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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이모작을 여는 사람들 | 충북 괴산의 ‘여우숲 지킴이’ 김용규 씨 - “숲 속 동식물들의 사는 법 배워요” 

잘나가던 벤처기업 CEO 내려놓고 숲 전문가로 변신… 한 해 수천 명 찾는 숲 생태마을 일궈 ‘희망’ 전도사 역할도 

글 고혜련 월간중앙 기획위원, 제이커뮤니케이션 대표/ 사진 전민규 기자〈jeonmk@joongang.co.kr〉

▎여우숲’의 인간대표 김용규 씨가 숲에서 8년을 함께 살아온 충성스러운 진돗개 ‘산’, ‘바다’와 함께 눈 덮인 오두막 앞에서 겨울 햇살을 즐기고 있다.
숲에 대한 열망과 그리움을 키워내는 이. 정작 숲에는 그가 없었다. 충북 괴산군 칠성면 사오랑 마을 산중턱에 자리한 ‘여우숲’의 ‘인간대표’ 김용규(49) 씨 말이다.

함박눈이 내리던 12월초의 어느 날, 영하 10도를 밑도는 혹한의 날씨, 시간이 정지된 듯 인기척이 없는 산중은 적막했으나 평화로웠다. 막힌 호흡이 어딘가 길을 내며 뚫리는 기분이었다. 햇살마저 얼릴듯한 쨍쨍한 추위에 살갗은 터질 듯했으나 가슴엔 편안함이 자리 잡았다.

얼마 후 눈 쌓인 가파른 숲길 사이로 그가 나타났다. 헝클어진 곱슬머리 외모의 그가 백팩을 메고 나타나자 조용했던 숲이 일제히 수런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 숲 속에 그가 깃들어 지낸 지 8년, 나이 오십을 바라보면서도 아직도 청년 같았다. 숲 속의 시간은 느린가 보다. 아니, 숲의 정기가 몸의 산화작용까지도 막아내는지도 모른다.

그가 자리를 비워 보이지 않아 ‘빈 숲’을 지켜야 했던 두 마리의 진돗개 ‘산’과 ‘바다’의 움직임도 부산해졌다. 그리고 곧이어 숲 속에 아이, 어른들의 도란거리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저 아래 마을어귀부터 들려와 점점 커져갔다. 그에게 숲이 전하는 얘기를 들으러 이 적막하게 얼어붙은 산중으로 또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다. 그는 ‘여우숲’의 명실상부한 주인이다. 그래, 그 숲의 ‘인간대표’인 것이다.

여우숲? 거기에 여우라도 있는 건가. 이곳에서도 여우는 사라진 지 오래다. 다만 그 여우가 다시 나타나길 기다리는 숲이라는 의미에서 그가 지은 이름이다. 그는 8년째 이 숲에 오두막을 짓고 숲에 기대 살면서 나무와 동식물의 이야기를 인간세상에 전하는 메신저 역할을 한다.

숲이 그에게 가져다준 깨달음을 담은 〈숲에게 길을 묻다〉 〈숲에서 온 편지〉라는 제하의 책을 내고 몇년 전부터 숲의 가르침을 웅변해왔다. 그로부터 그에게 ‘숲에게 길을 묻고자 하는’ 이들이 산중으로 줄을 지어 찾아오는 것이다. 그는 전국의 대학, 기업체, 유치원, 시민단체 등에서 거의 매일 강의 요청을 받을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이 삶이 좋습니다. 양복을 벗어 던지고 대신 등산복, 작업복 입고 숲을 누비면서 자연이 인간에게가르치는 이야기를 안내하는 삶이 정말 좋아요. 그것이 진정한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숲에 있을 때 나는 행복하고, 자연의 가르침을 사람들과 나눌 때 ‘아, 내가 정말 숨쉬고 있구나, 살아있구나’ 라고 자각합니다. 삶은 자기 호흡대로 숨쉴 때 정말 행복해집니다.”

