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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가을 정상회담 앞둔 南北의 계산법 

역사적 이벤트 감싸는 평양발 이상기류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북한전문기자
북, 트럼프와 ‘비핵화’ 담판 앞두고 남측 ‘우군(友軍)’으로 끌어안기...남, 남북 간 사업 추진에 무게 싣는 등 ‘한반도 운전자’론 굳히기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5월 26일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정상회담을 하기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
가을 남북 정상회담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남북한이 8월 13일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열린 고위급회담을 통해 “남북 정상회담을 9월 안에 평양에서 가지기로 합의했다”는 공동보도문을 낸 것이다. 지난 4월 판문점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가을 정상회담’에 합의한 내용을 ‘9월 개최’로 좀 더 일정을 구체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울러 4월 27일과 5월 26일에 이어 남북 정상이 다시 만남으로써 최고위급 소통 창구를 정례화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남북 양측에 가을 정상회담은 그동안의 남북 관계 진전 상황을 점검하고 향후 청사진을 함께 그려본다는 의미가 있다. 또 김정은 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간의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후 한반도와 주변 정세에 대한 이해를 남북이 공유한다는 측면에서 주목받고 있다. 정부는 “평양에서 9월 안에 개최될 남북 정상회담이 한반도 평화와 민족의 공동번영을 위한 역사적 이정표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준비한다”(통일부, ‘4차 남북 고위급회담 설명자료’)는 입장을 밝혔다. 미국 등 관련국과도 상황을 공유하면서 남북 관계와 한반도 비핵화가 선순환을 이루며 함께 진전해 나가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평양에서 열릴 김정은 위원장과의 세 번째 만남을 앞둔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 협력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큰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지난 1월 김정은 신년사를 통해 북한이 핵과 미사일 도발을 멈추고 대화와 교류의 장으로 나온 이후 남북 관계뿐 아니라 한반도와 북·미 관계에 중대한 진전이 벌어진 상황을 반영한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특히 판문점 남측(1차)과 북측(2차) 지역을 오가며 열린 앞서 두 차례 회담과 달리 3차 만남은 평양에서 열린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홈그라운드에서 개최되는 회담인 만큼 김정은 위원장이 보다 여유로운 입장에서 북한 비핵화에 대한 입장이나 남북 관계 현안에 대한 복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란 관측이다. 손님으로 가는 문 대통령에게 김정은 위원장이 뭔가 의미 있는 ‘선물’을 줘야 하는 상황인 만큼 주목할 만한 합의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란 전망도 제기된다.

국정운영의 무게추 대북 문제로 쏠려

정부는 일단 판문점 선언 이행이 차질 없이 진행돼 왔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상황이다. 8월 남북 고위급회담에서도 조명균 수석대표는 북측에 “판문점 선언이 차질 없이 진행돼 온 것은 남북이 확고한 이행 의지를 가지고 상호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함께 노력해 온 결과”라고 평가한 것으로 회담 관계자는 전하고 있다. 조 대표는 또 “앞으로도 판문점 선언을 차질 없이 속도감 있게 이행해 나가자”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북측 이선권 단장(북측은 회담 수석대표를 ‘단장’으로 표현)도 “전체적으로 판문점 선언이 잘 이행돼 왔다”고 평가하면서 “앞으로도 분야별로 진행 상황을 점검하면서 남과 북이 힘을 합쳐 남북 관계를 획기적으로 진전시켜 나가자”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회담 관계자는 전했다.

