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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산책 | 시인 고재종의 전남 담양 - 정철 ‘사미인곡’의 탄생지, 은둔 선비들의 풍류방(風流房) 

죽림에 둘러싸인 담양 일대는 시인묵객들이 노닐던 인문학적 누각과 정자의 산실(産室) 

글 고재종 시인 / 사진 주기중 월간중앙 기자 [clickj@joongang.co.kr]

▎담양은 대나무의 고장이다. 2003년 담양군이 생태공원으로 구성한 대나무 숲 죽녹원에는 매년 10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다.
내가 태어난 곳은 뒤로는 병풍산과 삼인산이 우뚝하고 옆으로는 두 산 사이에서 흘러나온 냇물이 아랫마을을 지나 영산강 지천으로 흘러가는 전남 담양군 수북면 궁산리 163번지다. 마을 뒷산들은 병풍처럼 둘러쳐서 병풍산(屛風山)이요, 아비사람 어미사람 그 품에 아기사람이 안긴 형국이라서 삼인산(三人山)이라 불리지만, 옛 문헌들엔 용구산과 몽성산으로 나온다. 예전에 비가 안 오면 용구산(龍龜山) 정상에 누군가 묘를 써서 그런다며 인근 서너 개 면의 사람들이 온통 삽 들고 괭이 들고 묘 파러 달려갔는데, 사실 용구산은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병풍처럼 빙 둘러친 산자락들이 모두 아기 거북이처럼 그만그만하게 용구산 품을 향해 기어가는 형국이다. 그리고 몽성산(夢聖山)은 이성계가 조선 건국 전에 전국의 유명산에 제를 올리며 무등산까지 왔다가 그 무등산에서도 답을 흔쾌히 얻지 못하고 기도 중 잠에 들었는데, 마침 눈앞에 삼인산 신령이 나타나서 “너는 유명산에만 제를 올리고 삼인산 같은 무명의 산엔 제를 올리지 않느냐?”고 호통치는 바람에 큰 깨달음을 얻고 삼인산에 와 제를 드린 뒤 임금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어 이름 붙여진 산이다.

요새 풍수지리를 연구하는 사람들 중에 병풍산은 하늘(乾)이요 삼인산은 땅(坤)으로, 건곤이 상합(相合)한 그 아래 수북면 궁산리와 내 건너 대방리 일대는 만물시생지지(萬物始生之地)라 하여 호남에서 제일 명당이라고 한다. 물론 제이는 구례 운조루 앞의 금환락지(金環落地), 제삼은 전라북도 태인의 평사낙안(平沙落雁)을 말한다.

‘궁산리’ 대숲에 별빛 쏟아지던 가을밤


▎담양천의 관방제림은 조선시대에 수해를 막기 위해 제방에 나무를 심어 조성된 숲으로 천연기념물 제366호로 지정됐다.
예전엔 우리 마을 한자가 궁산리(弓山里)인데도 수북면에서 제일 궁벽진 산아래 마을이라 해서 곧잘 궁산리(窮山里)로 불리었다. 그런데 그 풍수바람 탓인지 아니면 옆의 대방리나 궁산리가 그린벨트로 지정되지 않아서인지 전원주택 바람이 일어 요즘 자고 나면 매일 외지인의 으리으리한 집이 한 채씩 들어서곤 한다. 하기야 뒤로는 산이 수려하고 앞으로는 저 아래 광주까지 수북·봉산·대전들이 펼쳐져 있고 그 끝에 무등산까지 환히 보일 정도로 전망이 탁 트인 점, 또 광주의 고속버스터미널과 신도심인 상무지구까지 10여 년전 고속국도가 시원하게 뚫려 20∼30분이면 주파가 가능하게 된 점 등을 들면 진즉 개발이 안 된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예의 수북면·봉산면·대전면 등은 담양의 서쪽 3개 면으로 광주에 인접한 곡창지대인데 예로부터 물산이 풍부하여 다른 면들에 뒤지지 않는 세를 과시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 궁벽진 궁산리에서 땅 한 뙈기 없는 9남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순전히 죽세공(竹細工) 일로 목숨을 부지했었다. 그래서 대만 보면 몸서리쳐질 정도였다. 더욱이 우리 집은 남의 대밭 밑에 있어서 겨울날 삭풍에 대숲 쓸리는 소리는 젊은 날 나에게 온갖 스산한 공상을 솎아내게 하였다. 그럼에도 대숲에 별빛이 쏟아지는 맑은 가을밤이나 한겨울밤 폭설이 쏟아지고 난 아침의 고샅길로 휘어진 대숲은 장관이었다. 그 장관을 읊은 시가 ‘직관’이다.

