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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브렉시트와 영국인의 내면 탐구] 우리는 유럽 대륙과 달라! 

‘자유로운 개인’ 중시하는 영국주의자의 반란 

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화전공 교수
노동계급과 몰락한 중산층이 지지한 전통으로의 회귀… ‘진짜 영국인’이라는 환상 만들어내는 전통문화가 견인
브렉시트는 분명히 경제적인 이해관계의 문제이고, 정치적인 사안이다.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영국적인 보수주의 문화가 모습을 드러낸다. 개인의 자유가 없다면 다양성도 도덕도 없다는 것이 영국식 사고의 전통이다. 브렉시트는 이처럼 깊고 넓은 문화의 자장 안에서 태동했다


▎네오뱅크사이드 고층빌딩에서 바라본 런던 시내의 야경. 브렉시트는 경제적 동기를 넘어 영국인의 자존심과 보수적 전통이 결합된 철학적 결단인 측면도 있다.
브렉시트(Brexit)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했던 이들은 거의 없었다. 영국 내에서 브렉시트를 선동했던 극우 정치인들조차도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브렉시트가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면 결코 데이빗 카메론도 이런 도박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의 뜻은 정치인들의 예상을 빗나가게 했다. 이들에게 주어진 ‘한 표’는 보기 좋게 정치인들을 곤경에 빠지게 했다.

물론 새삼스럽게 이런 브렉시트의 의미를 재론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브렉시트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여러 요소 중에서도 ‘영국’이라고 불릴 수 있는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브렉시트는 ‘브리튼+엑시트(Britain+Exit)’이지, ‘잉글랜드+엑시트’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쩌면 ‘엥시트’라고 불러야 할 것을 ‘브렉시트’라고 불렀다는 점은 사소하게 보이지만 중요하다.

물론 어떤 이들, 가령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자 같은 이들은 ‘브렉시트’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에 잉글랜드만 따로 유럽 연합을 탈퇴하라고 하지만, 크게 반향을 일으키는 것 같지는 않다. 사실상 브렉시트는 세계화에 저항해서 쇄국정책을 실시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브렉시트는 유럽연합에 가입해서 세계화의 국면에서 자신의 입지가 줄어들었다고 생각하는 ‘영국주의자들’의 판단이 먹혀든 결과다. 도대체 이 영국성, 또는 영국적인 것(Englishness)는 무엇일까.

영국인들은 유럽대륙과 다른 자신만의 독특함을 가졌다고 믿는데, 기원은 오래되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을 보더라도,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되는 수도사가 바로 영국에서 오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사실 중세를 지탱했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 앨퀸이라는 사람도 영국 사람이다. 이른바 경험적이고 논리적인 ‘조사(inspection)’를 필요로 할 때 영국인들은 자신을 ‘영국인’이라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영국은 이런 맥락에서 ‘생각하는 방식’이 대륙과 달랐다.

루이스 앰허스트 셀비-비기(Lewis Amherst Selby-Bigge)라는 사람이 <영국 도덕주의자들>이라는 제목으로 선집을 묶으면서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에서 존 로크(John Locke)로 이어지는 일련의 자유주의 철학을 편의상 도덕철학이라고 불렀다. 영국적 사고방식의 저변에 흐르는 철학이 바로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리주의라고 불리는 자유주의에서 핵심적인 도덕철학은, 영국적 사고방식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도덕철학은 정치와 경제, 그리고 자아를 아우르는 중요한 근거를 제공하는 ‘근대사상’이다. 근대적인 영국이 여기에서 기원한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영국의 언어는 바로 영어다. 영어가 지금의 형태로 정립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중세 때만 해도 영어는 프랑스보다 격이 낮은 속어에 해당되었다. 그러나 이런 영어가 이른바 영국적 사고방식을 대표하는 틀로서 받아들여지면서 영국은 오늘날 무시할 수 없는 나라가 된 것이다. 영국적 사고방식은 이런 영어에도 스며들어 있다.

