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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계 화제 | 대학로 마지막 동네서점 ‘동양서림’ - 책으로 맺어진 因緣 세 세대를 잇다 

국사학자 이병도 박사 장녀가 열고 61년 전통 이어져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대물림 운영 최씨 부녀 “100년 된 서점으로 만들 것” 

글 송락규 월간중앙 인턴기자 사진 전민규 기자

▎61년 동안 혜화동로터리를 지키고 있는 동양서림. 1953이라는 숫자에 오랜 역사와 추억이 녹아들어 있다.
하길종 감독의 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에 나오는 혜화동로터리 풍경을 기억하시는지? 주인공 병태가 영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이에 영자는 마침 리포트를 써야 하는데 잘됐다며 병태에게 대신 써달라고 부탁한다. 병태는 흔쾌히 부탁을 받아들이지만 <이방인>을 읽어본 적이 없으니 낭패다. 결국 병태는 성북동행 지하철을 타고 혜화동로터리로 향한다. 그때 찾아간 곳이 바로 ‘동양서림’이다.

40년 세월이 흘러 영화 속 로터리 풍경은 찾아보기는 어렵게 됐다. 한때 대학로 일대에 8개의 서점이 있어 대학생들의 지적 목마름을 해결해주는 샘터 역할을 했다. 그중에 동양서림만이 남아 그 명맥을 유지한다. 다른 서점들이 속수무책으로 문을 닫는 동안에 동양서림은 어떻게 제자리를 지킬 수 있었을까?

그 비결을 확인해보러 12월 4일 영화 속의 ‘로터리서점’을 찾아갔다. 혜화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 혜화동로터리가 나왔다. 혜화우체국 옆 공간에는 중국집 金門, 혜화문방구, 성진약국 등 오래된 가게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 옆으로 빛바랜 간판 하나가 보였다. ‘since 1953 동양서림’이라는 글귀가 눈에 띄었다.

배고픈 예술가 아내의 ‘호구지책’


▎1953년 동양서림의 문을 연 이순경 여사. 이 여사 뒤로 남편인 고 장욱진 화백의 그림들이 보인다.
서점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잡지 및 베스트셀러 코너가 보였다. 나머지 선반엔 주로 중고생들의 ‘참고서’가 꽂혀 있다. 다른 동네서점과 비교해서 특별히 달라보이지 않는다. 서점 분위기는 한가해 보인다. 이따금씩 참고서를 사러 들어오는 중고생들을 제외하고는 손님도 뜸하다. 동양서림의 최소영(46) 사장은 “평소에도 손님은 적은 편”이라며 차분히 말했다. 장사가 잘 안 되는 서점을 굳이 유지해가는 이유가 궁금해 물었더니 그는 “역사죠”라고 힘줘 말했다.

동양서림에는 최씨의 말처럼 예사롭지 않은 역사와 스토리텔링이 담겨 있다. 그 시초는 61년 전. 1953년은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시기였다. 황무지나 다름없던 혜화동로터리에 처음 서점을 연 사람은 이순경(95) 여사였다. 이씨는 한국 사학계를대표하는 고 이병도 박사(1989년 작고)의 맏딸이자 고 장욱진 화백(1990년 작고)의 부인이다. 지금은 동양서림의 경영에서 손을 뗀 그는 장욱진 화백의 미술관이 있는 경기도 용인에 거주한다.

12월 7일 용인시 마북동 장욱진미술문화재단에서 만난 이씨는 94세의 나이가 무색하게 정정한 얼굴이었다. 그는 “화가의 아내로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지난날을 돌이켰다. 먼저 왜 서점을 꾸리게 됐는지 궁금해 물었더니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라는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고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씨의 남편인 장 화백은 이름난 화가였지만 소문난 주당이기도 했단다. 6·25전쟁이 끝난 후 장 화백은 서울대 미대에 교수로 임용됐지만 빛 좋은 개살구였다. 월급의 대부분을 제자들과 술값으로 써버렸고, 급기야 1960년엔 교수 자리마저 물리쳐버렸다. 복잡한 서울살이가 싫다며 아예 경기도 양주와 용인, 충북 수안보 등에 화실을 차리고 묻혀 지냈다. 자유로움을 찾는 장 화백은 작품도 1년에 고작 한두개만 그려냈고, 그마저도 어지간해서는 팔지 않았다. 아이들을 키우고 공부시켜야 하는 이씨로서는 속이 터질 일이었다. 남편 수입으로는 도저히 자녀들(2남 4녀)을 키워낼 재간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씨는 남편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내가 장사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1950년대는 사회통념상 양갓집 아녀자가 장사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대를 이어 학자를 배출한 이씨의 친정에 누가 될 일이라 아무거나 팔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심 끝에 생각해낸 것이 서점이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신문지도 함부로 밟지 못하게 했거든. 동양서림이라는 이름도 아버지께서 직접 지어주셨어. 책 파는 일은 사회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길이라 생각했어요.”

