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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관승의 파.스.텔. 인생(9)] 반백(半白) 변곡점 돌아 화가로 변신한 이명복 

“해외에서 먼저 인정해주니 자신감 얻었죠” 

손관승 세한대학교 교수, 언론중재위원
쉰 살 나이에 방송국 컴퓨터 그래픽 디자이너 명퇴 후 ‘갤러리 노리’ 열며 제2의 인생 찾아나서… 팽나무, 조랑말, 해녀 등 제주 특유의 소재로 독특한 화풍, 국제 예술 심포지엄 ‘레지던시’ 단골 화가로 팬클럽도 생겨나

▎갤러리 노리 앞에서 부인 김은중 관장과 함께 선 이명복 화가
비행기 창문 너머로 한라산이 내려다보이는 것을 보니 제주도다. 지중해 한복판에 환상적인 마요르카 섬이 있다면 한국에는 제주도가 있다. 조르주 상드와 함께 피아니스트 쇼팽이 사랑의 도피여행을 한 곳,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이 인생 후반부 왕성한 활동을 했고 마지막 숨을 거둔 곳 역시 마요르카였다. 그곳은 유럽 은퇴자들의 낙원이다. 독일과 영국, 북유럽의 여유 있는 사람들이 추운 겨울을 피해 철새처럼 날아오는 곳이어서 스페인령이지만 외국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지금 제주도가 그렇다. 마요르카의 절반 크기인 제주도는 바다와 산, 환상적인 풍경으로 외지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문자 그대로 5감(五感)이 살아 있는 곳이다. 공항에서 만난 작은 책자에는 이런 제목이 쓰여 있었다. “여행이란 살아보는 거야!”

새로운 것을 만나기 위해 떠났다가 결국은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여행이라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낡은 개념인지 모른다. 이 시대는 방랑하는 여행자가 아닌,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기 위한 절박한 행위로서의 여행을 선호한다. 가능하다면 더 길게, 그리고 더 깊게 여행하는 방식이다.


▎2016년작- 망아지가 있는 풍경
제주공항에서 내려 자동차를 타고 한라산 중산간도로를 따라 40분 정도 달리니 아름다운 이시돌 목장이 보인다. 아일랜드 출신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 신부가 가난했던 이곳 주민들에게 자립의 기틀을 마련해주기 위해 1960년대에 세운 목장이다. 젖소와 양, 돼지를 키우고 우유와 치즈공장을 운영하던 곳으로 중세 시대 스페인의 농부이자 성인이 된 성 이시돌의 정신을 기려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푸른 눈을 가진 신부가 세운 목장 이름처럼 이국적이고도 아름다운 전원 풍경이 주변에 펼쳐져 있다.

이시돌 목장에서 조금 더 들어가니 ‘저지 문화예술인마을’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제주도가 제주특별자치도시로 바뀌기 이전 북제주군에서 문화예술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조성한 곳으로 멋진 미술관과 갤러리들이 여기저기 자리 잡은 개성 있는 마을이다. 이번 달 ‘파.스.텔. 인생’의 주인공이 있는 곳이다.

“2009년 6월 30일 회사에서 명예퇴직 했어요. 명퇴 직후인 7월에 여기 제주도로 가자고 결심했는데, 그때 제 나이 만 51세였습니다, 당연히 많은 생각이 들었죠. 이듬해인 2010년 2월 이곳으로 이주했습니다.”

이명복, 그는 26년 동안의 서울 직장생활을 청산하고 제주도의 화가로 변신했다. 그는 나와 같은 방송사 출신이다.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컴퓨터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는 그의 사무실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당연히 그와 안면이 깊고 출중한 업무능력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개인적인 것에 대해서는 사실 제대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대학에서 전공이 미술이었다는 것, 직장생활 틈틈이 작품 전시회를 가진 중견 작가였으며 심지어 언제 회사를 그만두었는지조차 전혀 알지 못했다. 서울의 직장생활이 으레 그렇듯이 말이다. 약 10년간 접촉이 끊겼다가 최근 우연한 기회에 그가 제주도로 건너와 성공한 화가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직장인 아닌 예술가로서의 원래 모습 찾아”