간밤 뒤란에서 뚝 뚜욱 대 부러지는 소리 나더니

오늘 새벽, 큰눈 얹혀 팽팽히 휘어진 참대 참대 참대숲을 본다

그중 한 그루 톡, 건들며 참새 한 마리 치솟자 일순 푸른 대 패앵, 튕겨져오르며 눈 털어낸 뒤

그 우듬지 바르르바르르 떨리는 저 창공의 깊숙한 적막이여

사랑엔, 눈빛 한 번의 부딪힘으로도 만리장성을 쌓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담양은 대개 마을마다 대숲을 뒤꼍에 끼고 형성되어 있다. 예전 담양사람들은 그 대숲을 의지하여 각종 죽공예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래서 대밭 한 마지기는 논 다섯 마지기하고도 바꾸지 않을 정도의 생금밭으로 불렸다. 대로 죽제품을 만들어 오일장마다 내다팔 수 있을 정도로 환금성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특히 죽제품을 많이 만든 지역은 담양읍을 비롯하여 월산면·금성면·용면 등 들이 적고 산이 많은 마을이었는데, 어릴 적 담양 오일장은 새벽같이 각종 바구니며 죽제품들을 이고 지고 와서 판매하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오죽하면 한수 이남의 3대 시장으로 담양의 바구니장이 충남의 강경장과 함께 거론되었겠는가?

1천 년 이상 이어져온 죽취일(竹醉日)


▎1970년대에 담양과 순천을 잇는 국도 변에 메타세콰이어를 심었는데, 이 가로수길이 지금은 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이는 명소가 됐다.
담양사람들은 대나무로 죽제품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대나무를 심고 가꾸는 데도 하나의 문화를 구성했다. 소위 죽취일(竹醉日) 행사가 그것인데, 고려초부터 1천 년 이상 이어져오다 일제에 의해 1923년 강제 폐지된 행사로 음력 5월 13일과 8월 8일에 열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5월 13일에 심은 대는 잘 번식하고, 8월 8일에 심은 대는 잘 산다 하여 마을단위로 또는 문중 단위로 대나무를 심고 이날 죽엽주를 마시며 죽통놀이 등을 했다는 것이다. 담양이 대나무로 유명해진 것은 담양이 대가 자라는 데 좋은 기후와 땅의 조건을 갖고 있어서 대의 질이 타 지역에 비해 월등하게 좋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중요 무형문화재 제35호인 채상장(서한규)을 비롯하여 죽렴장(박성춘), 참빗장(고행주), 낙죽장(조운창, 이형진), 접선장(김대석) 등 담양의 블루오션인 대를 소재로 한 기능장인이 수두룩하여 대나무 문화를 아직까지도 전승하고 있다.

요사이 그 ‘대’ 때문에 소위 관광 ‘대박’을 터뜨리고 있는 곳이 ‘죽녹원’이다. 자치단체에서 2003년 담양읍 향교리 일대의 개인 대밭을 몽땅 사들여 소위 ‘죽녹원’이라는 생태공원을 구성했는데 그 녹색의 생태공원에 해마다 1백만여 명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것이다. 죽녹원을 한두 시간쯤 돌다 나와 촐촐해지면 바로 예전에 대바구니장이 열렸던 천변 둑, 곧 관방제 길에 늘어선 국수거리에 들러 멸치국물에 만 국수나 비빔국수를 한 그릇 먹는다. 거기에다 간장으로 찐 달걀에다 죽향(竹香) 막걸리를 두어 잔 들이켜면 오늘날의 산해진미가 부럽지 않은 것을 금세 깨달을 것이다.

