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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취재] 한국 근현대와 함께한 기독교 사학의 발자취 

‘세상의 빛과 소금’ 키운 130년 역사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구한말 선교사와 기독 신앙인들 뜻 모아 민족 계몽의 산실 역할
다양성 요구하는 시대 변화 대응해 기독 사학의 새 역할 찾아야


▎1800년대 말 조선에 들어온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는 서대문구 신촌동에 연세대의 모태인 연희전문학교를 세워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계몽 교육을 벌였다. 연세대 본관 앞에 서있는 언더우드 동상. / 사진:연세대학교
"한국 개화기의 역사는 기독교 사학의 역사였다.” 이영훈 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목사의 말처럼 한국 근현대사에서 기독교 사학은 시대를 이끄는 역할을 해왔다. 신앙에 입각한 수많은 지식인이 후학 양성을 통해 세상을 바꿔나가는 데 헌신했다. 교육을 통해 그리스도 정신을 세상에 전파하는 것을 소명으로 여겨 기독교 학교를 ‘미션스쿨’이라고 부르게 된 연원이기도 하다.

한국 기독교 학교의 역사는 개신교가 전래한 것과 거의 동시에 시작됐다. 조선 중·후기인 1700년대 말 천주교가 새로운 학문 성격으로 전래한 지 100년 뒤인 1884년부터다. 미국 선교사 알렌에 이어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인천 제물포 땅에 걸음을 내디디면서 한국의 기독교 역사가 출발한다. 알렌 선교사는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을 열었고, 이는 훗날 연세대 의과대학(세브란스병원)으로 발전했다.

이들이 선교활동을 시작할 당시 조선은 외세의 간섭과 서구 문물의 유입으로 기존 질서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유교 질서에 바탕을 둔 기존 질서를 정면으로 부정했다. 기존 권위에 대항한 유일한 종교였기에 깨어 있는 상류 지식인은 물론이고 계급사회에서 신음하던 하층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선교사들이 운영한 학교는 이들의 갈증을 해소하는 중심지 역할을 했다. 폐쇄적인 조선 사회에서 백성을 계몽하는 일은 선교사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미션 중 하나였다. 기독교적 가치관을 전파하기 위해선 배움이 따라야 했고, 배움을 위해선 문맹 퇴치가 절실했다. 또 일제 강점으로 절망에 빠진 양반가 지식인에게는 새로운 문물과 사상을 탐구하려는 욕구도 컸다. 이들이 기독교 가치관에 입각해 사회 발전을 견인해나가려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새로운 교육기관이 필수 요소였다.

선교사들은 1880년대에 저마다 교육기관을 열어 일반 대중을 상대로 기독교 교육을 시작했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서울시 중구 정동에 연 배재학당은 기독교 사학의 시초였다. 처음에는 선교사역을 위한 인력 양성으로 시작해 일제 강점기에 정식 학교 인가를 받았다. 비슷한 시기 언더우드 선교사도 정동에 고아 교육시설인 ‘경신학교’를 설립해 기독교 교육에 발을 내디뎠다. 경신학교 대학부는 연세대학교의 모체인 연희전문학교로 확대됐다. 스크랜턴 선교사도 같은 시기 정동의 자택에서 여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의 역사가 시작됐다.

초기 기독교 학교들은 민족 지도자 양성의 산실 역할을 톡톡히 했다. 서양 선교사의 가르침을 통해 서구의 근대 문물을 접할 기회가 차단돼 있던 현실을 극복할 돌파구로 여겨졌다. 19세 청년 이승만은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해 영어 등 새로운 학문을 익히며 세상을 보는 눈을 넓혔다. 이후 이승만은 선교사의 후원을 받아 미국으로 떠나 조선의 자주권을 되찾기 위해 활동을 시작했다. 1895년에 결성된 독립협회에 참여한 인물 대부분이 선교사가 세운 학교에서 교육 받았고, 독립 열기를 고취했던 [독립신문]도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발간될 수 있었다. 이후 계몽운동, 교육운동, 물산장려운동, 3.1운동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와 조선 민중의 계몽·독립 운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였다.

선교사들이 설립한 학교에서 새 문물을 익힌 당대 지식인들은 저마다 기독교 가치관에 입각한 학교를 전국 각지에 설립해 문맹 퇴치에 앞장섰다. 배재학당에서 한글 문법 연구를 시작한 주시경 선생은 언더우드 선교사의 후원 아래 한영·영한 사전, 한글 문법서 등을 간행해 한글 보급에 앞장섰다. 민족지도자 33인 중 한 사람인 남강 이승훈 장로(1864-1930)는 민족운동의 산실로 꼽히는 오산학교를 세우면서 ‘신앙입국’, ‘교육입국’, ‘산업입국’을 소명으로 내걸었다. 조만식, 함석헌, 이광수 등 당대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지식인들이 오산학교를 거쳤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세운 대성학교를 비롯해 양정의숙, 보성학교, 휘문의숙, 중동학교 등도 이 시기 기독교 교육을 받은 선각자들이 세운 대표 사학들이다. 사료에 따르면 1910년 초에는 천주교를 포함해 기독교 계열 학교는 전국에 796개에 이르렀다.

