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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 대기자의 ‘지성담론’] 데카메론 ‘정의란 무엇인가?’(5) 

법이 곧 정의라는 세뇌 문학은 그 허구를 폭로한다 

법질서 이름으로 내 편 아닌 사람들 잔혹하게 탄압
문학은 법이 은폐한 것들에서 인간적 정의 찾아


▎사진:이정권 기자
우리는 앞서 네 차례에 걸쳐 우리 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제도적·비제도적 불공정과 부정의의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비제도적 부정의를 양산하는 우리 사회의 갑을 문화 구조와 불공정과 불평등을 부추기는 합법적 부정의의 문제들이 그것이었습니다.

‘법=정의’라는 우리 사회의 확고한 믿음은 도그마로서 존재할 뿐 실재는 아닐 수 있다는 문제 제기. 그래서 법과 정의의 관계를 다시 고찰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부정의의 실체에 다가가기 어렵겠다는 문제의식을 갖게 합니다.

이번 정의를 위한 데카메론을 시작할 때 주요 목적 중 하나는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정의와 부정의의 문제를 인문학적·철학적·종교적으로 성찰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사회 현상으로 나타나는 정의와 부정의의 문제만 들여다봐서는 지나치게 잡다하고, 서로 부딪치는 현상과 문제들만 공전할 뿐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울 수 있어서입니다.

개개의 사안별 대증처방식의 대안을 제시하는 건 혼란만 더 부추기고 깊은 공감을 얻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한 정의를 입에 달고 살면서도 부정의가 판을 치는 세상이 된 이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부정의의 현장을 폭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왜 ‘부정의’의 뿌리는 이렇게 깊으며, 우리는 과연 ‘정의’를 대면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좀 더 사변적인 이야기를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문학을 통해 법과 정의의 문제에 다가가 보겠습니다. 문학은 인간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통해 질문을 던집니다. 일상적이고 확고한 삶은 문학을 통해 수수께끼가 되고, 그 수수께끼를 풀어가면서 인간은 모순을 의식하고, 성찰은 깊어집니다. 문학적으로 해석한 ‘정의’의 문제에 대해서 문학평론가 함돈균 선생을 통해 들어보겠습니다.

법이 포용하지 못한 것이 정의의 핵심


▎정의의 문제를 문학적으로 해석한 함돈균 문학평론가
실제 삶에서 ‘정의(justice)’라는 말이 날카롭게 인식되는 경우는 ‘법(法)’이라는 현실과 만날 때입니다. 정의의 문제는 사회제도로서의 법이 잘 구현되고 있는 상태에서보다, 법과 삶이 긴장관계를 형성하거나 법이 파열을 드러내면서 현실이 부정적인 모습으로 전개되는 상황이 계기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정의는 어떤 사건을 계기로 그 시대의 법체계와 인간의 삶이 불화하는 모습을 보일 때, 이런 모습을 야기한 법에 무엇이 부재한 것인지를 질문하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법이 포용하지 못한 것. 법에 없는 것. 이런 것들이 정의 문제의 핵심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 그렇다면 이는 오히려 법이 정의를 구현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법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드러난 증상이 바로 정의의 문제라고도 달리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정의의 여신’ 디케는 눈을 가린 채 저울을 평형이 되도록 들고 서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부분 그 저울에 시선을 두고 평평함에만 주목합니다. 그런데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왜 디케의 눈은 가려져 있는지, 아니 그보다도 우리는 아무도 디케의 눈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에는 의문을 품지 않습니다. 실제로 ‘정의의 눈동자’는 어떤 형상인지 누구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다만 생각할 뿐입니다. ‘합법적 부정의’와 ‘법의 파열’이 일어나는 곳에 디케의 평평한 저울은 없었다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현장에는 눈을 가리고 보지 않는 디케만이 있었다고 인지합니다. 즉 우리는 ‘부정의’를 인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지하고 있을 뿐 설명하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이 어려움은 두 가지 측면에서 비롯될 것입니다. 하나는 현존하는 법이 스스로 논리적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법과 정의의 일치’를 강력하게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없는 것이 자기의 존재를 주장할 수 없듯이 그 법에 부재한 정의가 자신의 형상을 적극적으로 주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신분석학의 개념을 빌려서 한번 설명해 보도록 하죠. 라캉은 인간 인식의 세 차원을 상상계·상징계·현실계로 구분하였는데, 이 중 인간의 활동을 규율하는 언어·법·규율의 세계를 상징계로 봅니다. 상징계가 구조화한 언어와 법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인간의 모든 활동을 규율하는 포괄적이고도 자율적인 영역이지요.