원래 이 국수는 새벽같이 바구니를 이고 지고 오느라 아침식사를 하지 못하고 온 죽세공인 들을 위해 바구니장 주변에 친 천막에서 팔던 것이었다. 하지만 80년대 후반 들어서며 플라스틱의 등장 때문에 바구니 제품 등이 급격하게 사양길에 접어들어 시장이 문을 닫게 되자 국수장수들도 사라졌다. 그런데 과거의 추억을 가진 어떤 한 분이 10여 년 전 바구니장 천변에 국숫집을 열게 되면서 지금은 그곳이 아예 국수거리로 지정되어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게 된 것이다. 대바구니는 사라졌는데 어렸을 때 바구니를 이고 온 어머니를 따라와 먹던 그 국수를 다시 먹게 되었을 때 참으로 만감이 교차하던 때가 불과 몇 년 전인가.

국수거리 오른쪽은 천연기념물 제 366호로 지정된 관방제림이다. 관방제림은 조선 인조 26년(1648)에 담양부사 ‘성이성’이 읍내 마을들의 수해를 막기위해 제방을 쌓았다는 기록이 영조 때 이석희가 편찬한 [추성지]에 나온다. 제방을 쌓고 푸조나무·팽나무·서어나무·느티나무 등을 심었는데, 그렇게 관에서 막은 제방에다 형성한 350년 된 숲이 참으로 찬란하여 전국의 아름다운 숲 1위에 뽑히기도 했다. 푸르른 여름날, 혹은 울긋불긋한 가을날 관방제림 벤치나 평상에 앉아 밀어를 속삭이거나 장기를 두거나 하다 보면 모두가 선남선녀가 되거나 신선이 된다는 설이 후기산업사회를 살고 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은 그 숲 그늘에 앉거나 걸어본 사람들만이 안다.


그 관방제림 길을 한 20분 걷다 보면 숲길 끝이 담양에서 순창으로 가는 국도다. 그 국도 양켠에 심어진 메타세콰이아나무 1천여 그루가 초록 성화처럼 늠름하게 서 있다. 1970년대 초반에 군청공무원들과 담양농고 학생들이 같이 조성한 메타세콰이아 길은 선사시대부터 존재해왔다는 그 수종이 너무도 아름다워 영화촬영 등의 장소로 사용되는 바람에 전국 각지에서 관광객이 몰린다. 그런데 한때 그 나무를 베어내고 도로를 확장한다고 해서 전국의 네티즌들이 들고 일어나서 말렸다. 나도 거기에 동참하여 ‘초록 성화의 길’이란 시를 한 편 썼다.

전우치의 금대들보 숨겨진 원율리 강변


▎담양 궁산리에 있는 삼인산(왼쪽)과 병풍산. 삼인산은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전설을 품고 있다.
하늘에 닿을 듯 수려 찬란한 메타세콰이아. 저 나무를 커다란 초록 성화라 해도 괜찮겠다. (…) 초록성화의 길, 저 길이 급기야 불끈! 청청! 하느님에게까지 닿는 길이거늘 나는 이제 고요하여도 되는가. 하면 저 길이 길이거늘 저 길을 잘라내고 웬 길을 내려는가.

다행히 많은 사람의 관심으로 나무는 그대로 둔채 나무길 옆의 부지를 확보하여 새롭게 길을 낸 까닭에 오늘날 메타세콰이아 길은 관광명소로 바뀌게 됐다.

연동사엔 그 유명한 전우치 전설이 남아 있다. [추성지]에 “연동사 스님들이 절 주변에서 자라는 갈근, 두충, 오미자 등의 갖가지 약초와 보리, 쌀을 원료로 술을 빚어 곡차로 마셨다”는 고려 문종 때 참지정사를 지낸 예전 이곳 원율현 출신 이영간의 증언을 적고 있다. 술 맛이 어찌나 좋았던지 “마시면 신선이 된다”고 해서 ‘제세팔선주(濟世八仙酒)’라 불렀다. 이 술은 한때 ‘추성주’라는 이름으로 부활했는데, 지금은 향토주 회사가 만들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그 제세팔선주와 함께 거론된 이가 또한 전우치다. 전우치는 담양 전씨 사람으로 문헌에 의하면 원율현 사람으로 기록돼 있다. 조광조의 실패와 함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벼슬에서 물러나 숨어살다가 일찍이 요절한 선비로 알려져 있다. 전우치가 어릴 때 연동사의 동굴 암자에 들어가 공부하는데, 하루는 절의 스님이 술 곧 제세팔선주를 빚어 놓고 전우치에게 잘 보아달라고 부탁하고 산을 내려갔다. 그런데 스님이 돌아와보니 술은 없어지고 찌꺼기만 남아 있어 스님이 책망하니 전우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가 술을 다시 빚어 주면 진짜 도둑을 잡아내겠다고 하였다. 스님은 반신반의하면서 그의 말대로 다시 술을 빚어 주었다.