가을 정상회담에서 판문점 선언을 뛰어넘는 보다 큰 틀의 남북 협력과 대북 구상을 제안할 공산이 크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 같은 분위기는 문재인 대통령의 8·15 경축사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과 이선권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장 간의 판문점 고위급회담에서 ‘9월 정상회담’이 합의된 지 이틀 만에 이뤄진 공개 연설이란 점에서 문 대통령이 조금 더 자신감을 갖고 새 대북 구상을 선보인 것이란 진단이 나온다. 문 대통령은 A4용지 7장 분량의 경축사 절반 이상을 분단 극복과 남북 관계 진전, 한반도 평화구상에 할애했다. 올가을 문 대통령의 국정운영의 무게추가 상당부분 대북 문제와 한반도 정세 관리 쪽에 쏠릴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문 대통령이 경축사의 남북 관계 관련 대목에서 ‘경제 공동체’를 가장 앞세운 것은 눈길을 끈다. “정치적 통일은 멀었더라도 남북 간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자유롭게 오가며 하나의 경제 공동체를 이루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광복”이라고 문 대통령은 역설했다. “평화 공동체, 경제 공동체의 꿈을 실현시킬 때 우리 경제는 새롭게 도약할 수 있다”는 대목에서는 한계 상황을 드러내고 있는 우리 경제의 돌파구를 남북 관계 진전과 경협, 대북 투자에서 찾겠다는 의지가 드러난다. 특히 국책기관의 연구를 인용해 향후 30년간 남북 경협에 따른 경제적 효과가 최소 170조원에 이를 것이란 전망을 제시한 점에서는 문 대통령의 기대감을 확인할 수 있다.

개성공단 재가동과 금강산관광 재개에 대한 의지를 피력한 부분도 주목된다. 문 대통령은 “금강산관광 당시 8900여 개의 일자리를 만들고 강원도 고성의 경제를 비약시켰던 경험이 있다”고 강조했다. 또 “개성공단은 협력업체를 포함해 10만 명에 이르는 일자리의 보고(寶庫)였다”고 말했다. 사실 청와대는 물론 통일부·외교부 등 대북 부처는 개성·금강산의 문을 다시 열기 위한 검토작업을 그동안 물밑에서 상당 수준 진행해 왔다. 120여 개에 이르던 입주 기업이 개성공단 재가동을 위한 목소리를 본격적으로 내기 시작했고,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던 통일부 등 관련 부처도 최근엔 재가동 추진 쪽으로 분위기가 바뀐 모습이다. 조명균 장관도 요즘엔 공개 연설 자리에서 “대북제재의 틀 속에서 풀어나가는 게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개성공단 사업 재개의 ‘당위성’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는 모습니다.

금강산관광의 경우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계기로 면회소 등 현지의 시설을 우선 재가동하고 관광 재개를 위한 애드벌룬을 띄워볼 수 있을 것이란 게 정부 안팎의 분위기다. 우리 정부 당국자를 단장으로 한 시설 점검단이 지난 7월 현지를 다녀왔고, 시설에 문제가 생긴 이산가족면회소와 현대아산 소유의 호텔·식당 등을 돌아봤다. 제20차 이산가족 상봉이 열린 2015년 10월 이후 3년 가까이 방치하다시피 해 보수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면회소 등에 대한 인테리어 공사를 마친 상태다.

이런 상황 전개를 토대로 살펴보면 남북 관계의 표면적 흐름은 전반적으로 긍정적이다. 이 추세대로라면 9월 중으로 잡힌 가을 정상회담을 통해 또 하나의 ‘역사적 이정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가능하다.

수면 아래의 심상치 않은 기류가 변수


▎평양 개선문 앞을 지나는 북한 주민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9월 평양에서 만날 예정이다. / 사진:연합뉴스
문제는 수면 밑에서 벌어지고 있는 남북 당국 간의 밀고 당기기가 심상치 않은 기류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8월 13일 판문점 남북 고위급회담에서 ‘9월 평양 정상회담’에 합의하면서도 날짜를 박지 못했다는 건 상징적이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고위급회담 하루 전 브리핑에서 “고위급회담에서는 4·27 판문점 선언에서 합의한 남북 정상회담의 시기와 장소, 방북단의 규모 등이 합의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판문점 선언에 담긴 ‘가을 평양 방문’에서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 당초 ‘8월 말~9월 초’로 알려졌던 정상회담 시기도 ‘9월 안’이란 표현으로 공동보도문에 담김으로써 폭을 좁히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3월 29일 열린 고위급회담 때 1시간30분 동안 논의를 통해 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첫 정상회담 날짜를 도출했던 것과 비교된다. 불과 한 달 뒤 정상회담을 치러야 하는 상황인데도 북한이 개최 일정을 내주지 않은 건 향후 남북 관계에 그만큼 유동적인 변수가 많을 것임을 예고한다고 할 수 있다. 고위급회담이 사실상 정상회담을 위한 준비접촉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양측의 택일 불발은 이례적인 일로 보인다는 지적이다.

