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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현의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다시 보는 일본(6)] 일본 정부 ‘잃어버린 30년’ 미봉책 일관 

국민 체감 개혁 없으면 ‘붕괴하는 10년’ 온다 

보조금 등 구제책 통해 경쟁 없는 기업들 살려 위험 미뤄
한국도 변화 방향 잘못 읽으면 한순간에 늪에 빠질 수도


▎올림픽 개최 전부터 일본 내에는 코로나19 확산을 우려한 올림픽 반대 여론이 높았다. 8월 1일 일본 도쿄도(東京都) 신주쿠(新宿)구에서 도쿄올림픽 중단을 요구하는 시민들이 행진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잃어버린 10년’이 어느덧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잃어버린 20년으로 바뀌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잃어버린 30년이란 표현이 등장했다.

‘잃어버렸다’고 하는 말은 ‘당연히 존재해야 하지만, 가질 수 없다’는 암묵의 전제를 포함하고 있다. 이제는 잃어버린 30년이라는 말이 태연하게 등장하는 걸 보면 일본 사회 전체의 상실감의 크기가 무한정 늘어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지난 30년의 세월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 제목과 다르지 않다.

1990년 도쿄 증권거래소는 1월 4일 개장 이후 갑자기 200엔이 넘는 하락을 기록했다. 도쿄 증권거래소는 1989년 12월 29일 폐장일에 사상 최고치인 3만8915엔87전을 기록했다. 하지만 1990년 장 개막일부터 내리기 시작한 주식시장은 그 후 30년이 지난 지금도 사상 최고치를 40%가량 밑돈 채 침체기를 계속하고 있다.

그사이 미국의 대표적인 주가지수인 S&P500은 약 800% 상승했다. 353.40(1989년 말)에서 3756.07(2020년 말)로 30년 사이 10.6배 상승했다. 반면 일본은 1989년 말 기록했던 최고치를 30년간이나 넘지 못하고 있다. 버블의 붕괴와 잃어버린 30년에는 신용 수축, 부동산과 주식시장 상승을 이끌었던 투기 의욕의 급격한 쇠퇴 그리고 일본 정부의 정책적 착오가 뒤섞여 있다.

이러한 일본의 상실과 부진은 구조 개혁의 실패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변해야 할 때 제대로 변하지 못하고 카이젠(改善)에 그치고 만 일본 사회의 한계로도 지적된다. 이 같은 모순은 예상치 못했던 코로나19 시대의 출현과 맞물린 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맞닥뜨렸다. 실제로 전후(戰後) 일본의 힘을 과시했던 1964년 도쿄올림픽과 코로나19 시대에 열린 2020년 도쿄올림픽(개최는 2021년)은 여러 면에서 대비된다.

잃어버린 30년 넘어 40년, 50년 될라

지난 30년 동안 주가를 포함한 일본의 각종 경제지표는 거의 오르지 않았다. 정치 면에서는 일시적인 정권 교체도 있었지만, 거품 붕괴의 원인을 제공한 자민당이 여전히 일본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자민당은 일본의 모든 가치관과 시스템 속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거품 붕괴의 원인이나 그 책임을 묻지 못한 채 잃어버린 30년이 지났다. 자민당 정권의 정책을 요약하자면, 경기 침체 시에는 재정 지출을 통해 리스크를 피했다. 반면 팽창을 거듭하던 시기에는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소비세율을 끌어올림으로써 경기를 가라앉히는 식으로 일본 경제를 이끌어갔다.

2012년부터 시작된 아베노믹스 시기에는 재정 투입 대신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을 동원했다. 일본 정부는 다른 차원의 양적 완화 명목으로, 실제로는 재정 파이낸스(중앙은행이 정부 발행 국채를 직접 사들이는 정책)와 비슷한 정책을 폈다. 정부 지침을 감히 거스르지 못하는 중앙은행 총재들도 일본 경제의 잃어버린 30년과 무관치 않다.