그런데 문화체계로서 상징계의 전략은 ‘법과 정의는 일치한다.’라는 명제를 사람들에게 ‘진실’이라고 인지하도록 하고 이를 내면화하도록 작동하는 것입니다. 상징계는 정의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충분한 공감이나 실체적 형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은 은폐합니다. 아니 상징계 자체가 정의를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무지를 향한 열정’. 라캉이 이런 현상을 두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 말은 법의 무지 또는 법에 대한 무지는 법을 위반하려는 핑곗거리가 아니라, 오히려 법을 성립 시키고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핑계라는 것입니다.

의식의 주체, 즉 사람들은 정의의 부재라는 법 현실 속에서도 마치 법이 정의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법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법이 정의를 구현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동일시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없는 현실은 있는 현실’로 인지됩니다.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의 나라처럼.

이 이야기에 나오는 임금의 신하와 보통의 백성들은 임금님이 벌거벗은 것을 모르는 척, 보지 못한 척합니다. 결여를 보지 못하는 ‘척’ 살아가는 사람들. 슬라보예 지젝이 말하는 ‘사회적 환상’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환상과 자기를 동일시합니다.

‘법=정의’라는 환상에 질문하는 문학


▎정의의 여신 디케는 눈을 가리고 있어 아무도 정의의 눈동자는 보지 못했다. 눈감은 여신의 평평한 저울이 과연 정의인가? 문학은 이 부분을 집요하게 질문한다.
그렇다면 ‘사회적 환상’이 충만한 현실 속에서 문학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문학적 주체 또는 문학적으로 던지는 주제들은 ‘벌거벗은 임금님 나라의 꼬마’ 같은 존재입니다. 사회적 환상과의 동일시가 이뤄지지 않은 이 주체는 ‘무지를 향한 열정’에 동참하지 못합니다. 사회적 환상 속에서 수행되는 연극적 페르소나를 쓰는 데에도 실패합니다. 법이 승인한 권리와 의무, 노동의 사회적 분할과 계약 체계에 쉽게 수긍하지도 동의하지도 못합니다.

주인공들은 법의 요구에 대답하지 못하고 오히려 질문을 퍼붓습니다. 이런 이들을 현실 세계에서는 히스테리 환자로 인식합니다. 주인공은 정의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판사의 판결문처럼 똑 떨어지는 대답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법이라는 대타자에 정의가 결여되었음은 직감하게 합니다. 히스테리 환자처럼 신경질적으로 질문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이 특이한 존재가 바로 문학 또는 문학적 주체입니다. 법의 파열, 법의 불가능성, 법의 부재를 드러내는 이 ‘부정의의 증거자’들을 ‘법의 증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탁월한 문학작품들은 존재의 아름다움을 수수께끼로, 질문의 형상으로, 하나의 파열로서 드러내는 일을 해왔습니다. 법과의 긴장관계는 그중에서도 문학의 가장 오래된 형상 중 하나입니다.

이것은 문학이 지닌 고유한 형식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말(言)로서 지어진 탁월한 존재 형식인 문학은 필연적으로 말로서 구성된 정치공동체를 문제 삼는 것이지요. 법은 정치공동체의 기율입니다. 그런데 문학의 주체들은 이 기율을 바로 자기 것으로 내면화하거나 승인하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따져 묻습니다.

