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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인터뷰] ‘참여정부 마지막 대변인’ 천호선 노무현재단 이사 

“盧, 진보독점의 정치 꿈꾼 적 없다” 

서거 10주기, 늦기 전에 盧 객관화하는 작업 시작할 때
2030의 ‘진보꼰대’ 비난 이해해… 청년 민주주의자 기를 것


▎천호선 노무현재단 이사는 6월 초 착공될 예정인 노무현시민센터(가칭) 건립사업을 총괄하고 있다.
올 5월 23일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10주기가 되는 날이다. 진보진영에서는 기일을 한 달여 앞두고 추모 분위기가 무르익는다. 4월 2일 다큐멘터리 영화 [노무현과 바보들] 시사회장은 훌쩍이는 소리로 가득했다. 노 전 대통령을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에 흘리는 눈물로 읽혔다.

그런데 천호선(57) 노무현재단 이사가 10주기를 대하는 자세는 사뭇 다르다. 4월 5일 서울 신수동 노무현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천 이사는 “탈상(脫喪)할 때가 됐다”며 “이젠 눈물을 거두고 노 전 대통령을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그래선지 터부시될 법한 노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얘기도 피하지 않았다.

천 이사가 ‘노무현의 객관화’를 말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그는 다음 10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20여 년 전 ‘바보 노무현’과 교감했던 세대는 이제 나이 예순을 향해 가는 중이다. 다가올 세대는 노무현을 어떻게 기억할까. 별다른 노력이 없으면 그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대통령’으로만 남을 수도 있다.”

비극적 죽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잊혀져가지 않을까. 천 이사는 “그러기엔 노무현의 삶과 죽음이 너무나 강렬하고, 또 논쟁적”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노 전 대통령이 선보였던 정치와 정책은 임기 내내 파격의 연속이었다.

그 때문에 노 전 대통령은 앞으로도 현실정치에 끊임없이 호출될 운명이다. 정치에서뿐만이 아니다. 교학사는 최근 노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합성사진을 교재에 써 논란을 빚었다. 열번 째 기일을 준비하는 그에게 ‘탈상’의 뜻과 방법론을 물었다.

“盧, 진보·보수 뛰어넘는 정치 자산”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열린 2009년 5월 29일 광화문과 시청광장을 가득 메운 추모 인파가 운구행렬을 뒤따르고 있다.
이틀 전 보궐선거에서 정의당 여영국 후보가 503표차로 신승했다.

“선거가 하루만 늦게 치러졌어도 결과가 달라질 수 있었다.”

왜 그런가?

“여 당선인은 선거운동 당시 창원성산이 ‘노회찬 지역구’라고 강조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되레 그 점을 파고들었다. 고(故) 노회찬 의원을 겨냥해 ‘돈 받고 스스로 목숨 끊은 분’이라고 비난했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때와 같은 모습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을 혐오하는 내밀한 속내들이 있다.

“무책임하다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사실 그런 생각이 마음을 괴롭힌 적도 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부끄러워서 내린 자기 파괴적 결정이 아니었다. ‘내가 졌다’와는 다르다. 내 주변 사람이 고통을 받으니 내 선에서 끝내자. 당당한 선택이었다는 측면이 있다.”

노 전 대통령이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각에서 집요하게 희화화되는 이유는 뭘까.

“교학사 사건처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앞으로도 현실정치에 호출될 것이다. 또한 노무현과 함께했던 사람들이 현실정치를 하고 있기 때문에 쉬이 없어지지 않을 거다. 앞으로 5년은 더 이런 식으로 호출될 거다.”

올해 나올 예정이던 평전의 출간이 미뤄졌다. 집필을 맡은 윤태영 전 대변인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폭넓은 기록과 평가가 담길 터였다.

“윤 전 대변인이 취재에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고 하더라. 대신 올해는 노 전 대통령이 쓴 책들을 엮은 전집을 낸다. 그리고 노무현의 삶을 연보로 정리한 작은 책을 전집에 더했다. 전집의 서문은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출판사에서 연보의 서문을 내게 써달라고 하더라. ‘세상에 연보에 서문을 쓰던가?’(웃음) 고민하면서 쓴 서문이다. 추상적이지만, 노무현의 삶에 대해서 내가 가진 생각을 가장 압축한 이야기다.”

천 이사가 건넨 서문 원고의 일부를 지면으로 전한다.

‘연보의 끝, 그분의 마지막 선택의 의미를 헤아려 봅니다.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있었을까? (…) 감히 그분의 생각을 가늠하진 못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도 국민들에게는 겸손했고 그들에겐 당당했습니다.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노무현은 그렇게 떠났습니다.’