실제로 최근 일본의 국제 경쟁력 저하는 곳곳에서 눈에 띄게 드러난다. 노동 생산력은 계속 저하되고 있고, 저출산 고령화는 뚜렷하다. 국민과 기업은 새로운 가치관을 좀처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잃어버린 30년이 지난 지금, 일본은 잃어버린 40년, 혹은 잃어버린 50년을 걷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이대로라면 2030년대에 일본은 만성 저성장 국가가 되고, 경상수지 적자 누적으로 인해 머지않아 선진국 대열에서 낙오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런 예측을 하는 전문가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최근 30년간 일본은 어떤 변화를 이뤘을까. 우선 주요 통계상의 수치로 확인해보자(코로나 경제 이전 30년 비교).




미국의 주가가 최근 30년간 10배가 된 것을 생각하면, 일본의 주가는 비정상적인 상태라고 볼 수 있다. 30년 동안 독일의 주가지수도 1790.37(1989년)에서 1만3718.78(2020년)로 상승, 대략 7.7배가 됐다.


▎도쿄올림픽 개막일인 7월 23일 일본 도쿄 신주쿠 국립경기장 앞 광장에서 일본 시민들이 오륜기 조형물을 배경으로 사진 찍고 있다. 개막식은 코로나19 확산에 따라 무관중으로 진행됐다.
여기에 덧붙여 주식시장의 규모를 나타낼 때 사용되는 시가총액도, 최근 30년간 일본은 조금밖에 상승하지 않았다. 주식 상승에 따른 자산 효과의 혜택을 일본 국민 개개인은 거의 보지 못한 셈이다. 개인이 주식에 투자해 금융자산을 크게 늘린 미국에 비하면 일본은 개인의 주식 투자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일본인의 대부분이 풍요를 실감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해외 투자자의 일본 주식 보유율의 경우 1990년에 5% 미만이었던 것이 2018년에는 30%에 이르고 있다. 일본 주식의 3할을 외국인 투자자가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과거 일본 주식시장의 경우 30% 이상을 국내 개인 투자가가 보유했다. 그런데 거품 붕괴에 따라 개인 투자자들은 주식시장에서 떠나야 했다. 개인 투자자 비율은 2019년 말 현재 사상 최저 수준인 16.5% 정도에 그치고 있다. 닛케이지수가 반짝 상승해 3만을 돌파했을 때도 그 수익의 대부분은 일본 중앙은행과 공적 연금 등 거대 기관에 돌아갔다.

2012년 아베노믹스가 시작된 이래, 정부는 ‘연금 적립금 관리 운용 독립 행정 법인’ 등 공적 자금을 사용해 의도적으로 주가를 지탱하고 있다. 일본은행도 ‘상장투자신탁’을 계속 사들이고 있다. 이래서는 주식이 제값을 받기 어렵다. 주가가 폭락했을 때 개인이 증시에 뛰어들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주식시장이란 어디까지나 시장의 가격 형성에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주가가 크게 떨어지면 개인 투자자들이 주식 투자를 시작할 가능성이 크다. 모처럼의 투자 기회를 정부가 의도적으로 가로막고 있는 상태가 계속됐다고도 할 수 있다.

세계 GDP 점유율 2040년 3.8%까지 하락 전망


▎2월 16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 모니터에 닛케이 225(닛케이 평균 지수)가 표시되고 있 있다. 닛케이 지수가 종가 기준 3만 선을 넘어선 것은 ‘버블 경기’가 한창이던 1990년 8월 2일 이후 처음이었다.
미시경제 관점에서 보면 일본의 명목 GDP(국내총생산)는 1989년 421조 엔이었지만 30여년이 지난 현재는 557조 엔이 됐다(미 달러 기준으로 계산. 1989년은 IMF, 2018년은 내각부 추계). 얼핏 보면 GDP는 순조롭게 증가해온 것처럼 보이지만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일본 경제의 비중을 보면 일본의 약화를 잘 알 수 있다.

IMF(국제통화기금)의 조사에 의하면 미국의 비중이 1989년의 28.3%에서 2018년의 23.3%로 약간 낮아진 것과 비교하면, 일본의 하락은 크다. 대신 중국의 비중은 2.3%에서 16.1%로 급상승했다. 신흥국 및 개도국 전체의 비중도 18.3%에서 40.1%로 확대됐다.