아주 오래된 고전이면서도 탁월한 문학작품인 그리스비극 작품들이 법 또는 법의 주체들을 둘러싼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이 현대의 법과 매우 다른 사회적 배경과 법의식을 담고 있으며 비극적 영웅들 특유의 고립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여기에는 무시할 수 없는 특유의 ‘증상’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스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이 작품은 헤겔 법철학의 중요한 모티프와 영감을 제공했던 작품으로 법의 문제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드라마입니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안티고네는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의 딸로, 오이디푸스가 왕국을 버리고 떠돌다 죽은 후 고향 테베로 돌아옵니다. 이곳에선 왕위를 둘러싼 다툼에서 죽은 오빠 폴리네이케스를 섭정이자 숙부인 크레온이 조국의 배신자로 규정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조국의 배신자는 매장을 금지한다’는 법령에 의해 그의 시체가 황야에 버려집니다. 이에 안티고네는 죽은 가족의 매장은 신들이 부여한 신성한 의무라고 주장하며 오빠의 시체에 모래를 뿌려 장례의식을 행하였다가 사형을 당합니다.

비극의 한 축을 담당하는 주인공인 크레온은 공동체의 질서와 권위를 대표하는 임금이고, 안티고네는 그의 조카이자 미약한 개인입니다. 여기에서 임금이란 금지를 명령하는 법의 수호자라는 뜻입니다. 임금은 오랫동안 진행되어온 국가적 혼란을 종식시키고자 임금의 이름으로 법질서를 선포합니다. 국가 전복을 기도하는 비상사태에 대응하는 ‘크레온의 법’은 추상같고 이 법의 영토에 예외를 만들지 않으며, 외면적 차원에서 충분한 논리적 타당성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이 법은 오이디푸스 왕 이래 야기된 극도의 무질서에 대한 정치적 대응이라는 차원에서 공동체의 필요에 대응하는 ‘공리주의적’ 대의명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티고네가 법의 현실적 대리인인 임금 앞에서 지금 주장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녀는 공동체에 극심한 불안과 무질서를 야기한 죄인에 대한 애도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녀가 요구하는 것은 산 자의 성한 몸이 아니라, 이미 싸늘히 식어버렸으며 들개에게 반 이상이 뜯겨 형체가 온전하지 않은 오빠의 주검 반환이었고 그에 대한 예의였습니다.

죽은 자, 더 정확히 말해 ‘죽음’에 대한 애도가 그녀의 요구사항입니다. 물론 이 요구는 공동체의 존속에 필수적인, 나아가 삶의 논리를 대변하는 법의 효력을 중지하라는 요구이기도 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법의 효력과 무관하게 행동하는 그녀의 실천은, 삶에 대해 죽음의 권리의 우위성을 주장한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직관적으로 법에 부재한 정의를 지적한 안티고네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에서 유령이 되어 떠도는 햄릿왕에 대한 애도는 공동체의 공포를 잠재우기 위한 산 자들을 위한 행위였다. 뮤지컬 햄릿의 한 장면.
이 작품에서 매우 인상적인 것은 (남성인)왕의 엄격한 추궁에도 불구하고, (여성인)안티고네가 다음과 같이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 나온 표현대로 옮기자면 이렇습니다.

“여기 살아 있는 이들보다도 지하에 계시는 이들의 마음에 들어야 할 시간이 더 깁니다.”

“어제오늘에 생긴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 있고,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모르는 신들의 확고부동한 불문율이 더 중요합니다.”

안티고네가 확신한 최종 심급은 ‘하계의 신성한 규칙’이며, 그의 굳건한 실천력을 추동하는 힘 역시 ‘하데스와 사자(死者)’에 대한 믿음에서 나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안티고네의 애도가 지닌 독특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애도는 공동체의 질서를 복원하고 유지하는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회정의라고 말하는 것도 ‘공정함’과 같은 사회적 질서의 유지와 회복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안티고네의 애도는 공동체의 복원이나 유지, 즉 살아있는 자들의 세계를 유지하려는 효력이 있는 애도가 아닙니다. 즉 실천의 최종 심급에 대한 안티고네의 자기 확신은 공동체에서 애도가 지닌 기능적 필요의 논리를 이미 넘어서 있습니다.