판문점 남북 고위급회담의 전개 과정을 꼼꼼히 살펴봐도 적지 않은 의문이 생긴다. 공개 회담에서 조명균 수석대표와 이선권 단장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지만 합의 내용을 담은 공동보도문은 3개의 짤막한 문장에 불과했다. 오전 10시에 시작한 회담은 70분간의 전체회의에 이어 수석대표 접촉 1회, 대표 접촉 2회 등 모두 2시간에 불과했다. 회담을 시작하며 공개 환담에서 “한배를 타면 운명을 같이한다는 것”이라며 기대를 보였던 이선권 북측 단장은 종결회의에서는 싸늘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북남 회담과 개별 접촉에서 제기한 문제들이 만일 해결되지 않는다면 예상치 않았던 그런 문제들이 산생될 수도 있고, 또 일정에 오른 문제들이 난항을 겪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비공개 접촉 과정에서 우리 측에 적지 않은 전제조건이나 요구사항을 제시했다는 점을 암시한 것이다.

이선권 단장은 회담장을 떠나며 남측 취재진에게 “기자 선생들 궁금하게 하느라 (정상회담) 날짜를 말 안 했다. 날짜는 다 돼 있다”고 너스레를 떠는 등 장외 신경전까지 펼쳤다. 남측 당국의 태도나 입장에 따라 회담이 언제든지 열릴 수 있다는 논조의 전형적인 대남 선동술이라는 게 남북회담에 오래 관여했던 한 당국자의 귀띔이다. 우리 회담 대표단과 청와대·통일부 등은 이에 대해 일절 함구하고 있어 궁금증을 증폭시키고 있다.

사실 올 들어 전개된 남북 정상회담이나 당국 대화 등은 거의 대부분 북한 측 요구에 의해 성사된 측면이 크다. 4·27 판문점 정상회담의 경우 평창 겨울올림픽 개막식 참가차 방한한 김여정 노동당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이 지난 2월 10일 청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오빠인 김정은 위원장의 친서를 전달하면서 물꼬가 트였다. 5월 26일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열린 정상회담의 경우도 김정은의 긴급 제안을 문 대통령이 수용하는 방식으로 비공개 회담이 이뤄졌다.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상황에서 북한의 외교 관리들이 미국 측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입장을 내자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 취소 서한을 김정은에게 보내면서 남북 정상 간 긴급한 소통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8월 판문점 남북 고위급회담도 북측의 요구에 의해 테이블이 마련됐다. 북한이 최근의 남북 관계와 관련해 자신들의 입장을 전달하고 가을 정상회담과 관련한 논의도 벌이는 자리를 제안한 데 따른 만남이었다.

북한의 대남(對南) 행보가 거칠어지는 이유


▎조명균 통일부 장관(왼쪽)과 이선권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이 8월 13일 판문점 통일각에서 열린 제4차 남북 고위급회담을 마친 뒤 악수하고 있다.
남북 관계 개선과 한반도 정세 관련 논의나 합의사항 이행에 비교적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던 북한의 보폭이 이처럼 좁아지기 시작한 건 6월 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기점으로 해서다. 트럼프와의 정상회담을 앞둔 5월 24일 풍계리 핵실험장 폭파 등의 이벤트를 국제사회에 공개하며 분위기를 띄운 김정은 위원장은 정작 센토사 섬에서 4개항의 북·미 정상 공동성명을 내놓은 뒤 속도 조절에 나선 모양새를 보였다.

