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Zoom Up!] 바다의 마법에 홀려 제주 해녀 된 김은주 씨 부부 

“물질하러 가는 날은 소풍 갈 때처럼 설레요” 

글·사진 주기중 기자 clickj@joongang.co.kr
억대 수입 포기하고 서울에서 제주로 이사, SNS에서도 해녀 알림이 자처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걸맞은 ‘제주해녀 시즌2’ 시대 준비해야죠”


▎‘명랑해녀’ 김은주 씨가 공천포 바다를 배경을 포즈를 취했다. 시원한 웃음소리가 바다를 닮았다.
“해녀는 아주 매력적인 직업입니다. 해녀가 되고 싶어하는 젊은이도 꽤나 많아졌어요. 이제 해녀문화도 바뀔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당당한 직업인으로서 멋스럽게 차려 입고 출퇴근하는 새로운 ‘해녀상’을 꿈꿉니다.”

제주 공천포 ‘명랑해녀’ 김은주(48) 씨의 말이다. 중년의 나이지만 고령인 해녀사회에서는 ‘아기해녀’로 통한다. 김씨는 서울에서 제주로 귀어(歸漁)해 동갑내기인 남편 김형준 씨와 함께 공천포의 해녀·해남이 됐다.

해녀라는 직업은 여자에게 힘들고, 위험한 3D 업종의 대명사다. 남자로 치면 탄광의 막장 광부쯤 될까. 어려웠던 시절 제주 여자들은 먹고 살기 위해 ‘자의 반 타의 반’ 바다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런데 ‘서울사람’인 김씨가 해녀가 된 것은 경우가 다르다. 물질하는 것이 좋고, 바다가 좋고, 제주가 좋아서다.

김씨는 동대문시장에서 꽤 잘나가는 ‘비즈숍’을 운영했다. 보석이나 구슬을 이용해 옷·구두·핸드백 등에 들어가는 장식품을 만드는 직업이다. 남편은 광고회사에서 시각디자이너로 일했다. 부부의 수입을 합치면 연 수억 원이 됐다. 사업에 실패한 것도 아니고 실직한 것도 아닌데 두 사람은 서울 생활을 접고 제주로 내려왔다.

“일보다 사람에 지쳤어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남편과 함께 ‘프리다이빙’을 시작했어요. 제주 바다를 즐겨 찾게 됐고, 취미인 물질이 직업이 됐습니다. 뭐랄까, 마법에 걸린 것처럼 제주와 제주 바다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웠습니다.”

김씨는 틈만 나면 제주를 찾았고 지인들과 함께 ‘제주 폐가 살리기’ 운동에도 관여했다. 그러다가 친구 집에서 개에 물려 다치는 일이 발생했다. 김씨는 이를 핑계로 한 달 반 동안 제주에 머물게 된다.

“사업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 시기였어요. 서울로 올라가기 싫어 친구 집에서 생활했습니다. ‘놀고먹는다’는 소리를 들을까 싶어 닥치는 대로 일했어요. 단순노동이었지요. 귤도 따고, 당근도 캐고, 식당에서 설거지도 하고…. 힘들었지만 마음은 참 편하고 좋았습니다.”

고행은 새로운 인생 설계의 밑거름 되고


▎해녀들이 소라를 따기 위해 자맥질을 하고 있다.
제주에서 고행(苦行)은 마음을 비우고,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는 계기가 됐다. 서울로 올라간 김씨는 사업을 정리했다. 남편과 딸 셋을 서울에 남겨두고 자신이 먼저 제주로 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에 남편도 흔쾌히 동의했다. 사업 스트레스와 따분한 일상에서 해방된 김씨는 ‘물 만난 고기’가 됐다.

해녀라는 직업에 묘한 매력을 느꼈다. 마침 제주시에서 운영하는 ‘한수풀해녀학교’가 문을 열었다. 김씨는 프리다이빙 국제공인자격증을 딸 정도로 자맥질에는 자신이 있었다. 2014년 한수풀에 이어 2015년 ‘서귀포법환해녀학교’를 졸업한 김씨는 공천포에 터를 잡고 해녀로 첫발을 내딛게 됐다. 김씨의 남편도 직장을 접고 지난해 제주로 내려왔다.

