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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특별기획시리즈] 다시 기업가정신이다-한국 경제의 개척자들(9) 최종건·최종현 SK그룹 창업회장 上 

최종건의 돌파력·최종현의 치밀함, 수출 한국의 문을 열다 

기술학교 졸업한 최종건, 선경직물 입사 후 보스 기질 발휘해 인수 성공하며 경영자로 변신
박정희 정부 수출정책에 편승해 급성장, 시카고대 출신 동생 최종현 입사 후 해외 판로 개척


▎오늘날 반도체·2차전지· 바이오·정유·통신 등에 걸쳐 제국을 건설한 SK그룹의 모태는 선경직물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최종건(오른쪽 둘째) 창업회장의 기업가정신은 박정희(오른쪽) 대통령까지 감화시켰다. / 사진:SK그룹
SK그룹의 모태라 할 선경직물은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0년 10월 수원역에서 서남쪽으로 2㎞가량 떨어진 수원시 권선구 평동에 설립된 직물제조회사였다. 당시 대평정(大坪町)이라 불리던 평동은 그 일대가 넓은 들판이었기 때문에 예전부터 벌말·벌리·들말·평리 등으로 불렸다. 공장 부지를 이곳으로 정한 이유는 동네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서호천(西湖川)이 공장용수로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상호로 정한 선경(鮮京)은 공동 투자자인 선만주단(鮮滿綢緞)과 경도직물(京都織物)의 머리글자인 ‘선’과 ‘경’을 조합한 것이다. 선만주단은 만주지역에 직물류를 수출하기 위해 1929년 국내에서 설립된 일본인 포목상이었다. 경도직물은 일본 관서지방을 대표하는 일본인 소유의 견직물 제조업체였다. 선만주단은 공장부지 8000평과 공장 건축비 및 기타 비용을 부담했으며, 경도직물은 직기 및 부대 설비를 각각 현물 출자했다.

중·일 전쟁(1937) 발발 이후 중국 내에서 일본 제품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선경직물이 설립될 무렵 국내에는 군소 직물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제직(製織)은 기술 습득이 비교적 쉬운 데다 적은 자본으로도 창업이 가능한 업종이었기 때문이다. 선경직물은 제1, 2공장에 기모토식(木本式) 직기 100여 대와 염색가공 설비, 보일러, 기숙사 등을 완비하고 종업원 200여 명(남자 약 40명)으로 태평양전쟁 와중인 1943년 봄부터 인견(人絹, art silk)과 군복 안감(silver)을 직조했다. 나날이 급증하는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작업반을 주야 2교대로 편성해 24시간 풀가동했다.

기술자로 입사해 4개월 만에 책임자로 승격

SK그룹 창업자 최종건(崔鍾建, 1926~1973)도 이 무렵에 선경직물과 인연을 맺는다. 최종건의 부친 최학배(崔學培)는 21세 때 결혼과 함께 수원군 팔탄면 해창리에서 평동으로 이주, 그곳에서 대성상회(大成商會)를 개설했다. 수원잠업 시험장에 볏짚과 왕겨 등을 납품했고, 인천 미곡취인소(米穀取引所)를 상대로 미곡상도 하면서 착실하게 재산을 불려갔다. 최학배는 이재에 밝아 사업이 번창했을 뿐만 아니라 1942년 봄 선경직물 공장을 건설할 때는 골재와 자재류를 납품하기도 했다.

최종건은 1926년에 최학배의 8남매 중 장남으로 수원 평동7에서 출생했다. 그는 어렸을 때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 집에서 4㎞나 떨어진 곳에 있는 수원 신풍소학교에 입학했다. 체격이 크고 건강했다. 성격 또한 활달했던 최종건은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해 신풍소학교 축구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친구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솔선해서 이를 해결해주는 등 인정과 의리를 겸비한 골목대장이었다.

1942년 신풍소학교를 졸업한 최종건은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라는 부친의 권고를 뿌리치고 경성(京城)직업학교 기계과에 진학했다. 인문계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는 것보다 직업학교에서 기술을 배우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3급 기계정비사 자격증 소지자인 최종건은 18세가 된 1944년 4월 부친의 권유로 선경직물 공무과 견습기사로 입사했다.