숲의 황홀함에 끌려 도시를 떠나다


▎김씨가 괴산군 한 산중턱에 돌로 기초를 놓고 흙벽을 쳐 직접 지은 오두막집. 전기를 끌어오는 데에만 2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오두막 바로 위편에 3년 전에 세운 ‘숲 학교 오래된 미래’의 교장이면서 산마늘 농사를 짓고 있는 농부 그리고 말없는 숲의 가르침을 전하는 숲 생태 전문가이다.

한겨울, 시간이 정지된 듯 사위가 적막한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의 산중턱에 자리한 ‘여우숲’은 괴산군의 ‘산막이 옛길’과 닿아 있다. 서울에서 150㎞가량 떨어진 이 길은 사오랑 마을에서 산골마을인 산막이 마을을 잇는다. 4㎞ 길이로 딱 십릿길이다. 이젠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과 함께 국내 3대 인기 트레킹 코스로 전국에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혹한의 겨울을 제외한 나머지 계절에는 이 아름다운 길을 걸으려는 사람들이 산으로 몰린다. 여우숲은 그런 사람들을 산 중턱에서 말없이 바라다보고 있다. 그 건너편 역시 병풍처럼 굽이굽이 도열한 산자락이 장엄하게 펼쳐져 이 숲에 깊이를 더하고 있다. 이곳에 그가 제2의 삶의 터전을 마련한 것은 2006년이었다.

‘왜 나이 들수록 인간은 허망해지는가? 숲은 여전히 깊어지고 황홀한데….’ 이전부터 숲에 깃들기를 좋아했던 그가 나이 마흔을 앞두고 회사를 떠나기전에 자신에게 던진 물음이었다고 한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당시 국내 유명금융회사와 이동통신회사에서 인사와 경영전략을 담당했다. 외환위기 이후 몸담고 있던 회사는 사업 다각화의 일환으로 영화콘텐트 등을 다루는 벤처회사를 설립했고, 그는 CEO를 맡게 됐다.소위 ‘IMF 시대’의 그늘과 절망이 온 사회를 뒤덮었던 그때 많은 사람은 CEO가 된 그에게 “희망의 길 위에 섰다”며 박수를 보냈다.

“삶의 외양은 그럴싸했어요. 하지만 늘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바쁜 하숙생 아저씨 같은 삶을 살고 있었지요. 불편한 생활을 감수하면서도 내 삶의 길을잃었다는 생각에 괴로웠습니다. 많은 사람이 합류하려 했던 그 시대적 대로 위에서 오히려 길을 잃은 참담한 기분이랄까요? 그때는 삶의 주인이 따로 있는 길을 걸었던 거죠. 나는 길을 잃은 채 방황하고 주주와 거래처, 직원들이 규정하는 사회적인 나만 존재하는 길 말입니다.”

진정 나다운 삶은 무엇일까?

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다. 한동안 숲에 깃들어 살리라고 말이다. 그는 삶의 터전을 산 중턱에 옮기기 전 이곳 사오랑 마을을 수시로 찾아왔다. 때로는 새벽에, 때로는 낮에, 어떤 때는 저녁에, 많을 때는 매주 한 차례씩 내려왔을 정도다.

과연 이 땅이 자신의 삶에 적합한지 숲과 땅에 물었고, 이웃과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결론은 해낼 수 있으리란 막연한 기대감이었다. 숲 속에 올라 앉으니 저 건너 장엄한 산굽이가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함을 안겨줬고, 숲 속의 고요함이 실로 오랜만에 심신을 평온하게 가라앉혔다. 잔잔한 기쁨에 가슴이 설레었다.

결국 그와 같은 뜻을 가진 5명의 지인으로부터 자금을 모아 농토 4천 평, 숲 7만5천 평을 사들였다. 우선은 김씨가 먼저 들어오고 나머지 사람은 서울생활이 정리되는 대로 차근차근 들어오자고 했다.