영국식 사고의 뿌리, 도덕철학


▎자전거를 타고 런던 거리를 달리는 영국인. 영국인은 타인의 부당한 간섭을 거부하는 신성불가침의 자아를 중시한다.
생각의 구조가 언어라고 한다면 영어에도 나름대로 생각하는 방식이 있을 것이고, 이것이 바로 영국의 문화를 구성하는 일정한 토대가 될 것이다. 영어에 있는 여러 수수께끼 중 하나가 바로 ‘나’를 표현하는 대문자 I일 것이다. 이렇게 ‘나’를 대문자로 쓰는 영어야말로 영국적 사고방식의 일단을 정확하게 드러낸다고 하겠다. 왜 ‘나’는 항상 대문자로 쓰는 걸까. 물론 미국 시인 E. E. 커밍스처럼 소문자로만 시를 쓰는 경우도 있다. SNS에 포스팅을 하거나 휴대폰으로 텍스트 메시지를 보낼 때, 입력 속도를 높이기 위해 대문자를 쓰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모두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예외가 있든 어떻든 영어에서 ‘나’는 무조건 대문자 I다. I는 어쨌든 대명사다. 대명사 자체를 대문자로 표기하는 유럽어는 거의 없다. 대체로 문장의 첫머리에 오는 단어만 대문자로 표기한다. 그런데 영어에서 ‘나’를 의미하는 I는 예외다. 항상 대문자인 것이다.

그 이유를 자연스럽게 추측할 수 있다. 영국식 사고에서 ‘나’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대문자를 고집했을 수 있다. 이런 추측은 크게 틀리지 않다. 원래 I는 고대 영어 ‘ic’에서 유래했다. 독일어에서 I에 해당하는 것이 ‘ich’이고 네덜란드어에서 ‘ik’인 것을 보면, 확실히 I의 기원을 알 수 있다. 보통 심리학에서 즐겨 쓰는 ‘ego’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나’를 뜻했다. 원래 I는 손으로 글씨를 쓰던 중세에 독립적으로 표기한 i를 강조하기 위해 길게 쓰던 습관에서 연유했다. 말하자면 소문자를 손으로 길게 쓴 것이 I였던 것이다. 이 표기는 숫자 1을 의미하기도 했다. 1을 I로, 2를 II로, 3을 III으로 표기하기도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대문자 I는 특별히 다른 글자와 구별하기 위해 썼던 셈이다. 원래 소문자 i는 위에 점이 없는 1의 형태에 가까웠다. 이렇게 쓰던 i를 강조하기 위해 길게 늘여서 I로 만든 것이다.

이렇게 길게 늘인 대문자 I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나’를 의미하는 i라는 글자를 소문자로 두었을 때, 의미론적인 중요성에 비해 너무 하찮게 보여서 실수로 문장에서 떨어져 나온 것처럼 오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일인칭 주어를 표기한다는 것은 치명적인 의미 전달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다. 그래서 문장 첫머리에 오는 일인칭과 중간에 오는 일인칭을 구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인류 공통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게으름 덕분에 그냥 일인칭 주어는 대문자로 표기하는 버릇이 굳어져버렸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렇게 통일해서 쓰는 게 훨씬 쉽고 편했기 때문이다.

대문자 I의 쓰임새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텍스트가 바로 제프리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다. 13세기에 쓰인 이 텍스트에서 초서는 당시로 본다면 혁신적인 문법을 채택해서 일인칭 주어를 대문자로 표기했다. 예나 지금이나 새것에 민감한 이들은 예술가다. 이들이 혁신을 대중화하는 것이다. 초서 덕분에 ‘나’를 의미하는 I를 대문자로 쓰는 습관이 광범위하게 퍼져나가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영어의 일부가 되었다. 문학이 어떻게 언어를 바꾸고 어떻게 습관을 바꾸는지 초서의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더 세밀하게 말하자면, 일인칭 주어를 대문자 I로 쓰게 된 것은 인쇄술의 발명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구텐베르크가 처음 인쇄기계를 발명했을 때 내세운 광고가 인쇄물의 품질이 손으로 필사한 것과 똑같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새로운 감각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감각을 새롭게 배치함으로써 출현한다고 볼 수 있다.

