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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기업에서 배운다 | 하리보(HARIBO) 

세계 최대 곰 젤리 가족기업의 100년 경영 

전 세계 3살 꼬마들도 다 안다는 ‘곰 젤리’는 100년 전 설탕 한 자루와 구리 솥으로 시작했다. 전쟁도 이겨냈다. 창립자부터 3대째 젤리 하나로만 1000여 종을 생산하는 하리보(HARIBO)는 독일 경제의 원동력인 ‘미텔슈탄트(중소·중견기업)’의 모범 사례로 꼽힌다.



세계 최대 젤리 생산업체 하리보(HARIBO)는 ‘장수기업’으로 가는 첫 9부 능선을 넘었다. 1920년 설립해 지난해 100주년을 맞은 이 기업은 전쟁의 고비까지 넘으며 굴곡진 현대사도 이겨냈다. 니콜라이 카르푸조프 하리보 아시아퍼시픽 총괄 대표는 포브스코리아 이메일 인터뷰에서 “하리보 그룹 성장은 ‘천진난만하게 행복한 순간들’이 이어온 100년이라고 표현하고 싶다”며 “설탕 한 자루로 시작했던 리겔 가족이 3대째 고수해온 경영철학이 구심점이 됐다”고 말했다.

하리보는 대표적인 ‘미텔슈탄트(Mittelstand: 중소·중견 기업)’로 꼽힌다. 독일의 미텔슈탄트 기업 연구가인 빈프리트 베버 만하임 응용과학대 교수는 포브스코리아 이메일 인터뷰에서 “하리보 그룹은 가족기업의 모범 사례로 미텔슈탄트의 성공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고 평했다. “미텔슈탄트 기업 중엔 가족기업이 많은데 100년 이상 가업을 이어가고, 후손들도 기업을 최초로 설립한 작은 마을에서 거주합니다. 지역 공동체에 기반을 둔 기업문화로 미텔슈탄트 기업은 전문가적 능력, 장인정신 등을 기반으로 성장했지요.”

현재 하리보는 독일을 비롯한 유럽 10개국에 16개 공장을 두고 있다. 직원 수는 7000명, 2019년 매출은 3조6000억원이다. 젤리 제품만 1000여 종을 생산한다. 전 세계 제과 부문에서 매해 상위 10위에 랭크될 뿐 아니라, 유럽에서 가장 신뢰하는 브랜드 목록에 꾸준히 이름을 올렸다. 2018년 미국 시장 구미 젤리 부문 판매 1위, 한국에서는 2016년 이후 매해 구미 젤리 부문 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미 독일 내에선 ‘하리보 징글벨 송’도 있을 정도로 국민 제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독일 슈퍼마켓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하리보 젤리는 부활절, 핼러윈, 크리스마스 등 특별한 축제 기간에 판매하는 한정판 젤리 덕분에 인기를 더한다. 베버 교수는 “매년 추수감사절 독일 사람들은 밤(chestnut)을 준비하면서 함께 하리보 젤리를 담는다”며 “퍼레이드에서 사탕을 던지는 행사가 있는데 캔디류가 매우 흔함에도 독일 국민은 하리보가 제공하는 최고의 젤리를 기다린다”고 말했다.

첫 곰 젤리를 만든 아버지에 이어 1946년부터 67년간 기업을 이끈 한스 리겔 주니어(1923~2013) 회장은 유럽 최장수 경영인으로 하리보를 세계 최대 젤리 생산업체로 키운 주역이다. 29억 달러(3조3000억원) 자산가였고 독일에서는 32번째 부자였다. 평생 독신이었던 한스가 2013년 세상을 뜬 뒤, 조카 한스 귀도 리겔 CEO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공동 경영자였던 동생 폴 리겔의 아들이다.


리겔 회장을 만나본 빈프리트 베버 교수는 “20세기 성공한 가족 경영인 중 하나”라며 “열정과 유머가 가득한 사람”이라고 회상했다. “90년 평생 젤리 신사로 살아온 그는 ’아이들이 어떤 과자를 원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들의 언어는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며 어린이, 청소년들과 꾸준히 접촉하려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리겔 회장은 나이가 들어서도 하리보 젤리의 젤라틴이 자신을 민첩하게 유지해준다고 말해 좌중을 웃기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하리보의 고향은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본(Bonn)에 있는 한 주택이다. 1920년 27세였던 아버지 한스 리겔 시니어(1893~1945)는 근교 농촌에 집을 구했다. 과거 제과 공장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설탕 한 자루와 구리 솥을 준비해 뒷마당 작은 세탁실에서 캔디를 만들었다. 회사 이름은 ‘Hans Riegel’과 ‘Bonn’의 앞 글자를 두 개씩 따 ‘하리보’라고 지었다. 처음에는 딱딱한 사탕을 만들었다가 식감이 말랑한 과일 젤리가 좋은 반응을 얻자 바로 사업 아이템을 바꿨다. 베버 교수는 “사업이 성공하려면 남들이 잘 하지 않는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전략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하리보의 시그니처인 ‘춤추는 곰 젤리’는 사업 시작 2년 만인 1922년 출시했다. 지금 나오는 곰 젤리 모양보다 조금 길고 날씬하다. 사업 초기엔 순항했다. ‘춤추는 곰 젤리’를 비롯해 ‘리코리쉬 휠’ 등을 선보이며 1930년대까지 성장했다. 직원 수는 400명까지 늘어났다. “이때 하리보가 사용한 ‘하리보는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줍니다!(HARIBO makes children happy!)’란 광고 문구를 지금까지 사용하면서 하리보 DNA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니콜라이 카르푸조프 대표가 말했다.