이처럼 세계 경제에서 일본의 위상은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세계의 GDP 점유율 추이를 보면 1980년에 9.8%이던 것이 1995년에는 17.6%까지 상승했지만, 2010년에 8.5%로 낮아졌다. 거의 30년 전의 위치로 되돌아간 셈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를 맞이한 2020년에는 5.9%를 기록했다. 일본의 GDP는 여전히 세계 3위이지만, 현재의 추이가 계속될 경우 2040년에는 3.8%, 2060년에는 3.2%까지 떨어질 것으로 국제기구들은 전망하고 있다. 이렇듯 일본의 국력 저하는 분명해 보인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을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는 지표로 일본 전체의 국제 경쟁력이나 일본 기업의 ‘수익력 순위’가 있다. 스위스의 경영대학원 IMD가 매년 발표하고 있는 국제 경쟁력 순위에서는 일본이 1989년부터 4년간, 미국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그러던 것이 2002년에는 30위로 후퇴했고, 2019년에도 30위로 변동이 없었다. 2020년에는 4단계 더 하락해 34위에 그쳤다. 반면 같은 연도 조사에서 한국은 전년도보다 5단계 상승한 23위에 자리매김했다. 그런가 하면 미국의 비즈니스 잡지 [포춘]이 매년 발표하는 ‘포춘 글로벌 500’은 글로벌 기업 수익 순위 500대 톱을 제시한다. 1989년 일본 기업은 111개 사가 순위에 올랐으나, 2019년에는 52개사로 감소했다.

일본의 과학기술력도 최근 30년간 크게 쇠퇴했다. 일본의 연구자가 발표한 논문이 얼마나 다른 논문에 인용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TOP 10% 보정 논문 수’라는 데이터에서도 1989년 전후에는 세계 3위였지만, 2015년에는 9위로 떨어졌다.

이 밖에도 최근 30년 사이에 순위가 떨어진 분야는 부지기수다. 대부분의 영역에서 일본 이외의 선진국이나 중국으로 대표되는 신흥국에 추월당하고 있다. 일본은 지금 선진국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언론은 일본의 기술이 훌륭하다거나 치안이 뛰어나다거나 하는 등 몇 안 되는 일본의 장점만을 부각함으로써 일본이 세계를 리드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주고 있다.

1989년에는 일본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 수가 매우 적었다. 그해 방일 외국인은 1989년 283만 명이었으나, 2018년에는 3119만명으로 늘었다. 1989년 당시 외국인들에게 일본의 물가는 너무 비쌌기에 부유층을 제외하면 어지간해서는 일본에 올 수 없었다.

그러나 코로나19 시대 이전에는 중국뿐 아니라 세계의 수많은 관광객이 물가가 저렴하다는 이유로 일본을 찾았다. 실제로 일본은 최근 30년간 거의 물가가 오르지 않았다. 그로 인해 아베노믹스가 기치로 내건 연 2%의 인플레이션율 조차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일본은 분명히 활기를 잃어가고 있다.

대부분 영역에서 다른 선진국·신흥국에 추월 허용


잃어버린 30년의 표면적인 계기는 주가 대폭락이었지만, 당시 대장성(현 재무성)이 고공행진을 계속하는 부동산 가격을 억제하기 위해 총량 규제를 한 것이 큰 원인이었다. 주가에 제동이 걸렸는데 땅값에까지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본 경제의 거품 붕괴에는 정부 책임이 크다.

2008년 글로벌 경제 위기 당시 미국의 ‘리먼 쇼크’와 같은 사건을 일본은 이미 그 20년 전에 맛봤다. 그렇지만 위기에 대한 대응의 차이가 미국과 일본의 차이를 결정했다. 일본은 주가와 땅값 폭락 등으로 부실화된 금융기관과 기업의 정리를 미뤘다. 위험을 뒤로 미루면서 자민당을 주축으로 하는 정치 체제를 지켜냈고, 정권과 공동운명체인 관료 기구도 의도적으로 구조 개혁의 속도를 늦췄다. 그동안 정부는 일관되게 공적자금 투입에 따른 경기 부양이나 공공사업 증가 등으로 대응해왔다. 적자 국채 없이는 일본은 살아갈 수 없게 됐다.