일인칭 주어를 뜻하는 대문자 I는 처음에 손으로 글씨를 쓰던 철자법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인쇄술이 발명되고 기계로 서적을 찍어내는 변화가 일어났지만, 정확한 필사를 위해 만들어졌던 철자법은 그대로 보전되었다. 이처럼 영어의 일인칭 주어를 대문자로 표기하는 것은 소리와 표기의 조응관계에 따라 이뤄졌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이 표기는 인쇄술이라는 새로운 매체기술과 과거 필사의 습속이 결합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문자의 기록이 음성과 아무런 관련 없이 발생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영국을 지배하는 개인주의적 전통이 이런 과정을 통해 공고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공리주의와 ‘not your business’


▎영국 런던에서 열린 ‘해적 축제’에 가족과 함께 참가한 해적복장 차림의 소년. 영국인은 유럽 대륙과는 다르다는 강한 정체성을 지닌 민족이다.
영국식 사고방식을 구성하는 많은 요소 중에서도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공리주의일 것이다. 앞서 말한 도덕철학이 발전을 거듭하면서 공리주의라는 사고방식을 낳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사고방식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영어 표현 중 하나가 바로 “It is not your business”가 아닐까. “None of your business”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한국어로 옮기면 “네가 알고 싶어 할 필요 없다” 또는 “네가 관심 가질 일이 아니다”라고 좀 받아치는 뉘앙스를 지닌 말이다. 한마디로 “관심 꺼”라고 쐐기를 박는 의미다. 상당히 무례한 표현이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거의 쓰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표현에서 영국적인 것을 이해할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왜 ‘business’가 ‘알다(know)’나 ‘관심 갖다(concern)’라는 뜻과 관련한 의미를 가지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Business’라는 말의 어원은 ‘busy’와 같다. 바쁘다는 말이다. 국립국어원에서 발간한 <표준국어대사전>에 보면 ‘바쁘다’는 말을 “일이 많거나 또는 서둘러서 해야 할 일로 인하여 딴 겨를이 없다”로 풀이해놓고 있다. 여기에서 ‘겨를’이라는 말은 ‘어떤 일을 하다가 생각 따위를 다른 데로 돌릴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딴 생각’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영어로 ‘busy’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신경 쓰다’ 또는 ‘걱정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의미는 ‘business’와 별반 관계없다. 물론 열심히 일하면 ‘딴 생각’을 할 수 없겠지만, 그렇게 들어맞는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business’는 ‘busy’의 원래 의미에서 유래한 것이라기보다 후일 네덜란드어의 영향으로 “계속 고용되어 일한다”는 의미가 추가되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나면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도대체 “계속 고용되어 일한다”는 의미와 ‘관심 꺼’라는 의미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기에 “it is not your business”가 가능할까.

‘Busy’라는 말에 곁가지가 있다는 것이 실마리다. ‘Busy’라는 말에 포함되어 있던 ‘신경 쓰다’ 또는 ‘걱정하다’가 발전해서 ‘신경을 거슬린다’는 의미로 확장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까마득한 옛날 16세기 무렵에 영국인들은 ‘busy’라는 말을 ‘신경 쓰이게 만든다’는 뜻으로 썼다. 이때 ‘busy’는 나쁜 뜻이었고,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서 사업을 뜻하는 ‘business’에 밀려서 ‘busy’라는 단어는 ‘바쁘다’는 뜻만 남기게 된 것이다. 이런 의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단어가 바로 “남 일에 끼어들기 좋아하는 사람”,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오지라퍼’를 뜻하는 ‘busybody’이다.