전쟁을 이겨낸 가족의 집념


▎1946년 전쟁포로에서 돌아와 경영 전면에 나선 한스(오른쪽)와 폴 리겔 형제.
대부분 독일 장수기업 역사에 세계대전은 빠질 수 없는 사건이다. 하리보에도 전쟁의 상흔이 짙다. 성장 가도를 달리던 하리보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직격탄을 맞았다. 직원들은 줄줄이 전쟁터로 끌려갔고 주 재료인 설탕 조달도 어려워졌다. 1945년 초 아버지 리겔은 52세로 사망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맏아들 한스 리겔 주니어와 동생 파울 리겔이 러시아의 전쟁포로로 잡혀갔다. 하리보에 남은 직원은 30여 명에 불과했다.

니콜라이 카르푸조프 대표는 “가족기업의 장점은 여기서 빛을 발했다”고 말했다. 그는 창업주 아내인 게르트루트 리겔의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 하리보의 첫 직원은 아내 게르트루트 리겔 부인이다. 1923년 자동차에 ‘하리보 간판’을 달고 운반하며 회사를 알리기 전까지 게르트루트 부인은 매일 자전거로 직접 배달할 만큼 열정적으로 회사를 도왔다. “남편이 사망하고 아들들이 전쟁포로로 잡혀간 상황에서도 하리보 사업을 일으켜 보겠다는 의지가 대단했다고 합니다. 게르트루트 부인은 전쟁 중에도 매달 집요하게 영국 군 기관에 하리보 생산 허용을 요청했고 마침내 제한적으로나마 영업을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집념과 전략적인 방침이 사업의 공백을 메웠죠.”

종전 후 전쟁포로였던 두 아들의 귀환은 하리보의 화려한 서막을 알렸다. 1946년이었다. 리겔 형제는 어머니가 힘겹게 붙들고 있던 가업을 일으켰다. 회사 경영 전면에 나서 주변 제과 회사를 과감히 인수해 몸집을 불렸다. 당시 24세였던 한스 리겔 주니어는 마케팅과 판매를, 21세였던 동생 폴은 생산관리를 하며 경영 업무를 나눴다.

형제가 사업에 뛰어든 지 5년 만인 1950년, 하리보는 1000명으로 사세를 확장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형제는 각각 절반씩 지분을 나눠 가졌다.

팔을 뻗고 앉아 있는 듯한 디자인의 ‘곰 모양 젤리’는 전 세계 히트 상품이다. 1967년 리겔 회장은 아이들이 보는 잡지와 만화책, 서커스에 나온 곰 등을 보고 착안한 곰 모양 젤리 구미 베어를 생산했다. 형제는 1922년에 아버지가 만든 ‘춤추는 곰’보다 통통하고 작게 만들었다. 하리보를 상징하는 ‘골드베렌(Goldbären)’ 시리즈는 구미 젤리의 표본이 됐다. 마치 창문을 통해 선물가게를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으로 포장지 일부도 투명하게 보이게 했다. 지금도 골드베렌는 하리보 제품 라인에서 매출 1위로, 매일 1억6000개가 생산된다. 한국에는 ‘꼬마곰’이란 이름으로 출시됐다.


▎1920년 창업주 한스 리겔 시니어가 처음 젤리를 만들기 시작한 집 뒷마당 세탁실.
미텔슈탄트 기업의 또 다른 조건은 ‘글로벌 전략’이다. 베버 교수는 “과거에도 유럽에는 독일, 벨기에, 영국, 스위스의 많은 사탕 제조업 챔피언들이 있었는데 하리보 창립자는 처음부터 세계시장을 목표로 했다”며, “이미 1933년에 덴마크 자회사를 설립해 다음 세대부터 미국과 아시아 등에서 확장했다”고 말했다.