▎2016년작-삶1
“컴퓨터 그래픽 디자이너를 하다가 문화사업 부서로 발령받았는데, 거기서 출장을 다니며 큰 자극을 받았어요. ‘아, 내가 우물 안에만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저지 문화예술인마을에 있는 현대미술관에서 세계문화유산 전시회를 기획한 적이 있어요. 그 전에는 제주도에 와도 일 때문인지 별로 감흥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시돌 목장을 지나 이곳을 들어오는데 분위기가 너무도 달랐어요. 나지막한 언덕과 푸른 숲길,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나무들이, 그런 모든 분위기가 마음에 다가왔어요. 수목이 푸르른 5월 제주도는 정말 아름다웠어요. 그 순간 확 돌았다고 할까요?”

뭔가 이루려면 미쳐야 한다. 연애가 그렇고 사업과 예술이 그러하듯, 제2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다. 따질 것 다 따지는 타산적 사고만으로는 실행에 옮기기 힘들다. 그의 말처럼 ‘확 돌아야’ 한다. 가까운 사람들은 서울의 부암동 같은 곳에서 작업해도 좋은데 왜 먼 시골로 가느냐고 반대했다고 한다. 늘 시간과 싸워야 하고 거칠게 일하는 여의도의 방송사 생활 가운데서도 그의 마음속 한가운데에서는 화가로서의 정체성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스스로 그 끈을 놓지 않았다. 마침내 때가 오자 그는 퇴직금과 가진 돈을 탈탈 털어 이곳에 ‘갤러리 노리’를 세웠다.

“저는 미대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기 전 2년 동안 예술가로 활동을 했어요. 그런 연유인지 돈을 벌기 위해 직장에 다니면서도 ‘나는 다시 그림을 그려야 해’라는 소리가 마음속에서 계속 들렸어요.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그런 소망의 불꽃이 꺼지려고 하는 것을 몇 번이고 다시 일으켜 세웠죠. 직장생활은 직장생활, 예술가인 나의 원래 모습을 찾아 꼭 제2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말이죠.”

남자 나이 50은 인생의 변곡점이다. 방향과 에너지가 한꺼번에 확 바뀌는 시점이다. 쉰 살은 위기인가, 기회인가? 이렇게 묻는다면 대부분 전자라 답할 것이다. 만약 누군가 후자라 답한다면 아마도 돈키호테 취급을 받을지도 모른다. 우리를 둘러싼 현실은 너무도 차가우니까. 50을 넘기면 인생 위기, 더 나아가 사회적인 생명이 거의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그게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하지만 화가 이명복은 후자였다. 그는 남자 나이 50을 오랜 의무에서 벗어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때, 그리하여 마침내 나의 자유를 찾아 과감하게 실행에 옮길 그러한 시점으로 보았다. 세상은 관점에 따라서, 절박감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 보이는 법이다.

인생 ‘위기’에 ‘기회’를 만든 남자


▎제주도에서 키우던 말이 낳은 망아지 이름도 ‘노리’라 지었다.
“50이라는 숫자, 심리적으로 크게 작용하죠. 저는 회사 다니면서도 그림을 근근이 그려왔고 틈나는 대로 작품전도 했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미술에 대한 욕망이 아주 강하게 작용하는 거예요. 50살은 그 마지노선이라고 할까. 그 것을 넘으면 제 꿈을 이루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흔 살 때도 한번 기회가 있어서 명퇴를 신청했었는데, 너무 젊다고 거부당했었던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번이 아니면 안 되겠다고 해서 결행하고 여기 제주도로 왔는데, 벌써 7년이 흘렀네요, 하하하!”