다른 선택이 가능했을까?

“없었을 것 같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용기를 내긴 어려웠을 거다.”

서문 말미에 그는 다음 100년을 이렇게 말했다.

‘가신 지 10년이 됐습니다. 100년 뒤의 노무현은 어떻게 기억될까요? 10년을 돌아보며 100년을 준비합니다. 바르게 기록하고 바르게 이어가야 합니다. 보수와 진보를 뛰어넘어 그분의 삶이 온통 우리 모두의 자산이 될 것입니다. 노무현은 그렇게 당당하게 살아있을 것입니다.’

10주기에 죽음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민감하고 불편하진 않을까?

“여전히 슬픔을 가진 분들에게 무례한 일일 수 있다. 문제가 해결된 것인 양, 상처가 완전히 치유될 수 있는 것인 양 보이면 안 된다. 피해에 대한 생각을 지워 버리자, 이런 의미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상을 준비하는 이유는 뭔가?

“다음 10년, 다음 100년을 준비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다. 노 전 대통령이 현실정치에서 역사 속으로 들어갈 때가 됐고, 역사 속에서 바르게 평가받도록 준비해야 한다.”

“시민 참여와 직접민주주의 구분해야”


▎2008년 1월 청와대 대변인인 천호선 홍보수석이 춘추관 브리핑룸에서 현안에 관련한 기자들 질문에 답하고있다.
과소평가됐던 노무현의 행보가 있다는 말이겠다.

“당장 좋게 평가받긴 어렵지만, 100년까진 아니어도 20~30년 바라보고 했던 정치와 정책이 있었다. 2006년 발표했던 ‘비전 2030’이 그랬다. 삶의 질을 중심에 두고, 어떤 복지국가를 만들지 최초로 정리한 장기계획이었다. 또 ‘e지원’을 만들어 정부기록물 관리를 혁신했다. 2005년 제안한 대연정도 꼽을 수 있다. 미래엔 이런 정치도 가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걸 보여줬다.”

자칫 인정투쟁으로 비칠 수 있다. 과거에 쌓인 피해의식이나 열패감을 이참에 풀어보자는 거다.

“노무현이 한번 이렇게 해봤으니 다음엔 더 쉽게 도전할 수 있다. 용기를 품을 근거가 된다. 그런 민주주의의 역사와 전통을 갖는다는 게 중요하다. 미국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1863년 게티즈버그에서 연설했을 때 당시 언론은 ‘형편없다’며 깎아내렸다. 100년 후의 링컨은 어떤가. 민주당과 공화당을 뛰어넘어서 하나의 미국을 상징하는 인물이 됐다.”

노 전 대통령이 지금 청와대에 있다면 다시 대연정을 제안할까?

“답하기 어렵다. 대연정은 특수한 상황에서의 특수한 제안이었다. 물론 선거제도 개혁이라는 문제의식은 같다. 노 전 대통령은 2007년 6월 원광대에서 ‘민주주의 똑바로 하자’는 제목으로 특강을 했다. 이날 연설에서 노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는 투쟁을 통해 공존을 모색하는, 모순적인 제도’라고 말했다. 용납 못할 분노는 있지만 그래도 공존할 필요가 있는 상대이기 때문에 대연정을 제안한 거다. 노무현은 진보독점의 정치를 꿈꾼 적이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4월 1일 청와대에서 열린 시민사회단체 간담회에서 의미심장한 화두를 던졌다. 한 보수 시민단체 대표가 국정운영을 질타하자 문 대통령은 “시민사회는 진보냐 보수냐를 떠나 옳은 일에 박수치고 그른 일을 비판하는 기능을 해야 한다”고 답했다. 또 “(보수단체라) 간담회에 오기 망설여졌다는 말을 듣고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천 이사는 “뭐라고 평하긴 부적절하다”고 전제하면서 “문 대통령은 노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보수를 타도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그는 또 “보수의 문제의식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참여민주주의는 직접민주주의의 일종 아닌가. 참여정부가 국회를 우회해 여론정치를 한다는 비판이 있었다. 이른바 ‘포퓰리즘’ 논란이다.