당시 선경직물은 1944년 8월 ‘전시기업정비령’에 의해 수원의 다른 직물공장들과 함께 조선직물(朝鮮織物)에 흡수됐다. 조선직물은 1934년 경기도 안양에서 설립된 부지 4만1000평, 건물 9100평의 인견직 전문생산업체였다. 수도권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직물공장 중의 하나였지만 안양공장은 일본군용 항공기 제조창으로 징발됐다. 전황이 일본군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조선총독부는 군수시설 확충을 위해 기업 구조조정을 강제했던 것이다. 대신 조선직물은 수원에 산재해 있는 직물공장들을 전부 접수할 수 있었다. 당시 수원에는 선경직물 외에 선일직물공장, 수원직물공장, 동흥직물공장 등 6개 공장이 있었다. 조선직물은 이들 직물공장을 접수함과 동시에 선일직물을 제1공장으로, 선경직물을 제2공장으로 편성했다.

최종건은 입사 4개월 만에 직보반 제2조장으로 승진했다. 2조장은 100여 명의 제직(製織)조 여공들을 주야 2교대 작업반으로 편성해서 생산 계획을 차질 없이 수행하며 품질관리도 책임지는 자리였다. 그는 직공들의 애로사항을 경청하고 고장 난 기계를 고쳐주는 등 리더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서 신뢰를 쌓았다. 최종건이 제직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해방과 한국전쟁 거치며 사업가로 변모


▎1967년 선경의 공장 기공식에 최종건(왼쪽 다섯째), 최종현(왼쪽 일곱째) 회장이 참석했다. SK 가문의 혈족 간 결속력은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 사진:SK그룹
1945년 8·15 해방과 함께 전국 도처에서 흥분한 군중이 일본인들에 대한 보복을 자행했다. 일본인들의 집에서 재물을 빼앗기도 하고, 자신들이 근무하던 공장 시설들을 부수고 창고를 털어가는 사례가 빈발했다. 최종건은 서둘러 선경치안대를 조직하고 직기 100여 대와 원재료 사수에 돌입했다. 대부분의 공장 직원들이 최종건의 지시를 순순히 따라준 덕분에 선경직물에서는 불상사가 없었다. 선경 공장은 경인 지방에서 제반 시설이 온전히 보전된 유일한 사례였다.

한편 선경직물의 소유권이 미군정에 귀속되면서 이 기업의 유일한 한국인 주주였던 황청하와 서울 마포의 거상 김덕유가 관리인단에 들어갔다. 황청화와 김덕유는 총 주식 50만 주 중 각각 100주씩을 소유한 군소주주에 불과했지만 미군정법령 ‘적산관리요령’의 “적산(敵産) 업체의 주주 또는 당해 적산업체에서 5년 이상 근속한 자에게 관리인 자격을 부여한다”는 조항에 따라 선임된 것이다.

선경직물은 1946년 2월부터 조업을 재개했다. 공장장은 황청하의 동생 황철하가, 총무부장에는 김덕유의 조카 표덕은이, 생산부장은 21세의 청년 최종건이 맡았다. 해방 직후 대부분의 적산공장에서는 한국인 근로자들이 좌우로 갈려 노사분규가 심했다. 최종건은 수원지방 우익단체의 하나인 태백동지회 일원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념을 떠나 대다수 종업원이 최종건의 말을 잘 따라줘 공장 가동에는 문제가 없었다.

1947년부터 직물업계의 호황으로 선경직물도 활성화됐다. 해방을 계기로 국내 일본계 기업의 생산 중단에다가 일본에서의 원료 수입마저 단절돼 물자난이 극심한 반사효과를 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1948년부터 북한이 남한에 대한 송전(送電)을 중단하면서 선경직물도 조업에 차질을 빚었다.