마침내 그토록 원하던 일을 하게 된 자의 편안한 얼굴이었다. 명예퇴직이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된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인생의 전환점을 만든 것이다. ‘저지 문화예술인마을’에는 30여 동의 건물이 있는데, 현대미술관을 비롯해 그 절반 가량이 미술관이나 갤러리고 나머지도 예술인 창작건축물과 야외공연장이나 복합문화공간이다. 하나같이 이곳의 자연 풍광에 어울리게 지어진 건물들로 제주도를 찾는 사람들에게 문화 예술 테마 여행지가 되어 있는데, 그의 갤러리 역시 마찬가지다. 갤러리의 이름 ‘노리’는 우리말 ‘놀이’를 발음대로 풀어 쓴 것이라 한다. 일이 곧 놀이, 즉 일과 취미가 하나가 된 삶을 추구한다는 뜻이리라. 갤러리 운영관리는 보통 그의 부인 몫이다. 서울에서 그의 남편처럼 SBS에서 컴퓨터 그래픽을 담당하던 부인은 이제 갤러리 관장으로 명함이 바뀌었다. 그녀의 옆에는 큼직한 첼로가 보였다. 제주도에 와서 틈틈이 배우고 있는 중이라 했다.

“여기에서는 다양한 분을 만나게 돼요. 서울에서는 직업이나 지위에 따라 만나는 범위가 한정되어 있기 마련인데, 저희 갤러리가 항상 열려있다 보니 뜻하지 않게 많은 분과 대화를 할 기회가 생겨요. 장관이나 사장님으로서가 아니라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주고받게 되니 더 좋아요.”

부인 김은중 관장의 말이다. 남편 이명복 화백의 공간은 갤러리 2층에 달린 작업실이다. 서울에서 살다가 제주도에 정착한 화가의 하루 삶은 어떤 것일까.

“여름에는 아침 6시경이면 이곳 갤러리로 출근합니다. 집은 여기서 멀지 않은 협제 근처에 있어요. 갤러리에 도착하면 우선 마당 정리하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여름에는 풀이 아주 빨리 자라니까 운동 겸해서 풀을 깎고, 낮에는 갤러리와 작업실에서 일을 하다가 저녁 여섯 시쯤 퇴근하지요. 겨울에는 해가 짧기 때문에 오전 8시30분경에 여기 오는데, 요즘은 전시 준비하느라 늦게까지 작업하다가 밤 11시경에 퇴근합니다. 이게 보통 제 일과입니다.”

갤러리 인근에는 2007년 개관한 제주현대미술관이 있는데 그곳에 전시된 그림을 통해 화가로서의 그의 실력과 색채를 잘 살펴볼 수 있다. 오래된 팽나무, 조랑말 같은 제주도 특유의 자연 소재도 특이했지만 해녀 같은 제주도의 독특한 삶을 주제로 다룬 작품들이 눈을 사로잡았다. 글을 쓰는 작가에게 문장이 곧 그 사람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화가에게 그것은 그만의 색채와 붓의 터치일 것이다.

‘제주-라비니츠 현대미술전’이라는 특별전도 열리고 있어, 그 그림들 속에서 예술가로서 그의 현재 좌표를 확인할 수 있었다. 라비니츠(Rabnitz)는 오스트리아의 한 지역으로 매년 여름 그곳에서는 유럽과 미국, 러시아의 화가들 10명 정도를 초청해 ‘레지던시’라는 행사를 연다. 참가자들이 한 달 동안 각자 그림을 그린 뒤 공동으로 전시하는 일종의 예술 심포지엄인데, 그는 이곳의 단골 초청 화가가 되어 있었다. 독립한 지 불과 7년 만에 대단한 도약이 아닐 수 없다.

“우연이었어요. 화가로서 제 나이는 어중되거든요. 미술계도 젊은 작가를 선호하는 경향이 심해요. 그래서 어떤 계기를 마련하고 싶었는데, 오스트리아에서 온 손님들이 이웃에 들렀다가 제 갤러리에 오게 된 거에요. 그 사람 가운데 한 명이 제 그림들을 보고 자기 나라에 있는 지인에게 소개해줘서 레지던시에 초청받게 되었어요. 사실 저는 독일어는 전혀 못하고 영어도 거의 바닥 수준이었거든요. 그런데 무슨 용기가 났는지 불러주면 가겠다고 했는데, 떡하니 초청장이 왔지 뭐에요. 첫해 라비니츠에 가서 정말 고생 많이 했어요. 그래도 그곳에서 제가 그렸던 6점의 그림 가운데 절반이나 팔렸어요. 보람된 순간이었습니다.”