괴산은 귀농, 귀촌을 꿈꾸는 도시의 예비 농부들에겐 인기지역으로 손꼽힌다. 전국의 한가운데에 위치해 교통이 편리하면서도 아직 개발이 덜돼 청정한 자연이 살아있는 곳이다. 특히 이곳 사오랑 마을은 축사가 거의 없어 환경이 깨끗한데다 주변에 산막이 옛길의 풍광이 빼어나기로 소문나 있다.

“삶의 구비를 따라 흐르다 그동안 잊혀졌던 젊은시절의 꿈을 불러내고 새 삶을 시작했습니다. 내가 항상 좋아했던 것은 학교였고 숲이었거든요. 그 숲에서 자기다운 삶, 더불어 사는 삶을 고민하는 이들을 모아 행복한 삶, 생태적인 삶을 안내해주는 ‘무면허 선생’ 노릇을 하자는 꿈을 꾸었거든요. 자연에 세 들어 ‘황홀하게’ 살아가는 또 다른 삶이죠.”

결심을 굳히고 나서 그는 ‘사단법인 숲연구소’에서 공부하면서 서울생활에 익숙한 아내와 초등학생인 딸아이를 설득했다. 하지만 딸아이는 “왜 아빠는 저렇게 사는지 모르겠다”며 원망할 정도로 귀촌에 반대가 컸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의 집을 판 뒤로도 학교를 다니는 딸아이와 아내는 가까운 증평 읍내에 거주하도록 하고 그 혼자서 이곳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

직접 돌로 기초를 놓고 흙벽을 치고 아궁이를 앉히는 데 온 힘을 다했다. 집으로 전기를 끌어오는 데 걸린 시간도 2년. 오뉴월 뙤약볕에 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맨손으로 돌을 나르고 흙을 퍼 담으니 자고 일어나면 손가락이 펴지지 않을 정도로 옴 몸이 신음소리를 냈다. 그의 분신이 된 고물트럭도 험한 산길을 오르내리다 수시로 주저앉아 그를 힘들게 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듯한 두려움이 엄습하기도 했다.

“새로운 길 위에 서는 것은 두려움의 연속이었죠. 그 두려움이 산처럼 내 앞을 가로막아 힘들 때면 언제나 뒷숲으로 걸어 들어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정말 나답게 살수 있는가?’, ‘이 새로운 길을 끝까지 걸어가면 내가 원하는 곳에 닿을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숲 전문가로 인생 제2막 열어젖히다


▎1 눈이 내린 후 온 산하가 얼어붙은 12월 혹한에도 김씨에게 숲의 가르침을 들으러 ‘여우숲’ 나들이에 나선 청소년들과 교사, 학부모들. 2 한 유치원생 소녀가 김씨의 친구인 진돗개를 쓰다듬고 있다. 평소 용맹하기로 이름난 이 견공이 낯선 이에게 이미 익숙하다는 듯 온순한 표정으로 몸을 내맡기고 있다.
뒷산의 수풀 속을 헤매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바람결 속에서 숲이 전하는 속삭임을 조금씩 알아듣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숲에는 각종 동식물이 남을 해치지 않고 아름답게 공존하면서 나름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숲은 그에게 갖가지 가르침을 쏟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가르침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뭔가 자신의 머리며 몸의 한구석이 하늘을 향해 열리는 기분이들었다. 어느 시점부터는 그 가르침이 글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그 과정을 통해 얻은 것이 <숲에게 길을 묻다> <숲에서 온 편지>다.

숲의 속삭임에 익숙해지자 날마다 저마다 저답게 삶을 시작하고 이어가는 숲 속 생명체들이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숲은 그에게 “너라는 생명에게도 너로써 시작하고 살아갈 힘이 있다”고 매일매일 속삭여주었다.


▎여우숲 초입에 서 있는 안내표지판. 이 숲에는 김씨의 오두막 외에도 지자체와 민간이 힘을 모아 만든 숲 생태 체험관과 탐방로, ‘숲학교 오래된 미래’의 강의장 등이 들어서 있다.
“생명을 보라. 벌과 나비를 만날 수 없다고 그것이 두렵다고 스스로 먼저 시드는 꽃은 한 송이도 없다. 삶은 나라는 생명에게 깃든 자기 완결의 위대한 힘을 믿는 한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생명은 모두 자기로 살아갈 힘을 가졌으므로.” 숲이 그에게 가르쳐준 메시지였다.

