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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식의 부국굴기(富國屈起) | 자유시장경제의 원류를 찾아서(4)] 중국 송나라가 낳은 인류 최초의 화폐 경제 

상업 흔들어 깨운 유연한 과세 정책 

베트남 쌀 도입에 따른 농업 생산성과 인구 증가 등으로 소비사회 도래
군사력의 취약성 무역으로 보완하고, 몽골에 멸망된 후 유럽에 문물 전파


▎북송 시대 수도 개봉의 모습을 담은 청명상하도의 일부. 당시 북송의 경제번영을 짐작할 수 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비교 대상이 유럽과 중국이다. 각기 서양과 동양을 대표하는 양대 지역인데다 주변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성향을 가졌기 때문이다. 특히 유럽의 고대 로마제국과 중국의 한(漢)나라는 비슷한 시기인 기원전·후의 4세기 동안 대륙 규모의 영토를 지배하며 전성기를 맞았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유럽은 로마제국 이후 줄곧 분열된 상태였지만 중국은 이후로도 대부분 통일된 제국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고대 한나라부터 현대 중화인민공화국까지 2000년이 넘는 중국 역사에서 송나라를 집중 검토하는 이유는 ‘부국굴기’라는 기준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만일 중국 역사에서 강대국을 검토하는 것이 목표라면 아마 한나라나 당(唐)나라, 또는 원(元)·명(明)·청(淸) 등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실제 진시황의 짧았던 대륙 통일 이후 등장한 고대 한나라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를 역사에 뿌리내리는 역할을 했다. 또 황하와 양자강 유역을 중심으로 태평양과 티베트 사이의 영토를 통일한 국가의 기초도 역시 한대(漢代, 기원전 206~서기 220년)에 수립됐기 때문이다. 중국어가 여전히 한어(漢語)로 불리지 않는가.

중세의 당나라(618~907년) 역시 중국이 전성기를 구가한 시기다. 영토를 넓히고 활발한 국제 교역의 중심으로 발전을 이룩했으니 말이다. 당인(唐人)이라는 표현이 중국인을 의미하게 된 것도 그 덕분이다. 13세기부터 20세기까지 중국 대륙에서 제국을 형성한 원·명·청은 모두 동아시아를 지배하는 강대국의 면모를 발휘했다. ‘대국굴기’ 시리즈라면 중국을 대표할 수 있는 당당한 후보들이다.

이에 반해 국제정치나 군사적으로 보면 송나라는 취약한 세력이었고 실제 쉽게 무너지는 경향을 보였다. 예컨대 북송의 시기에 대륙의 북부는 송과 거란의 요나라가 양분했고, 남송의 시대에는 아예 중화문명의 핵심인 황하 유역을 여진의 금나라에 완전히 내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국’의 기준으로 살펴보면 송나라가 단연 으뜸이다. 중국은 송대(宋代, 960~1279년)에 경제 수준이 정점에 도달한 뒤 19세기 유럽에 추월당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산업혁명 이전의 중국 대륙에서 1000년의 경제 선진국으로 부상한 시기는 송나라 때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자본주의 세상과 중국 송나라의 가장 인상적인 공통점은 정부가 발행하는 지폐가 전국적으로 사용되는 경제라는 사실이다. 요즘 신용카드나 모바일 결제의 부상으로 지폐 사용이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그린백’이라 불리는 미국 지폐 달러나 마오쩌둥이 그려진 중국의 위안화는 해당 국가경제를 상징한다. 유럽의 유로, 일본의 엔, 한국의 원화 역시 그 나라의 경제를 대표한다.

군사력 취약한 宋이 부국된 이유


▎마르코 폴로는 유럽에 지폐 경제의 아이디어를 전파했다.
송나라는 무려 1000년 전에 인류 최초의 정부 발행 지폐 경제를 형성했다. 물론 고대 그리스도 기원전 시기에 이미 정부가 발행한 은화를 통해 정치 권력 주도 하에 경제 질서를 창출했다. 하지만 금·은 등의 화폐는 그 자체가 가치를 갖기 때문에 사회적 신뢰에 의존하는 지폐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지폐를 활용하는 화폐 경제가 작동하려면 사회를 통제하는 정부의 능력이 무척 강하거나 화폐 발행 제도에 대한 대중의 신뢰가 밑받침돼야 한다. 유럽에서 이런 형태의 지폐 경제는 17~18세기 프랑스에서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19세기가 돼서야 영국의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지폐 중심의 경제가 제대로 형성됐다.