예컨대 그것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햄릿왕에 대한 애도는 애도 받지 못해 공동체에 밤낮으로 출몰하는 왕의 유령을 잠재우기 위한 공동체의 의례 절차 같은 것입니다. 산 자를 위한 것이지요. 그런데 안티고네에는 이런 고려가 없습니다. 안티고네의 애도는 공동체의 질서를 바로잡으려는 임금의 법에 대해 ‘하계의 신성한 규칙’의 우위와 상대적인 근원성을 주장합니다.

오히려 안티고네의 애도는 가까스로 회복된 공동체의 질서에 메스꺼운 죽음의 냄새를 불러들이고, 겨우 되찾은 삶의 질서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죽음과의 기이한 동반을 환기시킵니다. 이 갈등이 ‘시체’라는 물질화된 대상을 눈앞에 두고 벌어지는 갈등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이 갈등은 한 정치 공동체 내에서 서로 다른 권력의 위계 내에 존재하는 개인들 간의 싸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노모스(인습·관습·법 등)와 노모스적이지 않은 것 사이에서 벌어지는 싸움인 것입니다. 그런데 노모스적인 크레온의 권력은 안티고네의 당당한 언어 앞에서 오히려 왜소해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헤겔은 안티고네의 언어가 지닌 이런 성격을 진화하는 사회공동체에서는 극복되어야 하는 고대적 유산의 일종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문학작품이 지닌 고유한 발화의 성격을 간과한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안티고네의 당당함은 사회라는 이름의 공동체 인식에 기반하고 있는 법의 공리성에는 무엇인가가 빠져있다는 직관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법에 부재한 것에 대해 그녀는 신의 법, 죽은 자들의 법, 여자의 법이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공동체의 비극은 이런 부재에서 비롯됩니다. 이 부재의 원리야말로 법의 핵심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게 안티고네의 ‘정의’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 정의는 인간적 특수성과 산 자들의 이해관계, 남성성을 대질시킵니다. 임금의 법이 부과하는 명령(의무)을 무시하고 자기 자신의 고유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권리-의무’의 또 다른 ‘유토피아(utopos)’를 요청하고 있는 소송적 언어입니다.

‘어제오늘에 생긴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 있고,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모르는 신들의 확고부동한 불문율’ 이러한 요청은 신비주의적인 것도 아니고 공동체의 전통주의를 따르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보편적인 개인의 소망이 따로 있음을 보여줍니다. 어쩌면 아직 도달하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도래할 것이라고 믿는 어떤 지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에 파열음을 내는 안티고네라는 문학적 주체는 당대에 현존하는 ‘부정의’를 통해 미래를 소환하고 미래로 향합니다. 그러나 법은 스스로 이 부재하는 것의 존재, 빠져버린 이상향의 실체를 알지 못합니다. 법의 대리인으로서 크레온의 과잉(대응)은 이 무지의 결과이자 무지의 형상입니다.

근대 이후의 소설에선 법에는 빠져있는 것들, 즉 법에 부재하는 어떤 원리로서의 ‘정의’의 문제를 보다 직접적으로 제기하는 작품들이 많습니다. 주로 사회소설의 성격을 띤 것들이며, 노동의 사회적 분할과 신분적 위치에 대한 자각이 생겨난 근대 문학에서 보다 뚜렷한 증후를 보였다고 할 것입니다.

‘레미제라블’에서 드러난 법의 구조적 폭력성


▎서울 용산 재개발 농성자 사망사건 현장의 벽 가림막에 시민들이 남긴 추모의 꽃과 추모 글.
그중에서 앙시앙 레짐(Ancient Régime, 프랑스 혁명의 타도 대상이 된 구체제) 이후 전개된 크고 작은 혁명·반혁명의 과정을 다룬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한 범죄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의 잔인한 성격을 드러낸 드라마로 유명합니다.

이 드라마에선 주인공 장발장의 범죄를 통해서 드러나는 법의 냉혹한 성격도 흥미롭지만 경감 자베르를 통해 드러나는 법권력 특유의 시각이 눈길을 끕니다. 그의 시각은 어떤 ‘원리의 결여’를 보여줍니다. 그것을 ‘정의’의 문제와 연결지어 생각해볼 수 있을 겁니다.