“교과서 공급권 따낸 뒤로 전성기 누려”


▎1954년부터 동양서림과 함께한 2대 사장 최주보(오른쪽) 씨와 2004년 아버지로부터 가업을 물려받아 현재 서점을 운영하는 소영 씨.
처음 서점 문을 열 때부터 가장 큰 도움을 준 건 막내동생 이본녕(79) 씨였다. 서울대 문리대학에 다니던 동생은 아버지의 이름을 팔아 중고서적을 임대받기도 하고 모아둔 용돈으로 신서(新書)를 구입해 오기도 했다. 아무리 서점이라도 살림만 하던 여자에게 장사가 쉽지는 않았나 보다. 이문이 나지 않았다. 보다 못한 동생이 아침저녁 틈날 때마다 서점에 들러 잔소리를 했다. “누님 그렇게 앉아만 있어서 가족들 어떻게 먹여 살리려 해.” 동생이 다그칠 때마다 이씨는 마음을 다잡았다.

당장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시절에 책장사가 잘될 리 없었다. 돈을 벌기는커녕 적자가 늘어나 결국 얼마 안 가 서점 문을 닫아야 했다. 아무래도 골목 구석에 서점을 연 것이 잘못 같았다. 다시 막내동생이 나서서 새로운 서점 자리를 물색해주겠다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마침 혜화동 대로변에 좋은 자리가 났다. 1954년 9월 1일, 혜화동로터리 6평 남짓한 가게에 ‘동양서림’이 문을 열게 된 역사다. 그로부터 꼬박 60년 동안 동양서림은 그 자리에 있었다.

1960년대의 대학로 주변은 고등학교와 대학교가 많아 밤낮으로 학생들이 붐비는 청춘의 거리였다. 서점을 하기에 이만한 곳이 없었다는 얘기다. 지금은 학교들도 대부분 자리를 옮겨가 젊은이들이 줄었지만 그때만 해도 보성중고, 혜화여고 등 5개의 학교가 있었다. 방과후면 서점이 학생들로 가득 찬 이유다. 그렇다고 늘 장사가 잘되는 건 아니었다.

“주로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찾아오는 학생이 많았지. 이따금씩 책을 훔쳐가는 학생도 있었지만 모른 척해줬어요. 개중에는 졸업하고 나서 찾아와선 예전에 책을 훔쳐가 죄송하다고 실토하는 아이들도 있었다니까요. 얼마나 귀여운 아이들이야!”

그 뒤로 동양서림은 인근 학교의 교과서 공급권을 따내면서 엄청난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 1964년 이 여사가 출판사들을 찾아다니며 혜화동의 중·고등학교에서 채택한 교과서 공급권을 따내고 나서부터다.당시 대학로엔 동양서림 외에도 서점이 많아 경쟁이 치열했다. “매년 새 학기가 시작하는 3월에는 교과서를 팔아야 하니까 공급권을 확보해서 전해 10월에 책을 받아야 했거든.” 서울시내의 서점들은 교과서 공급권을 따내는 데 사활을 걸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 여사는 출판사와 인근 학교를 찾아다니며 끈질긴 설득 끝에 공급권을 따냈다. 한 번 물꼬를 터놓으니 그 뒤로는 사업이 한결 쉬웠다. 일이 많을 때는 책을 가득 실은 2.5t 트럭이 서점과 학교를 40번은 오가야 할 정도로 많은 책이 팔렸다. 작업량이 워낙 많아 수금하는 인력이 부족할 정도였다. 그는 “당시가 동양서림 최고 전성기”라고 회고한다. 교과서를 도매로 공급하다 보니 수익이 급증했다. 그때 번 돈으로 이씨는 가게를 넓히고 나중에는 결국 건물을 사들였다. 6평 남짓 서점은 10년 만에 6배 규모로 성장했다.

이씨에게는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동양서림에 평생을 바친 동료 최주보(79) 씨다. 그는 이씨에 이어 2대 서점 대표를 지내기도 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개업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4년 서점을 옮기고 난 뒤로 이씨는 점원을 한명 들이기로 했다. 어느 날 한 학생이 찾아와 “당숙 뻘 되는 사람 중에 처지가 딱한 분이 있다”며 점원으로 한 달만 써달라고 부탁을 했다. 고민 끝에 어디 한 번 모셔오라고 했더니, 짤막한 키에 발걸음이 빠릿빠릿한 소년이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당시 열입곱 살이었던 최주보 씨의 첫인상이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든든한 동료로 지금까지 인연을 맺어온다.