전우치가 술을 지키고 있노라니 갑자기 흰 기운이 무지개같이 창문으로 들어와 술 항아리에 잠시 머물더니 술 냄새가 진동하는 것이 아닌가. 흰 기운이 시작되는 곳을 찾으니 앞산 바위굴 속이었다. 그런데 그 굴속에 흰 여우 한 마리가 술에 잔뜩 취하여 자고 있었다. 전우치는 밧줄로 여우의 다리를 묶어 등에 메고 와 암자의 들보에 매달아 놓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글을 읽고 있었다. 한참 있으니 여우가 술에서 깨어나 사람의 말로 “나를 놓아주면 그 은혜를 꼭 후히 갚겠습니다”며 애원하는 것이었다. 전우치가 “도망가려는 수작 마라. 네가 무엇으로 은혜를 갚겠느냐? 차라리 죽여버리는 것이 속 시원하겠다”고 하니, 여우가 “저에게 환술을 부릴 수 있는 비결 책이 있는데 굴속에 감추어 두었으니 그것을 드리겠습니다. 나를 줄로 묶은 채 굴 속으로 들여보내면 그 책을 찾아오겠습니다. 만약 굴속에서 나오지 않으면 줄을 잡아 당겨 그때 죽여도 늦지 않겠지요”라고 더욱 애원했다. 전우치가 그것도 괜찮겠다고 여기고 여우의 말대로 하였더니 과연 여우가 책을 가져다주었다.

약속대로 여우를 풀어주고 책을 살펴보니 도술에 관한 비결서였다.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 경면주사로 점을 찍어가며 수십 가지를 보았는데 어느 날 전우치의 본댁 노비가 머리를 풀고 통곡하며 찾아와 그의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전우치가 놀라 책을 방바닥에 버려둔 채 문 밖으로 뛰어나가 보니 갑자기 노비가 온데간데 없었다. 그제야 여우에게 속은 것을 알고 방으로 들어가 보니 여우가 이미 주사로 점을 찍은 부분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조리 베어 가버린 후였다. 전우치가 절름발이 도통으로 끝난 이유가 이 때문이라 한다. 도술을 익힌 전우치는 명나라 황제궁의 금 대들보를 훔쳐가지고 제비로 변하여 담양을 향해 날아 왔다. 이를 알아챈 중국의 도인이 매가 되어 뒤따라 오는 것을 보고 전우치는 금 대들보를 현재 금성면 원율리 강변에 숨기고, 자기는 원율리 앞 오평리의 진주샘에 숨어 겨우 도망쳤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4대강사업으로 파헤쳐진 ‘물구십리들’


▎송순의 ‘면암정가’에 등장하는 면암정. 이곳에 오르면 담양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제 담양댐이다. 이 댐은 담양의 용면·금성면·월산면·수북면·대전면 등을 가로질러 장성댐까지 이어진다. 당시 용면의 여러 개 마을이 수몰되면서 생긴 댐이었으나 담양의 논들 절반 정도가 이 댐에 의해 수리안전답으로 바뀌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데 담양댐은 개설 이래 지금까지 만수위가 3번도 안 되고, 항상 물이 70%도 못 차 있는데 지난 정권의 4대강사업의 일환으로 둑 높이기 사업을 벌이고 있다. 이는 고서면 쪽의 광주댐도 마찬가지다. 아니 그보다도 월산면의 ‘물구십리들’은 물이 좋아 그야말로 수십 만평의 곡창지대인데, 여기 전부를 파헤쳐서 ‘홍수조절지’란 큰 웅덩이를 만들어 놓은 걸 보면 입이 딱 벌어질 수밖에 없다. 홍수조절지란 홍수 때 물을 담아놨다가 가물 때 물을 내보내는 저수지로, 여기 대대로 살아온 경주 이씨들에 의하면 지금까지 물구십리들만 아니라 그 지역 전체가 홍수가 난 적은 한 번도 없고, 또 담양댐이 있어서 물 부족으로 농사 못 지은 적은 아예 없는데도, 굳이 곡창지대를 파헤쳐서 저토록 수십만 평의 웅덩이를 파놓는 이유가 뭐냐고 항변한다. 지금 그 큰 웅덩이 밑바닥엔 세숫대야 물 만큼이나 물이 고여 있어 온통 썩은 내를 풍기고 있다.

