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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모가 들려주는 예술가의 안목과 통찰(18) 초상화가 강형구 

형형한 눈빛에 희로애락을 담다, 내 작품은 ‘허구적 사실주의 

미대생에서 중소기업 회사원으로, 다시 갤러리 대표로, 그리고 마침내 작가로-. 마흔여덟에 첫 개인전을 연 늦깎이 작가 강형구(66) 얘기다. 그가 사람 키만 한 캔버스에 에어브러시로 유명 인사들의 얼굴을 커다랗게 그려냈을 때, 사람들은 무엇보다 그 형형한 눈빛에 압도됐다. 서슬 퍼런 고흐의 초상화는 2007년 홍콩 크리스티에서 추정가보다 여덟 배(약 7억원)나 높게 팔리며 그를 스타덤에 올려놨다. 그는 왜 초상화에 천착하는 것일까.

▎초대형 자화상 앞에 선 강형구 작가. 병원 원장님에게 받았다는 투명 가리개가 코로나19 시대 장수의 투구 같다. / 사진:갤러리비케이
서울 이태원에 이어 한남동에 새 전시장을 오픈한 갤러리비케이는 한남점 개관전으로 강형구 작가의 ‘룩 인투(Look Into)’를 시작했다. 7월 2일부터 9월 18일까지 1부가, 9월 24일부터 12월 31일까지 2부가 이어지는 6개월간의 장기 전시다. 실내로 들어가면 우선 가로 3m, 세로 2m에 달하는 거대한 작가의 자화상과 눈을 마주치게 된다. 대학 때 하고 다니던 헤어스타일이라는, 어깨까지 찰랑거리는 백발에 흰 수염이 덥수룩한 채로 나타난 작가는 산전수전 다 겪어낸 노련한 장수였다.

“난 아티스트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


▎‘ Greta Garbo’(2019), oil on canvas, 186.5×124.5㎝ / 사진:갤러리비케이
작가의 길은 언제부터 생각했나요.

고2 때부터입니다. 원래 육군사관학교를 가려다가 우여곡절 끝에 진로를 바꿨죠.

초상화는 대학 때부터 그렸나요.


▎‘ Monroe Wink’(2016), oil on aluminum, 122×244㎝ / 사진:갤러리비케이
입시를 준비할 때 비너스나 아그리파 같은 석고상을 많이 그리잖아요. 미대에 들어가면 진짜 사람 얼굴을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졸업 후 왜 화가의 길을 포기했나요.

1학년 때 같은 대학(중앙대) 음대 다니던 동갑내기 처자를 만나 연애를 했죠. 사병 시절에 결혼했고, 아기도 생겼어요. 그림만 그려서는 먹여 살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미술계에 대한 환멸도 있었고요.

어떤 건가요.

제도권의 폐습 같은 것이죠. 미대 들어오면 다 화가가 되는 줄 알았는데, 뭔가 차별받는 느낌이랄까. 제가 고분고분한 스타일도 아니어서 학점도 별로였고. 새로운 세계를 찾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서울농약주식회사 기획실에 입사하게 되었죠. 나중에 호림 박물관을 세우신 윤장섭 당시 사장님이 많이 아껴주셨어요.

회사 생활은 어땠나요.

10년간 성실한 직장인이었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내 그림을 그린다’는 욕망은 늘 갖고 있었죠. 이 직장 경험이 굉장한 도움이 됐어요. ‘눌린 용수철’로 살아간 기간이었달까. 용수철이 풀려 있으면 그냥 쇳조각에 불과하잖아요. ‘타락’을 막아준 기간이기도 해요. 제도권에 의존하거나 불필요한 인맥 쌓기에 시간을 낭비하는 나쁜 버릇이 생기지 않았어요. ‘비’를 피하고 있었던 거죠.

갤러리는 또 어떻게 하게 된 건가요.

미술계로 돌아가기 전에 중간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퇴직금 받고 집 팔아서 동숭동에 나우 갤러리라고 문을 열었습니다. 3년 반 운영했는데, 망했죠. 갤러리 운영은 예술 활동이 아니라 냉혹한 경영이라는, 뼈저린 깨달음은 얻었습니다.

