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외환위기 전인 1996년 대학을 졸업하고 운 좋게도 국내 정보통신 대기업에 채용됐다. 3개월 연수를 받은 후 동기 5명과 소프트웨어연구소에 발령됐는데, 바로 팀에 배치하지 않고 연구소의 여러 팀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했다. 당시 인기였던 PC통신 기반 서비스 부서, TCPIP 기반 기술 부서, 교환기 관련 기반 기술 부서 등 다양한 분야가 있었다. 그러나 교육이 끝난 후 동기들이 선호하는 부서는 한 곳으로 집중됐다.연구소장과 각자 원하는 부서에 대한 개별 면담을 하게 되었는데, 예상대로 동기들은 모두 PC통신 기반 서비스를 개발하는 A부서를 지원했다. 지원자가 몰리자 연구소장은 다음 날까지 원하는 부서를 1지망에서 3지망까지 정해 오라고 주문했다.다음 날, 연구소장 앞에 동기들이 모였다. 연구소장은 첫 질문으로 내게 “원하는 부서에 발령을 못 받으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 물었다. 나는 주저 없이 “아직 고민해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연구소장은 1지망부터 3지망을 모두 A부서로 적은 내 쪽지를 공개했다. “최소한 자네보다 A부서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없어 보이는군!”사실 오리엔테이션이 있던 그날 저녁, 술자리에서 동기들이 서로 A부서를 가야 하는 이유를 말하는 것을 보며 ‘내가 가장 어렵겠구나’라고 여겼다. 나이도 제일 어리고, 졸업 성적이나 학교에서도 밀리는 듯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와 밤새 뒤척이며 ‘어느 부서를 선택해야 하나’ 걱정에 쉽게 잠들지 못했다.그리고 이튿날 출근하는데 ‘다시 회사를 알아보게 되더라도 A부서가 아니면 안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3지망까지 모두 A부서를 쓴 이유다. 결국 나는 이 간절함 덕분에 A부서에 발령받았다.어찌 보면 얕은 행동이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에 첫발을 딛고 처음으로 받은 상사의 지시를 어기는 것 자체가 쉽지는 않았다. 나를 제외한 동기 몇몇은 결국 제비뽑기로 부서를 결정했고, 나는 동기들 사이에서 ‘독한 놈’으로 낙인 찍혔다.시간이 흘러 1년 후 인터넷의 확산과 함께 해당 팀은 무선통신 자회사로 이동했고, 몇 년 후 나는 국내 최초로 무선인터넷을 국내에 도입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이 경험은 현재 모바일 보안 인증사업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지금까지 중요한 결정과 선택의 순간에서 나의 간절함이 언제나 ‘신의 한 수’로 작용했던 것 같다.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는 2025년에도 ‘그 간절함’으로 다시 한 번 달려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