이것이 4대강사업의 본 모습이다. 용흥사는 담양에서 백양사 쪽으로 8㎞쯤 가다 보면 월산면 바심재 너머에 있는데 백제 침류왕 1년(384)에 인도승 마라난타 존자가 초암을 지은 뒤 5차에 걸쳐 중창과 복원을 거듭한 천년 고찰이다. 이 절에는 보물 제1155호인 ‘담양 용흥사 동종’이 있다. 또 조선조 영조의 생모인 최숙빈이 이 절에서 기도하고 영조를 낳았다 해서 원래 이름이 몽성사였던 것이 임금과 나라를 위한다는 용흥사로 바뀌었다는 전설이 있다.

최숙빈은 원래 담양 대전면 사성마을에서 태어나 어미아비가 괴질로 죽었으나 돈이 없어 장사를 치르지 못하고 길가에서 울고 있는데, 마침 나주목사로 가던 관리가 이를 딱하게 여겨 데려가 용흥사에서 며칠 묵다가 나주로 갔던 바, 그가 다시 한양으로 올라가게 되어 최숙빈도 따라갔는데 그 관리가 딸 대신 최숙빈을 궁녀로 넣은 바람에 숙종의 후궁이 되었다는 설을 이곳 담양에서는 역사적 사실처럼 여기고 있다.

근세 이전에 있어 현재의 담양군을 이루는 지역은 크게 보아 담양과 창평, 두 개의 행정단위로 나뉘어 존속해왔었음을 알 수 있다. 담양의 남쪽에 있었던 창평은 통폐합되기 전만 해도 17개 면이 딸렸는데, 담양사람이 좀 고집스럽고 보수적이라면 창평 사람들은 진취적인 성품을 갖고 있다는 말처럼 창평에서는 수많은 인물이 배출됐다. 담양을 흔히 ‘정자문학의 1번지요 가사문학의 산실이다’고 말하는데, 이런 타이틀은 사실 창평군에 소속된 지역을 말한다. 내가 태어난 수북면도 조선시대엔 창평군과 광주군에 소속된 지역이었음을 감안하면 사실 담양 속의 핵심은 창평이었던 것이다. 현재 담양군의 남쪽에 해당하는 창평지역은 많은 정자를 중심으로 호남의 선비들과 문학이 만화방창했던 곳이다. 그래서 나는 담양산책은 항상 누정탐방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면앙정, 송강정, 식영정 등의 누정과 소쇄원, 명옥원, 독수정 등의 원림을 둘러보아야 하는 일은 담양 여행의 처음이자 끝이라는 것이다. 그중 먼저 담양 태생으로 조선조 중기의 큰 인물인 송순의 면앙정에 오른다. 창평지역은 아니지만 창평지역 옆에 바짝 붙어 있는 봉산면 제월리 산정산에 있는 면앙정은 오르자마자 사방으로 넓게 트인 시야로 인해 가슴 가득 호연지기가 인다. 지금은 각종 개발로 인해 그 풍경이 절반도 남아 있지 않다.

담양, 호남 선비들과 문학의 산실


▎슬로시티로 지정된 창평 삼지천 마을. 수백 년 된 고택과 돌담길이 운치가 있다.
이런 시심의 백미는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에서 절정을 이룬다. 정철이 1585년 선조 18년에 당쟁의 와중에서 사헌부와 사간원의 논척을 받아 담양 창평에 물러나 있을 때 고서면 원강리에 송강정을 짓고 3년째 되는 해에 지었다는 ‘사미인곡’은 임과의 인연과 이별, 그리고 변함없는 사랑을 읊고 있는 가사인데, 우리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작자의 능란한 솜씨가 이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 몸 생겨날 제 임을 좇아 생겨나니/ 한평생 연분이며 하늘 모를 일이런가/ 나 하나 젊어 있고 임 하나 날 괴시니/ 이 마음 이 사랑 견줄 데 다시 없다/ 평생에 원하기를 함께 가자 하였더니/ 늙어서 무슨 일로 홀로 두고 그리는고/ (…) 차라리 죽어가서 범나비 되오리라/ 꽃나무 가지마다 간 데 족족 앉았다가/ 향 묻은 날개로 임의 옷에 옮으리라/ 임이야 나인 줄 모르셔도 내 임 좇으려 하노라