어떤 갤러리였나요.

행위예술이나 설치미술 같은 현대미술에 주력했는데, 좀 쉽게 생각했어요. 돈은 벌지 못했지만 그래도 네임 밸류는 좀 쌓았죠.

그렇게 전업 작가를 시작했군요.

저는 화가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자유맨’의 시작이죠. ‘아티스트’라는 말에도 구속감을 느껴요. 전 아티스트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티스트가 되려 했다면 자유인이 아닐 겁니다. 사람들은 화가라는 타이틀을 갖고 싶어 하죠. 마치 명품을 두르듯, 타이틀에 집착합니다. 지금도 저는 화가가 아닙니다. 그저 내 그림의 감상자로서 그릴 뿐.

당시 사모님은 뭐라 하셨나요.

사실 직장 들어갈 때부터 못마땅해했어요. “당신은 예술가 아니냐” 하면서. 피아니스트 대신 1남 1녀 키우느라 삶을 다 보낸 사람입니다. 그런 집사람을 절대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어요.

“손으로 만져지지 않고 머릿속에 남는 작품이 되길”


▎‘ Miles Davis’(2013), oil on canvas, 259×194㎝ / 사진:‘ Miles Davis’(2013), oil on canvas, 259×194㎝
그는 다시 10년간 작업에만 집중했다. 초상화, 그것도 200~300호, 심지어 600호에 이르는 대작 위주였다. 메릴린 먼로, 오드리 헵번, 고흐, 앤디 워홀, 링컨 같은 세계적인 명사들의 얼굴이 그의 손끝에서 색다른 표정을 드러냈다. 2005년 시카고 아트페어에 첫 출품한 600호짜리 레오나르도 다빈치 초상이 4500만원에 팔리며 세계 미술시장에 각인됐다.

왜 셀럽의 얼굴에 집중했나요.

유명인의 얼굴을 그린다고 하면 ‘간판쟁이’라고 하면서 우습게 보는 경우가 많아요. 저는 인물을 그려도 일반인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그리자고 동기부여를 했습니다. 예를 들어 메릴린 먼로는 너무나 알려진 인물이지만 막상 그의 삶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부분을 담아내는 것이죠.

또 왜 이렇게 크게 그리나요.

모두 아는 얼굴에도 미처 알지 못하는 감정이 숨어 있거든요. 숨어 있는 것을 보여주기란 쉽지 않습니다. 지폐를 실물로 보면 거기 얼마나 세밀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지 잘 모르죠. 전 그걸 다 보여주고 싶었어요. 특히 눈을 크게 그리고 싶었죠. 희로애락을 담아서. 제 그림이 커진 이유입니다.


▎‘ Audrey’(2017), oil on canvas, 259×194㎝ / 사진:갤러리비케이
눈에 흰자위가 많이 드러나는 삼백안(三白眼)이 많은데,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한 건가요.

그들의 사진을 보면 삼백안이 없습니다. 제 작품이 허구인 이유죠. 피부색을 전반적으로 어둡게 하면 안구가 돋보입니다. 흰자위를 강조하면 검은자위까지 강조되죠. 그런데 더 중요한 건 눈 주변의 주름을 잘 그려내는 것입니다. 허구를 잘 그려야 더 리얼하게 느껴집니다. 진중권 평론가는 이런 제 작품을 ‘허구적 사실주의’라고 불렀죠.

많은 사람이 극사실화로 생각합니다.

극사실화는 제 그림이 가진 특징의 5분의 1 정도에 불과합니다. 나머지는 허구이자 상상입니다. 먼로는 서른여섯에 죽었지만 저는 팔순의 먼로도 그려냅니다. 허구까지 그리는 게 제 역할이죠.


▎개관전 포스터. 그림은 윈스턴 처칠의 눈. / 사진:갤러리비케이
자화상에도 집중하는 이유는.

내가 나에게 주는 경고지요. ‘타락하지 마라’ 하는. 나를 노려보는 내 눈빛을 보며 저도 긴장합니다. 첫 개인전 때 68세의 내 얼굴을 그렸어요. 배경 연도도 2022년이라 적고. 그런데 지금 모습과 신기하게 비슷하더라고요.

