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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일상 반추’ | ‘방(房)’의 위대함 - 실존과 자아의 물적 토대 

아무 가면도 쓰지 않은 순수한 ‘나’로 돌아가는 공간… 존재의 안쪽에 대한 은유로 빛나는 장소가 사라져간다 

장석주 전업작가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먹는 것, 자는 곳, 입는 것? 우리가 일상에서 가장 흔히 마주치는 사물(事物)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평소 ‘느림과 비움의 삶’을 주창해온 시인 장석주가 우리 곁의 사소한 것들과 가장 진중한 대화를 시작한다.(편집자)
방이 천장과 바닥이 있고 네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이라면, 사람은 방에서 태어나고 방에서 죽는 게 맞다. 방에서 탄생과 죽음 사이의 시간들을 보내고, 많은 일을 겪는다. 예를 들면 방에서 성공, 실패, 슬픔, 애도, 이별, 배신, 불행, 파산 따위를 겪으며 감정을 단련하고 자아를 단단하게 키운다. 방은 자아가 출현하는 무대일 뿐만 아니라, 그 실재와 본질성에 비추어볼 때 방보다 더 주체의 내면과 자아를 표상하는 것은 찾기 힘들다. 한마디로 방은 중요한 실존의 물적 토대이자 자아가 출현하는 무대다. 방을 알고자 하는 것은 삶이 무엇인가를 알려는 철학적 노력의 출발점이다. 방은 보이지 않는 자아를 가시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에 방의 탐구는 곧 자아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는 실로 많은 방이 존재한다. 소주택의 좁은 방들, 아파트의 규격화된 방들, 대저택의 화려한 방들…. 사람은 이런저런 방을 떠돌다가 사라지는 유목민이다. 스무 살 무렵 나는 나만의 방을 참으로 갈망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자 하는 갈망에 사로잡힌 청년에게 혼자 쓸 수 있는 독방은 그 어떤 욕망보다 컸다. 글을 쓰고자 하는 욕망과 독방을 향한 욕망은 하나다. 독방에의 욕망이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독립적인 자아를 가진 사람이라면 시대를 막론하고 자기만의 방을 원했다. “그러한 욕망은 문명과 시간을 관통한다. 잠, 성, 사랑, 병, 생리 현상뿐 아니라 기도하고 명상하고 읽고 쓰고자 하는 영혼의 욕구도 은둔을 부추긴다.”(미셸 세르, 140쪽) 1970년대 중반 우리 가족은 다가구가 모여 사는 벌집 형태의 빈민굴 같은 집에서 살았다. 우리 식구가 기거하는 집은 달랑 방 두 개뿐이었다. 부모님과 형제자매들 넷이 한 방을 쓰고, 남은 방 하나를 내가 차지했다. 그 방은 책상 하나를 들여놓고 나면 겨우 한 사람이 누울 정도도 작은 방이었다.

그 집은 ‘총체적 변신’을 꿈꿀 만한 그런 집은 아니었다. “집은 완벽한 삶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상할 무대를 제공하고, 다양한 도구를 통한 ‘총체적인 변신’을 꿈꾸게 한다.”(빌리 엔·오르바르 뢰프그렌, 271쪽) 하지만 내가 차지한 방은 그저 빈약한 몸 하나를 겨우 눕힐 만큼 좁고 폐쇄된 공간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그 방에서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꿀 만한 획기적인 기획을 세우지 못했다. 나는 무엇을 했던가? 나는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불안에 떨며 탄식을 하고, 더 많은 시간을 불안을 이기기 위해 수많은 책으로 도피하곤 했다. 책을 읽는 것은 내면의 불안을 잠재우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자의식이 강한 청년은 그 작은 방에서 자주 몽상에 빠지며 심심함 속에서 노트 가득 시를 썼다. 다섯 남매의 맏아들이던 청년은 자신이 독방을 쓸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가족의 양보와 희생이 있었기에 독방을 쓸 수 있었던 것인데, 그 시절엔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매우 이기적인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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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호 (2014.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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