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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산책 | 시인 이상국의 강원도 양양 - 산천과 바다의 낭만, 인문적 향기 그윽한 古都 

연어의 일생과 영혼이 담긴 아름다운 강 남대천… 오대산 높고 너른 품에 배어든 불교와 유교 정신세계 풍요로워 

글 이상국 설악신문사 사장. 사진 주기중 월간중앙 기자

▎양양팔경 중 제1경이 남대천이다. 양양 사람들은 남대천을 젖줄 삼아 삶의 역사를 이어나간다.
2012년 동해고속국도가 양양에 와 닿기 전까지 양양을 남북으로 잇는 길은 7번 국도가 유일했다. 동서로는 강릉을 경유하는 영동고속도로가 있긴 하지만 영서와 양양을 바로 연결하는 도로는 구절양장 한계령이 유일했다. 험준한 영을 넘어야만 사람이 서울을 가고 물산이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동홍천에서 양양을 잇는 고속도로 공사가 몇 년째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준공까지는 부지하세월이다. 그리고 요즘의 고속도로라는 게 속도와 기능 위주여서 곧잘 사람 사는 마을을 버리고 저 혼자 달리기 일쑤다.

나는 7번 국도를 사랑한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동해 해변가의 영동 아홉 고을이 남북으로 1천 리나 된다고 했는데, 그 천리 동해안을 끼고 달리는 국도의 구비와 경사에는 산천의 역사와 낭만이 있다.

여말(麗末)의 안축은 강원도 존무사를 지내고 돌아가며 경기체가 형식의 <관동별곡>을 남겼는데 고성의 청간정을 지나 양양 낙산을 향해가는 여정을 이렇게 읊었다.

雪嶽東 洛山西 襄陽風景/ 降仙亭 祥雲亭 南北相望

‘설악 동쪽 낙산 서쪽의 풍경. 강선정과 상운정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는 대강의 풀이가 가능한데 여기에 나오는 강선정이라는 정자가 있는 곳이 강현면 강선리이고 그곳이 내가 출생한 곳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나고 자란 마을의 역사는 어림잡아 800년 이상은 되는 셈이다. 그때 안축도 이를테면 지금의 7번 국도에서 설악산 쪽을 바라보며 말을 몰지 않았을까. 자랑할 게 별로 없는 나는 고향 이야기만 나오면 안축이 친구라도 되는 듯 <관동별곡>을 읊어대며 내가 그렇게 오래된 마을의 기를 받고 태어난 사람이라는 걸 내세우고는 한다.

강현면은 지금은 폐쇄된 옛 속초비행장 부근으로 속초와 양양의 경계지역이다. 교육이나 경제권으로는 속초에 가깝고 행정이나 문화적 연고는 양양에 속하는 곳이기도 하다. 나는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가까운 속초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읍내와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별로 없다. 다만 아버지를 따라 우전(牛廛)에 간다든지 시제나 명절 제사장을 볼 때 양양장에 따라가 맛있는 걸 먹기도 했던 기억이 전부다. 그 후 30대 초반부터 속초와 양양을 중심으로 20여 년 직장 생활을 하기도 하며 아직까지 고향 언저리를 떠나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면 고향이라는 게 멀리서 그리워하며 살아야 아름다운 곳일 수도 있지만 나처럼 나고 자란 산천을 온전히 차지하고 그 품에서 평생을 사는 것도 적잖은 행운일 것이다.

양양팔경 중 제1경이 남대천이고 2경이 설악산 대청봉이다. 크고 높은 걸로 치면 대청봉이겠지만 양양이 남대천을 젖줄삼아 삶의 역사를 이어나간다고 보면 장장 100리에 이르는 강에 1경의 자리를 양보 할 만하다.