지난 30년간 일본은 기업 구제를 위한 자금은 아낌없이 지출해왔다. 미국처럼 세금을 민간기업에 지출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하는 공화당 같은 세력이 일본에는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공적 자금의 지출이 경기 회복에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번에는 우정(郵政) 민영화 같은 규제 완화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 역시 여러 세력의 이해관계가 얽힌 나머지 어정쩡한 형태로 진행됐고, 결과적으로 비장의 경기 회복 카드가 되지는 못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아베노믹스가 야심 차게 출범한 지 올해로 10년이 다 돼가는데도 가시적 효과는 난망하다.

어쩌면 소비자 물가가 2%를 돌파할지 몰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일 가능성이 크다. 그사이 정부의 채무는 자꾸자꾸 부풀어오를 테고, 정부는 소비세율 인상에만 목멜 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1989년 4월 소비세를 도입한 이후, 최근 30년간 일본 정부는 세 차례 ‘소비세율 인상’을 단행했다. 하지만 인상 폭이 2~3% 정도에 그쳤으며, 결정적인 패닉에 빠지는 리스크를 피하기에만 급급했다. 반면 미국은 리먼 사태 때 벤 버냉키 FRB(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 대담하게 그리고 속도감을 가지고 해결책을 내놓았다.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리스크에 대처하는 자세였다. 그러나 일본은 늘 위험을 회피하고 무사안일로 일관했으며, 개혁의 속도와 규모가 미미했다. 그 결과 성과도 작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 30년의 잃어버린 시간은 현 정부 책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일본 국민은 거품 붕괴의 원인을 만든 정권을 지금도 편들고 있다. 그 배경에는 ‘보조금 행정’ 등 정부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기업이나 국민이 있다. 실제로 최근 30년간 통계에서 보듯이 국가 채무는 250조 엔에서 약 4배가 넘는 1100조 엔으로 늘었다.

정치권에 가해야 할 채찍질, 이웃 나라로 돌리는 그들


▎7월 23일 일본 도쿄 신주쿠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개막식에서 나루히토(왼쪽) 일왕과 스가 요시히데(가운데) 총리가 손뼉을 치고 있다. / 사진: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A
2013년 신조 유행어 가운데 ‘사토리 세대(さとり世代)’라는 말이 있다. 사토리는 ‘깨달음·득도’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는 ‘욕망이 없는’ 세대를 가리킨다. 여기에서 세대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1987년에서 2004년에 태어난 세대를 지칭한다. 일본 거품 경기 붕괴 시기와 일치한다.

자민당 정권이 지금도 유지되는 이유가 낮은 투표율에 의존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지난 30년 사이 일본 국민 사이에 확산된 체념이 ‘경지’에 이른 탓이라는 지적도 있다. 욕망이 거세돼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일본 국민은 정치권에 가해야 할 채찍질을 애꿎은 이웃 나라로 돌리고 있다.

이번에는 일본의 땅값 변화를 살펴보자. 전국 땅값 평균 공시가격의 경우 1976년을 0으로 봤을 때 1992년까지는 플러스권(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 이후 거품이 꺼지면서 주택지·상업지 모두 공시가격이 계속 마이너스를 보이다가 2015년에야 전년 대비 플러스로 돌아섰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일본 국민은 땅값 하락을 감수해야 했던 셈이다.

주가나 토지 가격이 상승할 수 없었던 배경을 어떻게 파악하면 좋을까. 간단히 말하면, 적어도 일본 정부는 구조 개혁으로 이어질 만한 대담한 개혁은 단행하지 않았다. 근본적인 구조 개혁은 게을리한 채 소비세 도입이나 세율 인상 같은 지엽적인 미봉책에 치중해왔다.