사실 중국의 화폐 역사는 적어도 춘추전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개껍질이나 거북이등껍질을 사용하는 초기부터 옥이나 금을 사용했던 시기를 거쳐, 한나라 시대에는 처음으로 동전이 대규모 발행됐다. 중국은 로마에 버금가는 거대한 영토를 가진 제국을 형성했을 뿐 아니라 권력을 중앙에 집중하는 강한 국가였다. 이런 거대한 국가조직을 운영하기 위해선 전국에서 세금을 거둬야 했다. 화폐는 징세와 관료의 봉급, 벌금 등에 다양하게 적용되는 경제 수단이었던 것이다.

동전(銅錢)과 철전(鐵錢)은 고대 중국 경제에서 가장 많이 활용되는 기본적인 화폐였다. 송나라에 와서도 동전과 철전은 일상에서 가장 즐겨 사용하는 지불 수단이었다. 하지만 경제의 규모가 성장하면서 고액을 보관하거나 이동하기 어려운 동전이나 철전보다는 지폐라는 새로운 수단을 발명해 활용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종이 문서를 화폐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사천(四川) 지역의 상인들이었다. 중세 유럽에서 상인들이 문서를 통해 화폐 기능을 개발했듯이 중국에선 이보다 몇 백 년 앞서 신용화폐를 사용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송나라 정부가 이 아이디어에 착안해 지폐에 크게 의존하는 경제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960년 나라를 세워 중국 대륙을 지배했던 송조(宋朝)는 1023년에 교자무(交子務)라는 기관을 설립해 지폐 관리를 맡겼다. 여기서 교자란 지폐를 의미하며 교자 대신 회자(會子), 철인(鐵引) 등의 명칭이 사용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주어진 지역에서 제한된 기간 동안만 사용되던 지폐는 점차 지역과 유효 기간이 확대돼 송나라 말기가 되면 정부가 회주(淮州), 성도(成都), 항주(杭州) 등에 공장을 만들어 직접 지폐를 인쇄하는 조폐 기능까지 관장하게 된다. 항주의 조폐 공장에선 이미 1000명에 가까운 노동자가 작업했다고 전해질 정도다. 산업혁명 이전 시기에 중국에서는 대규모 공장이 존재했던 셈이다. 몽골의 원나라도 송의 지폐 전통을 이어받았는데, 마르코 폴로와 같은 유럽의 여행자들이 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서구에 전달했다.

고대 바빌로니아부터 그리스나 로마에서 보았듯이 인구의 증가는 대부분 경제 생산성이 더 높아졌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중국의 송나라 시대 역시 인구가 대폭 증가했다. 실제 당나라 시기인 713년 750만 호였던 가구 수는 송나라 초기인 980년 610만 호로 줄어들었다가, 1085년에는 1540만 호로 크게 늘었다. 또 이후에도 성장세는 지속돼 1102년 4550만 명 규모였던 인구가 1207년에는 8000만 명 수준으로 불어난다. 1207년의 인구수는 중국 남부에 자리한 남송(南宋)과 북부에 있는 금(金)나라의 인구를 더한 숫자다.

베트남 참파 쌀이 중국을 먹여 살리다


▎송나라의 화려한 궁중생활과 미식문화를 묘사한 ‘문회도’. / 사진:교양인
중국에서 이와 같이 인구가 가파르게 증가할 수 있었던 가장 커다란 요인은 양자강 이남 지역의 개발과 이모작이 가능한 동남아 쌀의 도입이다. 11세기 송나라의 인종(仁宗)은 복건성의 관료를 베트남 참파(Champa)에 파견해 보물을 선사하고 그 대가로 일찍 여무는 올벼의 종자를 받아오도록 하였다. 올벼의 도입으로 기후가 온화한 중국 남부에선 이모작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송나라 시기의 농업 생산성을 계산하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지만 사료를 바탕으로 평균을 따지는 연구에 따르면 헥타르 당 2800㎏의 쌀을 수확한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시기인 중세 유럽에서 밀의 수확량은 300~500㎏에 불과했고, 20세기 초 미국의 아이오와에서도 2500㎏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무척 높은 생산성이었던 것이다. 물론 유럽이나 미국의 밀농사와 비교했을 때 중국의 쌀농사는 더 많은 조직력과 노동력이 투입돼야 했다. 관개시설을 건설해야 했고 손도 더 많이 가는 농업이었기 때문이다.