따라서 “It is not your business”라고 할 때, 이 ‘business’는 사업이라고 한국어로 번역하는 그 말과 같은 것이 아니다. 이 표현에 등장하는 ‘business’는 ‘busybody’에 쓰인 그 “신경을 거슬리게 만든다”는 의미를 가진 것이다. 그래서 이 말은 “너 따위가 참견할 문제가 아니다”는 깔보는 뉘앙스를 포함하게 되었다. ‘Business’라는 말도 변천을 거듭했는데, 15세기에 직업을 뜻하다가 18세기에 오면서 상업적인 거래나 무역이라는 의미를 추가하게 되었다. 이렇게 여러 갈래로 해석할 수 있는 ‘business’야말로 영국식 사고방식을 이해하기에 적절한 사례다.

앞서 말했듯이, 영국식 사고방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나’이다. 이 ‘나’는 개인의 단위이자 결코 침범당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한 영역이다. 너와 내가 확실히 다르다는 것, 그래서 그 다른 것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문명의 진보라는 것을 합의하고 들어가는 것이 영어의 사고방식이다. <자유론>에서 존 스튜어트 밀은 진보와 개인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물질의 진보가 개인성에 해악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고했다. 밀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변화무쌍할 뿐만 아니라 진보적이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기계를 발명하고, 그 기계들은 더 나은 것으로 끊임없이 교체된다. 우리는 정치, 교육, 심지어 도덕에서도 개선을 염원한다. 물론 이런 개선의 생각은 다른 이들을 우리만큼이나 선하게 만들기 위해 설득 또는 강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진보에 반대하지 않는다. 반대로, 역사상 누구보다도 우리가 가장 진보적인 사람들이라고 스스로에게 아첨한다. 우리가 전쟁을 선포한 상대는 개인성이다. 우리 자신을 스스로 어슷비슷한 존재로 만들었다면 도대체 우리가 이룩한 경이로운 업적들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개인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망각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유형에 내재한 불완전성을 깨닫고 타인의 우수성에 주목하거나, 아니면 둘의 장점을 합쳐서 둘보다 더 나은 것을 만들어낼 가능성을 따져보게 만드는 중요한 동기이다.”(Utilitarianism and On Liberty)

“물질적인 진보가 다양성을 압살할 수 있다”


▎1.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영국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 그는 “물질적 진보가 다양성을 말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 2. 영국인들은 전통적으로 홍차를 즐겨 마신다. 브렉시트의 배경 중에는 영국적 전통의 훼손에 대한 분노도 깔려 있다.
밀은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사상가로 알려져 있다. 자유주의 중에서도 공리주의를 이론적으로 발전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짧은 인용문이긴 하지만, 이런 그의 면모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이다. 공리주의는 경제제도를 제대로 갖추어서 물질적인 만족만 제대로 충족시킬 수 있다면 만사형통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사회적인 부를 어떻게 나누어 가질 것인지,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분배의 문제를 정치의 핵심으로 간주했던 이들도 영국의 공리주의자들이었다. 당연히 이런 생각에서 중요한 것은 물질적인 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경제였다. 경제를 중심으로 정치와 사회를 재구성하는 것이 이를테면 공리주의적인 기획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밀이 지적하고 있듯이, 이런 공리주의적 기획이 누락하고 있는 것은 자유주의를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유다. ‘판옵티콘’이라는 원형감옥을 생각해낸 제러미 벤담처럼, 개인에게 문제가 있다면 고유한 자유를 잠시 구속해서라도 설득과 강제를 통해 번듯하게 살아가는 존재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정통 공리주의의 주장이다. 밀은 그러나 이런 생각이 우리 모두를 ‘어슷비슷한 존재’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경고한다. 물질적인 진보가 다양성을 압살할 수 있다는 밀의 생각은 오늘날 소비주의 사회에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너도나도 소비자의 개성을 주장하면서 “당신만을 위해 만들었습니다”라고 광고하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소비자가 똑같은 상품을 구매해서 어슷비슷해지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오히려 본말이 전도되어서 동일하지 않으면 이상하게 취급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한때 중학생들 사이에서 ‘등골 브레이커’라고 불렸던 값비싼 아웃도어 재킷이 있다. 이 재킷을 입지 않으면 집단 따돌림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사례는 밀이 염려한 물질적인 진보의 디스토피아를 제대로 보여준다. 상품이 인격의 품위를 결정하는 이런 전도현상을 밀은 이미 예측했던 것이다.

