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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대한노인회중앙회 공동기획 同行(2) | 존경받는 시니어, 골드보이가 간다] 곡절 많은 서수남의 ‘오뚝이 인생’ 

“숨이 다하는 날까지 노래하겠습니다” 

1964년 ‘아리랑 브라더스’로 데뷔… 56년째 외길 인생
노래 이외의 것도 잘하고 인성도 갖춘 사람이 진짜 가수


▎56년차 가수 서수남이 가장 아끼는 물건은 통기타다. 서수남은 “통기타는 수명이 짧은 편인데 지금까지 구입한 통기타만 100개 가까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56년차 가수 서수남(76)은 요즘도 무대에 오른다. 김광진·김국환·이자연 등 동료 가수들과 함께 매월 ‘낭만콘서트 전국투어’에 나선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주최하고 대한가수협회(회장 이자연)가 후원하는 이 콘서트는 매월 한 차례 열린다. 원로·중견 가수들이 대중문화 소외 지역을 찾아가 팬들과 직접 만나는 자리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노래를 듣는 사람도 모두 편안해지는 시간이다.

이 행사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서수남은 “이 콘서트는 2011년부터 시작됐는데 대중문화 혜택을 받지 못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된다”며 “지금도 우리를 좋아해 주는 팬들과 만난다는 것은 큰 보람이자 기쁨”이라고 말했다.

‘서수남과 하청일’로 우리에게 친숙한 서수남은 1962년 MBC 주최 서울특별시 콩쿠르대회에서 금상을 받으며 재능을 인정받았다. 이어 한양대 재학 시절인 1964년 DBS 동아방송 주최 대학중창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고, 뒤이어 하청일·천장필·석우장 등과 함께 남성 4인조 컨트리 보컬그룹 ‘아리랑 브라더스’를 결성해 정식 데뷔했다. 이때를 기준으로 하면 서수남은 올해로 가수 데뷔 56년차다. 서수남의 대표곡으로는 ‘과수원 길’, ‘수다쟁이’, ‘동물농장’, ‘팔도 유람’, ‘오! 멋진 세상’, ‘즐거운 여름’, ‘한번 만나줘요’, ‘우리 애인 미스 얌체’ 등이 있다.

월간중앙이 5월 30일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자택에서 ‘키다리 아저씨’ 서수남과 만나 그의 가수 인생 50년과 굴곡진 인생 이야기를 들어 봤다. 서수남은 “죽을 만큼 힘든 일을 겪었지만, 어머니의 신앙과 기도 덕분에 오늘까지 오게 됐다”며 “양보하고 감사하는 게 행복하게 되는 길인 것 같다”며 환하게 웃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에 매료돼 가수의 길로


▎지난해 TV조선에 출연해 아픈 가족사를 털어놓은 서수남. / 사진:TV조선 캡처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요?

“뭐 놀고 있죠(웃음). 대한가수협회에서 진행하는 ‘낭만콘서트 전국투어’에 함께하고 있어요. 가수 공연을 접하기 어려운 오지나 지방 도시를 찾아 주민들과 직접 얼굴을 맞대는 이벤트입니다. 주로 50·60세대들이나 어르신들과 만나고 있지요. 한 달에 한 번 정도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가수 데뷔한 지 굉장히 오래됐죠?

“고등학교 때 라디오에서 팝음악을 접하곤 자연스럽게 음악과 가까워졌어요. 그 당시에는 팝음악이 대단히 신선하게 다가오더라고요. 팝음악의 매력에 빠져 라디오를 자주 들었던 게 가수의 길로 접어든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직접적인 데뷔 계기도 궁금합니다.

“제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서울 시내에 음악감상실이 있었는데 그곳에 가면 음악을 많이 접할 수 있었어요. 또 빵집 같은 곳에도 주크박스라는 게 있었는데 거기에 동전을 넣으면 음악을 들을 수 있었고요. 아무래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사람은 엘비스 프레슬리라고 봐야죠. 엘비스의 노래에 매료돼서 가수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엘비스가 데뷔 초창기에 기타를 들고 노래했는데 그 모습에 반한 거죠. 엘비스 때문에 기타를 배우게 됐고, 노래를 부르게 됐어요. 아마도 제가 국내에서는 포크송 1세대 가수일 겁니다.”