양안(兩岸) 사이 넘치는 남대천 물결의 도도함


▎동해로 흘러드는 남대천은 연어의 일생과 영혼이 담긴 아름다운 강이다.
남대천은 그야말로 천(川)이다. 말이 천이지 나는 남대천이 강(江)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는 게 늘 불만이고 아쉽다. 넓은 데는 강폭이 500m도 넘고 홍수나 큰물이 지면 양안(兩岸) 사이를 빽빽하게 흐르는 물결의 도도함이라니! 오대산 자락에서 내려오는 어성전천, 구룡령 골짜기의 후천과 한계령을 넘어오는 오색천이 합수하여 동해로 흘러드는데 이것이 보통강이 아니라 연어의 일생과 영혼이 담긴 아름다운 강이기 때문이다.

남대천은 우리나라 최대의 연어 회귀천이다. 사람에게 모국이 있듯 어떤 물고기는 지구 반 바퀴 거리인 베링해까지 갔다가 기어코 저 난 곳으로 돌아와 일생을 마치는데 그것이 연어이고 그 어머니 강이 남대천이다. 손양면 송현리에 한국수산자원관리공단 양양연어사업소가 있다. 거기서 해마다 600만∼700만 마리 정도의 치어를 방류하는데 그중 돌아오는 건 1% 정도라고 한다. 국내 소상 연어의 70%가 남대천으로 돌아온다. 더러 가족과 함께 연어축제마당에 가서 그 커다란 은빛 물고기를 맨손으로 잡아 올리면 퍼들거리는 생명의 강한 파동이 전율처럼 몸을 때리고는 했다.

오래전에 양양과 원산을 오가던 기차가 있었다. 잊혀진 동해북부선이다. 1937년 원산과 양양 사이가 개통된 후 6·25전쟁 당시 휴전선에서 양양까지의 철로를 걷어내고 지금은 철도부지만 남아있는 전설 같은 기찻길이다. 언젠가 그것이 이어지면 나는 원산을 지나 몇 날 며칠을 먹고 자며 이스탄불이나 바그다드로 갈 것이다. 은하철도 999처럼 꿈의 철도다. 그러나 언젠가 꿈은 이루어질 것이다.

양양역이 있었던 송암리나 청곡리 어디쯤 비석거리가 있었다. 언젠가 비석거리와 여기저기 산재하던 많은 비(碑)는 현산공원 중턱으로 모두 옮겨졌고, 나는 언젠가 역대 관찰사나 부사들을 기린 수많은 영세불망비 중 연암 박지원의 것도 있나 찾았으나 보이지 않아서 아쉬워했던 적이 있다.

민족적 거사에 목숨 바친 양양인의 기개


▎조선의 개국공신 하륜과 조준이 만년을 보낸 ‘하조대’는 바다와 어우러진 기암들이 절경을 이룬다.
연암은 1800년 63세의 나이에 양양부사로 부임한다. 연암이 누구인가! 지금으로 말하면 조선의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거니와 지배 이데올로기의 관철을 위하여 문장 한 줄만 잘못되어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았던 왕조시대에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있게 한 장본인이 아닌가. 그가 부사로 양양땅을 밟은 건 양양으로서는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그것은 내가 글쟁이어서 그러기도 하겠지만 그가 한참 앞서가는 중국을 통해 새로운 세계관에 눈뜬 실학자이자 천재적 소설가인데다가 하룻밤 앉은 자리에서 50여 잔의 술을 마셨다는 풍류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악산 중들과 불화하여 겨우 8개월 만에 부사직을 버리고 갔다니 그것도 연암다운 일이라 생각된다.

그의 아들 박종체가 쓴 <나의 아버지 박지원>을 보면 당시나 지금이나 귀한 목재인 황장목(黃腸木)에 대한 이권 때문에 이속과 토호들이 싸웠고 연암은 이에 엄격했던 것 같다. 황장목은 현북면 어성전 등지에 자생하는 아름다운 소나무다. 고작 8개월 스쳐 지나간 게 무슨 역사랴 싶지만 소설 속의 인물에 불과한 홍길동의 출생지를 가지고 지역 간에 다툼이 일거나 어떤 탤런트가 밥 한 끼만 먹고 가도 식당벽에 광고를 하는 역사와 인물장사, 혹은 문화적 허기에 비하면 양양은 지금보다 연암과 더 가까워져야 할지도 모른다.