최종건은 1949년 여름 선경직물을 퇴직한 뒤 원사(原絲) 거래에 착수했다. 당시 직물공장에서는 이탈리아산 원사를 수입해서 사용했는데 수급이 불안정해서 잘만 하면 큰 시세차익을 얻을 수 있었다. 최종건은 뛰어난 사교력과 선경 근무시절 원사 공급상들과의 안면으로 외상거래가 가능했다. 그는 원사 거래로 재미를 보다가 1950년 6·25전쟁 발발과 함께 마산으로 피란했다가 1952년 5월 수원으로 돌아왔다. 선경직물 공장은 전화(戰禍)를 입어 거의 폐허 상태로 관리인 황청화와 김덕유는 책임을 포기한 상태였다. 시설들을 점검한 결과 직기 10~20대 정도는 수리하면 사용이 가능한 상태였다. 최종건은 죽마고우이자 해방 전부터 선경직물에서 일한 박윤환과 함께 고장 난 직기들을 재조립했다. 잦은 고장으로 애로가 많았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구식 직기 20대를 갖추게 됐다.

최종건은 방구현, 차철순과 함께 공동으로 선경직물 불하 작업을 추진했다. 방구현은 최종건이 오래전부터 잘 아는 직물업계 선배로, 해방 후에는 적산 불하로 큰돈을 벌어 ‘수원한량’ 소리를 들었다. 선경직물 공장부지 1만2000평 중 차철순의 지분 4000평을 우선 매입하기로 결정했다. 선경직물은 설립 당시 차철순의 땅 1만2000평을 공장부지용으로 매입했는데, 8000평에 대한 대금만 지불하고 나머지는 5년 이내에 지불하기로 했었다. 그래서 당시까지 4000평은 차철순 지분으로 등재됐던 것이다. 또한 ‘농지개혁법에 의해 농지를 매수당한 자에게 귀속재산 매수에 우선권을 부여한다’는 귀속재산 불하 규정이 있어서 차철순은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부친에게 자금 지원받아 선경직물 매입


▎최종건(맨 앞) 창업회장은 기술력과 인간관계를 사업의 밑천으로 여겼다. / 사진:SK그룹
최종건은 부친에게서 자금을 지원받아 선경직물 공장의 차철순 지분 4000평을 매입했다. 1953년 4월 8일 최종건, 차철순 공동명의로 경기도 관재국에 선경직물 우선매수신청을 제출했다. 3개월 후인 7월 27일 관재청은 선경직물을 130만환(圜)에 불하하기로 허가하며 “3주일 이내에 매각대금의 10%(13만환)를 납부하고 계약을 체결하라”고 통지했다. 당시 쌀 한 말이 1000환으로, 계약금 13만환은 쌀 1300가마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하지만 최종건은 [선경 40년사]에서 “당시로서는 귀속재산 매각통지서를 손에 넣는다는 것은 곧 큰 행운을 잡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 귀속재산을 불하 받아서 손해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귀속재산은 으레 시가보다 싼값에 매각되기 마련이었으며 매수 대금도 5년 내지 15년까지 장기분납이 가능했다. 매수계약금에 해당하는 1차 납부금도 매수총액의 10%만 납부하면 됐으며, 게다가 매수대금은 액면가보다 훨씬 싼 값에 살 수 있는 농지증권으로 대납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날이 갈수록 치솟는 인플레로 화폐가치가 자꾸 떨어지기 때문에 귀속재산을 불하받는다는 것은 횡재나 다름없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1953년 8월에 최종건과 차철순은 선경직물 주식 50만 주 중 황청하, 김덕유 몫(각각 100주씩 소유)을 제외한 49만9800주 인수계약을 체결했다. 나머지 잔금은 10년 분할상환하기로 했다. 최종건은 추후에 차철순 몫을 청산하기로 약정했다. 바로 이 시점부터 최종건의 선경직물 오너경영인 구상이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당대 히트상품 ‘닭표’ 안감과 ‘봉황새’ 이불감


▎미국 시카고대 경제학 석사 출신인 최종현 회장은 재계에서 드문 이론가로 통했다. / 사진:SK그룹
20대의 직기가 정상 가동하기 시작한 것은 1953년 7월부터였다. 직기 1대의 직조량은 인조견 30마로, 20대 직기를 정상으로 가동하려면 하루에 인견사 1고리(bale, 181kg)가 필요했다. 인견사 1고리의 가격은 대략 쌀 10가마였다. 자금난으로 운전자금 및 원사(原絲) 구입 대금은 선경직물의 고철을 팔아 충당했다. 임금을 제때 지급 못 하는 경우도 빈번했지만, 대부분의 공장 인력이 최종건의 신풍소학교 동창들이어서 임금 체불로 인한 갈등은 거의 없었다.