국제무대 진출한 뒤 팬클럽도 생겨


▎오스트리아 라비니츠에서 매년 열리는 예술 심포지엄 ‘레지던시’의 2015년 전시개막전. 한 달 간 작업한 작품들을 소개하는 예술가들의 발표를 듣는 관중들.
그렇다. 기회는 잡아야 한다. 안 된다는 이유는 10가지, 100가지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꼭 해야만 하는 이유는 단 하나, 간절함 그것 아니던가. 라비니츠의 주민들이 모이는 레스토랑에 그의 그림이 걸려있는 덕분에 그는 지역 유명인사로 통한다고 한다. 서구에서 보지 못하던 칼라와 화풍 때문 아닐까 하고 그는 말한다.

“거기서는 아무것도 안하고 하루 8~10시간 그림만 그립니다. 작업실과 게스트하우스를 제공해줘요. 끝나고 보름 동안 전시회를 함께 열죠. 열심히 한 덕분에 외국 화가 친구도 많이 생겼습니다. 독일, 에스토니아, 오스트리아, 미국 작가들과도 친해졌어요. 제 그림이 터키에도 전시되었어요. 제주도에서 지루해질 때쯤 그곳에 가서 새로운 환경 속에 작품 활동을 하다 오니 자극도 되고 좋아요. 그곳에서 제 팬클럽도 생겼답니다. 처음 다녀온 뒤로 영어도 열심히 해서 이제는 제 작품도 제법 자신 있게 설명하죠, 하하하!”

우리는 이런 표정을 행복한 얼굴이라 말한다. 이쯤 되면 확실한 인생 전환점이다. 인도네시아 발리의 작가들과도 교류전을 벌이고 있다. 해외 작가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그는 무엇을 느꼈을까?

“그림이 많이 달라요. 한국 사회는 경쟁이 심하다 보니 화가들조차 경쟁의식이 강해요. 그러다 보면 그림조차 더 자극적이고 더 튀게 됩니다. 반면에 유럽 작가들은 평화로워요. 대부분 작고 아기자기한 것들에 관심을 갖습니다. 순수하다고 할까? 그런 것이 가능한 것은 공동체 관계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라비니츠 지역은 주요 산업이 와이너리인데, 그곳에서 화가들의 그림을 사서 그곳을 찾는 손님들에게 그림을 보여주면서 예술을 소재로 비즈니스 대화를 합니다. 근처의 빵집이나 레스토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술과 삶의 유기적 모습인데, 우리는 그런 공동체가 깨진 것이 아쉽죠.”

외국 작가들과 활발한 교류뿐 아니라 제주도 지역사회와도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를 방문하러 가던 날에는 제주도 토박이 화가들인 ‘탐라미술인협회’의 일원으로 기획전을 앞두고 작업하느라 한창이었다. 제주도는 텃세가 유독 심하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는 어떻게 현지 예술인들과 쉽게 섞일 수 있었을까?

“물론 저도 이곳에 오기 전부터 텃세 소문은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생활해보니 이곳 사람들이 인심이 아주 좋아요. 이곳에 건물을 짓고 난 직후 어느 날 집 앞에 감귤 한 박스 혹은 호박 등이 놓여 있었어요. 이웃들이었죠. 고마워서 찾아가 비슷한 연배 분들이면 술 한잔도 나누면서 사는 얘기하니 빨리 친해지더라고요. 여기서는 돈이든 권력이든 뭐든 있는 척하면 적응하기 힘들어요.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면 아무래도 거리가 생기죠. 어디나 처음 오면 지역정보에 어두워서 정착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비슷한 눈높이로 다가가면 좋은 이웃으로 받아주는 것 같아요. 이 분들이 정말로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다행히 연착한 것 같습니다.”

갤러리 노리는 연중 대부분 열려 있다. 개관한 뒤 해마다 5월이 되면 지역 초등학생들을 상대로 ‘말(馬)’전을 기획하고 있다. 학교마다 100명 정도의 학생을 초대해 말을 그리게 하고 갤러리에 전시하는 행사다. 부모들은 자녀의 그림을 보러 자연스럽게 갤러리를 방문하고 그럼으로써 지역사회와 예술이 함께 한다는 의미다. 물론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로서는 자기 그림이 갤러리에 걸리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한다. 그렇다고 제주도 정착에 어려움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려움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생겼다. 정착 초기 작품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기대만큼 작업 진행되지 않아 마음의 방황을 했다고 한다.