김씨는 낙천적인 성격이다. 늘 웃는 모습에 붙임성이 좋다. 신세대 해녀답게 ‘명랑해녀’라는 별명으로 페이스북 계정까지 열었다. 일기를 쓰듯이 공천포 해녀의 일상을 사진과 함께 올린다. 남편이 그려준 캐릭터로 ‘공천포 해녀 김은주’라는 명함도 만들었다. 해녀를 홍보하고 새로운 해녀문화를 알리겠다고 시작한 일이었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더군요. 마음고생을 많이 했어요. 갑자기 서울여자가 해녀 하겠다고 오니까 ‘저러다 말겠지…. 언젠가는 떠날 것’이라며 끼워주지 않는 거예요. 일이 힘든 것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는데… 야속했죠.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렇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주 해녀사회에는 보이지 않는 진입장벽이 있다. 위계질서도 강하다. 경력과 평균 수확량에 따라 상군·중군·하군으로 나뉜다. 물질을 할 때 들고 나가는 어구인 ‘태왁’의 크기부터 다르다. 해녀계의 궂은일은 주로 하군의 몫이다. 현재 상군과 중군의 해녀는 대부분 70~80대의 고령이다. 어릴 때부터 눈칫밥을 먹으며 해녀일을 배운 분들이다. 그래서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경향이 있다. 젊은 해녀의 영입에 소극적이다. 더구나 외지에서 들어오는 젊은 해녀가 달가울리 없다. 정해진 바다 구역은 한정돼 있는데 해녀 수가 늘면 수확이 줄어드는 것을 우려한 까닭이다.

곱지만은 않던 시선 1년쯤 지나 따스해져


▎김은주 씨가 물질을 끝낸 뒤 뭍으로 올라오고 있다. 잠수모자에 달린 불가사리 문양이 인상적이다.
제주도에서는 해녀의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앞두고 대 잇기에 고심하고 있다. 제주에 등록된 해녀는 2015년 말 기준으로 4337명. 대부분 고령이라 현업에서 활동하는 해녀는 절반에도 못 미친다. 최근 5년간에만 504명의 해녀가 줄었지만 새로 들어온 해녀는 89명에 불과하다. 해마다 100명 넘는 해녀가 줄어드는 셈이다.

제주도의 고민이 여기에 있다. 그래서 ‘해녀 인턴제’를 도입했다. 인턴 해녀를 받으면 해당 어촌계에 실습비를 지원한다. 인턴제도의 성과가 나타나 젊은 해녀가 하나둘 늘고 있다. 그러나 대를 잇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 김씨도 공천포 해녀계 인턴을 거쳐 해녀가 됐다. “정식 해녀가 됐지만 지켜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어요. 해녀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온 마음을 다했습니다. 1년쯤 지나서야 언니(해녀)들이 조금씩 마음을 열더군요.”

해녀들은 1년에 약 8개월가량 바다일을 한다. 7, 8월은 산란기이기 때문에 소라 채취가 금지돼 있다. 통상 9월에 수매가가 결정되고 10월이 돼야 물질이 시작된다. 올해는 수출업자의 가격담합으로 해산물 수매가 결정이 늦어져 11월 초에 하반기 첫 물질이 시작됐다. 더구나 물때를 맞춰야 하고 기상상황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실제로 바다일을 하는 기간은 한 달에 약 10일밖에 안 된다.

물질이 있는 날은 김씨 부부가 해녀 대기실에 가장 먼저 나간다. 방을 청소하고, 선배 해녀들의 어구(漁具)를 정리한다. 가장 먼저 나와 가장 늦게 물에 들어간다. 물질할 때도 하군은 늘 조심해야 한다. 선배 가까이 가지 않는 것이 예의다. 전통적으로 상군은 주로 수심 10~20m, 중군은 7~10m에서, 하군은 5m 이하에서 작업한다. 잘하는 사람이 초보자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배려다.

두세 시간의 자맥질이 끝나면 몸이 파김치가 된다. 물에 익숙하지 않은 초보 해녀일수록 더 고되다. 그러나 가장 먼저 뭍으로 올라와 수확물을 담는 어구를 준비한다. 선배 해녀의 ‘물마중’을 하기도 한다. 30~60㎏ 되는 수확물을 바다에서 끌어올리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파도와 싸우고, 울퉁불퉁한 갯바위와 씨름해야 한다.


