있다. 그러니 더 이상 알파고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인간의 몸은 애초에 알파고와 같은 정보 속도를 이길 수 없게 설계돼 있다. 기계처럼 힘들게 계산하고 추론하는 데 삶을 허비하지 말라는 얘기다.

인공지능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기계와 경쟁할 수 없는 2차원의 시각에서 벗어나 3차원의 직관에 점점 눈을 돌리게 될 것이다. 그야말로 ‘직관의 시대’가 오는 것이다. 우선 뚜렷한 인과관계와 선후관계로 맺어진 논리의 회로를 벗어나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자유로운 결정이 중요해질 것이다.

이어 ‘무엇이 좋고 싫은가’ 아니라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느냐’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게 될 것이다. ‘얼마나 많이 독점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멀리 보고 많이 공유할 수 있는가’가 새로운 권력의 첩경이 될 것이다. 이때 인공지능은 놀라운 연산능력으로 인간의 판단에 근거를 찾고 당위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수천 년간 누적된 직관의 산물인 점성학(Astrology)에 따르면 인류는 약 100년 후 ‘물병자리’ 시대에 접어든다고 한다. 놀랍게도 이 물병자리를 상징하는 동물이 바로 날개를 가진 ‘새’다. 우리는 벌써 단편적이고 평면적인 지식의 완고함을 넘어 새처럼 하늘을 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자. 당신에게는 이미 날개가 있다. 그 존재를 잊지 않는 한 직관은 당신에게 삶의 큰 그림과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줄 것이다.

신기율 - 과학·종교·철학 등 다양한 학문을 자유롭게 횡단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대학 졸업 후 약 15년간 철학자로서의 남다른 혜안으로 세상과 사람의 깊은 본질을 마주한 결과 국내 최초로 ‘직관’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저서로는 2016년 베스트셀러 <직관하면 보인다>가 있다.

201608호 (201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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