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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한국문학, 이제는 세계로] 한강의 <채식주의자> 번역과 문학상 

예술품 만드는 장인정신이 필요하다 

김재혁 시인, 번역가, 고려대 독문학과 교수
번역은 모든 원문 속에 선험적으로 존재…번역할 가치가 있어야 진정 최고의 작품인 것

한강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데보라 스미스는 원문이 함의하고 있는 큰 줄기를 잘 살려냈다. 돋보이게 할 것은 돋보이게 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악센트를 두지 않는 쪽을 택한 번역이다. 심하지는 않지만 ‘개작’에 가깝다. 수용하는 쪽의 효과에 역점을 둔 번역이 성공을 거둔 사례다.


▎소설 <채식주의자>의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가 2016년 6월 15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사진·전민규
“한 문학작품의 가치는 그것이 다른 나라 말로 번역될 만 한가에 의해 결정된다.” 프랑스의 번역철학자 앙투안 베르만은 그의 저서 <낯선 곳으로부터 오는 시련>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의 작품이 최고의 온전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번역할 가치가 있어야 하고, 또 번역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번역은 모든 원문 속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번역가는 외국어로 된 원문 속에 들어 있는, ‘자기 말로 된 텍스트’의 원석을 캐내는 광부와 같다. 이때 그는 원 텍스트 내의 예각을, 쉽게 마모되지 않는 그 텍스트만의 개성을 살려 원문을 닮은 번역 작품을 만들어내야 한다. 괴테는 괴테답게, 카프카는 카프카답게, 릴케는 릴케답게 되어야 한다.

성격상 아주 이국적인 것이어서 작품에 각주를 달아 번역하던 시대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영국작품이나 독일 작품이나 한국작품이나 현대의 일상을 이야기할 때엔 비슷한 사물과 환경들이 나오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심리의 드라마는 그 사회만의 역사성을 품고 있다. 그러면서도 작품의 큰 줄기는 현대를 살아가는 보편적 인간의 잠재된 문제로 상연된다. 현실 속에서, 삶 속에서 우리 인간은 부조리함과 맞서야 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그 부조리함 앞에서 얼마나 좌절하는가.

데보라 스미스 번역의 놀라운 성공


▎2016년 5월 16일 소설가 한강이 <채식주의자>로 한국인 최초로 ‘맨부커상 국제부문상’을 수상하자 전국 서점에서는 이 책을 찾는 사람들이 급증했다. / 사진· 중앙포토
현실에서 행해지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말 속에는 뭔가 섬뜩한 것이 도사리고 있다. 인간심리에 내재된 보편적 폭력성의 드라마를 우리는 무엇보다 독일의 작가 알프레드 되블린의 단편 ‘민들레꽃의 살해’에서 목격한다. 주인공은 산책 중에 작은 풀꽃을 지팡이로 쳐서 목을 잘라놓고 풀꽃에 대한 연민과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로 몇날 며칠을 지새우며 고통에 시달린다. 이것을 작가는 내적 독백의 문체로 생생하게 되살려 보여준다. 인간 내면의 도착된 풍경화를 그리는 것이 현대소설의 테마가 된지는 이제 꽤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그것을 그려내는 작가의 손길은 화가의 붓질만큼이나 서로 다르다. 외국의 작가가 쓴 작품은 더욱 생소하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외국의 독자들은 거의 진공 상태에서 알려지지 않은 이국의 소설가를 대하게 된다. 이 독자들은 처음 보는 소설가의 작품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까. 소설가 한강은 <채식주의자>로 2016년 맨부커상을 수상했다. 맨부커상은 영국 땅에서 영어로 출간된 작품을 대상으로 매년 수여하는 주요 문학상 중의 하나로 1969년에 제정되었다. 2005년부터는 맨부커 인터내셔널 프라이즈라는 명칭으로 또 하나의 분야를 시행해오고 있다. 이 부문은 영어로 번역된 외국 작품에 대해 2년마다 수여한다.

한강의 작품을 영어로 옮긴 이는 런던대학에서 한국문학을 전공한 데보라 스미스다. 영어로 옮긴 작품에 대해 평가를 하고 상을 주므로 그녀가 한강의 수상에 큰 역할을 한 셈이다. 상을 준 심의위원들은 한강의 소설에 대해 ‘생소함의 깊이로 놀라움을 자아내는, 감동적이고 암시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이 평가는 우리가 작품을 읽으며 느낄 수 있는 것을 그대로 잘 드러내주고 있다. 번역이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음을 방증하는 말로 받아들여도 될 것 같다. 이 소설에 대한 평가 중 ‘생소함’은 극장에 막 들어갔을 때 어둠 속에서 어리바리하게 손과 발을 떼는 관객의 그것과 같다.