본인만의 기법이라면.

저는 지우기 혹은 안 그리기 기법을 씁니다. 그림을 계속 칠하지 않고 외려 닦아내는, 기존과는 반대죠. 예를 들어 고흐의 담배 연기 같은 것은 그리지 않고 비워서 연기 느낌을 내는 식입니다. 안 그리면서 그리는 사람이 진짜 화가라고 생각합니다.

에어브러시는 언제부터 사용했나요.

공업용 에어브러시가 처음 나온, 대학 다닐 때부터요. 당시 앞서가는 테크닉이었죠. 지금은 미술용 에어브러시를 쓰는데, 기구가 갈수록 좋아져서 일을 그만두지 못하고 있어요.(웃음) 제 작업의 60%는 에어브러시 기법입니다.

알루미늄 위에도 그리는데.

15년 전에 처음 시작했습니다. 일반적인 미술 재료는 아니죠. 하지만 화방에서 파는 재료만 미술 재료인가요. 알루미늄은 금속의 특이한 부분을 살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안구는 피부와 다른 질감인데, 그런 표현을 쉽게 해주죠.

머리카락도 한 올 한 올 자연스럽습니다.

맨 마지막에 전동 드릴로 알루미늄판을 마구 휘저어서 나온 겁니다. 그런데 눈 감고 작업해요. 하하.

비단에도 그리기 시작했죠.

비단은 잔잔한 무늬가 좋아요. 윤두서 초상도 비단에 그리면 색다른 맛이 나죠.

메릴린 먼로를 제일 많이 그렸나요.

어머니 같은 분이죠. 우리 어머니와 나이도 비슷하고, 무엇보다 날 먹여 살렸으니까. 그런데 신기한 게, 제가 그린 분들이 꿈에 자주 나타나요. 열심히 그리다 보면 그런 행운이 종종 생겨. 한번은 링컨이 나타나 똑같은 질문을 다섯 번 하더라고요.

뭐라고 하던가요.

모르지, 영어로 했으니까. 하하. 내가 못 알아들으니까 사라졌는데, 꿈에서 본 얼굴이 너무 생생해서 바로 일어나 그대로 그렸어요. 열심히 작업한 날은 잠들기 전에 ‘오늘은 또 누가 오실까’ 기대하기도 해요.

하루 작업량은.

그냥 본능대로. 한 10시간 정도는 그리는 것 같아. 그림 그리는 시간은 시험 보는 시간이에요. 정답을 알고 있는 학생이 시험 보는 시간, 즐거운 시간.

2부 전시는 어떻게 달라지나요.

판화도 준비하고 있어요. 보급적 측면에서.

초상화를 의뢰하는 사람도 많겠습니다.

있는데, 99% 거절해요. 젊었을 때, 무명이었을 때는 그렸죠. 그때 내 별명이 ‘팔포’였어. 팔기를 포기했다고. 당시는 파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니까 포기도 없었죠. 그런데 팔리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팔포’가 됐어요. 팔기를 포기해야 그림이 되니까. 주문 회화, 연예인 부탁, 팔린 걸 다시 그려달라는 오더에는 거의 응하지 않아요. 나는 자유인이니까. 내가 나를 흉내 내지 않으니까.

요즘은 어떤 작업을 하나요.

옛날 작업을 하나씩 지우고 있어요. 태우면 존재가 사라지니까, 존재는 있되 그림은 사라지게. 발표된 작품 20점을 덧칠해서 그냥 지웠어. 난 그림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상품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영화처럼 머릿속에 남는 것이죠. 만져지지 않는 부분으로 감동시키는 것, 그걸 하고 싶어요.

※ 정형모는… 정형모 중앙 컬처앤라이프스타일랩 실장은 중앙일보 문화부장을 지내고 중앙SUNDAY에서 문화에디터로서 고품격 문화스타일잡지 S매거진을 10년간 만들었다. 새로운 것, 멋있는 것, 맛있는 것에 두루 관심이 많다. 고려대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했고, 한국과 러시아의 민관학 교류 채널인 ‘한러대화’에서 언론사회분과 간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함께 만든 『이어령의 지의 최전선』이 있다.

202008호 (2020.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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