“구별을 잘해야 한다. 예를 들어 촛불은 시민의 직접행동이지만 그 지향은 직접민주주의였다, 이렇게 볼 순 없는 거다. 마찬가지로 노무현 대통령이 시민 참여를 강조했지만 대의제를 포기하자는 말이 아니었다. ‘대의제가 잘 작동하려면 시민들의 참여가 중요하다’는 게 큰 관점이라고 본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대의제는 몇 개 정당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유권자가 배신당하지 않으려면, 정당이 정말 훈련되고 검증된 공직 후보를 내세워야 한다. 최근 ‘빅 마우스’로 활동하는 한 의원을 보라. 민주당에서 시작해 이제 두 번째 탈당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그 의원의 가치가 옳다 그르다 평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민주당에서 당의 지향과 전혀 맞지 않는 사람을 공천한 게 문제다. 당원들과의 활동에서 검증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정당이 시민의 조직이 되려면, 정당 안에서의 시민 참여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보트코리아’로 인터넷 정치 첫발


▎2004년 6월 3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국정과제회의를 주재하기에 앞서 천호선 의전비서관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다.
노무현과 지지자들의 인연을 그린 영화 [노무현과 바보들]이 4월 18일 개봉한다. 시사회에 참석했나?

“제작엔 도움을 줬지만 재단 차원에서 단체 관람을 하진 않았다. 단체 관람을 하면 ‘재단이 인증한 영화’가 돼버린다. 재단에서 정한 규칙이다. 노무현재단이지만, ‘이것이 노무현’이라고 단정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한다.”

영화는 2000년 6월 시민들이 노무현 팬 클럽인 ‘노사모’를 결성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당시 어떤 일을 하고 있었나?

“2001년 12월 노 전 대통령이 대선 경선 출마를 결심하면서 캠프로 들어왔다. 인터넷본부 기획실장을 맡았다. 홈페이지도 하고 노무현TV, 노무현 라디오, 노무현 웹툰 이런 걸 다 운영했다. 인터넷 선거란 개념은 당시 처음 나왔다. 그 출발은, 감히 이야기하지만, 노사모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노사모라는 역동적인 움직임을 온라인 플랫폼에 담아냈을 뿐이다. 스스로는 이탈리아 오성운동이나 스페인 포데모스의 뿌리였다고 자부한다(웃음).”

2002년 대선 전엔 인터넷 선거라는 개념조차 없었는데.

“캠프에 참여하기 1년 전부터 구상했다. 보트코리아란 회사를 만들었다. 지금 청와대 국민청원과 비슷한 형태다. 인터넷을 통한 정치 참여와 정책 결정을 실험했다.”

보트코리아 플랫폼은 어떻게 돌아갔나?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가 인터넷 정책 제안 시스템이었다. 당시 16개 국회 상임위원회에 소속된 의원들과 보좌관들을 여야 상관없이 묶었다. 일반 시민이 정책을 제안하면 시민들이 보트코리아 웹페이지에서 찬반토론을 진행한다. 그리고 표결한다. 마지막으로 다수의 선택을 받은 정책을 해당 상임위 국회의원이나 보좌관에게 제안한다.

또 하나는 지식인 데이터베이스를 확보해서 전문가 정책 여론조사를 했다. 2만 명까지 모았다. 입법이 있으면 메일로 이런 입법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다. 보통 관련 있는 전문가 2000명에게 보냈다. 그러면 회수율이 15% 정도 된다. 그걸 2001년에 한 거다.”

미처 몰랐던 한국의 정치 스타트업 1세대다. 발상을 어디서 얻었나?

“미국의 선거 전략가 중에 딕 모리스라고 있다. 1996년 클린턴 전 대통령의 재선에 결정적으로 기여를 한 인물이다. 이 사람이 vote.com이란 웹사이트를 만들었다. 정책 자료를 올리면 찬반 여론조사를 해서 해당 의원들에게 보낸다. 그런데 이건 즉흥적인 찬반만 보여 주니까 숙의를 할 수 없다. 토론을 하고 전문가 견해를 붙여서 정치인에게 보내자는 게 아이디어였다.”

경선 캠프에 참여하기 전엔 뭘 했나?

“1990년대 초반부터 지방자치에 착목했다. 청년이 기초 단위에서부터 차근차근 성장하는 모델을 생각했다. 김민수 전 부천시장, 김성환 의원(노원병, 전 노원구청장)이 당시 같이 공부하고, 또 지방의회 문을 두드렸던 동료들이다.”

젊은 세대에게 민주주의가 낡은 개념이 돼 간다. 이 흐름을 어떻게 반전시킬 수 있을까?