송나라 정부는 관개시설을 만드는데 앞장 선 것은 물론 남부의 땅을 개간하는 데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대략 8세기부터 중국은 양자강 하류에서 농토를 개간하는 작업을 시작했고 13세기까지 이를 완성했다. 또 항주만이나 광동의 주강(珠江) 하류에서도 관료가 주도해 땅을 개척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런 작업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북해를 막아 농토를 개간한 노력과 비교할 만하다.

농지를 개발한 송나라의 노력은 원나라의 통계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전국에 걸친 정부 수입 가운데 양자강 하류의 농토에서 거두는 세금이 40%나 차지했는데, 그중 40%는 국가가 직접 소유하는 농지에서 발생한 세금이었다. 말하자면 국가 수입의 무려 16%가 양자강 하류 국가 농토에서 집중적으로 도출됐던 셈이다.

송나라는 도시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도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와 마찬가지로 중국은 고대부터 도시가 발전하는 특징을 공유했다. 중국 역사에서 서한(西漢)시기(기원전 206~서기 24년)는 도시화가 매우 발달해 서기 1500년 유럽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동한(東漢)시기부터 당대(唐代)까지는 도시화가 오히려 퇴보하는 경향을 보인다.

중국에서 도시화가 다시 진행된 것은 송나라 때다. 이 시기에 도시에 사는 사람의 비중은 전 인구의 10%에 달했는데 이는 유럽이 1800년에 이르러서야 도달한 수준이다. 북송의 수도였던 개봉(開封)과 남송의 수도였던 항주(杭州)는 인구가 100만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였다. 이처럼 중세시대에 이미 송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화려한 대도시를 둘씩이나 만개시켰던 것이다.

‘청명상하도’에 구현된 도시의 발전


▎중국 취주(臭州) 금채산에 위치한 육승탑. 송나라 시대 5층 석탑으로 무역선들을 위한 등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송나라 장택단(張擇端)의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는 12세기 수도 변경(汴京, 현대 개봉)의 모습을 상세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청명절을 맞아 거리에 나온 사람들과 도시의 풍경은 당시 발달한 도시문화의 일면을 보여주는 한편, 풍요로운 송나라의 현실을 소개한다. 그림에 나오는 도시의 거리는 많은 사람과 마차, 수레로 활기차게 붐비고 있으며 상점이나 장터에서 거래가 이뤄지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또 길에는 서남아시아에서나 볼 수 있는 낙타도 등장하는데 송나라에서 국내 교역뿐 아니라 국제 무역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증명해준다.

강가에는 많은 배들이 떠있는데 당시 중국 남북을 연결하는 대운하를 통해 교역이 얼마나 활발하게 이뤄졌는지 쉽게 상상하도록 해준다. 또 배를 자세히 살펴보면 당시 송나라의 조선 기술을 엿볼 수 있다. 중국은 바퀴를 돌려 배를 운항하는 기술을 적용했고, 바다에서 사용하는 커다란 배의 경우 1000명까지 승선할 수 있는 규모였다. 송나라의 중국 상인들은 바다를 통한 해외 무역에 활발하게 나섰고, 특히 남송(南宋, 1127~1279년) 시기에 수도를 강남 항주로 옮긴 다음에는 광동이나 복건성을 기반으로 하는 무역이 발달했다.