남의 일에 참견하는 것 자체가 영국적인 개인주의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무례한 일이다. 이런 무례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상대방에게 쏘아붙이는 것은 말 그대로 상대방을 확실하게 비난하는 행위다. 개인을 신성불가침한 영역으로 보는 것이 핵심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일상적인 언어생활을 통해 형성된 삶의 규범들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적인 것(Englishness)을 구성하는 철학과 문화가 이런 영국의 일상 언어에 녹아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문화는 언어를 토대로 작동하는 코드의 산물이다. 코드란 기본적으로 개인들 사이의 약속을 의미한다. 그래서 지금 현재 통용되는 코드가 영원하다는 보장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영국적인 것을 두고 영국인들은 여전히 여러 가지 의견을 내놓고 있다. 이런 논쟁의 역사가 영국 문화의 역사이기도 하다. 도대체 무엇이 영국적인 것일까. 런던을 상징하는 빅벤과 빨간 이층버스가 영국적인 것일까. 아니면 멋지게 차려 입고 크리켓 경기나 폴로 경기를 관람하는 귀족적인 스타일이 영국적인 것일까. 단아하게 꾸며놓은 영국식 정원이나 오후 3시경에 둘러앉아 영국식으로 블렌딩한 밀크티를 마시면서 지금 읽고 있는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티타임의 한가로움이 영국적인 것일까.

대체로 우리가 영국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는 이런 문화는 18세기 영국 귀족문화를 관광상품으로 개발한 것이기도 하다. 관광상품이기 때문에 가짜라는 말이 아니다. 상품이라는 것은 사물의 전형성에 근거한다. 화폐가치라는 보편적인 기준으로 통일시켜놓은 것이 상품이고 상품형식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상품형식일 것이다. 이른바 짝퉁이라는 가짜 상품들을 보라. 이런 짝퉁이 흉내 내는 것은 명품 자체라기보다 명품이라는 형식이다. 일전에 말레이시아에 갔을 때, 짝퉁으로 유명한 시장을 재미삼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정말 없는 게 없었다. 물건을 팔던 상인이 내 시계를 가리키면서 “그것도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했다. 그냥 가려고 하니까 옷깃을 붙잡고 짝퉁 명품시계를 하나 보여주면서 “이 시계는 가짜지만 진짜 못지않은 가짜다”라고 말했다.

명품 소비의 기준은 도덕성


▎지난 7월 2일 영국 찰스 왕세자(앞쪽 왼편)와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제1차 세계대전 ‘솜전투’ 발발 100주년을 맞아 프랑스 티에프발에서 열린 추모식에 참석했다. 브렉시트 충격 속에서도 영국 왕실 가족은 합심해 솜전투로 인한 희생자를 추모했다.
도대체 ‘진짜 못지않은 가짜’는 무엇일까. 여기에서 진짜와 가짜라는 경계는 흐려진다. 진짜를 모방해서 가짜를 진짜 못지 않게 만들면 그것은 가짜인가 진짜인가. 예전에 한국에서 명품 가방 제작공장에서 일하다가 그만 두고 나와서 가짜 명품을 몇십 년 동안 만들다가 검거된 한 짝퉁 제조업자에 대한 사연이 언론을 타기도 했다. 이럴 경우, 이 제조업자가 만든 제품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기준은 제조과정이 명품회사의 인가를 거쳤는지 그치지 않았는지 그 차이일 뿐이다. 상품 자체에 그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인 요인이 그 상품의 진위를 판정하게 되는 것이다.