한국에서는 흔치 않은 컨트리 가수로 평가됩니다. 컨트리 음악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컨트리 음악은 말 그대로 시골 음악이죠. 서부영화를 보면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민간 사람들이 나오잖아요? 그 사람들이 부른 노래가 컨트리 음악입니다. 처음에는 기타나 바이올린 위주로 연주했지만, 나중에 장르가 발전하면서 만돌린이나 콘트라베이스 같은 악기들도 더해졌어요. 컨트리 음악은 가족·친구들이 함께 부르는, 다 같이 즐기는, 편안한 음악입니다.”

가장 좋아하는 가수는 누구인가요?

“특별히 누구를 좋아한다기보다 음악 자체를 굉장히 좋아해요. 사실 저는 노래를 특출하게 잘하는 것도 아니고, 최고 가수가 된 것도 아닙니다. 그냥 즐기고자 노래를 했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아무리 음악을 많이 듣고 오랜 시간 음반 작업을 해도 음악이 질리지 않아요. 음악은 제게 청량제입니다. 그래도 굳이 좋아하는 가수를 꼽으라면 역시 엘비스겠죠. 엘비스뿐만 아니라 컨트리 음악 계열의 가수들은 모두 좋아해요.”

가수 인생을 돌아봤을 때 가장 보람된 일은 무엇일까요?

“글쎄요, 어딜 가든지 사람들이 저를 노래하는 가수로 알아보고 반겨준다는 거? 섬마을 같은 오지에서 만나는 80~90세 할아버지·할머니도 저를 알아보시더라고요. 제가 그분들보다 잘난 것도 아닌데 저를 가수로 인정해 주고 제 노래를 들으면서 박수를 쳐준다는 게 감사할 일이죠. 사람이 누군가에게 인정받는다는 건 참 고마운 일입니다. 저는 팬들이 뜨겁게 환호하는 가수가 아닌 가족같이 편하게 대해 주는 가수라고나 할까요?”

‘서수남’하면 하청일입니다. 두분은 어떻게 만나서 활동을 함께하게 됐나요?

“대학교(한양대 화학과 61학번) 때 음악동아리에서 만났어요. 자연스럽게 노래를 같이 해보자고 뜻을 모았고 함께 활동하게 됐습니다. 이어 1969년 MBC TV가 개국하면서 듀엣으로 태어난 거죠. 당시 연출을 맡았던 김경태 PD가 서수남-하청일 듀엣을 만들어주신 분입니다. 그때만 해도 듀엣은 형제나 자매 등 비슷한 사람들끼리 했는데 우리는 전혀 다르잖아요? 거기에서 착안해서 국민에게 코믹하면서도 재미를 줄 수 있는 노래를 해보라고 김경태 PD가 권유한 겁니다. 그렇게 듀엣이 돼서 1988년까지 20년 동안 활동을 했어요. 부부나 형제자매가 아닌 남남끼리 그렇게 오랫동안 활동한 사람은 거의 없어요.”

음악동아리에서 만난 하청일


▎2010년 7월 별세한 코미디언 백남봉씨 장례식장에서 조문을 마친 뒤 눈물을 훔치며 걸어 나오는 서수남.
서수남-하청일 콤비는 1975년 TBC 방송대상을 받을 만큼 한때 활동이 왕성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 들어 인기가 예전만 못하자 결국 1988년 해체됐다. 이후 서수남은 ‘서수남 음악원’을 세워 대중가요 보급에 나서는 한편 솔로 가수로 활동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하청일은 듀엣 해체 후 사업가로 변신, 20여 년 전 미국으로 건너가 지금까지 그곳에서 살고 있다.

왜 듀엣 이름이 하청일-서수남이 아닌 서수남-하청일이었나요?