이처럼 송나라는 당시 일종의 중상주의(重商主義)를 실천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일례로 정부는 항주·광주·천주 등 연안에 8개의 무역관을 운영했다. 그 가운데 복건성의 천주(泉州)는 동남아를 넘어 인도양을 향한 중국 해외 무역의 핵심 기지였다. 남송 시기 천주 지역 출신 관료들이 송나라 조정에 다수 발탁될 정도였다. 또 이런 해양 무역의 도시에는 아랍 상인이 정착해 중국 고위 관료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1970년대 천주 앞바다에서 난파선이 발견됐는데 배 안의 상품을 조사한 결과 향료·조미료·약재 등이 있었고 이들 가운데 일부는 동아프리카 연안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물건도 있었다. 중국에서 출발한 배가 동남아나 인도, 아라비아를 거쳐 동아프리카까지 진출했을 가능성을 점칠 수 있는 것이다. 명나라 정화의 해외 대원정이 무(無)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수 품종의 쌀을 도입해 농업 생산성이 늘어나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동시에 도시가 발달하면서 송나라는 이후 자본주의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소비사회의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개봉이나 항주를 중심으로 각자의 취향에 따라 동호인들과 모여 취미를 즐기는 클럽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또 이런 활동을 뒷받침하는 해당 서적들이 출간돼 대중화를 이끌었다. 예를 들면 수많은 요리 책이나 차(茶)에 대한 서적, 레스토랑의 등장, 술에 대한 안내서 등을 발견할 수 있다.

개봉은 항주처럼 바다에 접한 도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봉에는 다양한 종류의 말린 생선을 쉽게 소비할 수 있었을 만큼 연안과 내륙의 교역이 활발했다. 송나라 시기 중국은 광동 지역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해 설탕 생산이 증가한 것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송 말기에 차는 점차 대중이 대량으로 소비하는 중요한 상품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수도에서 생선 요리나 설탕을 넣어 만든 단 음식을 먹으며 차를 마시는 일이 일상이었다는 말이다. 이는 대륙 규모로 연결된 효율적 시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중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육류는 돼지고기다. 유명한 동파육의 요리법은 미식가 소동파(蘇東坡)가 직접 작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양주(揚州) 볶음밥도 송나라 때부터 전해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지금과 차이가 난다면 당시는 많은 고기를 생식(生食)했다는 점이다. 송나라 사람들은 생선은 물론 돼지·양·오리·거위·참새 등을 가리지 않고 날로 먹기를 즐겼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위생을 위해 생식은 점차 줄어들었다. 중국은 다양한 채소와 과일을 소비하는데 앞장섰고, 약초와 약재 역시 중요한 소비 상품이었다. 음식 문화는 건강한 삶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다.

‘소비사회’의 출현


▎1915년 출토된 송나라 도자기를 3D 기법으로 복원했다.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송나라 때는 다양한 수공업이 발달해서 도시의 시장에 상품을 제공했다. 수공업에서 빠뜨릴 수 없는 품목은 비단과 면직이다. 옷을 만들어 입는데 필수적인 재료였기 때문이다. 종이나 칠기, 바구니 등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심고 대나무를 키우는 일도 중요한 사업이었다.

당시 비단과 함께 중국의 대표적 수출품으로 등장한 것이 도자기다. 송나라의 대표적인 도자기는 절강성의 용천청자(龍泉靑瓷)와 섬서성의 요주청자(耀州靑瓷)를 들 수 있다. 송나라의 청자는 고려청자와 유사한 스타일의 옥빛 청자들인데 용천 지역에는 500개가 넘는 가마에서 자기를 생산했다. 복건성의 경덕진(景德鎭) 도자기 역시 송나라 때인 11세기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경덕진은 14세기 원나라 때 황실의 도자기를 생산하는 기지로 부상하면서 다른 지역을 능가했고, 이후 중국 도자기의 대명사로 부상해 세계 시장을 지배하는 것은 물론 유럽 등지에서 도자기 산업의 발전을 자극했다.