형식은 어떤 규범(the normative)을 만들어낸다. 규범이라는 것은 행동의 기준을 의미한다. 명품을 소비하는 행위는 상품 자체에 대한 매력에 끌린다기보다 이런 규범을 훌륭하게 이행할 수 있는 자신을 뽐내기 위함에 가깝다. 자신의 행동이 특정 기준에 맞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명품 소비의 본질이다. 그러니까 명품 소비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질 높은 상품이라기보다 그 상품의 정체성을 드러낼 형식이다. 그 형식을 상징화하고 있는 것이 바로 명품을 말해주는 상표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행동에 대한 판단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예를 들어서, 분수에 맞지 않는 명품 소비를 비판하는 입장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가능한 것일까. 규범이 행동의 기준이라면, 이 기준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흥미롭게도 그 결정 요인이 바로 도덕성(morality)이라고 영국인들은 오래전부터 확신했다. ‘morality’라는 말은 13세기 라틴어 ‘moralitatem’에서 연유한 것이다. 원래는 인성이나 예절을 의미했다. 16세기 중반까지 ‘moral’이라는 말은 착하거나 나쁜 성격 자체를 지칭했다. 말하자면 사회에서 개인이 처신하는 행동 자체를 통틀어 ‘moral’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도덕적인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는 의미는 16세기 후반에 와서야 처음으로 영어에 등장한다. ‘선(goodness)’이라는 의미가 ‘morality’에 추가된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도덕적인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는 의미는 이때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때 ‘착한 사람’이라는 의미는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는 ‘마음씨 좋은 사람’이 아니다.

영어로 ‘moralist’라는 말이 ‘착한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봐도 짐작할 수 있다. ‘moralist’는 도덕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어원적 의미에 충실하면 사회에서 적절하게 행동하게 만드는 예절을 가르치는 사람이 ‘moralist’다.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에 등장하는 완고한 교사에 더 가까운 사람이다. 드물게 ‘도덕적인 사람’을 뜻하기도 하지만, 이때 도덕적이라는 말도 상황에 적절하도록 처신한다는 의미이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착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도덕적인 것은 선이라는 말과 연결되는 것일까. 영국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로운 개인’이다. 영국 문화는 개인을 ‘자유로운 행위자(free agency)’로 본다. 자유로운 개인이 없으면 도덕도 없다는 것이 영국식 사고방식이다.

영국 자유주의의 기반은 ‘morality’


▎영국 런던 시민들의 일상. “자유로운 개인이 없다면 도덕도 없다”것이 영국인의 사고방식이다.
이런 사고방식에 따르면, 도덕이라는 것은 자유로운 개인의 행동에 대한 판단기준일 뿐이지, 그 개인의 속성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다. 어떤 개인이 특정 행동을 했을 때, 그것을 판단해주는 기준이 ‘morality’이다. 그래도 문제가 남는다. 그렇다는 걸 인정하더라도 ‘morality’는 도대체 어디에서 온 물건인가, 의문이 가시지 않는 것이다. 이 문제를 길게 논의한 영국 철학자들의 책을 찾아보면, ‘morality’는 신이 부여하고 보장하는 것이라고 말들은 하고 있지만, 말만 그렇게 하는 것이지 존 로크 같은 철학자들이 딱히 신을 신뢰하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는 심리학적인 차원에서 ‘morality’를 개인의 내면에 자리 잡은 ‘도덕적 동기’로 보는 입장이다. 이런 주장이 성립하려면 자유로운 개인은 자연스럽게 도덕적인 의무를 따른다는 전제가 증명되어야 한다. 자유주의는 이 전제를 증명하는 철학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세에 유행했던 ‘morality play’라는 연극 형식을 보면 등장인물들이 각각 ‘God, Death, Everyman, Good-Deeds, Angel, Knowledge, Beauty, Discretion, Strength’와 같이 명명되어 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도 이런 ‘morality play’의 형식을 차용한 것이다. 이런 기법을 알레고리(allegory)라고 부른다. 개인이 가질 수 있는 미덕(virtue)을 각각 주인공으로 삼아서 여러 개인의 행동으로 인해 초래되는 다양한 사건사고의 교훈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때 ‘virture’는 ‘미덕’이라고 옮기기도 하지만, 사실은 능력 또는 역량이라는 뜻이다. 개인을 규정하는 어떤 속성 따위가 ‘virtue’를 통해 만들어진다.