“지금 2030세대가 386을 진보꼰대라고 부르지 않나. 이해한다. 386이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했다고 해서 반드시 민주주의자는 아니다. 민주주의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우리 세대는 사실 연습이 부족했다. 직장에서든 마을에서든, 아니면 정당에서든 실제로 살을 맞대는 단위에서 민주시민 역량을 키워야 한다. 노무현을 체험하지 않았던 세대에서, 노무현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민주주의자를 키워내는 일이 재단의 과제다.”

6월 초 착공에 들어가는 노무현시민센터(가칭)는 다음 세대의 민주주의자를 길러내려는 의지의 산물이라고 천 이사는 설명한다. 재단은 2015년 경매로 나온 서울 한국미술박물관 건물과 부지(1191㎡)를 101억원에 낙찰받아 센터 건립을 추진해 왔다. 창덕궁 바로 옆이다. 천 이사가 건립사업을 총괄해 왔다.

노무현센터, 건축에서부터 시민 참여로


▎천호선 노무현재단 이사는 “민주화운동가와 민주주의자는 다르다”면서 “민주주의에도 연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무실에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보인다. 직원은 아닌 것 같은데.

“노무현시민센터 건립사업 입찰에 나선 시공업체 사람들이다. 5월 말까진 사업자를 정하려고 한다.”

그래선지 천 이사도 오랜만에 정장을 갖춰 입었다.

“싸구려 양복이다. 사진이 잘 안 받아서 걱정이다.”

노무현시민센터를 짓는 데 모금운동을 할 예정이라고 들었다. 예산이 빠듯해서 그런가?

“그렇지는 않고. 시민센터의 주인은 시민이다. 함께 짓자는 의미에서 5월부터 1년 동안 모금운동을 펼칠 계획이다. 건축에서부터 참여가 이뤄지는 거다. 가능하면 적은 돈을 가지고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하겠다.”

노무현재단은 5월 들어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 9개 지역위원회 차원에서 다양한 추모행사를 열 계획이다. 서울·대전·광주·부산에선 대규모 추모 문화행사를 개최한다. “무겁게 추모하기보단 민주주의 축제 개념으로 꾸미겠다”는 게 재단 관계자의 전언이다. 이 관계자는 또 “10주기를 마지막으로 대규모 행사는 당분간 하지 않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앞으로 추모보다 계승 활동에 전념하겠단 방침이다.

이날 노무현재단 사무실에도 청바지 차림의 편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자주 오갔다. 각 지역위원회에서 나온 회원들이 5월 행사를 어떻게 기획할지 논의하는 중이라고 천 이사가 대신 설명했다.

마지막 추모행사인 만큼 크게 열겠다고 했다. 축제라고 하니, 누가 나오는지 말해줄 수 있나?

“예전 재단 행사에 자주 참여했던 사람들은 많지 않을 거다. 명단을 벌써 공개할 수는 없지만. 나이가 더 젊기도 하고, 기존 노무현재단 행사에는 참여하지 않았던, ‘저 사람이 왜 여기 왔지’ 할 만한 사람들까지 부르려고 한다.”

대학교 때 목하(木下)라는 동아리에서 활동했다고 들었다.

“나무 아래 모여서 만들었다고 붙인 이름이다. 영어로 하면 ‘언더우드’가 되는 바람에, 사람들이 학교 창립자 이름(미국 선교사인 H. G. 언더우드)에 따온 줄로 오해하더라.”

어떤 동아리였나.

“정통 운동권은 아니었다. 공부를 기본으로 하는 비판적인 지식인을 지향하는 그룹이랄까. 당시 말로는 관념적 지식인들이라고 했다. 2학년 1학기 때 4.0 만점에 3.0을 넘어야 2학기 때 뽑았으니. 나중에 동아리 안에서 학점 폐지 투쟁을 했다.”

지금 기준에서도 3.0이면 만만치 않다.

“나는 0점대 받은 적도 많았는데.(웃음) 돌이켜 보면 데모하러 학교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아쉽다. 20대 때 공부를 더 할걸. 요즘은 유튜브로 강의를 즐겨 듣는다. 인문학이나 물리학. 아들이 뇌과학을 전공으로 하기도 해서. 나이를 먹으니 이런 쪽에 관심이 간다. ‘세상이 정말 바뀔까?’ 천 년 뒤에도 보수와 진보 나뉘어서 아옹다옹할 텐데. 그때도 정치는 비정할 거고.”

진보 진영은 말 그대로 진보에 대한 믿음이 핵심 아닌가?

“지금보다 나아질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나 갈등은 있지 않겠나.”

- 글 문상덕 월간중앙 기자 mun.sangdeok@joongang.co.kr / 사진 전민규 기자 jun.minkyu@joongang.co.kr

201905호 (2019.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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