지역사회와 예술의 공존 이뤄야


▎아직 훼손되지 않은 제주도의 환경을 사랑해 틈나는 대로 걷는다.
“약 3년을 머뭇거렸어요. 이곳에 오면 금방 그림이 잘 그려질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어요. 공간의 이동에 따른 심리적인 적응이 필요했던 것 아닌가 싶어요. 이직을 하고 새로운 곳에 가면 어느 정도 기간이 필요한 것이구나 하고 위안을 삼았습니다.”

나의 선배 기자들은 퇴직을 한 뒤 새로운 자리에 정착하기까지 ‘잉크물 빼는 데 3년 걸린다’라고 표현했는데, 대개 비슷한 듯싶다. 잉크물이란 기사를 쓰는 행위, 기자라는 자의식을 가리킨다. 그것이 사라져야 새로운 자리에 착근(着根)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제주도 초기 3년 동안 고통스럽게 그려냈던 작품들의 흔적을 나는 갤러리 한쪽에 그림을 모아둔 수장고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제2의 인생은 결국 그 3년이란 고비를 견뎌낼 수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그는 이겨냈다.

이 화백의 제주도 정착기를 들으면서 나는 2000년 호주 시드니 올림픽을 앞두고 발행된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의 특집기사를 떠올렸다. 기사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시드니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그 도시 앞에 바다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부터였다.” 무슨 말인가? 시드니 앞에 바다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지금이야 시드니라는 도시를 바다를 중심으로 생각하지만 한때는 그렇지 않았다. 도시는 가급적 바다와 멀리 떨어진 곳을 중심으로, 육지 지향으로 생각하고 설계하려고 했다. 그런데 바다의 풍광과 어울리는 오페라하우스를 건축하고 달링 하버를 건설하면서부터 이 도시의 얼굴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백인 중심의 백호주의라는 악랄한 인종주의, 건축논쟁으로 인한 분열, 흉물들까지도 한순간 아름다운 것으로 뒤바뀌어버렸다. 관점의 전환이란 이토록 위대한 것이다.

제주도라는 섬, 그리고 중년이라는 나이 역시 마찬가지다. 한때 제주도는 가난과 귀양의 상징이었으며, 가서는 안 될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제주도는 ‘자발적인 유배지’로 각광받고 있다.

미국의 스미소니언협회는 5년 전 ‘세계에서 가장 좋은 유배지(best exile of world)’를 선정해 발표한 적이 있다. 나폴레옹이 유배되었던 세인트헬레나 섬, 만델라가 27년 동안이나 갇혀 있던 남아공의 뢰벤 섬, 영화 <빠삐용>의 실제 무대인 프렌치 기아나에 위치한 악마의 섬, 칠레의 로빈슨 크루소 섬 등 20여 곳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여기서 ‘best’라는 표현은 풍광이 멋지다는 뜻이지 당시 감옥의 조건이나 대우가 좋았다는 뜻은 아니다.

한국에서 대표적인 유배지는 누가 뭐래도 제주도다. 고려 시대를 기점으로 하여, 조선 시대에는 무려 200여 명이나 이 섬에서 지내야 했다. 임금의 자리에서 폐위된 광해군 같은 유명인사도 적지 않다. 수도 한양에서 3000리나 떨어져 가장 거리가 멀었고 험한 뱃길로 가야 했기에 최악의 유배지였다. 추사 김정희는 비정한 세태를 소나무에 빗대 <세한도(歲寒圖)>라는 그림으로 남겼으며, 이중섭은 서귀포의 성냥갑처럼 작은 누옥(陋屋)에서 배고픔과 그리움에 소와 게, 아이들을 그렸다.