“숲은 생명에 주어진 위대한 능력과 그 생명에 부여된 거스를 수 없는 숙명을 이해하고 수용하도록 가르쳐줬어요. 그것을 느끼고 인정하면서 저는 삶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됐습니다.”

그가 쓴 책들은 김씨처럼 ‘자기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많은 이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에게 직접 ‘숲의 은유적 가르침’을 전해 듣고자 하는 곳도 늘어났다. 방송이나 신문에 그의 이야기가 등장하자 ‘여우숲’으로 향하는 사람의 발길이 크게 늘어났다. 산막이 옛길을 걷던 등산객들도 ‘여우숲’의 팻말을 보고 이곳을 기웃거리게 됐다.


▎김씨가 서재로 쓰는 오두막의 다락방. 그가 밤하늘의 별과 바람을 벗삼아 사색도 하고 글도 쓰는 곳이다
조용하던 시골 마을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의 오두막에서 조금 떨어진 산등성이에도 몇 개의 건물이 들어섰다. 그가 주축이 돼 마을주민과 도시민 20여 명이 참여해 머리를 맞대 만든 기획안이 충청북도의 지역균형발전 공모사업에 선정됨에 따라 ‘숲이랑 사오랑 숲 생태체험마을’이 조성된 것이다. 도비 6억원과 군비 2억원, 주민 자부담 등 10억원을 들여 8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숲학교 오래된 미래’와 실내 및 야외 강의장, 숙박시설, 찻집 등이 들어섰다.

‘숲학교 오래된 미래’는 흙벽돌과 흙다짐벽, 나무 등 자연재료를 이용한 생태건축물로 지어졌다. 유치원생부터 대학생까지 이곳에서 체험학습을 하고 일부 기업체는 그의 강의를 들으면서 워크숍도 연다. 이와 함께 숲을 걸을 수 있는 생태탐방로(3485㎡)와 캠핑시설, 생태주차장, 효소와 장류를 담아 보관할 수 있는 발효장독대(990㎡) 등도 갖추게 됐다. 때마침 ‘힐링캠프’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이곳도 더 바빠졌다.

“예전엔 숲의 자원을 이용하는데, 그 다음은 숲이 쏟아내는 피톤치드의 중요성을 발견하곤 숲을 치유의 도구로, 이제는 숲을 이루는 나무와 벌레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가르침에 많은 이가 귀 기울이게 된 거죠.” 하지만 정작 사람들이 원하는 치유의 역량을 제대로 갖춘 힐링 프로그램들이 얼마나 있는가는 또다른 얘기라는 데 그도 동의한다.

이곳 역시 자연 숲 강의에 더해 각종 기획강좌와 체험프로그램이 만들어졌다. 졸참나무관, 층층나무관 등 강의장과 숙박시설이 생기니 자연히 규모가 커져갔다. 화석연료 없이 밥짓기, 새집 만들어주기, 간단한 농사체험, 산나물로 자연밥상 만들기, 나물 구분법, 동네 목수들이 전하는 목공체험과 장 만들기 등의 체험프로그램들이 덩달아 생겨났고 외부강사와 동네 주민들의 참여도 필요하게 됐다는 것.

숲은 살아갈 길 알려준 나의 스승


▎여우숲에서 내려다 본 괴산군 사은리 마을 전경. 여러 개의 산봉우리가 첩첩이 도열해 장엄한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참여하게 되자 자연히 운영체가 필요하게 됐고 다양한 의견 역시 무성했다. 때론 도시적 욕망이 서로 충돌했다. 이를 조화롭게 끌어가는 데는 구성원들의 적지 않은 희생과 노력, 인내와 화합의 기술이 필요했다.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생태체험마을이 보다 발전하기 위한 크고 작은 진통을 겪고 있음을 시인했다.