최종건은 조업률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방법으로 생산에 매진해서 선경직물 인수 1개월여 만인 1953년 9월 30일 차철순에 지가증권 13만환을 전부 상환했고, 공동매수인 권리 포기 각서까지 확보했다. 27세 청년 최종건은 거의 적수공권으로 시작해서 1만2000평의 선경직물 공장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최 회장은 보스 기질을 타고난 행동가였다. 최 회장은 공사 현장에서도 종업원들보다 더 많은 땀을 흘렸다. 종업원들과 노는 자리에서는 전혀 상하를 가리지 않았다. 막걸리 파티라도 열렸다 하면 다 같이 친구요, 형이요, 아우였다.” 청년 최종건의 기술력과 인간관계가 창업의 밑거름이 된 셈이다([최종건 창업회장의 창업이념과 기업가정신]).

그해 10월 제1공장 건물을 복구하고 선일직물과 동흥직물에서 중고 직기 60대를 구입해서 설치했다. 1955년 8월에는 서울 휘경동 태창직물의 중고 직기 50대도 넘겨받아 선경직물의 제2공장까지 복구했다. 선경은 양복 안감인 인조견 능직(綾織)을 생산했다. 당시 국내에서 생산되는 양복 안감은 대부분 재단 전 물세탁을 해야 했지만, 선경 제품은 물세탁하지 않아도 됐기에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이 무렵 국내 굴지의 인견직 메이커는 조선직물·태창직물·심도직물 등으로, 선경직물은 지방 소재 중소기업에 불과했으나 1955년 ‘해방 10주년 기념 전국산업박람회’ 참여로 도약의 계기가 마련됐다. 그해 10월 1일부터 2개월 동안 서울 창경궁에서 개최된 박람회는 국산 장려와 산업 부흥을 목적으로 한 국내 최초의 대규모 행사였는데 선경의 ‘닭표’ 안감이 부통령상을 수상한 것이다. 선경의 ‘닭표’ 안감은 인견 부문에서 유일하게 수상했다.

당시 산업은행은 박람회에서 수상한 업체들에 기업육성 자금을 융자해줬다. 대통령상은 500만환, 부통령상은 300만환 등의 장기저리 자금을 제공했다. 선경은 융자금 300만환으로 악성 고리채 100만환과 선경직물 매수대금 중 잔금 91만환을 상환하고, 나머지 100만환으로는 고급 견직물을 생산하기 위해 일본제 문직기(Jacquard) 25대를 발주해서 제3공장을 건설했다. 문직기(紋織機)는 1930년 프랑스인 자카드(J. M. Jacquard)가 발명한 것으로, 1만여 개에 달하는 종침(從針)과 횡침(橫針)을 조작해서 섬유에 문양을 찍어내는 직기다.

1956년 3월 24일에 선경직물은 주식회사로 설립 등기했다. 또한 제3공장의 가동으로 선경의 생산량이 두 배로 급증한 그해 11월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 서울 연락사무소를 개설하고 사무소장에는 경리 담당 이문재를, 직원으로는 수원농고 졸업생인 둘째 아우 최종관을 충원했다. 원활한 원사 공급과 동대문시장의 직물유통정보를 정확히 파악해서 생산 활동에 반영함은 물론 급증하는 자금 수요의 일부를 서울의 사채시장에서 조달하기 위함이었다.