먼저 공권력의 집행자인 자베르의 발언은 물리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나 헤게모니를 쥔 지배계급이 (하층)인민을 바라보는 통상적 시각을 반영하는 전형적인 발언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굶주리는 조카를 위해서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 옥살이를 한 장발장이 가석방이 된 후에도 경감 자베르는 강박증적일 만큼 집요하게 추적합니다. 그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요. 그 강박성은 어쩌면 법이 스스로 정의와 자신을 완벽하게 일치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자부심의 증거일 수 있습니다.

이제 소설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장발장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선량하고 능력 있는 시장으로 살아가던 중 그의 정체를 알게 된 자베르가 그의 앞에 나타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을 동명 소설로 만든 영화의 대사를 통해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자베르: 수년간 너를 찾아다녔지. 너 같은 인간은 절대 변하지 않아. 너 같은 인간은.

장발장: 나를 믿어주시오.

자베르: 나 같은 사람도 결코 변하지 않지.

장발장: 당신은 내 인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 않소.

자베르: 아니, 24601번!

장발장: 난 단지 빵을 조금 훔쳤을 뿐인데.

자베르: 나는 법과 관련된 일을 하지.

장발장: 당신은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 않소.

자베르: 너에게는 권리가 없어.

공권력의 화신인 자베르는 이 작품에서 결코 부패하거나 타락한 ‘나쁜 개인’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회 도처에서 출몰하는 범법자들이 실제로는 법과 사회의 구조적 폭력에서 나올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의 잔혹성은 법과 정의를 일체화하고, 법에 결여된 것을 인지하지 못하며, 자신이 그 법 자체와 거리를 두지 못하는 동일시에서 비롯되며, 그것은 자베르의 닫힌 정의를 드러냅니다.

자베르가 구현하는 법권력은 범법자에 대해선 엄격하게 형벌을 가하고 집요하게 법을 집행하지만, 법권력 자체가 생산해내는 죄의 가능성에 대해선 결코 질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법권력의 시각에서 볼 때 법 자체가 ‘합리적인’ 권력 행사이기 때문입니다.

장발장에 대한 자베르의 강박증적 집착은 합리적 권력 행사에 오점을 남기지 않으려는 신념과 욕망에서 비롯됩니다. 그는 제아무리 합리적인 것에 기초한다 할지라도, 인민의 관점에서 보면 그런 권력 행사가 기존 계급구조와 지배질서를 방어하는 잔인한 억압 행위로 보인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법의 노예로 전락하는 주인공들


▎오이디푸스의 왕의 딸 안티고네는 조국의 반역자는 매장을 금한다는 임금의 법에 따라 들판에 버려진 오빠를 매장하기 위해 섭정 크레온과 ‘죽은 자의 권리’를 주장하며 투쟁을 벌인다.
구조주의자들의 관점을 빌리자면 여기에서 사회체-구조의 포로가 되어 있는 것은 장발장만이 아닙니다. 자베르 역시 노예이자 포로입니다. 그 역시 억압적 사회체를 유지하기 위해 작동되는 지배기계의 일부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자베르는 법이 ‘하나의’ 상징적 작동체계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한편 죄(罪)의 원천을 ‘세상’의 차원과 연결 짓지 못하고 ‘너 같은 인간’, 즉 그가 생각하는 ‘순수한 인간성’에서만 찾는다는 점에서 자베르는 지배구조에 갇힌 ‘닫힌 도덕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인간(성)을 유전적 요인(DNA)으로 이해함으로써 인간성은 변화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죄는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의 문제로 이해되며, 도덕은 다시 생물학적이고 개별적 인간성이라는 심성 차원의 것으로 수용됩니다. 도덕과 죄의 문제는 엄격한 자연의 질서 아래 있게 되므로, 여기에선 ‘죄인’뿐만이 아니라 죄를 다스리는 법의 집행자, 곧 국가권력과 지배계급이 지닌 순수한 위상도 변하지 않습니다. 지배계급은 변치 않는 위상을 지녔기에 여기에선 정의의 주체로 나섭니다.