▎송강 정철이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지은 송강정 주변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섰다.
‘사미인곡’의 서두와 말미 부분이다. 차라리 죽어서 범나비 되어 “꽃나무 가지마다 간 데 족족 앉았다가/ 향 묻은 날개로 임의 옷에 옮으리라”는 고백은 임에 대한 그 절절한 사랑의 말로 최고의 경지를 구가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이런 뜨거운 연애시가 실은 자기를 총애하고 또 자기를 버린 임금에 대한 끝없는 충절과 고뇌의 소산이라는 데 있다. 물론 조선시대의 사대부라면 마땅히 취해야 했던 임금을 향한 삶의 전형적인 가치를 구현함으로 일찍이 송죽지절(松竹之節: 소나무같이 꿋꿋하고 대나무같이 곧은 절개)의 경지를 획득한 글임엔 분명하지만, 한편으로 보면 임금이 다시 자기를 불러주길 애원하며 극도로 아부하는 글로도 보여 역겹기 그지없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송강정에 올라 발아래 앞과 옆으로 뚫린 고속화 국도의 소음을 한탄하면서도 정철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착잡하다. 정철은 국문학사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면서 당쟁의 와중에서 누구보다도 격렬하게 투쟁의 선봉에 섰던 사람이다. 정치가로서의 그는 당쟁의 와중에서 너무나 첨예하게 한쪽 편에 섰던 관계로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불운한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을묘사화 등 권력 암투의 희생양으로 고통을 받았던 기억 탓인지 그는 평생을 정쟁의 마당에서 날뛰었다. 정철은 속내를 숨기지 못하는 직선적인 성품으로 호오(好惡)가 너무도 분명하여 교류관계도 적이 아니면 친구로 확연히 구분했다고 한다. 정치적 융통성과 포용력이 부족했던 그는 반대파에 대하여 언제나 극렬한 감정적 대응을 하여 상대를 어떻게 하든지 제압하려고만 했다. 그에 대하여 친구인 율곡은 충고하기를 “나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사리에 치우치지 말고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사람을 평가하라”고 하기도 했다고 한다.

과격하고 불같이 급한 그의 성정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 소위 정여립모반사건의 처리 과정이었다. 그는 이 사건이 발생하자 맏아들의 상중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취조관이 되겠다고 자청하여 1천여 명에 이르는 반대파를 제거하는, 소위 기축옥사(己丑獄死)에 앞장을 섰다. 그는 실로 ‘사미인곡’이나 ‘성산별곡’ 같은 아름다운 시를 지은 인물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잔혹하고도 악착같은 일면을 보여준 것이다. 그럼에도 예술가로서 그의 자질과 존재는 너무나 뚜렷하여 이것이 그의 정치적 기복을 무척 덮어 주었다. 그는 풍부한 시적 상상력과 섬세하고도 연연한 감정의 세계를 맛깔스러운 글로써 잘 표현해낸 뛰어난 시인이었다. 현실 세계의 실의와 참담함에 대한 보상적 사고를 작품으로 승화시켰다고도 할 수 있다. 아울러 겉으로는 과격하고 직선적이며 성격이 급한 그였지만 내면으로는 낭만적이고 나약한 면이 있어, 더럽고 아니꼬운 현실에 대한 불만을 술로 해소하려고 했던 탓인지 ‘장진주사(將進酒辭)’란 유명한 시도 남겼다. 술에 대한 그의 자세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 향락주의나 현실도피 경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나 풍류를 즐기는 것은 당시 선비들의 전통적인 멋이었다.

송강정을 지나 소쇄원에 간다. 방금 현실도피 경향이라고 한 바, 소쇄원의 주인인 양산보만큼이나 철저하게 현실을 피하여 산중에 은둔해버린 사람은 조선 선비 중 그 누구도 없을 것이다. 그는 정암 조광조의 제자로 진정한 사표이자 삶의 이정표였던 스승이 기묘사화로 능주에 유배된 뒤 곧바로 사약을 받아버리자 당시 열일곱 살 나이에 받은 충격 때문인지 명리도 파벌도 없는 깊은 골짜기로 들어와 은둔하면서 이곳 남면 지곡리에 소쇄원을 짓고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세상에 들고남이 없었던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어쩌자고 그는 평생 문장 한 줄 남긴 것이 없느냐는 아쉬움이다.