미국이 장담했던 북핵 폐기를 위한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가 공동성명에 빠지면서 김정은은 대미 협상에 자신감을 보이는 듯한 태도를 드러냈다. 지난 한 해 핵·미사일 도발에 대한 미국과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에 밀려 회담 테이블에 나온 그는 남북 정상회담에서 약속한 ‘완전한 비핵화’ 카드를 트럼프와의 대좌에서도 그대로 써먹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연합훈련 중단을 선언하는 등 북한으로선 뜻밖의 선물도 챙겼다. 김정은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과거를 걷고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역사적인 서명”이라고 공동성명을 평가한 뒤 “세상은 아마 중대한 변화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말한 ‘중대한 변화’의 조짐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북한은 워싱턴을 염두에 둔 몇 가지 실행조치를 통해 북·미 공동성명 합의 내용을 이행하는 듯한 제스처를 보여 왔다. 무엇보다 성명 제4항에 언급된 6·25전쟁 당시 북한 지역에서 사망하거나 실종된 미군 유해 발굴 및 송환에 초점을 맞췄다.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나 새로운 북·미 관계의 수립 등 여타 항목보다 실행이 빠르고 수월한 데다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효과가 크다는 점이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평북 동창리 미사일 발사 기지의 해체 같은 상징적 조치도 병행했다. 새로운 핵 관련 시설의 건설 징후가 포착되는 등 일각에서 북한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북·미 관계는 특별한 파열음 없이 순항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김정은에 대한 높은 평가와 신뢰를 언급하고 ‘비핵화’ 등 합의를 이행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데 힘입은 바 큰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문재인 정부를 대하는 북한의 태도가 점차 거칠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정상회담 추가 개최를 목전에 둔 상황임에도 남북 당국 차원의 경협 사업이나 민간 교류에 좀체 활기가 돌지 않는 분위기다. 판문점 합의에 따른 ‘동해선·경의선 철도 연결 및 현대화’ 사업도 북한은 뭔가 석연치 않은 태도를 취하며 적극성을 보이지 않고 있다. 7월 중순으로 양측이 약속했던 철도 연결지점 공동조사도 구체적인 답을 주지 않고 계속 미적거리다 하루 전에 갑자기 통보해 우리 관계자들이 부랴부랴 짐을 싸 현장으로 달려가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사회·문화 분야 교류 사업의 경우도 북측이 선호하는 사업 위주로 진행되고 있다. 김정은이 관심을 보인 통일 농구의 경우 7월 4일 평양에서 치러졌다. 남북 유소년 축구 경기 등 스포츠 분야에 치중된 교류가 이뤄지고 있을 뿐 본격적인 민간 차원의 왕래는 아직 실행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통일부 관계자는 “7월 이뤄진 송영길 북방경제협력위원장의 나진·선봉 방문과 김홍걸 민화협 상임의장의 방북도 북측 요구로 최소한의 인원으로 줄여 성사됐다”고 말했다. 4월 평양에서 열린 남측 예술단의 공연 ‘봄이 온다’에 대한 답방 형식인 북측 공연단의 ‘가을이 왔다’ 행사의 경우 우리 측이 “언제쯤 남한에 오는 게 좋겠느냐”고 물었지만 북한은 묵묵부답이라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을 지목한 대남 비방까지 서슴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노동신문]은 지난 7월 20일자 보도에서 문 대통령에게 “주제넘은 허욕과 편견” 운운하며 “감히 입을 놀려대고 있다”는 거친 비난을 퍼부었다. 일주일 전 싱가포르 랙쳐 행사에서 “북·미 공동성명을 지키지 않을 경우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양측 정상을 항해 합의 이행을 촉구하자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김정은이 북한 엘리트와 주민에게 줄 선물