점원 출신 최씨에게 서점 경영 맡겨


▎도서정가제 시행 이후 동양서림의 손님은 늘어나게 될까? 동양서림에서 한 손님이 책을 읽고 있다.
이 여사에게 최씨는 “항상 곧은 사람”이었다. 도매서점에 책을 떼러 가도 사람들이 둘을 모자(母子) 사이로 여길 정도였다.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책을 떼러 오는 점원들은 대개 서점 주인의 흉을 하기 마련인데, 최씨는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게으름 한 번 피우지 않고 책방 일을 제 일처럼 헌신적으로 하는 것을 보고 주변에선 두 사람을 한 식구로 취급한 것이다.

최씨의 기억은 어떨까? 12월 9일 동양서림에서 직접 최씨를 만나보았다. 그는 “여사님은 나한테는 어머니 같은 분이시죠”라며 말문을 열었다.

“전쟁 끝나고 서울에 올라왔는데 먹고 살 방법이 있어야지. 그때 여사님이 저를 거둬줘서 지금의 내가 있는 겁니다.” 최씨는 부모님을 일찍 여의는 바람에 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나중에야 이씨의 도움으로 야간으로 덕수상고를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을 한 후로는 서점 일에 매진하려 했는데 어느 날 이 여사가 다시 최씨를 불렀다. “웬일인가 했더니 여사님 하시는 말씀이 우리 집안이 대대로 학자 집안이니 최군도 대학에 가라, 이러시는 거예요. 일개 점원인 나를 한 가족처럼 대해주신 거지.” 사장님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최씨는 말 그대로 주경야독으로 공부하면서 당당히 대학(성균관대 법학과)에 합격했다. 낮에는 서점에서, 밤에는 학교에서 열정을 쏟은 끝에 1961년 학사모를 썼다.

6월항쟁으로 민주화 바람이 불기 시작한 1987년, 동양서림에도 작지 않은 변화가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여사가 최씨를 부르더니 조용히 말을 꺼냈다. “그동안 수고했네. 앞으로 가게를 맡아주게. 나는 일절 관여하지 않겠네.” 이 여사의 말을 들은 최씨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점원에게 가게를 통째로 넘겨준다는 건 들어본 적도, 꿈꿔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다만, 이 여사가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서점을 계속 유지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때 일을 이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동양서림에 평생을 다 바친 사람인데 아까울 게 뭐 있어요? 내 결정에 가족들도 아무런 불만이 없지. 워낙 열심히 했던 친구니까 다들 잘했다고 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해요.”

이씨에게 동양서림은 가족을 먹여 살린 논밭이고, 젊은 날을 바친 추억이기도 했다. 최씨는 책방을 끝까지 지키겠다고 약속하고 직접 운영을 맡았다.

1987년 4월 1일. 그렇게 최씨는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동양서림의 2대 사장이 됐다. 하지만 그를 부르는 호칭만 달라졌을 뿐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전 7시가 되면 서점 문을 열었고, 오후 10시면 문을 닫았다. 1954년 처음 책방에 들어올 때 부터 그는 줄곧 서점 안에 야전침대를 들여놓고 먹고 잤다. 몸에 밴 습관 덕분에 사장이 된 뒤로도 최씨는 어김없이 제시간에 맞춰 서점 문을 열고 닫았다. 하지만 서점운영이 예전처럼 호황은 아니었다.

최씨가 사장이 될 무렵, 혜화동에 있던 학교들이 강남개발로 하나둘씩 이사를 간 것이다. 한때 학교 10곳에 교과서를 공급했던 동양서림에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다. 그때부터 동양서림은 서서히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다. 그래도 서점사업은 꾸준했다.

하지만 10년 뒤인 1997년에 찾아온 외환위기는 동네서점들에게 큰 시련을 안겼다. 그 뒤로 대형 서점들이 잇따라 생겨나면서 온라인과 오프라인 시장을 빠르게 잠식해갔기 때문이다. 동네서점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말들이 나왔다. 책을 사지 않으니 가뜩이나 어려운 출판시장이 침체의 늪에 빠졌다. 대학로에 있던 서점들은 줄줄이 문을 닫았다. 외환위기 이후로는 서점 매출액이 한 번도 늘어난 적이 없었을 정도다. 그럼에도 최씨는 이 여사와 한 약속 때문에 가게 문을 닫지 않았다.

“동양서림을 물려준 이후로 여사님은 한 번도 임차료를 올리라고 한 적이 없었어요. 이젠 서점을 해서 먹고 살기는 어렵다는 걸 잘 아셨던 거지.” 이 여사의 배려로 최씨는 힘든 시기를 극복했다. 2004년 최씨는 서점을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한 후, 딸 소영 씨에게 서점의 운영을 맡겼다.

