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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선비정신의 미학⑥] 조리서 <수운잡방> 쓴 김유·김령 

남존여비 시대 요리 레시피 펴낸 선비 

글 송의호 기자 yeeho@joongang.co.kr / 사진 공정식 프리랜서
술·김치·두부·식혜·좌반 등 121가지 조리법 상세히 소개… 벼슬길 접고 고향 지키며 음식과 술로 손님 접대에 공들여

▎계암종택이 2009년 설립한 수운잡방연구원과 한국국학진흥원은 <수운잡방>에 기록된 121가지 술과 음식 중 50여 가지를 재현해냈다.
서울 신라호텔 한식당 라연은 코스요리에 요즘 ‘수란’이란 음식을 낸다. 또 이 호텔 한식 뷔페 더파크뷰에는 ‘황밥’이란 메뉴가 있다.

이들 메뉴는 조선시대 조리서에 전하는 레시피를 바탕으로 지난해 유서 깊은 종가와 신라호텔이 현대화했다. 경북 창조경제혁신센터가 다리를 놓아 8가지 메뉴를 만든 뒤 시식회를 거쳐 두 가지를 채택한 것이다. 예약을 받은 시식회는 그때마다 만석이 됐다.

조리서는 광산 김씨 예안파의 계암(溪巖) 김령(金坽) 종가에 내려온 <수운잡방(需雲雜方)>이다. 이 책은 <음식디미방> <온주법>과 함께 안동지역에 전하는 3대 고(古) 조리서 중 하나다. 안동은 땅이 척박하다. 그런데도 조리서는 물론 안동소주·안동찜닭·간고등어·건진국수·안동식혜·헛제사밥 등 알아주는 음식들이 지금도 많다. 물산이 풍요롭지 않은 곳에 소문난 음식이 여럿인 까닭은 무엇일까?

흥미로운 사실은 <수운잡방>을 남자가 썼다는 점이다. 남존여비 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선비가 쓴 레시피다. 이 책을 쓴 선비가 직접 조리를 했다는 기록은 없다. 음식을 관장한 정부인인 안동 장씨가 <음식디미방>을 남긴 것과 다른 점이다. 선비가 조리서를 직접 쓰게 된 건 무슨 연유일까. 또 어떻게 조리 과정을 낱낱이 알 수 있었을까. 취재는 이런 궁금증을 안고 시작됐다.

7월 28일 안동시 태화동 ‘수운잡방음식연구원’에서 김원동(62) 이사장을 만났다. 계암의 15대 종손이다. 계암 종가는<수운잡방>을 연구하고 음식을 재현하기 위해 2009년 이 기관을 설립했다. 아직은 설립 초기 단계여서 외부의 요청이 있을 때만 음식을 재현한다고 했다.

종부는 그동안 <수운잡방> 음식을 숱하게 재현해봤다. 돌아가신 시아버지가 생전에 <수운잡방>에 나오는 레시피를 하나씩 건네며 만들어보라고 한 것이다. 종가는 지금까지 한국국학진흥원 등과 손잡고 오정주·삼색어아탕 등 50여 가지 술과 음식을 재현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함께 쓴 레시피


▎김원동 종손은 <수운잡방>에 담긴 접빈객 문화를 복원하는 일에 적극 나섰다.
<수운잡방>은 조선 중기 안동 예안에 살았던 탁청정(濯淸亭) 김유(金綏·1491∼1555)가 처음 썼다. 한문으로 당시 술과 음식, 저장법 등을 적었다. 전하는 책은 김유 혼자 다 쓴 것은 아니다. 뒷부분(통상 ‘하편’으로 지칭)은 그의 손자 계암 김령(1577∼1641)이 쓴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필체도 다르다. 앞부분은 행서, 뒷부분은 초서에 가깝다. 속표지엔 ‘탁청공유묵’, ‘계암선조유묵’으로 적혀 있어 두 사람이 썼음을 시사한다.