“글쎄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제 이름이 먼저 나가게 되더라고요. 듀엣을 만들어주신 김경태 PD도 그렇게 하는 게 낫겠다고 했고요. 가나다순으로 해도 서수남이 먼저 아닌가요(웃음)?”

가장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모든 가수가 다 그렇겠지만 자기 음악에 100% 만족을 못 해요. 늘 뭔가 아쉽고 허전해요. 저는 국민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가수이지만 큰 파급효과를 미친, 최고의 가수는 아니었죠. 그런 면에서 솔직히 아쉽습니다.”

가수가 된 걸 후회하진 않으세요?

“저는 노래를 잘해서라기보다 노래 자체가 너무 좋아서 가수가 됐으니 후회 같은 건 없어요. 동료 중에서 중도에 가수의 길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요. 그런데 정말 노래를 좋아한다면 가수의 길을 접을 수 없다고 봐요. 노래를 진짜 좋아한다면 자신이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든 없든 음악을 하는 그 자체를 즐길 수 있거든요.”

사진작가로도 변신했죠?

“전문 작가라고 할 정도는 아니고요(웃음). 필름카메라 때도 사진을 좋아하긴 했는데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디지털카메라가 나온 뒤부터죠. 아무래도 필름카메라는 비용 등 사진을 현상하는 작업이 만만치 않으니까요. 2010년부터 아프리카로 봉사활동을 가게 됐는데 그때부터 사진을 많이 찍었어요. 우리가 후원하는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서 전시회를 연 적도 있고요. 인물도 자주 찍고 풍경도 자주 찍는데 요즘엔 게을러져서 좀 덜 찍게 됐네요(웃음).”

연예계에서 특별히 마음을 나누는 동료가 있나요?

“그렇게 많지는 않은 편이에요. 가수들이 연기자나 연주자보다 비교적 교우 관계가 넓진 않은 거 같아요. 저 개인적으로는 방송인 허참(70)씨, 개그맨 전유성(70)씨 같은 분들과 친분이 두텁습니다.”

지난해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가슴 아픈 사연을 털어놓았죠?

“사람이 사는 데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건강이든 금전이든 인간관계든 어려운 일을 다 겪게 돼 있어요. 하지만 저 같은 경우는 좀 특별한 어려움을 당하긴 했죠. 저는 사업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남들에게는 적은 돈이라 할지라도 충격이 클 수밖에 없어요. 2000년이었던가요? 집사람이 재테크를 잘못했는지 금전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보고 홀연히 제 곁을 떠났어요. 당시 저는 데뷔 35주년 기념앨범을 준비하고 있었을 때인데 참 막막하더라고요. 그래서 준비하던 걸 다 접고 폐인처럼 살게 됐어요. 앞을 봐도 뒤를 봐도 길이 없더라고요. 많지도 않은 재산 다 날리고 큰 빚만 졌으니…. 엄청난 실의에 빠져서 모든 걸 다 포기하려 했어요.”

서수남은 지난해 7월 TV조선에 출연해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가슴 아픈 가족사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아내의 가출은 삶의 의욕을 송두리째 빼앗아 간 것이었다. 아내는 모든 재산을 탕진했고, 빚까지 10억원을 남겨뒀다. 운영하던 노래 교실로 채권자들이 찾아올 때까지 아내가 진 빚에 대해서 몰랐다. 그 뒤 아내가 잠적했다.”

서수남은 부인의 빚을 갚으며 곤궁한 시기를 보냈다고도 밝혔다. 그는 “셋방 얻을 돈도 없을 정도였다”며 “채권자에게 무릎을 꿇고 1년만 살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냉정하더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어려움 극복의 원동력은 어머니 그리고 신앙


▎1999년 한양대 출신 연예인들이 연예인동문회 창립총회를 가졌다. 뒷줄 왼쪽 셋째가 서수남.
그처럼 큰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나요?