▎1. 김은주 씨가 물질을 나가기 전 선배 해녀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 / 2. 물질이 끝난 뒤 김은주 씨가 선배 해녀의 물마중을 하고 있다.
그러나 김씨는 ‘명랑해녀’라는 별명답게 늘 웃음 띤 얼굴로 선배를 맞는다. 엄마처럼, 언니처럼 따르며 애교를 부리기도 한다. 힘이 들지만 속마음을 감춘다. 바다일이 끝나고 샤워를 할 때는 ‘상군 언니’들의 등을 밀어주기도 한다. ‘뜨내기’가 아닌 제주해녀로 인정받기 위해서다. 왜 어렵고 힘든 일을 택했냐는 물음에 ‘명랑해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제주 해녀사회에는 ‘불턱문화’라는 것이 있어요. 지금은 불턱이 어촌계 대기실로 바뀌었지만 그 정신만은 되살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존경받는 해녀상을 만들고 싶어요.”

해녀일만으로는 수입 부족, 대부분 ‘반농반어’


▎1. 제주 공천포에 정착한 김형준·김은주 씨 부부. / 2. 남편 김씨가 만들어준 아내 김은주 씨의 공천포 명랑해녀 명함.
불턱은 바닷가에 돌을 쌓아 올려 만든 공간으로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거나 불을 피워 언 몸을 녹이는 곳이다. 지금은 현대식 탈의실과 샤워장으로 바뀌었다. 불턱에는 엄격한 위계질서가 있다. 그러나 약자를 위한 배려의 공간이기도 하다. 상군들이 수확물이 적어 망사리가 빈 하군에게 해산물을 나눠주기도 했다. 몸이 아파 물질을 나오지 못하거나, 어려운 일을 당한 해녀를 돕는 일을 상의했다.

김씨 부부는 지난 10월 지인들의 기증품으로 벼룩시장을 열었다. 그 수익금으로 어려운 해녀들에게 쌀을 기증해 불턱 문화를 실천하는 모범을 보였다. 앞으로도 매년 벼룩시장을 열 계획이다.

“해녀에 대해 잘못 알려진 것이 많습니다. 한 번 나가면 20만~30만원은 족히 버는 고소득자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상위 10%에 해당되는 얘깁니다. 그래서 대부분 귤농사를 짓거나 반농반어(半農半漁)로 삽니다. 민관이 협력해서 제주해녀를 브랜드화하고 관련 산업을 육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해녀에게도 혜택이 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걸맞은 ‘제주해녀 시즌2’ 시대가 열리지 않을까요.”

인턴 해남으로 일하는 김씨의 남편 형준 씨의 말이다. 현재 김씨 부부는 해녀일과 함께 부업으로 작은 펜션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또 광고회사 시각디자이너의 경험을 살려 해녀 관련 콘텐트를 개발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김씨는 “최근 해녀 양성정책과 브랜드화 사업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번다’는 말처럼 정작 현직에서 일하는 해녀에게는 실질적인 혜택이 없다.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소라를 수매하는 수협차량이 오는 날은 이른 아침부터 동네가 들썩인다. 온 식구가 동원돼 바닷가에 담가뒀던 소라 망태기를 주차장으로 나른다. 해녀들이 함께 모여 소라를 크기별로 분류하고 작은 것은 바다에 다시 놓아준다. 올 하반기 수매가는 1kg당 4000원으로 결정됐다. 이날 상군 해녀는 약 100~120㎏, 중군은 60~100㎏, 하군은 30~50㎏ 정도를 납품했다. 중군인 명랑해녀는 86㎏, 인턴 해남인 남편은 50㎏에 못 미쳤다. 남편 김씨는 “해녀일은 ‘짬밥’을 무시 못한다”며 껄껄 웃었다.

취재를 마치고 김씨 부부의 기념 사진을 찍었다. “해녀·해남 된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손을 내젓는다.

“물질하러 나가는 날은 설렙니다. 해녀일이 즐겁고, 제주 바다를 너무 사랑합니다.”

- 글·사진 주기중 기자 clickj@joongang.co.kr

201612호 (2016.11.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