이 책을 처음 알린 윤숙경 안동대 명예교수는 “저술 연대는 상편의 경우 1540년경이 확실하다”고 주장한다. 고추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유의 나이 50세를 전후한 시기다. 기술한 방식을 살펴봤다. 이 책의 레시피 1번은 ‘삼해주(三亥酒)’다.

“정월 첫째 해일(亥日)에 멥쌀 1말을 깨끗이 씻어 가루를 내고, 끓는 물 1말로 죽을 만들어 차게 식힌다. 이것을 누룩 5되, 밀가루 5되와 함께 섞어 독에 넣는다. 둘째 해일에 멥쌀 9말을 깨끗이 씻어 가루를 내 쪄서 익히고, 끓는 물 10말로 죽을 만들어 차게 식힌다.(…)”

‘전계아법(煎鷄兒法)’이라는 닭고기 레시피도 나온다.

“영계 한 마리를 깃털을 뽑고 사지를 자르며 피를 씻어 없애고, 참기름 2홉을 뿌려 솥에 넣고 졸인다. 닭고기가 익으면 청주 1홉, 식초 한 숟가락, 맑은 물 1사발을 간장 1홉과 섞어 솥에 부어 1사발이 될 때까지 졸인다. 파를 잘게 다지고, 형개·후추·천초가루 등을 뿌려 먹는다.”

<수운잡방>은 모두 121가지 레시피를 소개한다. 할아버지 김유가 86가지, 손자인 김령이 35가지를 수록했다. 상편에는 술 만드는 법 42가지, 식초 만드는 법 6가지, 김치 담그는 법 13가지, 장 제조법 11가지, 한과 2가지, 타락·두부 만들기, 식해, 좌반, 육면법에 파종 및 채소 저장법 7가지가 실려 있다. 하편에는 술 만드는 법 20가지, 국 조리법 6가지, 김치 담그는 법, 한과, 면법 등이 나온다.

식품학자들은 상세한 기록으로 보아 김유가 어머니 양성 이 씨와 함께 레시피를 정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의 실용적 관심은 어머니가 역법서(曆法書) <칠정산내외편>을 저술한 과학자 이순지의 손녀였던 가계의 내력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취재팀은 종손과 함께 <수운잡방> 마을을 찾았다. 안동에서 북쪽으로 도산서원 길을 따라 20㎞쯤 가면 오천유적지가 나온다. 40여 년 전 안동댐 건설로 수몰을 피해 오천(烏川, 외내)의 종택·재사·누정 등을 옮겨 새로 조성한 곳이다. 오천은 예안현 남쪽 7리쯤이었다. 광산 김씨는 고향이 물에 잠겼고 유적은 이곳에 옮겨진 것이다. 오천유적지는 입구에 세워진 표석처럼 ‘군자리(君子里)’로도 불린다.

먼저 탁청정(중요민속자료 제226호)에 들렀다. 탁청정은 <수운잡방>을 쓴 김유의 호(號)이자 정자 이름이기도 하다. 탁청정은 수리 중이었다. 지붕의 기와를 모두 걷어내고 곳곳에 공사용 파란색 천이 덮여 있었다. 탁청정(濯淸亭)이란 이름은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는다’는 중국 초(楚)나라 시인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를 떠올리게 한다. 올곧은 선비 정신을 나타낸다. 글씨는 명필 한석봉이 썼다.

“어찌 세상의 명리만을 따라다닐 것인가”


탁청정은 4칸 마루와 2칸 온돌방에 도드라진 주춧돌과 육중한 기둥이 눈에 띈다. 많은 사람이 넉넉하게 앉을 수 있는 공간이다. 이런 정자를 마련한 김유는 어떤 인물일까.

김유는 생원시에 합격한 뒤 활쏘기에 능해 무과에 여러 차례 응시한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성격은 호방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김유는 급제에 연연하다가 한 생각이 떠올라 크게 탄식한다. “삶이란 세상에 태어나 즐거워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달렸을 뿐이다. 어찌 세상의 명리(名利)만을 따라다닐 것인가.” 그리고는 그 길로 벼슬 길을 단념한다. 대신 오천에서 책을 읽고 덕을 쌓는 선비의 길을 걸었다. 문과에 급제한 뒤 관직으로 나간 형 김연을 대신해 집을 지킨 것이다.