남대천을 건너 바로 바닷가 쪽으로 들어서면 한반도 신석기시대의 역사를 8천 년 전으로 끌어올린 오산 선사유적지가 나온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최신식 콘도와 선사시대가 공존하는 곳이다. 수만 평 갈대밭 가운데 선 선사박물관을 돌아 나와 바닷가 옛길을 지나 한참 가면 현북면 하광정리 하조대에 이른다. 얼마 전 높은 시청률 속에 방영된 TV 사극<정도전>에 나오던 조선의 개국공신 하륜(河崙)과 조준(趙浚)이 만년을 보낸 곳으로, 바다와 어우러진 기암들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그들 이름의 첫 글자를 따서 지은 누각 이름이 하조대다. 지금이나 그때나 정권을 일으킨 자들은 국정을 농단하다가 사약을 받거나 감옥에 가기 일쑤인데, 그들이 비록 만년을 청유(淸遊)했다고는 하나, 머나먼 동해까지 온 걸보면 그럴 만한 곡절이 있지 않았을까 하고 짐작해 본다.

인공치하에 살았다는 원죄 아닌 원죄


▎천년고찰인 낙산사에서 바라보는 동해바다는 일품이다.
하조대에서 국도를 따라 2㎞쯤 강릉 쪽으로 나가면 현북면 기사문리에 이르고 거기에 3·1만세공원이 있다. 사대문 밖에서는 가장 치열했다는 양양의 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하여 십수 년 전에 세운 공원이다. 3·1운동 당시 체포되어, 취조하는 일경에게 화로를 던지다가 내려치는 칼을 맞고 순국한 함홍기(咸鴻基) 의사를 비롯해서 당시 양양에서는 11명이 목숨을 잃고 80여 명이 체포됐다. 그 가운데 일개 면지역인 기사문리 만세고개에서만 아홉 명이 목숨을 잃었고 20여 명이 총상을 입었으니 일경의 악랄함과 만세운동의 처참함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함홍기 의사는 당시 22세 였다. 그리고 죽거나 태형을 받은 사람들이 거의 20세 전후였으니 이는 양양사람들의 기개를 드높인 민족적 거사이자 긍지이기도 한 것이다.

만세고개를 내려서 남쪽으로 한참 가면 휴게소가 나오고 거대한 38선 표지석이 있다. 비극의 38선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동서 냉전시대의 최전선이었던 38선이 여기서부터 한반도를 반으로 가르며 서해에가 닿는 것이다. 그러나 탁 트인 바다에는 아무 금도 보이지 않는다. 언젠가 읽은 소설가 이호철 선생의 인생역정을 보면 6·25 당시 열여섯 살 인민군 소년병으로 참전한 그가 패주하는 부대를 이탈해 산속을 헤매다가 이 근처에서 남한의 농부 옷을 얻어 입고 산을 내려왔다고 한다. 그러다가 국군에게 붙들려 다시 국군 소년병이 되었다는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였다.