문학작품은 정의의 내용을 적극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지만, 법의 파열을 통해 정의 혹은 공정성이 법에는 결여되어 있음을 인식시킵니다. 독자들은 작품을 통해 사회적 환상과 주인공 사이를 갈라놓는 거리와 파열적 증상에 대한 이입(동일시)을 느끼게 됩니다. 작품은 사회적 환상과의 동일시가 아니라 ‘사회적 실재’와의 동일시를 통해 상징계의 균열을 드러내는 낯선 공간을 열어줍니다.

사람이 아니라고 여겨서 / 죽였을 것이다 / 사람입니다, 밝히지 못하고 / 죽었을 것이다 / 죽이고 싶었다고, 죽였을 것이다 / 죽이고 싶었지만, 죽였을 것이다 / 죽이고 싶었는데, 죽였을 것이다 / 죽은 사람은 / 죽을 것처럼 애도(哀悼)해야 할 텐데 / 죽인 자는 여전히 / 얼굴을 벗지 않고 / 심장(心臟)을 꺼내 놓지 않는다

여전히 납치(拉致) 중이고 / 폭행(暴行) 중이고 / 진압(鎭壓) 중이다/ 계획적(計劃的)으로 / 즉흥적(卽興的)으로 / 합법적(合法的)으로 / 사람이 죽어간다 / 전투적(戰鬪的)으로 / 착란적(錯亂的)으로 / 궁극적(窮極的)으로, 사람이 죽어간다 / 아, 결사적(決死的)으로 / 총체적(總體的)으로 / 전격적(電擊的)으로 죽은 것들이, 죽지 않는다 / 죽은 자는 여전히 실종(失踪) 중이고 / 농성(籠城) 중이고 / 투신(投身) 중이다

유령(幽靈)이 떠다니는 현관(玄關)들, / 조간(朝刊)은 부음(訃音) 같다 (이영광, ‘유령3’, 전문)

안티고네에게 강요된 임금의 법에서 배제된 것이 신의 법, 죽은 자들의 법, 여자의 법이고, 자베르의 법의식이 기초하고 있는 인간의식이 ‘너 같은 놈 / 나 같은 놈’이라는 동일성의 변증법이라면, 우리 시대의 법권력이 발생시킨 정치적 사건을 염두에 두었음 직한 이 시는 임금의 법과 자베르의 법 의식을 마주해서 던지는 질문일 것입니다.

법적 보호 대상을 나누는 사회적 무의식


▎6.10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박종철씨 고문치사 사건에 분노한 시민들의 추모행렬.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일반의지’를 법집행과 동일시하고 있는 이 시대의 어떤 정치적 양상은, 스스로를 정의의 현시체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 시는 법권력에 내재한 폭력이 어떻게 ‘정의’의 원리를 압제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이 시는 한 시대의 정치적 상황의 일단에 대한 문학적 폭로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조간을 ‘부음(訃音)’으로 읽는 이 시는 ‘폭로의 미학’에 근저를 이루는 원한이나 분노 같은 감정의 층위보다 더 깊숙한 지점에서 발원하고 앞으로도 지속될 듯한 모종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시의 무의식은 정치적 현실이라는 표면 아래에서 그 표면을 결박하고 있는, 그리하여 필연적으로 다시 그 표면 위로 떠오를 수밖에 없는 어떤 잉여의 에너지와 만납니다.

부음이 된 조간에서 ‘사람’의 죽음은 단신으로 처리되지만, 시인에게는 단순한 하나의 짧은 기사가 아닙니다. ‘부음이 된 조간’은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사이비일 수밖에 없는 ‘정의’를 앞세운 공권력이 삶의 공동체 안에 거대한 무덤을 만들어버리는 하나의 ‘표지’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시인의 무의식은 살의(殺意)를 번득이는 국가폭력의 무의식과 대치합니다. 그리고 일체의 감정적 수사와 은유를 배제한 시인의 직관, 선언적 언표 속에서 공권력의 무의식은 벌거벗겨지며 그것은 범죄적 사실이 되어 시의 재판정에 회부되는 것입니다.