1958년 5월부터 시판을 개시한 ‘봉황새’ 이불감이 전국적인 히트 상품으로 급부상하면서 선경은 점차 중견기업으로 부상해갔다. 1958년 11월에는 산업은행으로부터 대부받은 ICA 자금 4만5000달러로 문직기 50대와 염색가공 설비를 갖춘 제4공장을 오픈했다. ‘닭표’ 안감은 가짜 상표에 시달릴 정도로 소비자들의 인기를 독차지했으며, 봉황새 이불감도 인기에 편승해서 매출이 점증했다. 이로써 선경직물은 직기 150여 대와 염색가공 설비를 갖춘 일괄생산공장이 됐다. 400여 종업원을 거느리는 등 대기업으로 발돋움할 채비를 갖췄다.

형제 경영이 빚어낸 국내 최초의 직물 수출


▎김종필(가운데) 전 국무총리가 박정희 정부에서 ‘모범기업 사례’로 간택된 선경직물을 방문해 최종건 창업회장의 설명을 듣고 있다. / 사진:K그룹
선경의 본격적인 도약은 1961년 군사정부 출현과 함께 개시된 수출 촉진에 편승하면서부터였다. 군사정부는 1962년 7월 14일 특정외래품판매금지법을 제정, 공포했다. 국내 산업을 외래 사치품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그 일환으로 외국산 면 직물과 나일론 직물에 대한 국내 판매를 금지했다. 이로 인해 위기 국면에 있던 국내 섬유업계 형편이 점차 호전됐다.

한편 정부는 1961년 8월 무역법을 제정해서 강력한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실시했다. 당시 국산 견직물은 품질 면에서 외래품에 뒤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낮은 임금 탓에 경쟁력도 충분했으나 수출은 언감생심이었다. 최종건 사장은 수출로 불황 돌파구를 모색했다. 1961년 11월 서울사무소를 확대하고 선경이 자랑하는 ‘닭표’ 안감 수출길을 모색했다. 하지만 국내 무역상들이 외면했다. ‘목마른 자가 직접 우물을 판다’고, 선경은 직접 해외 무역업체를 접촉해서 1962년 4월 8일 홍콩 광홍공사(廣弘公司)에 ‘닭표’ 안감 10만 마(1만1300달러 상당)를 수출했다. 국내 최초의 인견직 수출로서, 수출 단가가 생산원가에도 못 미치는 출혈수출이었다.

홍콩에서 제시한 최종 오퍼가격은 마(90㎝)당 11.3센트로 10만 마를 수출할 경우 2700달러(약 351만원) 손해인 셈이었다. 당시 정부는 수출 관련 손실을 보전해주기 위해 1962년 상반기부터 수출장려금 교부요령을 마련했지만, 보조금 교부대상 품목에 인견직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때까지 인견직이 수출된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부는 1963년 3월 7일자로 상공부 고시 제2945호로 인견직물을 수출장려금 교부대상에 포함했다.

1962년 8월 자본금 1000만원의 무역업체인 선경산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서울사무소를 해체했다. 최종건의 첫째 아우 최종현(1929~1998)이 경영에 참여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최종현은 수원농고와 서울대 농대를 거쳐 1956년 6월 미국 위스콘신대 생화학과를 졸업한 후 1959년 3월 시카고대학에서 경제학석사를 받았다. 이후 귀국해 1962년 11월 선경직물 부사장으로 취임했다.

형인 최종건이 일부터 저지르고 벌이는 반면, 아우 최종현은 일을 꾸미고 가꾸는 스타일이어서 환상의 궁합이었다. 이후부터 선경은 최종건 3형제가 공동으로 경영했는데, 최종현이 무역 업무를 전담하고 둘째 아우 최종관은 서울사무소 해체와 함께 개설한 동대문연락사무소(종로5가 한일극장 뒤편)에서 선경직물의 구매 및 시장관리 업무를 맡았다.