일제의 노골적인 탄압에도 기독교 학교의 교육 열기를 막진 못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기독교적 신념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독교 학교의 항일 정신은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통해 분수령을 맞았다. 1937년 일제의 ‘황민화 운동’이 고조되면서 신사참배 강요가 전국으로 확산했을 무렵이다. 당시 수많은 기독교 학교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자진 폐교로 맞섰다. 숭실대가 1938년 스스로 문을 닫은 뒤 16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재개교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해방 후 공교육 역할 도맡아 ‘교육보국’ 매진


▎배재학당은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한국 최초의 기독교 학교였다. 강남으로 이전하기 전 서울시 중구 정동에 있던 배재학당 옛 교사(校舍).
한국의 기독교 학교 역사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비단 종교인 양성을 위한 목적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근대 교육의 오랜 전통을 가진 유럽의 경우 학교 교육이 시작된 중세 당시 성직자를 양성하는 게 학교의 거의 유일한 목적이었다. 일반 학문으로 교육 범위를 넓히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지나 근대가 시작되면서부터였다. 반면 우리나라의 기독교 학교는 출범할 때부터 대중 계몽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을 설립하면서 “우리는 통역관을 양성하거나 학교의 일꾼을 양성하려는 것이 아니요, 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세상에) 내보내려는 것”이라고 천명한 데서 당시 기독교 학교의 소명이 무엇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오직 입신양명의 발판으로만 여겨졌던 조선의 교육제도와도 차별화를 이루는 지점이다.

해방 후 기독교 학교는 새로운 소명을 부여받게 된다. 이전까지 기독교 학교의 역할이 자강을 위한 계몽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해방 후에는 공교육의 역할을 대신해야 했다. 해방 후 좌우 이념대립과 분단 등 혼란한 정세 속에서 공교육이 표류한 탓이다. 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는 “해방 후 이념적으로 혼란한 상황 가운데 기독교 학교들은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기초로 국민 의식 수준 향상에 힘을 쏟았다”고 평가했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독지가들이 사재를 털어 창학에 나섰다. 연희전문학교에서 수학한 뒤 훗날 [기독교신문]을 창간한 백남 김연준 장로는 한양학원을 설립해 한양대와 부속 초·중·고교 등을 세워 교육보국에 투신했다. 미국인 여자 선교사 미스 골든이 전주에 세운 기전여학교에서 수학한 승당 임영신 박사가 세운 중앙대, 민중병원 설립자인 상허 유석창 박사가 세운 건국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미원 조원식 박사가 설립한 경희대 등이 대표적이다. 기독교인이 세운 사립학교들은 이후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며 국가 재건의 토양을 이뤘다.

다양성 시대 접어들며 기독교 가치관과 충돌

해방 후 재건기는 미션스쿨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1960년대 국가 체제가 안정기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국가에 의한 공교육보다 사학의 역할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2016년 기준 우리나라의 189개 대학 중 절반인 94개 학교가 기독교 재단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부침도 있었다. 공교육 확산이 기독교 학교의 건학이념과 고유의 교육 시스템을 제약하는 역설적 상황이 나타났다. 1980년대 후반 중학교 의무교육이 추진되면서 중학교 교육 과정에서 종교 교육이 불가능해졌다. 이는 수많은 기독교 계열 중학교의 자진 폐교로 이어졌다.

다양성의 요구가 높아진 2000년대 들어 기독교 학교의 교육 방침은 더 큰 벽에 부딪힌다. 2004년 서울 대광고에서 종교수업(채플)을 거부한 강의석 군을 제적한 사건이 상징적이다. 교육의 보편성과 기독교 학교의 건학이념 사이에서 사회적 논쟁은 더욱 가속했다. 여기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중심으로 기독교 학교의 교사 채용 방식과 내부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2006년 사립학교법 개정 추진 과정에서 두 가치관의 대립은 절정에 이르렀다.

이런 충돌은 기독교 학교가 새로운 역할을 모색해야 한다는 과제를 던졌다. 개화기 이래로 기독교 학교를 일컫는 ‘미션스쿨’이란 단어에는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 수단으로서의 교육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시대가 변한 뒤에도 이런 기독교 학교의 운영 방침은 건학이념과 전통이란 미명으로 유지됐다. 이 때문에 기독교계 내부에서도 과거의 전통과 제도를 고수하는 방식으로 가치관의 충돌을 피하는 것은 바른 해법이 아니란 지적이 나오기도 한다. 피할 수 없는 시대 변화를 인정하고 그에 걸맞은 역할과 위상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재정 지원을 앞세워 획일화된 커리큘럼을 강요하는 현행 방식의 교육 정책의 개선이 병행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결코 작지 않다. 사립학교를 국가 교육 이념을 실현하는 위탁교육 기관 수준으로 전락한다면 교육의 다양성을 오히려 해칠 수 있다는 게 비판의 핵심이다. 또 일선 학교를 재정권으로 포섭하거나 통제하는 방식으로는 교육 정책에 자발적 참여를 끌어내기 어렵다는 점도 가벼이 흘릴 수 없는 지적이다.

기독교계의 한 원로 목회자는 “삭발이나 군중 집회와 같은 과거의 방식으로는 다시 불붙은 종교 사학의 위기와 역할 논쟁을 잠시 피할 수 있을지언정, 위기를 벗어날 근본 처방이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교육의 불모지에서 기독교 학교를 일군 선각자들의 소명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했다. “참된 진리를 깨우치는 세상의 빛과 소금”을 키우는 것, 시대가 요구하는 기독교 학교의 역할이다.

-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202112호 (202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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