“제 어머니는 스물여섯 살 때 청상과부가 돼서 외아들인 저를 홀로 키우셨어요. 평생 저와 함께 사신 거죠. 그 어머니의 신앙이 굉장히 깊으셨습니다. 그 믿음 때문에 제가 죽지 않고 다시 활동할 수 있게 됐어요. 어머니 기도 덕에 지금까지 오게 된 겁니다. 2010년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집에서 가까운) 분당의 한 추모관에 모셨습니다. 살아계실 때는 잘 몰랐는데 떠나시고 나니 어머니의 힘이 얼마나 큰지 새삼 깨닫게 됐어요. ‘어머니 살아계실 때 좀 더 잘할 걸’ 하는 후회가 됩니다. 살아계실 때는 어머니랑 참 많이 다퉜는데….”

어머니가 인생의 멘토라고 할 수 있겠군요?

“남편을 여의고 여자 혼자서 가정을 꾸려 나가려니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겠어요? 시장에서 행상, 공사판에서 막일 등 어떤 일도 가리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제가 노래를 하겠다고 하니 어머니가 두 손을 들어 반대하시더라고요. 노래를 반대하셨던 이유는 가수는 존경받지 못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었어요. ‘가수는 사람들이 좋아해 주는 직업일진 몰라도 존경받는 직업은 아니다. 너는 존경받는 사람이 되라’고 늘 말씀하셨거든요.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 말씀이 제가 조금이라도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던 원동력이 됐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공부를 많이 하셨던 분으로 동네에서 무료로 사람들을 가르치셨거든요. 어머니가 그 영향을 받으신 것 같아요.”

슬하에 따님이 세 분이죠?

“네, 하나는 시집가서 살고 있고, 하나는 지금 저랑 같이 살아요. 그렇게 가라고 해도 시집을 안 가네요. 아버지로서 안타까운 일인데 어쩔 수 없어요. 그리고 하나는 죽었어요.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었죠. 참 슬프더라고요. 잘해 준 거 하나 없는데…. 그게 지금도 가슴에 걸려요.”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고 했던가. 부인의 가출 후 서수남에게 더 큰 시련이 찾아왔다. 미국에서 살던 큰딸이 사망했다는 비보(悲報)가 날아온 것이다. 서수남은 TV 방송에서 “미국의 딸이 아프다고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며 “위독하니까 빨리 오라고 하길래 비행기를 예약했는데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하더라”며 울먹였다. 결국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지 못한 서수남은 인천공항에서 딸의 유골함을 안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아야”


▎서수남-하청일 콤비는 결성 후 20년 동안 꾸준히 활동했다.
개신교 장로시죠?

“네, 어머니 영향으로 1978년부터 교회에 출석하고 있어요. 이따금 (몇몇) 교회에 나가 간증도 하고 특송(特頌, 특별 찬송)도 부릅니다. 간증 때는 주로 어머니 이야기를 해요. 기도할 수 있는 힘만 있다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어요. 제가 겪었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신앙 덕분입니다.”

비슷한 연배의 ‘인생 후반전’을 사는 분들에게 해줄 말씀이 있다면.

“우선 건강해야죠. 건강하자면 잘 먹고 잘 자고 운동 열심히 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정신이 건강해야 합니다. 사람이 가장 잘못되는 근본 원인을 따져 보면 그건 욕심입니다. 욕심을 갖지 않고 사는 게 필요해요. 욕심을 조금만 덜면 세상이 편해집니다. 남에게 양보하면서 사는 자세도 필요하고요. 덕까지 베풀지는 못하더라도 양보하면 아주 편해져요. 하나 더 있다면 감사하는 마음이죠. 감사는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인 것 같아요.”

좌우명이나 신조 같은 게 있나요?

“매일매일 후회하지 않는 거? 시간을 값지게 활용하고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자는 게 제 신조입니다. 어머니는 늘 제게 ‘허튼짓을 하지 말라. 허송세월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오늘 하루는 어떻게 살았나, 어제보다 잘못 살지는 않았나 생각하곤 합니다. 또 어머니는 저에게 늘 공부하라고 하셨는데 젊었을 때는 그걸 학교 공부로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공부는 평생 해야 하는 겁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젊은 사람들에게 뒤처지고 무시당할 수 있어요. 사람은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지는 못할지언정 무시당하진 말아야죠.”