마치 카프카의 <변신> 속 그레고르 잠자처럼 작품의 주인공 영혜는 어느 날 갑자기 채식주의자가 되겠다고 선언한다. 작가는 주인공을 비롯한 주변의 인물들을 갑작스런 상황 속에 위치시킨다. 카프카의 경우처럼 결국 영혜는 주위와의 소통을 거부하고 무언가에 반항을 하면서 죽어간다. 일상의 반란이다. 작가는 줄곧 겉, 즉 표면만을 이야기한다. 꿈 때문이라고 변죽을 울려놓고서는 겉만 이야기하고 속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는 줄곧 궁금하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표면 아래에서는 뭔가가 오래도록 부글부글 끓어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시적인 상상력에 의한 산문으로 푸르고 작은 꽃잎, 푸른 몽고반점이 그림의 바탕에 깔리며, 그렇기 때문에 상징적인 측면이 강하다. 겉으로는 꽤 그로테스크하지만 이면에는 동화와 같은 분위기가 깃들어 있다. 또한 화자의 소곤대는 듯한 문체가 내적 독백처럼 번진다. 주인공 영혜는 자신의 신체를 새롭게 규정하려 한다. 그녀는 억압에 의해 규정된 운명을 스스로 새롭게 만들어가려고 한다. 그것은 식물성으로 특징되는 존재, 즉 나무가 되는 것이다. 폭력과 슬픔이 남긴 흔적과 그에 대해 저항하려는 주인공의 의지가 조용하고도 굳건히 식물성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파괴적인 의지에 의해 동반된다. 그녀의 저항방식은 나무처럼 수동적이고 끈질기다. 현실 속에서의 그녀의 사회적 기능은 마치 고장난 자명종이나 전자레인지 같다. 소설은 생명의 자연성과 인간의 인위적 이데올로기, 두 극단의 대결구도로 전개된다.

잠재된 사회의 폭력성을 한 인간의 내면에서 읽어


▎번역의 3단계론을 제시한 요한 볼프강 괴테의 초상. 마지막 단계는 원문을 그대로 대치할 수 있는 수준의 번역이다. / 사진·중앙포토
독일의 어떤 매체는 이 작품을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과 연관시켜 이야기하기도 한다. 작가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진첩을 통해 몰래 본 피비린내 나는 현장의 회상에 바탕을 둔 추론이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는 채식주의자가 혁명가처럼 보인다. 육식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주인공 영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먹기를 거부하는 것밖에 없다.

한강의 글쓰기의 특징은 사회에 잠재된 폭력성을 한 인간의 내면에서 읽어내고 그 전개와 파탄의 양식을 처절하게 그려내는 데 있다. 그 하나의 메타포가 바로 식물이다. 릴케의 <기도시집>에서도 사회적인 모든 것을 버린 ‘가난한 자들’의 모습은 곧 나무로 표현된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은 뿌리를 깊게 내린
꽃나무처럼 똑바로 서서 박하 향을 뿌립니다.
이파리는 톱니모양에 나긋나긋 합니다.”


작가 한강은 변모의 상상력을 발휘한다. 장편 <채식주의자>의 종자가 되었다고 작가 스스로 고백한, 이 소설의 출생 10년 전에 쓴 단편 ‘내 여자의 열매’에서 작가는 화분 속에서 모습을 바꾼 아내를 이렇게 묘사한다.

“그녀의 허벅지에서 흰 잔뿌리가 무성하게 돋아나왔다. 가슴에서는 검붉은 꽃이 피었다. 끝은 희고 아랫부분이 노르스름한 도톰한 꽃술이 유두를 뚫고 올라왔다.

동물에서 식물로 가는 것은 퇴화이지만 그 내면에는 시원적 원초를 향한 향수가 배어 있는 것이다. 일종의 제유법인 폭압의 붉은빛과 순수의 푸른빛의 대비는 소설을 이끌어가는 극명한 라이트모티프이다. 붉음에서 푸름으로 가는 길은 그로테스크하지만 속은 시원하다.”

이 소설은 2004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발표한 중편 <채식주의자>, <문학과사회> 2004년 가을호에 발표한 <몽고반점>, 그리고 2005년 <문학 판> 겨울호에 발표한 <나무불꽃>, 이 세 편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한 편의 장편소설이 되도록 하면서 작가가 세 편을 시차를 두고 각각의 중편으로 발표한 것은 화자를 각각 달리하여 입장에 따른 긴장감과 호소력을 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소설은 주인공 영혜와 관련된 세 인물의 시각에서 세 가지의 문체로 전개된다. 그것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회사원 남편의 입장, 예술을 하는 그녀의 형부의 입장 그리고 무엇보다 혈육인 그녀의 언니의 입장이다. 그리고 이것이 큰 서사의 틀을 형성하며 그 사이사이 세밀한 문학적 장치들이 배치된다. 작가는 내면의 심리를 감각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에서 솜씨를 발휘하고 있다.


