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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경지사(明鏡止史)] 반복되는 치사(恥史) 반면교사는 없었다 

문정왕후와 정난정 이후 500년 만에 반복된 여인들의 국정농단… 오랜 세월 흘렀음에도 권력자들의 패행(悖行)은 변한 것 없어 

역사저술가 김정현 kimskorean@naver.com
국정농단 끝에 법의 심판대에 오른 두 여인이 있다. 조선시대에도 이와 흡사한 일이 벌어졌다. 어찌하여 아픈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 위정자들이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했음에도 그런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문정왕후와 정난정의 국정농단을 다시 살핀다.

▎문정왕후는 우리 역사에서 대표적인 국정농단의 당사자로 알려져 있다. TV 드라마의 소재로도 등장한 문정왕후의 국정 전횡. SBS의 드라마 <여인천하>의 한 장면.
국정농단(國政壟斷)이란 나라의 정치를 독차지하다시피 하며 이익을 취해 대중에게 폐해(弊害)를 입히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에도 한두 사람이 국정을 농단한 경우가 여러 차례 있었다. 특히 그 중에는 여인들이 국정농단의 주역으로 등장했던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다. 연산군의 후궁 장녹수, 숙종의 계비 장희빈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 가운데 이미 잘 알려진 문정왕후와 정난정도 있다. 이 두 여인의 농단은 여인이 끼었던 국정농단 사례 가운데는 가장 폐해가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13대 명종(明宗) 재위 당시 문정왕후와 정난정은 권력의 자리에서 나라 일을 좌지우지하며 국정농단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문정왕후는 11대 중종(中宗)의 두 번째 계비(繼妃)다. 첫 번째 계비는 장경왕후(章敬王后)다.

당시 두 윤(尹)씨 성의 대신 사이에 파쟁이 있었는데, 이른바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싸움이다. 대윤의 우두머리는 윤임(尹任)으로 중종의 첫 번째 계비인 장경왕후의 오빠였다.

중종이 승하하자 장경왕후 소생인 인종(仁宗)이 왕위에 올랐다. 덕분에 장경왕후의 오빠인 윤임이 먼저 권신의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인종은 1년도 못 가 졸(卒)했다. 그 후임 왕으로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이 등극했다. 하지만 명종은 아직 성년의 나이가 되지 못하여 왕의 어머니인 대비(大妃) 문정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됐다. 문정왕후의 국정 개입에 따라 왕후의 남동생인 윤원형(尹元衡)이 실권을 잡았다. 소위 소윤의 우두머리가 된 것이다.

윤원형은 문정왕후를 배경으로 기존의 권신 윤임과 권력 다툼을 벌였다. 당연히 왕의 외삼촌이었던 윤원형의 승리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림(士林)이 화를 입었다. 이를 두고 을사사화(乙巳士禍)라고 한다. 결국 윤임은 죽임을 당하고, 이후에는 윤원형의 독무대였다. 윤원형은 문정왕후 못지않게 국정을 농단했다.

여기서 바로 정난정(鄭蘭貞)이 등장한다. 정난정은 윤원형의 후처였다. 윤원형이 권력을 잡자 자연스럽게 국정에 끼어들어 권세로 농단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8년 동안 윤원형과 그의 첩 정난정의 국정농단도 지속되었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는 윤원형과 정난정의 국정농단에 대해 자신의 문집 <석담일기(石潭日記)>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윤원형은 사람됨이 험악하고 독했으며 이익을 취하기를 예사로 했다. 을사사화 때 그로 인해 사류(士類)들은 화를 면한 이가 드물었다. 항간에서는 자기네들과 다른 말이 나오면 역당(逆黨)으로 지목했기 때문에 길 가는 사람들이 눈을 흘겼다. 윤원형은 세력이 날마다 크게 떨치니 권력을 농단하고 이익을 취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의복(衣服)과 거처의 찬란함은 대궐 안과 다름없었고, 뇌물을 받고 남의 것을 착취하는 일에는 그의 첩(정난정) 도움이 많았다. 생존과 살생의 권한을 잡은 지 20년이 됐는데 사림에서는 원한을 품고서도 감히 말하지 못했다.”

왕릉마저 멋대로 옮기려 했던 요승, 보우


▎문정왕후가 안장된 태릉. 왕비의 단릉이라 믿기 힘들 만큼 웅장한 능으로, 당시 문정왕후의 권세를 짐작할 수 있다.
윤원형과 그의 첩 정난정의 무섭고 대담한 국정농단을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다.

이들의 국정농단 외에 역시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국정농단에 끼어든 승려가 있었다. 보우(普雨)라는 중이었다. 후대에 요승(妖僧)으로 일컬어지기도 한 보우는 문정왕후를 배경으로 도가 넘치게 재물을 모았다. 그가 재물을 모은 이유가 불사(佛事)를 일으켜 불교를 진흥하려던 것이라 알려지기도 했지만, 그의 불교는 사이비 종교였다는 말이 많았다. 그는 궁궐에 거처하며 문정왕후의 사리판단을 흐리게 하고 벼슬아치들을 좌지우지했다. <석담일기>에는 보우에 관한 기록도 나온다.

“중 보우는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어 승려와 세속사람이 다 우러러보게 했다. 궐내에도 그의 존재가 알려지게 하여 문정왕후로 하여금 호감을 갖게 했다. 그리고 문정왕후를 속여 불사를 크게 일으켰다.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의 선과(禪科)를 설치하고 자기가 도(道)를 얻은 선사(禪師)라며 대궐 안에 거처했다.”