김유는 부모를 봉양하고 선비의 덕목인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대접)’에 충실했다. 특히 접빈객에 공을 들이며 선비들과 학문을 이야기하고 시인 묵객들과 교유를 넓히는 풍류를 즐겼다. 물려받은 침류정(沈流亭)을 수리하고 탁청정을 지은 것도 그 일환이다. 오천은 도산서당·역동서원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선비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었다. 접빈객에서 매개체인 술과 음식은 빼놓을 수 없다. 그래서 그걸 망라해 정리할 필요성이 생긴 것일까.

퇴계 이황이 남긴 김유의 묘지명(墓誌銘)에 당시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퇴계는 김유보다 열 살 아래다. 지척에 살았던 퇴계도 탁청정에 들른 것이다.

“(…) 집 옆에 정자가 있었는데 공이 모두 수리하고 넓혀서 손님이 찾아오면 못 가게 잡아놓고 실컷 술을 마시니 혹 밤을 새우더라도 피로한 빛이 없었다. 이 고을을 지나는 선비들은 대부분 찾아와 즐겼으니, 비록 미천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정성껏 대접했고 착하지 않은 사람은 준엄하게 꾸짖어 조금도 용서가 없었다.(…)”

부인 순천 김씨는 손님을 대접할 때엔 집안일이 바쁘더라도 삽시간에 준비해 전혀 소홀함이 없었다고 한다. 묘지명의 마지막 부분 명(銘)은 또 이렇게 적혀 있다. “(…) 주방에는 진미가 쌓여 있고 독 속에는 술이 항상 넘치도다.(…) 생전에 즐거운 일은 자리 위의 아름다운 손님이요.(…)”

손님 대접은 이렇게 김유의 일상이 됐다. 손님이 들르면 주방에선 음식을 준비했을 것이다. 조리서는 효과적으로 손님을 대접하는 지침서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수운잡방>은 당시 ‘접빈객’용 레시피가 아니었을까.

<수운잡방>에 등장하는 레시피 121가지 중 술 만드는 법이 60가지로 절반이나 되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국학진흥원과 함께 <수운잡방>에 나오는 술과 음식 50여 가지를 재현한 서정순(63·여) 박사는 “기록된 음식 대부분이 술 안주로 손색이 없다”고 말했다. 쇠고기를 국수처럼 처리한 육면이 나오는 걸 보면 접빈객 음식의 수준도 상당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유는 어렸을 때 고모부 김만균의 집에서 자랐다. 김만균은 김유의 종조부 김간의 사위가 되면서 오천으로 옮겼다. 후사가 없어 김유를 수양자로 삼았다. 김만균은 그를 사랑해 후일 재산을 물려준다. 또 아버지로부터도 논밭 5석1두를 물려받았다. 이들 재산은 김유의 폭넓은 접빈객을 뒷받침하는 물적 토대가 됐다.

지조의 손자 접빈객 문화를 이어가다


▎탁청정에 걸린 시판. 탁청정 김유가 퇴계 이황으로부터 받은 시를 새겨놓은 것이다.
책 이름도 접빈객을 뒷받침한다. ‘수운(需雲)’은 연회 등 음식 관련 행사를 뜻한다. <주역(周易)> 3권에는 ‘운상어천수군자이음식연락(雲上於天需君子以飮食宴樂: 구름 위 하늘나라에서는 잔치와 풍류로 먹고 마시며 군자를 대접한다)’이란 구절이 나온다. 또 ‘잡방(雜方)’이란 갖가지 방법을 뜻한다. <수운잡방>은 곧 음식에 관한 김유의 관심이 교제·풍류 등에서 나왔음을 보여 준다. 김원동 종손은 “거기다 접빈객 문화를 후손들이 이어가도록 책을 쓴 게 아닐까 짐작한다”고 말했다. 척박한 안동에 음식 문화가 발달한 것도 바로 이런 봉제사접빈객 문화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한국국학진흥원은 현재 광산 김씨 예안파 문중의 기탁 유물을 전시 중이다.
김유는 아들 셋을 두었다. 김부인·김부신·김부륜이다. 모두 7군자로 불렸고 셋째 아들 김부륜의 아들 김령이 할아버지에 이어 다시 <수운잡방>을 보완한다. 오천유적지에는 탁청정 아래 오른편에 계암정(溪巖亭)이 있었다. 신도비도 세워져 있다.