▎최근 독일어로 번역된 소설가 한강의 주요 작품. 독일 평단은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독자의 마음속을 온통 파헤치고 깊은 인상을 남겨놓는다”고 평했다. / 사진·중앙포토
세 인물은 영혜와는 대비되는 삶을 사는 존재들이다. 첫째 장에서 남편의 어투는 상당히 냉정하고 무미건조하며 영혜를 향한 진정한 사랑을 갖고 있지 않다. 감각적인 장면으로 가득 차 있는 둘째 장에서는 식물이 되려는 영혜와 그 사이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에로틱한 욕망을 내보이는 그녀의 형부의 탐욕이 한데 어울려 울긋불긋한 그림을 그려놓는다. 숨겨진 에로틱이 소설 바탕에 잠재해 깔려 있다. 셋째 장은 결국 정신병원에 갇힌 영혜의 모습을 언니의 입장에서 후회조로 서술한다.

영혜는 무엇에 저항하는 걸까? 이것을 작가는 분명하게 드러내주지 않고, 세 인물은 각자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 바쁘다. 작가는 극단적이면서도 진지한 메시지를 품고 있는 이 이야기를 전혀 흥분하지 않은 음조로 세세하게, 꼭 필요한 것에 국한하면서 들려준다.

평범함을 가장한 남자의, 은근히 에고이스트적인 남자의 눈으로 읽어내기 어려운 아내라는 텍스트, 그녀의 모습은 만성적 수동성에 사로잡힌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 ‘나’의 시각으로 본 그녀는 평범하면서도 특이한 모습이다. 영혜는 전혀 자기주장이 없을 것 같은 무채색의 여자다. 둘 사이에는 아무런 감흥도 열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둘째 장은 암시와 상징이 가득하다. 비디오아티스트인 그녀의 형부가 그녀의 주된 파트너로 등장하는 까닭이다. 이 장에서 가장 돋보이는 문장은 다음이다.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고반점이었다. 그것이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작가는 현실에 눈을 맞추지 못하는 그녀에게 때묻지 않은 원초성을 부여한다. 이 부분이 한강의 문체를 가장 적절히 잘 보여준다. 마지막 장은 그녀의 언니가 화자가 되어 전개된다. 이곳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문장은 영혜가 외치는 “나는 이제 동물이 아니야 언니”와 “아무도 날 이해 못해…”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그녀는 내화되어 말이 없어지고 침묵의 나무가 되어 간다. 그녀는 점점 입이 없는 나무가 되어가는 것이다. 언니는 동생 영혜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빛일 것 같지만 그녀의 빛은 동생의 어두운 가슴속까지 뻗지 못한다. 영혜에게 필요했던 것은 진정한 소통이었다.

문체의 특징과 작품 전체의 분위기 살려야


▎작가 한강 씨가 맨부커상을 수상한 직후인 2016년 5월 24일 신작 <흰>의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작품에서 포인트가 될 만하며 번역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요소들은 무엇인가? 먼저 세 사람의 서술 문체의 특징을 살린 번역이 필요하다. 그 다음은 작품의 전체 분위기다. 오역은 한두 개 낱말의 그릇된 번역보다 전체 문맥과 분위기를 도외시하고 세세한 것에 얽매일 때 생긴다.

<채식주의자>가 영국의 출판사 포르토벨로 북스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어 나온 것은 2015년의 일이다. 2016년 8월에는 이 소설이 베를린에 터를 둔 아우프바우 출판사에 의해 출간되면서 독일 언론의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다층적이고 감각적이고 시적이며 상궤를 벗어난 독특한 작품의 출간을 환영하는 글이었다. 한 매체는 “이 소설은 독자의 마음속을 온통 파헤치고 깊은 인상을 남겨놓는다”고 평했다.