▎금강산호텔은 북한 금강산관광의 한 상징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올 8·15 경축사에서 금강산관광 재개 가능성을 시사했다.
관영매체를 동원한 대남 압박 공세도 노골화하고 있다. [노동신문]은 8월 2일자 보도에서 “상대방에 대한 제재는 북남 관계 개선에 백해무익하며 조선반도의 정세 완화에 배치되는 대결정책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외세의 눈치를 보며 구태의연한 제재압박 놀음에 매달린다면 북남 관계의 진정한 개선은 기대할 수 없다”고 문재인 정부를 압박했다. 금강산관광 재개와 개성공단 재가동을 요구하는 노골적인 주장도 펼치고 있다. 신문은 7월 31일자에서 “5·24 대북제재 조치와 이전 정부의 독단적인 개성공단 폐쇄에 격분했던 현 집권세력이 왜 대북제재라는 족쇄에 두 손과 두 발을 들이밀고 남북 관계까지 얽어매느냐”고 문재인 정부를 파고들었다.

김정은 정권에 올가을은 체제의 명운이 걸렸다 할 정도로 중대한 시기일 수 있다. 우선 북한 정권 수립 70주년인 9·9절 행사를 치러야 한다. 집권 7년차인 김정은 체제가 핵과 미사일 도발을 접고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생존 모색에 나선 결과가 어떤 것일지 북한 권력 엘리트와 주민들은 주시하고 있다. 김정은이 7~8월 삼복더위에도 북한 곳곳의 공장, 기업소와 협동농장 등을 찾아다니면서 생산증대와 당 간부 및 지배인 등 관리자들의 분발을 촉구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북한 관영매체들은 9·9절을 대축전장으로 만들자는 캠페인을 일찌감치 시작한 상태다.

9월 하순 유엔총회도 북한으로선 신경 쓰이는 자리다. 김정은 위원장의 유엔 데뷔나 총회 연설 가능성까지 점쳐지는 가운데 남북한 정상과 트럼프 대통령이 만나 종전선언을 하는 이벤트까지 거론되고 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지난 7월 유엔총회에서의 남북한과 미국 3자 정상회담 가능성에 대해 “예단하기 어렵지만 배제할 수는 없다”고 말한 것도 이런 점을 염두에 둔 때문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문 대통령과의 세 번째 정상회담을 치러야 하는 김정은으로서는 몇 가지 노림수를 갖고 임할 수 있다.

첫째, 트럼프 정권과 ‘비핵화’와 ‘체제 보장’ 등의 힘겨운 담판을 벌여 나가야 하는 입장에서 문재인 정부를 남북 관계의 틀에 묶어둘 필요성을 느꼈을 가능성이 높다. 앞서 두 차례의 정상회담이 워싱턴의 문을 두드리는 정거장 역할을 했다면, 다음 번 회담은 한·미 공조의 균열을 통한 ‘우리 민족끼리’ 공감대를 다짐받는 자리가 될 수 있다. 남한과의 교류·협력은 물론 대남 메시지의 수위 조절을 통해 미국의 예봉을 꺾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판단일 수 있다. 유사시 북·미 관계에 다시 파국이 올 경우 문재인 정부 또는 북한에 우호적인 세력이 대북 지원 우군 역할을 하도록 여건을 조성하려고 시도한다는 얘기다.