풍류의 절정이 깃든 소쇄원


▎조선시대 대표 적인 정원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소쇄원. 민간 정원 중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은둔은 모든 가면과 위선을 벗기는 일이다. 은둔은 절대로 허위를 참아주지 않는다. 명백한 확언이나 침묵을 제외한 모든 것은 숲의 고요에 의해 조롱받고 심판받는다.” 피터 프랜스의 [삶을 가르치는 은자들]이란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러기에 은둔은 도피도 아니요, 초월도 아니며 삶의 또 다른 열정으로 그것은 침묵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박세채의 ‘처사공 양산보의 묘에 새긴 글’에서 보면 “그는 평생 동안 힘과 마음을 다할 것은 오로지 [대학]과 [중용]뿐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마음을 기울여 외우고 또 외웠다. (…) 선비가 하는 학문이라면 반드시 본말(本末)이 있어야 하는 법인데 이미 근본이 되는 일을 못하게 된 마당에 글을 써서 무엇 하겠는가”라는 부분이 있다. 피나는 학문연마와 치열한 인격수양으로 수기(修己)의 단계를 거쳐도 치인(治人)의 단계로 나갈 마음이 없었던 양산보에게 있어 사실 문장 행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것이다. 차라리 광풍각(光風閣)과 제월당(霽月堂)을 짓고 중국 북송의 주무숙처럼 “가슴에 품은 뜻의 맑음이 마치 비 갠 뒤에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과 같고 맑은 날의 달빛과도 같은” 그런 경지에 살고자 했음에 분명하다. 비록 양산보는 문장 한 줄 남기지 않았지만, 그 소쇄원에 들러 시문을 남긴 사람은 부지기수였으니 송순·임억령·김인후·유희춘·기대승·고경명·김성원·정철·백광훈 등 모두 학문과 시문에 있어 걸출이다.

요사이 창평 삼지천 마을은 슬로시티 지역으로 지정되어 느림과 비움의 문화를 되살려내느라 성심을 다한다. 돌과 흙을 사용한 옛 담장이 S자형으로 자연스럽게 굽어진 마을 안 길을 따라 형성되어 고가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일품이다. 이곳을 느릿느릿 걸으며 문명과 속도에 치우친 마음을 씻어보며 옛 것의 미학을 되돌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거기를 돌아 나오면 창평시장이 있는데, 이곳에서 창평국밥 한 그릇을 먹고 나오는 것도 담양산책의 멋이다. 돼지뼈를 곤 육수에 돼지 내장·머릿고기·간·순대 등을 넣고 파며, 고추며, 새우젓이며, 다대기로 양념하여 만든 창평국밥은 옛 시절의 향수 탓인지 인근 광주사람들이나 멀리서 온 관광객들이 더 좋아하여 국밥집마다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담양의 대표음식으로 떡갈비와 대통밥을 들어도 나는 값도 싸고 맛도 좋은 창평국밥을 일품으로 꼽는다.

고향이란 거기의 삼라만상과 이웃과 피붙이들이 합일을 이뤘을 때의 공간이다. 김광규 시인의 [영산]이란 시를 보면 어릴 때 마을 뒤쪽으로 어마어마하게 크게 높은 신령스러운 산이 있었는데 40년 뒤 고속버스를 타고 가보니 자그마한 구릉으로 변해 있더라는 것이다. 그곳에서 평생을 산 어른에게 영산이 어디 갔느냐고 물어본즉 원래 저 산밖에 없더라는 대답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지금 고향은 예전의 모습, 예전의 사람, 예전의 정이라곤 별로 찾아볼 수 없는 노령화·유령화한 공간으로 변해간다. 거기에 도시자본이 러브호텔이네, 가든이네, 골프장이네 하며 돈벌이 되는 것만 수시로 세우는 형편이니 이를 일러 무엇 하랴! 그래도 지금 나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산다.

- 사진 주기중 월간중앙 기자 [clickj@joongang.co.kr]

201503호 (2015.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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