일본 정부는 경기가 나빠지면 보조금 같은 구제책을 도입함으로써 시장에서 퇴출당해야 할 기업들을 살아남게 했다. 망해야 할 기업이 시장에서 퇴출당하면, 그 자본과 인력은 다른 분야로 투입돼서 새로운 산업을 구축할 수 있다. 그러나 부(負)의 결과를 두려워한 나머지 일본 정부는 항상 위험을 미뤄왔다. 일례로 버블 붕괴 이후에도 주식시장은 오랫동안 주가 떠받치기(Price Keeping Operation) 장세로 불리는 등 정부에 의해 유지됐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들어 디지털 혁명, IT(정보통신) 혁명이라고 하는 ‘이노베이션’ 대세에 일본 기업들은 뒤처지기 시작했다. 기업들조차 구조 개혁에 소극적인 나머지 적극적인 R&D(연구·개발)에 나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 유럽과 같은 리스크 머니(risk-money, 투자 의욕)의 개념이 결정적으로 부족하다. 위험을 무릅쓴 새로운 분야의 기술 혁신에 자금을 제공하는 기업이나 투자가가 너무 적다.

일본은 여러 분야에서 고도의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마케팅력이 약하다 보니 그것을 시장에서 살리기 어려울 때가 있다. 과거 일본 기업은 VHS나 DVD, 스마트폰 개발과 같은 기술 혁신에서는 세계 톱을 달렸다. 그러나 실제의 비즈니스에서는 기술력만큼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기술에서 앞서도 비즈니스화하지 못하면 그저 하청산업이 되고 만다.

지금까지 일본은 일본 특유의 영역을 구축해놓고, 그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갈라파고스의 딜레마’에 빠졌다. 쉽게 말해서 일본 특유의 기술을 너무 고집한 나머지 사용자를 배려하지 못하는 것이다. 일본이 제조업에 집착하면서 최첨단 기술 개발로 일관하는 동안, 세계는 GAFA(구글·애플·페이스북·아마존)에 지배되고 있다.

돌아보면 지난 30년 동안 일본 기업은 다양한 갈라파고스를 만들어왔다. 이 갈라파고스화(化)의 배경에는 정부의 왜곡된 행정이나 통제·규제 등이 존재해왔다. 업종에 따라 다르지만, 일본 기업의 상당수는 소비자가 아니라 규제 당국이나 연구·개발비를 보조해주는 상부(정부)를 향해 비즈니스를 하는 자세를 자주 보여왔다. 기업 입장에서는 정부가 쥐어주는 돈을 뿌리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용자 배려 없는 기술 개발로 ‘갈라파고스화’


▎혐한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일본 극우 단체 회원들.
일본의 잃어버린 시간은 30년에 그치지 않고 40년, 50년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일본은행은 한시라도 빨리 금융 행정을 정상적인 모습으로 되돌리고, 주식시장 역시 적정한 주가 형성 시스템으로 되돌아가라는 것이 시대의 요구다. 자민당이 회피해온 ‘최저임금의 대폭 상승’이나 ‘적극적인 엔고 정책’ 같은, 지금까지와는 정반대의 정책을 과감하게 펴야 할 때가 됐는지도 모른다.

아울러 일본 정부가 정치 개혁을 위해 국회의원 수를 줄이는 등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개혁을 하지 않으면, 이번에는 ‘잃어버린’이 아니라 ‘붕괴하는’ 10년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도 변화를 주저한다든지 변화의 방향을 잘못 읽으면 한순간에 늪에 빠질 수 있다.

※ 최치현 -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같은 대학 국제지역대학원 중국학과에서 중국지역학 석사를 받았다. 보양해운㈜ 대표 역임.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했다. 저서는 공저 [여행의 이유]가 있다. ‘여행자학교’ 교장으로 ‘일본학교’ ‘쿠바학교’ ‘스페인학교’ 인문기행 과정을 운영한다. 독서회 ‘고전만독(古典慢讀)’을 이끌고 있으며 동서양의 고전을 읽고 토론한다.

202109호 (2021.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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