60년 넘게 대학로의 터줏대감 노릇을 해온 동양서림에는 많은 이의 추억이 겹겹이 쌓여 있는 듯하다. 지금은 우리 사회를 이끄는 명사의 반열에 오른 이들 중에도 동양서림에서 꿈을 키운 사람이 적지 않다. 김준엽(2011년 작고) 전 고려대 총장과 조석래(80) 효성그룹 회장도 책방을 즐겨 찾았던 단골손님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씨의 회고담이다. “조 회장이 고등학생 때 집이 근처라 우리 서점에 자주 들렀어요. 매일 서서 오랫동안 책을 읽고 가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 그가 대단한 기업을 일군 걸 나중에 신문을 보고 알았어요.”

김수영·윤강로·성춘복 등 시인의 아지트 역할도

기라성 같은 작가들도 서점을 자주 왕래했다. 김수영(1968년 작고) 시인은 술에 취하면 늘 동양서림에 들렀다고 한다. 보성고 교사였던 윤강로(77) 시인은 틈날 때마다 동양서림을 찾아 책을 샀다. 허영자(77)시인은 지금도 동양서림을 방문하는 단골손님이다. 40년 전부터 동양서림을 이용했다는 성춘복(79) 시인은 “이제까지 동양서림을 지킨 세 분의 사장님을 다 봤으니 나는 서점의 역사와 함께한 산증인이다. 한 달에 열 번은 들를 정도로 동양서림에 대한 애정이 깊다”고 말했다. 노(老)시인은 “책방 주인과 손님이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일상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게 동양서림의 매력”이라고 했다.

이런 매력은 일반인들까지 단골로 만들었다. 꼭 유명인사가 아니더라도 동양서림에서만 책을 구입하는 단골이 많다는 이야기다. 대부분 혜화동 ·명륜동 일대에 거주하는 주민들이다. “가게에 책이 없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단골 분들이 전화로 책을 신청하는 경우가 많아요. 어떤 분들은 직접 쪽지에 적어서 가져다주시는 분도 있고요. 그런 단골손님 없었더라면 동양서림은 대번에 없어졌을 거예요.” 소영 씨에게 단골손님은 서점을 계속해서 운영하도록 지탱해주는 원동력이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학생들도 여전히 동양서림을 찾는다. 성북동에 거주하는 김규원(24·대학생) 씨는 “인터넷 서점을 이용하면 더 편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책을 직접 만져보고 고르고 싶어서 일부러 동양서림을 찾는다”고 말했다.

동양서림에서 하루 평균 팔리는 책은 80~90권 정도다. 도서구입비와 인건비, 월세 등의 비용을 제하면 남는 수익은 월 150여 만원 정도다. 동양서림의 매출액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부터 매년 5~7%씩 떨어졌단다. 명절마다 이 여사를 찾아가는 최주보 씨는 고민 끝에 지난겨울 이 여사에게 서점 운영의 어려움을 털어놨다. 이 여사는 “밑져서 장사할 수 있나. 다른 거 하려면 해”라고 흔쾌히 대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최씨는 당분간 업종 전환은 아예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여건이 되는 한 동양서림을 끝까지 지켜볼 생각이다.

“내년에는 서점 구조를 바꿔볼 생각이에요. 동네서점이라는 이미지에 맞게 누구나 와서 편하게 책 구경할 수 있게 하려고요. 우선 손님들이 편하게 앉아 책을 볼 수 있도록 의자를 배치할 생각이에요.” 소영 씨의 새해 계획이다. 도서정가제 시행으로 어려움을 다소 덜 수 있을까 하는 기대도 한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등록된 회원에게만 일정 금액을 적립해 도서를 할인해줬는데 이제는 회원과 비회원을 구분하지 않고 동일하게 할인해주고 있다. 소영 씨는 “도서정가제가 제대로 정착된다면 동네서점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렇다고 걱정이 없는 건 아니다. “요즘 세대는 책보다 스마트폰이 익숙한 세대 잖아요. 버스나 지하철만 타도 다들 스마트폰을 하고 있으니. 예전처럼 책을 보러 서점에 오는 학생이 거의 없어요. 앞으로 한 세대가 지나면 서점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해요.”

이 여사와 최씨, 그의 딸로 이어진 동양서림 식구들의 새해 소망은 한결같다. “동양서림이 우리나라 최초의 100년 서점이 될 수 있도록 잘 지켜내야죠.”이러한 바람이 전해졌을까? 서울시는 2년 전 동양서림을 미래유산으로 선정했다. 책의 숲(書林)에 오랜만에 순풍이 불어온다.

201501호 (2014.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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