정부는 국제수지 개선을 목적으로 1963년 1월 5일부터 제품의 수출을 전제로 원료수입을 허가하는 내용의 수출입 링크제를 실시했다. 수출 촉진을 통해 균형무역을 달성하고 수출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배려였다. 그해 3월 최종현이 한 달가량 홍콩에 머물며 레이온능직 300만 마(42만6000달러) 수출 건을 성사시켰다. 선경이 처음 수출한 레이온 능직에 대한 홍콩 바이어들의 평판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홍콩 바이어들이 일본 메이커들의 횡포를 견제하기 위해 수입선 다변화를 고려했던 점도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수출대금 42만6000달러 중 인견사 1500고리를 확보하기 위해 15만 달러를 확보하고, 나머지 27만6000달러로 나일론 원사의 구상무역 허가를 신청했다. 구상무역(barter trade)이란 국제 간의 물물교환 무역이다. 당시 나일론 직물은 인기 절정이었다. 그러나 원사수입용 달러화 배정액수가 대폭 줄어 1963년 국내 나일론 직물 생산 실적은 전년도 350만 마의 절반에 불과했다. 나일론 생산업체 간 나일론 원사 수입을 위한 달러 확보 경쟁이 치열했다. 최종현은 수완을 발휘해서 9만 달러를 확보해서 선경은 단번에 8000만원을 벌어들였다. 쌀값으로 환산하면 현재 가치로 약 40억원에 해당한다. 1963년 8월 15일 제18회 광복절 기념식에서 최종건은 수출 증대에 기여한 공로로 건국 이래 최초의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김종필 전 총리 소개로 박정희 대통령과 인연

이 무렵에 최종건은 박정희 정부와 인연을 맺는다. 최종건이 기업 성장에만 몰두한 것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좋은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것이 1961년 9월 박정희 의장의 선경직물 수원공장 방문으로 나타났다. 박 대통령은 민정 이양 이후인 1964년 10월에도 선경직물 수원공장을 다시 찾았다. 선경직물과 최종건 회장에 대한 대통령의 관심은 선경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주었을 뿐 아니라 홍보에도 크게 도움이 됐다. 예컨대 1964년 방문 때 동행한 영부인 육영수 여사에게 선물한 한복 옷감은 소위 ‘청와대 갑사’로 불리며 히트 상품이 됐다.

박정희와 최종건의 만남에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역할이 있었다고 전한다. 한·일회담 막후교섭 차 김종필이 일본으로 떠날 때 환송회를 겸한 만찬장에서 박정희 의장은 이렇게 한탄했다. “기업인들이 거의 다 부정축재자들이니 대체 우리나라 경제를 누가 이끌어가겠나? 기업인들 가운데 가장 양심적인 사람을 꼽자면 누가 있겠나? 우리나라에는 특혜 없이 자생력으로 성장한 기업이 하나도 없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때 김종필이 나섰다. “수원에 선경직물이라고 있는데,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공장을 일으켜 세워 자생력으로 성장한 기업이라고 합니다.” 김종필은 육사 동기인 이병희에게 들은 대로 선경직물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 기업을 일으킨 최종건에 대해서도 아는 대로 설명했다([시사저널], 新 한국의 가벌).

이병희(1926~1997)는 경기도 용인 출신으로 육군사관학교(8기)를 나와 1961년 5·16 군사정변에 참여했다. 5·16 직후 육사 동기생인 김종필이 초대 중앙정보부장이 되자 중앙정보부 서울분실장이 됐다. 대령으로 예편한 후 1980년까지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6~10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부정축재자로 몰려 재산 중 일부를 강제로 헌납당했지만, 박정희 집권 시절 수원을 대표하는 정치인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선경직물과 최종건에 대한 관심은 선경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주었을 뿐 아니라 선경 홍보에도 크게 도움이 됐다. 선경은 수출에 주력해서 1967년 제3회 ‘수출의 날’에는 183만 달러를 수출한 공로로 식산포상을 받았다. 이후부터 사업은 순풍의 돛을 단 듯 빠르게 확대된다.

※ 이한구 -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경제학 석사를, 한양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했다. 수원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강의하며 경상대학장, 금융공학대학원장을 지낸 뒤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국내 기업사 연구의 권위자로 (사)한국경영사학회 부회장을 지냈다. 저서로 ]일제하 한국기업설립운동사]와 [한국재벌형성사], [대한민국기업사], [한국의 기업가정신] 등이 있다.

202309호 (2023.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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