송나라에서 국내 교역과 국제 무역이 모두 활발하게 발전한 이유는 무엇일까. 앞서 농업 생산성에 따른 인구의 증가 덕분에 도시가 발달했다는 점은 살펴본 바 있다. 경제발전이 이뤄질 수 있는 필수 조건은 갖춘 셈이다. 하지만 중국에서처럼 권력이 집중된 강력한 정부가 도시나 상업의 발전을 가로막았다면 송대의 화려한 경제생활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송나라가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중요한 요소는 아이러니하게도 국가 안보의 취약성에서 비롯된다. 북송은 중국의 전통적 중심인 중원 개봉을 수도로 두고 있었지만 바로 북쪽에 거란의 요나라와 서쪽의 탕쿠트의 서하(西夏)로부터 상시적인 안보 위협을 받고 있었다. 거의 지속적인 전쟁 상태에 놓이다보니 중국 북부의 대규모 인구가 이 시기에 남쪽으로 이동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농업 분야에서 징세를 통해 국가를 운영해 왔는데 송나라는 이런 모델을 재현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던 것이다.

자연히 정부는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또 다른 수단인 상업을 장려해 국가 재정을 보충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이 국내 교역이건 해외 무역이건 상품의 이동은 세금을 거둬들이는 유용한 길이다. 특히 송나라처럼 거대한 규모의 군대를 운영하기 위해선 재정 수요가 긴박하기 그지없었다. 실제 송나라 예산의 80%는 국방비에 해당했고, 나머지 20%는 국가 관료제를 유지하는 비용이었다.

물론 국가가 과도하게 민간의 경제활동에 간여하거나 세금을 과중하게 거둬들이면 위축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송나라는 이런 관점에서 매우 균형 잡힌 정책을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한 연구에 의하면 송나라가 교역 상품에 대해 부과한 세금은 2~5% 수준에 그쳤다고 한다. 국가에 의한 관리와 통제가 수월하지 않았던 시대의 조건을 고려하더라도 이는 그다지 높은 과세라고 보기 어렵다.

송나라 정부는 민간 경제 활동을 장려하여 조금씩 자주 세금을 거두는 것이 과도한 세금으로 활동을 위축시키는 것보다 훨씬 영리한 전략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해외무역에 나간 배가 1년 만에 돌아오면 정상적인 세금을 매겼다. 하지만 5달 안에 귀국하면 세금을 깎아 주었고, 1년을 넘기면 관료들이 조사에 나섰다.

민본의 유교사상과 농촌 수공업


▎15세기 명나라 정화의 탐험선을 복원한 선박. 정화의 대원정 이전에 송나라의 해외무역이 있었다.
유교의 민본(民本) 사상도 이런 가벼운 세금 정책을 뒷받침하는 기본 윤리로 작용했다. 중국 유교사상에서 민은 국가의 기본을 형성하기 때문에 어떤 정치권력도 민에 과도한 부담을 지우는 것이 금기시됐다. 국가나 통치자에 대한 믿음은 바로 이런 정책적 배려를 통해 형성될 수 있는 결과였다. 송나라에서는 상업을 장려해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민에 대한 부담을 가볍게 해주는 지혜로 통용되기도 했다.

남송(南宋)의 고종(高宗)은 “해외 무역으로부터의 이윤은 무척 많다. 무역을 제대로 활용한다면 그 이윤은 쉽게 동전 수백만의 액수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무역의 수익이 일반 사람들을 징세하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따라서 민의 세금 부담을 덜기위해 해외 무역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나라의 상업 장려는 사실 농천하지대본(農天下地大本)을 주장하는 전통적 농업 중심의 중국 유교 전통에서는 벗어나는 길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위정자들은 이런 외도(外道)를 여전히 유교의 민본사상을 통해 정당화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중국의 상황을 두고 국가가 상업 활동을 장려하거나 적어도 방치했다는 점에서 ‘친시장’적이었지만 자본 집중을 통한 경제력의 과도한 성장은 막았다는 점에서는 ‘반자본주의’적이었다는 UCLA 웡로이빈(Roy Bin Wong)의 분석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는 로젠탈과 2011년 공저한 [분기 이전과 분기를 넘어: 중국과 유럽에서 경제변화의 정치]라는 연구서에서 매우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했다. 중세 이후 중국과 유럽을 비교해보면 중국은 농촌의 가족 내에서 수공업이 발전한 반면, 유럽은 주로 도시에 수공업이 자리 잡았다. 그 이유는 제국이 지배하는 중국은 상대적으로 농촌도 안정적이었던 반면, 분열된 유럽은 전쟁이 잦아 도시가 더 안정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는 장기적으로 큰 변화의 출발점이 되었다. 농촌보다는 도시의 노동자 임금이 더 비싸기 때문에 유럽은 자본과 노동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자본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그 결과 유럽에서는 더 치열한 기술 개발이 진행되었다. 결국 중세부터 중국과 유럽 모두 상업 활동과 시장의 발달을 공통으로 경험했지만, 자본을 집중하고 기술개발을 통해 산업화로 나아가는 일을 유럽이 주도하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거시 역사를 하나의 요인만으로 설명하려면 무리가 따르지만 정치통합과 분열이라는 요인을 경제로 연결했다는 점에서 날카로운 논리라 할 수 있다.