둘째, 대북제재의 무력화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한국 정부를 방패막이로 써먹겠다는 의도도 드러난다. 북한 김정은이 핵·미사일 도발을 멈추고 대화 국면으로 돌아서게 만든 데는 대북제재가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문재인 정부의 핵심 참모와 당국자도 큰 이견을 제기하지 않는다. 문 대통령도 이 점을 강조하며 트럼프 정부의 노력을 치켜세운 바 있다. 북한 입장에서 대북제재의 해제 없이는 북한 경제의 회생이 불가능하고, 김정은 체제의 안정성도 담보할 수 없다. 하지만 미국과 국제사회는 김정은의 ‘비핵화’ 약속만으로는 제재의 고삐를 늦추지 않겠다는 분명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런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남북 교류와 협력을 내세워 다양한 방식으로 대북제재의 예외 조치를 유엔에 요구하고 있는 문재인 정부를 활용하겠다는 게 북한의 심산으로 보인다. 최근 북한 당국자들의 입이나 관영매체의 주장에서 문재인 정부의 대북제재 노선 이탈을 촉구하는 볼륨이 높아진 건 이런 배경에서다.

대북제재 무력화에 한국 정부를 방패막이로?


▎2015년 2월 개성공단에서 근로자들이 작업하는 모습. 정부는 최근 개성공단 재가동 추진을 검토 중이다. / 사진:연합뉴스
셋째, 빨간불이 켜진 북한 경제의 회생을 위한 긴급 지원 형태의 자금·물자 조달을 위한 창구로 정상회담 테이블을 이용할 공산도 크다. 북한은 철도·도로 등 인프라 구축을 위한 협력 사업을 주장하며 문재인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이를 두고 2007년 10·4 합의에서 약속한 천문학적 규모의 투자 이행을 촉구하는 의미라는 해석이 나온다. 연간 최대 8000만 달러(약 904억원 수준)의 현금 수입을 가져다준 개성공단이나 9억4200만 달러의 관광 대가를 럼섬(lumpsum, 일시불) 방식으로 약속했던 금강산관광 재개에 북한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두 사업은 미국이 주도하는 대북제재의 중심축을 차지하는 데다 벌크캐시(bulk cash)의 유입 차단 움직임을 무력화할 수 있는 아이템이다.

이런 북한의 움직임에 대처하는 정부의 전략이나 수단은 미덥지 못한 게 사실이다. 대북제재는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과 국제사회가 정한 규율 위반에 대한 징벌적 성격의 조치다. 북한이 남북 관계와 한반도 안정을 해치는 행위를 중단하고 대화와 협력으로 나오도록 견인하기 위한 정책 수단이다. 최근 이 같은 대북제재의 틀을 훼손하려는 시도가 우후죽순처럼 나타나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평창올림픽에 북한을 참가토록 하기 위한 ‘제재 예외 조치’는 논외로 하더라도 개성 남북 연락사무소에 대한 우리 전력 지원과 금강산 면회소 개·보수, 서해 군 통신선 개통 장비 지원 등 남북 관계 전반에 걸쳐 제재를 우회하거나 회피한 대북 지원성 사업이 실행됐거나 추진 중이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 때문인지 문재인 대통령의 언급에서도 대북제재의 철저한 이행보다는 남북 간 사업 추진 쪽에 무게가 실리는 듯한 모양새다. 문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금강산관광 재개나 개성공단 재가동을 통한 경제적 효과에 초점을 맞췄다. 싱가포르 랙쳐 방문 당시 개성공단과 관련해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이행을 통한 대북제재 해제”라는 전제조건을 달았지만 이번에는 달라진 것이다. 문 대통령은 “남북 관계 발전이 북·미 관계 진전의 부수적 효과가 아니다”며 “오히려 남북 관계 발전이야말로 한반도 비핵화를 촉진시키는 동력”이라고 강조했다. 가을 정상회담에서 다시 한번 ‘한반도 운전자’로서의 역할을 부각시킬 것임을 예고하는 모습이다.

2018년 한반도의 여름은 유난히 뜨거웠다. 올 들어 두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과 한 차례의 북·미 정상회담을 치러낸 상황 속에서 교류 협력과 비핵·평화에 대한 열망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역사적인 이벤트가 불러온 들뜬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남북 관계와 한반도 정세의 근저에는 평양발 이상기류가 여전히 맴돌고 있다.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809호 (2018.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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