한때 잠시 맡았던 생태체험마을의 대표직을 내려놓고 그는 자신의 강의에 몰두하고 있다. 이제 ‘숲 강의’를 통해 그는 한 달에 20여 차례 전국 학교, 기업, 시민단체 들을 대상으로 한 단골강사가 됐다. 전국의 강연장을 찾아 강의를 하는 것이 일상의 대부분이 돼버렸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숲을 비우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가 살던 오두막도 이제 생태마을의 관리를 맡은 사람의 숙소로 사용하게 됐다.

그의 주 수입원은 강의와 그가 뒷산에 재배중인 산마늘 농사의 수확으로 이루어져 있다. 3년 지나면 포기가 두 배로 늘어난다는 산마늘 농사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듯했다. 한동안 벌을 키우는 양봉업에도 손을 댔으나 봉충낭아부패병이 전국에 유행병처럼 번져 다른 양봉업자들처럼 애써 여기저기 놓았던 벌통을 다 거둬들이는 안타까움도 겪었다.

그에게 물었다. 인생이모작으로 시작한 지금의 전혀 다른 삶이 만족스러운가? 숲을 자주 떠나 이곳 저곳을 다니며 강의하는데 때로는 피로감과 회의가 들지는 않는가? “이제 살고 싶은 삶을 살아가는 저는 숲에게 빚을 지고 있어요. 살아갈 길을 알려주는 스승으로, 또한 오두막을 짓고 기대어 살 수 있는 터전과 우리들의 책에 쓰이는 종이를 내어주는, 또 언제나 숨쉬게 하고 품어주는 숲에게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그는 여우숲이 보다 많은 사람을 위한 치유의 공간으로 거듭나도록 봄이 되면 두 개의 고정된 기획강좌를 마련할 계획이라고 했다. 인문학자와 생태학자 등을 초빙해 매달 한 차례, 1박2일로 진행해 연중 12회에 걸쳐 진행하는 두 개의 장기교육 프로그램을 구상 중이다. 또 그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숲과 인문학연구소’(가칭)를 열어 평생을 함께 공부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그에게 다시 물었다. 자주, 오래 떨어져 살아야 하는 아내와 딸아이(고교1년)가 원할 수 있는 가족의 ‘바로 지금, 현재’의 삶은 희생해도 되는 것인가? “가끔 지금 내 모습이 아내가 원했던 나의 미래 모습일까 하는 질문을 해봅니다. 하지만 아내와 딸은 대신 답을 해줍니다. 당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라고. 그런 당신이 이제 자랑스럽다고 말입니다.”

그가 덧붙였다. “우리들의 삶은 생존차원에 머무르는 삶, 충만함을 추구하는 삶, 또 숭고함을 지향하는 삶으로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누구나 노력해 숭고한 삶에 이를 수 있다고 봅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위해 살면서도 동시에 그것으로 타자를 일으켜 세울 수 있다면 말입니다. 숲 속의 꽃과 나무가 저다운 꽃, 잎을 피워 자기를 실현하면서도 다시 벌이나 나비, 새 등에게 꽃가루나 꿀을 나누며 숲 공동체를 살찌우듯이 말입니다.”

그는 우리 모두의 삶이 숲 공동체의 구성원들처럼 희망으로 가득 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얀 눈으로 덮여 숨죽인 여우숲의 나무들은 벌써 다가올 새 생명의 봄을 기다리며 새 움을 키우고 있다.

고혜련 - 칼럼니스트. 이화여대에서 국문학을, 미국 뉴저지주립대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했다. 중앙일보 기자, 차장을 거쳐 파이낸셜 뉴스 문화부장과 런던특파원을 지냈다. 저서로 〈신문, 취재와 기사작성〉 〈자연에 산다〉 〈매스커뮤니케이션개론〉 등이 있다. 현재는 홍보 및 콘텐트 기획회사인 제이커뮤니케이션 대표다.

201501호 (2014.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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