몽골의 침략과 유라시아 통합


▎몽골의 쿠빌라이 칸. 남송을 무너뜨리고 아시아와 아라비아, 유럽을 이었다.
13세기가 되면 중국 역시 몽골의 막강한 군사력 앞에 무릎을 꿇고 무너져버린다. 1211년 칭기스칸이 금나라를 공격한 뒤, 1234년 금이 먼저 멸망하였고, 남송은 쿠빌라이 칸의 공격으로 1279년 붕괴했다. 바빌로니아가 군사강국 페르시아에 무너지고, 고대 그리스가 로마의 군대에 붕괴됐듯이, 그리고 로마가 게르만의 대이동에 몰락했듯이, 송나라의 화려한 경제체제도 결국엔 몽골의 군사력에 항복했다.

몽골 세력에 굴복한 것은 비단 중국만이 아니었다. 몽골의 군사력은 역사상 처음으로 유라시아 대륙을 하나로 만들었다. 중앙아시아의 군사대국이 중국부터 페르시아를 거쳐 지중해와 흑해 연안까지 드넓은 대륙을 하나로 통일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 결과 13세기 들어와서 처음으로 구세계가 정치적으로 하나가 되는 경험을 공유하게 됐다. 마침내 동아시아와 아랍, 유럽의 소통과 교역이 활발하게 진행됐던 것이다.

미국의 아부루고드는 1991년 출간된 [유럽 헤게모니 이전의 세계 체계 1250~1350년]이라는 저서에서 몽골 제국이 이룩한 세계화를 묘사했다. 700여 년 전 중국 송나라의 선진 문화와 기술은 몽골 제국을 통해 인도와 아라비아와 유럽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인류 최대 발명품이라 일컬어지는 종이·화약·나침판·인쇄술 등의 기술은 이제 빠른 속도로 세계로 퍼져나갔다.

우리는 송나라 이야기를 화폐 경제로 시작했다. 11세기 세계에서 가장 많은 철과 동을 생산해서 동전, 철전으로 사용하고 종이에 고난도 인쇄를 통해 지폐를 대량 생산한 것은 다름 아닌 송나라다. 철통에 화약을 넣어 폭탄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송나라요, 나침판을 항해에 적극 활용한 것도 송나라다. 하지만 이런 기술과 발명품은 손에 손을 거쳐 세계로 전해졌고, 결국 유럽에서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발전했다.

종이와 인쇄는 유럽에 지식혁명을 불러왔다. 책과 교육의 대중적 보급 없이 종교개혁이나 과학기술의 발달을 상상하기 어렵다. 유럽은 또 대포와 대포를 장착한 배를 타고 세계로 나가 유럽이 지배하는 제국주의 시대를 열었다. 핵심적인 발명은 송나라가 했는데 그 이득은 유럽이 독점한 셈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11세기부터 1000년의 인류 역사를 통해 부국굴기 시리즈가 앞으로 탐구할 질문이다.

※ 조홍식 - 1989년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Sciences Po)을 졸업하고, 1993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유럽통합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베이징외국어대, 팡테옹-소르본대 등에서 객원 연구원 및 교수를 역임했고, 2006년부터 숭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경제와 유럽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근저로는 [문명의 그물: 유럽문화의 파노라마]와 [파리의 열두 풍경] 등이 있다.

201904호 (2019.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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