계암 김령은 지조의 인물이었다.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간신이 정권을 농단하니 기강이 끊어졌다”고 탄식한 뒤 돌아와 두문불출했다. 인조반정 이후 다시 불려 올라가는 도중 “권세가가 거사를 도모해 임금을 바꾸었는데 광해 임금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말을 듣고 말 머리를 돌렸다. 그때부터 병을 핑계로 19년을 고향에서 보냈다. 그가 쓴 일기 <계암일록>에는 “돌아와 식음을 전폐하고, 세수도 하지 않고 바지도 입지 않은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앉았다 누웠다 하기를 2~3년 그 뒤 6~7년은 일절 문밖 출입도 하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김령은 할아버지 김유가 세상을 떠난 뒤 태어났다. 생전에 뵌 적이 없는 사이다. <계암일록>에는 손자 김령이 <수운잡방>을 보완한 사실을 암시하는 내용이 나온다. “선조(先祖)가 남긴 글을 내가 지금 정리하고 있다. 상당히 많은 양이다.” 또 할아버지에 이어 접빈객을 실천하는 손자 계암의 모습도 자주 등장한다. 1612년(광해군4) 3월 29일의 일기는 이렇다.

“여희·자개·이지·이건·이도·덕우가 모두 도착했고, 평보형·자개·이지 삼형제가 모두 술을 가지고 와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눴다. 밤이 돼 이도가 시를 지어 읊조리니 모두 화답했다. 여러 사람이 모두 취해 차례차례 돌아가고 오직 자개·이지와 다시 이야기를 나눴다. 밤이 되어서야 헤어졌다.”

술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당시 선비들의 주량은 어느 정도였을까.

군자리 출신인 김형수 국학진흥원 연구원은 “일기를 보면 한 사람이 평균 소주 한 병을 마신 것 같다”고 분석했다. 안동 소주 한 병을 만드는 데는 쌀 한 말이 들어간다. 접빈객을 실천하려면 넉넉한 재산 없이는 마음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조선 선비의 평균 주량은 소주 한 병


▎안동댐의 건설로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로 옮겨진 군자마을. 계암정과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손자 김령도 할아버지를 닮아 교제의 폭이 넓었다. <계암일록>에는 그가 만난 사람의 이름을 낱낱이 기록해두었다. 등장인물만 1300명 정도라고 한다. 접빈객 문화가 절정에 이르렀다고나 할까. 김령은 14세에 최연소로 도산서원 원생이 되고 32세에 도산서원 원장을 맡았다고 한다.

취재팀은 이날 오후 국학진흥원에 들렀다. 마침 그곳에서 광산 김씨 예안파 문중의 기탁유물전이 열리고 있어서다. 올해는 ‘오천칠군자’ 중 한 사람인 후조당(後彫堂) 김부필이 태어난지 500주년이 되는 해다. 이 문중이 2012년에 기탁한 1만 점이 넘는 유물 중 교지·간찰·문집 등이 전시장 한 칸을 채우고 있었다. <수운잡방>도 모습을 드러냈다. 행서로 쓴 글씨가 단정했다. <수운잡방> 뒤에는 김령에게 내린 붉은색 시호(諡號) 교지가 진열돼 있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교지에는 ‘도와 덕이 있고 견문이 넓은 것을 문(文)이라 이르고 청백하게 지조를 지킨 것을 정(貞)이라 한다’고 쓰여 있다. 김령은 그래서 평생 제사를 모시는 무한 예우를 받는 불천위(不遷位)가 됐다.