인생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내가 가진 작은 재능을 누구에게라도 베풀고 싶어요. 저의 재능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베풀 각오입니다. 지금 노래를 부르는 건 봉사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니 하는 일이 늘 즐겁죠. 그런데 베푸는 게 아니라 사실은 그 일을 통해서 제가 기쁨을 얻는 거예요. 요즘은 그런 게 인생의 보람입니다.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노래 불러주는 게 작지만 큰 보람입니다.”

후배 가수들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

“요즘 후배들이야 저보다 재능도 많고, 또 노래를 배울 환경도 좋아졌지요. 대학교에 실용음악과 같은 학과들도 많이 생겼잖아요? 대한민국에서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는 여건도 만들어졌고요. 사람이 꿈을 갖는 건 좋은 일인데 꿈을 실현하겠다고 비인격적인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봐요. 인기를 얻는 사람보다는 전문가가 되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같은 가수라도 노래를 잘하는 사람, 작곡을 잘하는 사람, 편곡을 잘하는 사람, 작사를 잘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노래만 잘하는 게 아니라 노래 이외의 것도 잘하는, 인성을 갖춘 사람이 되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런 사람이 진짜 가수라고 생각합니다.”

“가수도 전문직, 전문성 길러라”


▎1978년 TBC 프로그램에 출연한 서수남(가운데)과 하청일(왼쪽).
요즘엔 가수나 배우가 청소년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 중 하나입니다.

“가수도 직업이잖아요? 자기가 가진 재능이나 특기가 직업이 되고 또 생활이 되는데, 가수라는 직업도 전문직이 돼야 합니다. 그런데 자녀를 가수로 키우려는 부모들이 그걸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얼굴 예쁘고 노래 잘한다고 해서 모두 가수가 되는 건 아닙니다. 가수가 된다는 건 물론 재능이 뛰어나야 하겠지만 운도 있어야 해요. 노래를 굉장히 잘하는 사람이 열 명, 스무 명 나올 때 데뷔했다면 나 혼자 튀기는 어렵지 않겠어요?

어떻게 보면 가수도 다른 직업 못지않은 전문인이 돼서 치열한 경쟁에서 인정받아야 합니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가수가 되는 것도 하늘의 뜻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인위적으로 (자녀를 가수로) 만들려다 보면 잘못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연예계에서는 가수가 가장 좋은 직업이라고들 합니다. 내가 부른 노래를 사람들이 좋아해 주니까요. 또 내 한계를 느낄 때면 거기에서 포기하지 말고 다른 능력을 키워야 돼요. 가령 키가 작다고 키를 늘릴 수는 없어요. 대신 키가 작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재능을 키우면 자신만의 강점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저는 사실 목소리도 별로고, 키(1m87㎝)도 너무 컸어요. 가수로서 조건이 그다지 좋은 건 아니었죠. 그런데 그런 불리함을 긍정의 힘으로 극대화시켜준 분이 김경태 PD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웃음을 주는 노래가 가장 훌륭하다. 슬픔을 위로하는 것도 위대하지만 기쁨을 창출하는 게 더 위대하다. 희극 배우가 비극 배우보다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다’라며 격려해 주셨습니다.”

‘서수남 하면’ 마음씨 좋은 ‘키다리 아저씨’로 인식되는 것 같아요. 팬들에게 당부를 남긴다면.

“많이 부족하지만 저를 사랑해 주시고 성원해 주시는 분들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평생 갚아도 못 갚을 신세를 지고 산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에게 보답할 수 있다면 뭐든 하겠다는 마음이니 언제든 불러주시면 기꺼이 달려가겠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서 (주변의) 모범이 되려합니다.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너무 질책하지 마시고 따뜻하게 봐주세요. 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노래하겠습니다.”

- 글 최경호 월간중앙 기자 squeeze@joongang.co.kr / 사진 김현동 기자 kim.hd@joongang.co.kr

201907호 (2019.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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