<석담일기>는 또 이런 기록도 남겼다.

“보우가 오랫동안 봉은사(奉恩寺) 주지(住持)로 있으면서 중종(中宗)의 능을 절 곁으로 이장해 그 절의 세력을 굳히고자 문정왕후를 현혹시켰다. 그의 말은 ‘선릉(宣陵) 근처에 길지(吉地)가 있으니 중종의 능을 그곳으로 옮겨 모셨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문정왕후는 그 말을 믿고 윤원형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켰는데, 윤원형이 대비의 뜻에 맞춰 조정 대신들을 위협하니 대신들도 마지못해 이장을 계획했다. 그리고 문정왕후 사후에도 그곳에 능을 만들 것을 작정했는데 지세(地勢)가 낮아 매년 강물이 넘쳐흐르고는 하여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이렇듯 보우가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권력을 전횡하는 일이 적지 않았으나 문정왕후 사후(死後) 제주도로 귀양가 거기서 죽음을 당했다. 보우가 국고(國庫)를 탕진한 것이 적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것은 행사에 쓰는 쌀이 수천 석씩이나 없어졌다고 한 데 있었다.

조선 선조 때 문신(文臣) 이정형(李廷馨)의 저서 <동각잡기(東閣雜記)>는 보우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양종(兩宗)을 세워 선과(禪科)를 베풀었다. 이때 문정왕후가 불교를 숭상하자 보우가 방자하게 떠벌려 이교(異敎)가 크게 성행했다. 양사(兩司)와 홍문관(弘文館)에서 해가 지나도록 간(諫)해도 왕후는 듣지 않고, 대신들이 백관을 거느리고 주청해도 보우의 행위를 막지 못했다. 문정왕후가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문정왕후와 보우의 관계가 어떤 조정 대신도 막지 못할 만큼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친오빠도 외면한 정난정의 패악


▎SBS 드라마 <여인천하>의 정난정(강수연)과 윤원형(이덕화). 이들은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즉시 탄핵되고 유배길에 올랐다.
선과(禪科)는 나라에서 인정하는 승려가 되기 위해 치르는 시험이었다. 그러니까 승려들의 과거시험이었다. 이런 선과가 생길 때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들이 극구 반대하고 보우를 죽일 것을 상소했다. 선조 때 민인백(閔仁伯)이 쓴 <태천일기(苔泉日記)>에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보우가 맘대로 떠벌려 불교가 크게 성하니 4월 8일에 장차 회암사(檜巖寺)에서 무차회를 여는데 그 비용이 국고(國庫)를 거의 바닥나게 했다. 8도의 승려와 백성들이 몰려왔다. 때는 음력 4월 7일이었다. 이날 문정왕후가 갑자기 승하하니 승려와 백성들이 놀라 흩어졌다. 수천 석의 쌀로 밥을 지으니 그 빛이 붉어 마치 피로 물든 것 같았다. 사람들은 괴이하게 여겼는데, 불사(佛事)는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끝은 있었다. <석담일기>는 윤원형과 정난정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윤원형이 쫓겨나자 백성들이 모여 돌을 던지며 죽이려 했다. 윤원형은 몰래 집을 나와 교하(交河)로 갔으나 또 원한을 품은 백성들이 찾아올까 두려워했다. 그러다 다시 강음(江陰)으로 옮겨갔다. 거기서 첩 정난정과 함께 매일 분한 마음을 머금고 울어댔다. 이때 윤원형의 전처(前妻) 김씨의 계모인 강씨(姜氏)가 형조(刑曹)에 소장을 올렸는데, 정난정이 김 씨를 독살했다는 내용이었다.”


▎최근 우리 사회를 들썩이게 한 국정농단 사태의 장본인 최순실. 위정자들이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했음에도 그런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기록도 있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잘못 전하기를 ‘금부도사(禁府都事)가 온다’는 말에 정난정이 겁을 먹고 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윤원형도 정난정이 자살한 것에 통곡하다 역시 자살했다.”

금부도사는 왕의 명령을 직접 받드는 의금부(義禁府)에 속한 관리다. 이들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기에, 또 얼마나 심한 국정농단이 있었기에 말로가 이토록 비참했을까. 당시 다음과 같은 일화(逸話)가 나돌았다.

“정난정의 친오라버니 정담(鄭淡)은 여동생 정난정이 국정농단 끝에 반드시 화를 볼 것이라 예견하고 가까이 하지 아니했다. 청탁하는 일 없이 지내며 오히려 사는 집 입구에 꼬불꼬불하게 담을 쌓아 놓았다. 이것은 정난정이 탄 가마가 드나들지 못하게 하려 함이었다.”

담장이 꼬불꼬불하니 가마가 들어올 수 없었던 것이다. 정담은 이러했기에 윤원형이 실각하고 정난정과 함께 쫓기는 죄인이 되었어도 아무 탈 없이 지냈다고 한다. 정담은 문장에 능하고 주역(周易)에 밝았다고 한다.

작금에 우리는 국정농단 끝에 법의 심판대에 오른 두 여인을 보고 있다. 국가 원수로 있던 여인은 끝내 국민들로부터 탄핵당하고 말았다. 실로 문정왕후와 정난정을 보는 듯하다. 문정왕후 당시나 오늘날에나 위정자들의 국정농단이나 만행에는 유사한 점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나라 일을 보는 위정자나 관리들이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했음에도 그런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안타까운 일이다.

- 역사저술가 김정현 kimskorean@naver.com

201705호 (2017.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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