이런 ‘morality play ’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morality’는 개인의 ‘virtue’를 판단하게 만들어주는 기준이다. 그런데 이 기준은 존재하긴 존재하되 개인의 내면에 존재한다. 물론 ‘morality’가 외부를 통해 주어진다고 주장한 토마스 홉스 같은 영국 철학자도 없진 않았다. 그러나 홉스도 자기보전을 위한 합리적 판단이 도덕적 의무를 이끌어낸다고 봤다는 점에서 개인 내면에 존재하는 ‘도덕적 동기’를 부정하지 않았다.

이런 관점에서 ‘morality’는 영어에서 대단히 중요한 말이다. ‘morality’라는 말이 없다면 전형적인 영국 문화는 성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morality’라는 범주가 없다면 분쟁을 ‘대화’로 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는 설 자리를 잃었을 것이고, 영국도 그만큼 설득의 기술을 발전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대화’를 하려면 먼저 상대방을 믿어야 한다. 이 믿음의 근거를 주는 것이 바로 ‘morality’이다. 이런 의미에서 서로 다른 개인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한 중요한 장치로서 ‘morality’라는 말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영국적인 사고방식에서 ‘morality’는 합리성(rationality)과 관련을 맺는다. 누군가 합리적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moralist’라는 의미다. 규칙을 준수하고 페어플레이를 펼친다면 그는 좋은(good) 사람이다. 물론 앞서 지적했지만, 이 좋다는 개념은 한국에서 착하다는 개념과 다소 다르다. 한국에서 착하다는 말은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는 뜻으로 영어로 치자면 ‘morality’의 어원적인 의미에 더 가깝다. 하지만 영어에서 좋다는 것은 상호혜택을 준다는 것이다.

영국적인 것의 수호가 영국인의 가장 중요한 가치


▎영국 국기에는 영국의 보수주의 전통이 서려 있다. 이른바 영국 신사의 품격도 이런 보수주의의 체현으로 나타난다.
도덕적인 사람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서로에게 혜택을 주는 사람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따라서 영어로 ‘rational’이라는 말은 개인들끼리 이해관계를 ‘대화’로서 조정해 공동의 목적에 부합하는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을 지칭한다. ‘rational’은 이성이라는 의미를 가진 ‘reason’에서 나온 말이다. ‘reason’은 완력을 사용하지 않고 말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이었다. ‘이성의 시대’라고 불리는 계몽주의의 근대는 이 능력을 ‘morality’의 중심에 놓으려는 지난한 역사의 결과물이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영국적인 것은 영국 보수주의를 이루는 근간이다. 이 보수주의에 따르면 영국적인 것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영국인의 가치다. 우리가 상상하는 이른바 영국 신사의 품격도 이런 보수주의 체현자로 등장한 것이다. 미국의 시인 T.S. 엘리어트가 부박한 미국문화를 비판하면서 런던으로 건너와 귀화했을 때, 그를 매료시킨 것이 바로 영국의 보수주의였다. 브렉시트는 분명히 경제적인 이해관계의 문제이고, 정치적인 사안이지만, 실제로 이런 정치경제학적 맥락은 영국적인 보수주의 문화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이런 문화적 배경이 없었다면, 브렉시트가 그렇게 쉽사리 이루어질 수는 없지 않았을까.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과거에 영국의 보수주의는 부르주아와 지주의 산물이던 반면, 이제는 이 보수주의를 영국의 노동계급과 몰락한 중산층이 지지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순수한 영국인’ 또는 ‘진짜 영국인’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또한 문화다. 영국적인 것이 있다는 믿음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문화라고 한다면, 브렉시트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이런 문화적인 요소를 과소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택광 - 1968년 출생. 부산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워릭대와 셰필드대에서 각각 철학과 문화이론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희대 영미문화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대중문화비평가로 활동한다. 주요 관심영역은 현대철학과 정신분석이론이다. 지은 책으로 <박근혜는 무엇의 이름인가>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 등이 있다.

201608호 (201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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