이제 제주도는 타의가 아닌 스스로 찾아온 ‘자발적인 유배지’로 각광받고 있다. 한국에는 3358개의 섬이 있다지만 제주도는 이제 최악의 유배지에서 최고의 은퇴지역으로 바뀌었다. 바람, 해녀, 말이 많다고 해서 ‘3다도(多島)’라 불렸던 제주도, 지금은 곳곳에 풍력발전기와 중국인 그리고 외제 자동차가 많이 보이기에 ‘신(新) 3다도’라 부르기도 한다. 김포에서 제주까지 불과 1시간 비행거리, 제주특별자치도의 선포, 여기에 국제학교가 설립되면서 외지인들의 급격히 몰려들고 있다. 제주도는 요즘 한 달에 1500명, 1년에 1만 명가량 인구가 늘고 있다고 한다. 이명복 화백이 7년 전 왔을 때 54만 명이던 제주도의 인구는 지금 65만 명으로 껑충 뛰었다. 주민등록상으로만 그러니 실제 거주하는 사람 수는 이보다 훨씬 많으리라. 당연히 땅값 상승으로 이어졌다.

“나만의 색(色) 얻기까지 40년 걸려”


▎작품에 집중하기 힘들어 방황했던 제주도 정착 초기 3년 동안 패러디 등 다양한 실험을 했던 작품들은 수장고에 모아뒀다.
일종의 기생화산이라 할 수 있는 ‘오름’은 제주도에 무려 368개나 있어 도보여행자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오름을 걸으며 제주도에서 새로운 인생을 꿈꾸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렇다고 제주도 이주가 결코 만만한 것은 아니다. 제주도에는 특유의 ‘괸당’ 문화가 있어서 주말이면 친척들이 모이는 잔치가 많다. 이런 행사에 빠지면 자칫 인간관계에서 소외되는 수도 있다. 커뮤니티의 문제는 이주자들에게는 의외로 중요하고도 심각한 요소다. 일상의 생활에서 함께 어울릴 친구가 적다면 외로움이 감돌기 때문이다. 쉽게 생각하고 왔다가 견디지 못하고 떠나는 이들이 종종 발견하는 것은 상당수 커뮤니티의 빈곤함, 심심해서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하소연이다. 부부 가운데 한쪽은 남고 한쪽은 떠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 점에서 제주도에 수준 높은 예술가들이 몰려들고 있는 것은 긍정적이다. 이제 제주도는 더 이상 자연 관광 자원만 파는 곳은 아니다. 문화가 꽃피는 공간이다.

작가는 그러나 자선사업가가 아니다. 작가는 일단 작품이 팔려야 한다. 그래야 다음 작품을 할 수 있다. 지속가능한 작가가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어떤 경쟁력을 가져야 할까?

“그냥 취미로 즐기면서 활동하기만 한다면 아마추어일 뿐이죠. 프로는 자기 작품을 파는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그림이 좋아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죠. 그림은 자기만 좋으면 되는 게 아니고, 남에게 보여주고 구입할 수 있도록 매력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명복이란 화가는 어떤 색을 가진 사람이구나, 또 하나의 색을 만들어 내기 위해 분투노력하는 모습을 관심 있는 분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게 중요하죠. 그림도 성실하고 발전해야 신뢰를 더 얻게 되니까요. 저도 저만의 색(色)을 얻기까지 40년 걸렸습니다.”

‘파.스.텔. 인생’의 핵심은 고유한 칼라가 있는 인생이다. 정형화되지 않고 자신만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의 목소리다. 2017년에 환갑을 맞는 그는 또 다른 도전의 욕망으로 불타 있다. ‘설렙니다!’ 한 번도 사업을 해보지 않고 도전하고 요구하는 교수들이나 정작 본인은 별다른 경험 없이 청산유수인 강연자들의 목소리와 질적으로 다르다. 셰익스피어는 이렇게 말했던가?

“타인의 눈으로 행복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쓰라린 일인가!”

그렇다. 새해에는 관점을 바꿀 일이다. 타인의 눈이 아닌 나의 눈으로 행복을 바라볼 일이다. 다가오는 또 다른 10년이 기대된다.

손관승 - 세한대 교수로 의사소통 능력과 스토리텔링, 리더십 등을 가르치고 있다. MBC 기자로 베를린 특파원, 국제부장, 100분 토론 부장 등을 거쳐 방송 콘텐트 플랫폼 기업인 iMBC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제2의 인생을 찾는 과정을 그린 <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 <그림형제의 길> <디지털 시대의 엘리트 노마드>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언론중재위원으로도 재직 중이다. ceonomad@gmail.com

201701호 (2016.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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