이 작품의 영문 판본은 영국인 데보라 스미스가, 독일어 판본은 한국인 이기향이 각각 번역했다. 영어판의 경우는 직역보다는 소통 쪽에, 독일어판의 경우는 원문을 그대로-물론 영어판을 참조한 듯 약간씩의 변형은 있다-따르는 쪽의 번역을 택했다. 맨부커상을 받을 때 큰 공을 세운 것은 데보라 스미스의 번역이다. 우리말 원본과 영문판 번역을 비교해보면 은근히 많은 부분이 원문과 다르게 번역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작품의 현지화에 많이 신경을 쓴 모습이다. 물론 번역자는 우리말의 ‘소주’를 그냥 ‘소주’로 옮겼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렇다면 영어 번역의 장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번역자가 원문이 함의하고 있는 큰 줄기를 잘 살려냈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즉 돋보이게 할 것은 돋보이게 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악센트를 두지 않는 쪽을 택한 번역이다. 이런 면에서 심하지는 않지만 이것은 독일어로 ‘Umdichtung’ 즉 ‘개작’에 가깝다. 원작에 봉사하는 번역이 아니라 수용하는 쪽의 효과에 역점을 둔 번역이다. 만약 번역 심사를 해서 최우수상을 뽑는 것이었다면 아마도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 작가의 섬세한 표현은 분위기와 줄거리를 위해 잘려나간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영국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학번역의 충실성은 낱말들의 정확한 변환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즉 낱말 하나, 문장 하나의 오역이 전체를 호도할 수는 없다. 두 가지 텍스트 즉 원본과 번역본을 놓고 보았을 때 낱말 하나하나가 그릇된 것 같지 않은 번역이 사실은 작품을 망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직접 대조를 하면 문제가 없는 듯하지만 번역만 홀로 세워놓았을 때 완전한 독립체가 되지 못하는 번역이 있기 때문이다. 데보라 스미스의 작업은 이런 면에서 완전한 홀로서기에 성공한 번역이다. 번역이 어설프게 빗나가지 않고 탄착점이 완전하다. 물론 인칭 대명사를 잘못 파악하거나, 군데군데 빠진 문장이나 어구, 낱말들이 있는 것은 아쉽다. 그러나 그녀는 전체 문맥을 파악하여 원문을 다시 한 번 새겨서 영어로 옮기면서 더 많은 호소력을 가져오려고 애쓴 것 같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영어로 번역해 일본에 첫 노벨문학상(1968년)을 안긴 번역가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는 “가와바타는 이 상의 절반은 나(사이덴스티커)의 것이라고 언론에 말했다”고 회고한다. 번역가가 작가와 작품을 잘 이해하여 도착어 문화의 환경에 적절한 언어로 옮기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 있다. 그 땅의 독자들이 소개되는 문학에 아직 익숙하지 않을 때이다. 이것은 괴테가 말한 번역의 3단계로 설명된다. 첫 단계는 시작 단계로서 생소한 이질 문화의 산문적 번안(풀어쓰기)이고, 둘째 단계는 여기서 조금 나간 자기 것을 바탕으로 한 패러디의 단계(의역 수준)이며, 마지막 단계는 독자의 입장에서 외국문학에 대한 더 깊은 호기심의 발로로서 원문을 대체할 수 있는 번역에 대한 요구의 단계(직역 수준)이다. 귀화한 헤세나 릴케 같은 것이다. 이 마지막 단계는 사실 낯선 것에 대해 저항하는 독자들에게 비난을 듣기 십상인 번역이다. 이질 문화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때 가능하다.

홀로서기에 성공한 데보라 스미스의 번역


▎일본의 문호 가와바타 야스나리. 그는 <설국>을 번역한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를 높이 평가하며 “노벨상의 절반은 사이덴스티커의 것”이라고 말했다. / 사진·중앙포토
우리 문학에 대한 외국 독자들의 현재의 인지도 면에서 볼 때 그들이 우리 작가들의 개성 있는 문체까지 맛볼 수 있는 단계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문체까지 다 살렸을 때 그 번역본을 읽는 외국의 독자가 그 맛을 느끼며 음미할 수 있을지는 현재로서는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현지의 번역자가 현지인의 입맛을 살린 개작 수준의 번역이 아직은 그쪽 땅에서 받아들이는 데 용이한 것은 아닌지 모른다.

현재 우리 문학의 세계화를 위해 힘쓰고 있는 대산문화재단이나 한국문학번역원에서는 우리 문학의 번역을 위해 원어민을 포함한 두 사람의 공동역자를 통해 번역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미적 구조물인 문학작품에 대해 두 사람의 각기 다른 취향이 반영된다면 예각이 살아 있는 아름다움을 유지하기 힘들다. 한 사람의 역자가 주도하여 번역을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하나가 책임지고 예술품으로 탄생시키겠다는 장인정신이 필요하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에게 맨부커상의 영예를 가져다준 번역도 데보라 스미스 혼자만의 작업이다.

한강의 작품은 이제 세계의 여러 언어로 번역되는 길을 가는 가운데 점차 더 완성된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이다. 한강의 작품 속에는 번역을 요구하는 잠재된 요소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독자들에게서 한쪽에서 부족했던 모습이 다른 쪽을 통해 채워지며 괴테가 말한 온전한 ‘세계문학’을 향해가는 것이다. 작품은 독자의 가슴속에서 비로소 완성되므로.

김재혁 - 현재 고려대 독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시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복면을 한 운명> <릴케와 한국의 시인들> 등의 저서와 <딴생각> 등의 시집이 있다. <딴생각>은 [Gedankenspiele]라는 제목으로 독일에서 출판했다. 독일에서 [Rilkes Welt](공저)를 출간했으며, 현재까지 60여 권의 독일작품을 우리말로 옮겼다.

201701호 (2016.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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