▎법의 잔혹성을 고발한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은 영화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의 역설이 있습니다. 시의 법정에 회부된 이 폭력의 무의식은 악(惡)의 차원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종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권력에 의해 살해된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명백히 ‘사람 아닌 존재’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사람 아닌 것을 죽이는 것, 사람이라고 밝히지 못하고 죽는 것은 현대 생명정치의 한 유형이 아닐까요. 부음은 애도를 요구하지만 죽인 자가 죽은 자를 위해 “여전히 / 얼굴을 벗지 않고 / 심장을 꺼내 놓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죽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동질화된 사람들은 자신들과 동질화되지 않은 사람들을 구분하고, 비동질적 부류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드러내거나 단죄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사회적 주체들의 무의식 속에서도 ‘법의 정의’는 모든 이에게 동등하게 구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겐 주어도 되고, 누구는 누릴 자격이 없다는 분할적 사고, 무의식적 배분의식이 있습니다. 이것이 법폭력을 당당한 ‘공권력’이 될 수 있도록 추동하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공동체에서 배제된 자들, 시민권을 부여받지 못한 자들, 산 자들이 만들어 놓은 노동의 질서에 자리를 할당받지 못한 자들, 사람의 범주에 들지 못하여 죽음의 자리까지 온전히 배당받지 못한 주검들은 그리하여 합법적으로 폭행당하고 계획적으로 진압당하며, 즉흥적으로 죽어나갑니다.

사회 내에서 자연스럽게 인식되고, 애도 받지 못해도 우리가 다시 한번 주목할 것은 “궁극적으로, 사람이 죽어간다”는 사실입니다. 계급이든 민족이든 인종이든 젠더든 ‘사람’을 법적으로 보호해야 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여기는 동일자-타자의 변증법은 합법의 공간에서 범죄의 정점을 이루며, 이 공간은 노예제의 형상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소멸하는 것은 궁극적인 의미의 사람, 순수하게 평등한 사람이라는 ‘이념’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언표되기 어려운 이 ‘사람’의 영역이야말로 순정한 무의식이 머무르고 옹호할 수밖에 없는 시의 거처가 됩니다.

억압된 것은 반드시 회귀하고야 만다는 프로이트의 견해처럼, 정치체제에서 배제된 잉여, ‘사람’ 임을 밝히지 못한 채 죽은 것들이 죽지 않고 유령으로 회귀합니다. 이 시는 애도를 통해 유령을 잠재우려는 애가(哀歌)가 아니라, 실행되지 못한 공동체의 애도에서 애도하지 않는 한 시대의 무능을 읽어낸 것입니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비극부터 근대문학과 현대 한국 사회를 노래한 시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전시대를 통틀어 문학은 사회제도로서의 법에 부재한 것들에서 인간적 정의의 모습을 찾습니다. 이것은 ‘법은 곧 정의’라고 사회의 주체들에게 세뇌하는 ‘사회적 환상’. 이 사회적 환상을 믿어 의심치 않고 닫힌 정의의 실현을 위해 헌신하는 ‘무지에 대한 열정’은 법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는 ‘나’와 법이 보호할 가치가 없는 ‘타자’를 분리시키고, 타자에 대한 가혹함을 정당화합니다. 문학에서 제기하는 법과 정의의 문제는 법에서 빼버렸기 때문에 노예화되고 탄압받는 ‘사람’의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것입니다. 이는 문학뿐 아니라 바로 이 시대 법의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자신에게 질문하고, 우리가 타자화한 그들을 위한 정의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는 숙제를 던집니다.

※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 중앙일보 온라인편집국장과 논설위원을 역임했으며, 사회적·경제적 소외와 불평등 문제를 직설화법으로 다루는 칼럼으로 유명하다.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소설가이며, 해박한 중국 역사와 고전 지식을 바탕으로 [여류(余流)삼국지(메디치미디어)][적우(敵友):한비자와 진시황(나남)]등 중국 역사소설을 썼다. 서울대에서 경제교육학 전공으로 교육학박사학위를 받았다.

201907호 (2019.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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