종손에게 물었다. 지금도 <수운잡방> 시대처럼 손님을 대접할 재산이 넉넉한지 궁금했다. 증권사에서 일하다 6년 전쯤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종손은 “지금은 재산이 없다”고 했다. 무슨 말인가. 1820년대 순조 연간 종손의 8대조가 노비를 해방시킨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한다. 8대조는 당시 노비들을 향해 “이제 이 집을 떠나라. 그렇지만 갈 곳이 없으면 있어도 좋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원인은 분명치 않다고 했다. 그때부터 농사 등 경제활동은 중단됐다. 재산은 조금씩 줄어들었다.

그래서 안동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놓인 종택을 옮기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했다. 대신 종손이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아버지가 생전에 표현한 그대로 “피난 생활”과 비슷하다고 했다. 종손은 종택 복원을 후대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대신 접빈객 문화를 복원하고 <수운잡방> 음식을 선보일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했다.

- 글 송의호 기자 yeeho@joongang.co.kr / 사진 공정식 프리랜서

[박스기사] 광산 김씨 예안파의 오천칠군자 - “한 동네에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

벼슬을 멀리하고 퇴계 문하에서 학문에 정진

광산 김씨 예안파가 오천에 들어온 것은 김효로(1454∼1534) 때다. 김효로는 슬하에 아들 김연과 김유를 두었다. 김연은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로 나갔고 김유는 형을 대신해 고향을 지키며 가풍을 확립했다. 김유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퇴계 이황과 가까이 지내면서 자제들을 보내 가르침을 받게 했다. 김연의 두 아들과 고종(姑從) 둘도 퇴계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김효로의 손자 김부필·김부의·김부인·김부신·김부륜과 외손자 금응협·금응훈이다. 이들 일곱 종형제는 모두 훌륭한 학자로 성장해 ‘오천칠군자’로 불렸다.

행적은 이렇다. 김부필은 27세 되던 해에 부친상을 당하자 벼슬을 접고 고향에서 일생을 보냈다. 김부의는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선발하는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이듬해 모친상을 당하자 3년상을 마치고 성균관에 유학했다. 김부인은 무관이면서도 퇴계 문하에서 경학에 정진했다. 김부신은 44세로 요절했지만 유학에 돈독했다. 김부륜은 동복현감 시절 향교가 퇴락하자 새로 정비하고 800여 권의 서책을 사들이는 등 학문을 권장했다. 광산 김씨가 예안으로 입향한 지 3대 만의 일이다.

그 무렵 안동부사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오천을 방문한다. 마을을 둘러본 한강은 “한집안 식구여도 서로 돕고 살기 어려운데 오천 한 동네에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고 감탄했다. 이후 오천은 ‘군자리’로 불리게 됐다.

전쟁터로 나가거나, 불사이군 은둔하기도

퇴계에게서 전수받은 학문은 광산 김씨 예안파 가학(家學)의 기반이 된다. 충효를 바탕에 두지만 벼슬에 연연하기보다 자연과 하나 돼 명리(名利)를 멀리하는 처사형(處士型) 사림(士林)이다.

그러나 시대는 격동기였다. 밖으로는 왜란과 호란을 겪고 안으로는 광해군의 난정(亂政)과 인조반정으로 당쟁이 격화됐다. 학문에만 전념할 수 없었던 선비들은 김해·김기처럼 전쟁터로 나가거나 김령처럼 불사이군(不事二君)하며 은둔하기도 했다.

광산 김씨 예안파 사림은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며 나라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가풍은 김해와 김령, 김광계와 김염·김선 그리고 김순의까지 4대에 걸쳐 120년간 기록된 일기에 남아 있다. 후대에 이야순은 이들을 가리켜 ‘오천25현’이라 명명하고 세계도(世系圖)를 그린 뒤 이들의 업적과 미덕을 기렸다. 광산 김씨 예안파는 이곳에서 20여 대에 걸쳐 600년 가까이 살았다.

201609호 (201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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