하리보의 ‘한 우물 파기’는 잘 알려져 있다. 구미 젤리 외 다른 분야 사업은 하지 않는다. 사탕이나 초콜릿도 생산하지 않는다. 사업 다각화 계획을 묻자 카르푸조프 대표는 “우리는 구미 젤리에 집중해왔고, 지속적으로 젤리를 중심으로 다른 카테고리를 확장해갈 것이다”라며 “최고 품질을 유지하는 한 우리가 실현할 수 없는 트렌드를 무리해서 좇을 생각은 없다”고 일축했다.

사실 4년 전 얻은 교훈이기도 하다. 하리보 그룹의 매출은 견고하고 기복이 적은 편인데, 2017년 독일 내 하리보 매출이 일시적으로 감소했다. 당시 골드베렌보다 신제품 ‘저당 젤리’ 생산에 주력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하리보는 재빨리 사업을 추스려 본연의 주력 제품에 집중했고 다시 제자리에 올라섰다.


▎2018년 독일 서부 그라프샤프트에 확장 이전한 하리보 본사와 공장.
대신 국가별로 현지화한 레시피로 카테고리를 넓혔다. 오리지널 구미 젤리의 식감은 일반 젤리보다 질긴데, 맛도 너무 자극적이지 않은 게 특징이다. 매해 종류를 다양화한 신제품 50개를 내놓으면서 크기별로 녹말만 넣거나, 왁스 코팅, 과즙 첨가 등 맛에 차이를 두었다.

하리보는 전 세계 100여 개국에 수출하며 나라별 현지 입맛에 맞췄다. 프랑스에서는 마시멜로가 붙은 젤리 ‘차말로우스(Chamallows)’, ‘타가다(Tagada)’를 만들었고, 영국에서는 형형색색의 과일 젤리인 ‘스타믹스(Starmix)’를 개발했다. 현지 1위 제품이다. 북유럽에서는 감초맛 젤리에 주력했다. 카르푸조프 대표는 “최근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을 겨냥해 출시한 포도맛 젤리 ‘해피 그레이프(Happy Grapes)’는 이미 굉장히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슬람, 유대인들을 배려한 할랄, 코셔 젤리뿐 아니라 저당, 채식, 비건 젤리 등 대체식품도 생산했다. 카르푸조프 대표는 “하리보는 전 세계에서 곰, 개구리, 복숭아, 딸기, 하트 모양 등 1000개가 넘는 맛과 모양으로 출시한다”며 “새로운 레시피를 개발하기 위해 각 국가 지사를 통해 시장을 철저하게 분석한다”고 언급했다.

전통을 유지하면서 생산 라인에서는 혁신 기술을 접목했다. 2018년에 독일 서부 그라프샤프트에 4645㎡ 규모의 본사와 공장을 마련해 확장 이전했다. 축구장 38개를 합친 크기로 연간 젤리 7만5000톤을 생산할 수 있다. 해외 공장도 설립해 현지 시장에 파고들 계획이다. 하리보는 미국 진출 30년 만에 위스콘신에 현지 첫 공장을 세우고 있다. 하리보로서는 유럽 외에 해외 현지 공장을 세우는 첫 번째 사례다.


▎1930년대 생산됐던 구미 젤리.
베버 교수는 “하리보 성장의 핵심 비결은 사람 중심의 기업문화”라며 “기업의 목표 뒤에는 목표를 향한 협업 과정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 배경으로 독일식 이원화 교육인 ‘아우스빌둥’을 언급했다. 하리보는 학생 때부터 실습을 거치는 아우스빌둥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1953년 당시 400여 개 직종을 소개하는 아우스빌둥 교육 책자에 다음과 같이 언급됐다. “캔디 메이커 구성원들은 초등학교 교육을 마치고 가족기업에서 3년간 교육을 받는다. 캔디 메이커는 설탕 덩어리를 만들고 단단하고 부드러운 사탕으로 가공한다. 이 사탕 제조업자는 구운 아몬드, 코팅된 알약, 껌 등을 만든다. 이 일은 강한 몸과 예민한 미각과 후각을 필요로 한다.”

빈프리트 베버 만하임 응용과학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리겔 회장은 견습생들과 직원들에게 늘 목표를 공유했고 협업문화를 만들어가는 데 탁월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업의 성공 조건 중 ‘신뢰’와 ‘헌신’은 바로 하리보와 같은 기업에서 비롯된 거죠.”.

니콜라이 카르푸조프 하리보 아시아 퍼시픽 총괄 대표는 3대를 이어온 브랜드 DNA가 경쟁력이라 강조했다. “창립자인 선대를 따라 한스 귀도 리겔 CEO도 늘 산업과 사회의 변화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리보’만의 대응 방식을 찾아가고 있죠. 하리보는 목표를 늘 미래에 두었고 지난 100년이 아니라 앞으로 변화할 100년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 박지현 기자 centerpark@joonang.co.kr

202102호 (2021.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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