일본이 패망해서 도망가고 난 뒤/ 양양은 북한 땅 이었다가/ 육이오전쟁으로 남한 땅이 되었다/ 그래서 수복지구라고 불렀다/ 동해 기사문리(其士門里)에서 먼 서해까지/ 삼팔선은 은하수처럼 지나갔는데/ 그 선에 걸려 넘어진 사람은 골병이 들었거나/ 죽었다/ 양양에 가을이 오면/ 먼 바다 연어들은 있는 힘을 다해 돌아오고/ 이슬만 받아먹던 송이들도 산을 내려오는 건/ 여기 사람들을 위로하려고 그런다는 걸/ 어느 날 한계령을 넘다가/ 자작나무들이 저희끼리 이야기하는 걸 나는 들었다(졸시 ‘한계령 자작나무들이 하는 말’ 전문)

양양을 일러 수복지구라고 한다. 해방과 함께 38선이 그어지면서 북한지역이 되었던 양양은 그로부터 전쟁이 발발하기까지 5년간 인공치하였다. 수복은 되찾았다는 의미다. 식민지배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겪고 전쟁이 끝나면서 대한민국에 편입된 셈이다. 시퍼런 연좌제 아래 두 개의 정부를 국가로 삼았던 수복지구 사람들이 음으로 양으로 감내해야 했던 고통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것이었다. 가난한 농촌 수재들이 가고자 했던 사관학교는 엄두도 못 냈을 뿐만 아니라 좋은 대학에 합격하고도 신원조회의 덫에 걸려 발길을 돌려야 했다. 공직에서 좌절을 겪어야 했던 인재들에게도 인공치하에서 살았다는 것은 원죄 아닌 원죄이기도 했던 것이다.

누구보다도 양양을 사랑하는 양양출신의 소설가 이경자 씨가 수복지구 사람들의 애환을 엮은 작품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니는 시방 내가 하는 말 잘 듣구 나서 날래 까져 먹어야 해. 알아 듣겠너?”

도문집이 고요하게 말했다. 목소리가 비장하다 못해 칼날 같았다. 난생처음 듣는 어미의 목소리에 석은 소름이 끼쳤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알지도 못하면서 속 깊은 데로부터 싸늘한 공포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석은 손가락마디를 뚝뚝 꺾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고 말해도 알지 못할 것 같은 기이한 공포감. 그리고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니 외삼춘이 넘어왔다.”

“…………”

“그러니 니는 가라. 내 말은 듣지두 못한 거여. 이제 알겠너?”

석은 떨리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하늘을 쳐다봤다. 무의식은 신비로웠다. 그는 공포감이 그에게 기별한 게 무엇인지 비로소 이해 했다.

“아버지는유?” 석이 천천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외삼춘이 왔어. 용립이 외삼춘.”

“혼자서유?” (이경자 소설집 <건너편 섬> 중 ‘박제된 슬픔’의 일부)


전쟁이 멎고 휴전선이 굳어가자 많은 사람들이 북으로 갔다. 소설 속 석의 아버지도 외삼촌도 북으로 갔다. 그런데 어느 날 외삼촌이 남파간첩이 되어 나타나자 겁에 질린 어머니가 자식과의 연루를 차단하기 위하여 서울로 도피시키는 내용이다. 나는 얼마 전 이경자 씨와 소설의 주인공 석이로 나오는 사람과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백발이 내려앉은 그도 젊어 좋은 대학에 합격했으나 끝내 다니지 못했다고 했다.

우리 작은아버지 중 한 분은 우차꾼이었다. 닷새장이 서는 물치 장거리에서 장짐을 모아 새벽같이 양양장에 실어다 주고 삯을 받았다. 전쟁이 나던 해 봄, 인민군에 동원되어 며칠씩 야음을 틈타 38선 기사문리까지 짐을 날라줬다고 한다. 그리고는 일제가 버리고 간 ‘찌까다비(작업화)’ 등을 품삯으로 받아 왔는데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 일은 위장한 포신(砲身)이며 전쟁물자를 38선 근처에 미리 운반해놓는 일이었다고 했다.

14세 일연(一然) 스님이 출가했던 진전사


▎진전사에는 양양의 유일한 국보인 3층석탑이 있다.
중학교 시절이었다. 어느 해 여름 뒤란 밤나무에 덕을 메놓고 감자와 ‘아이스케키’를 바꿔 먹으며 뒹굴고 있었는데 별안간 귀를 찢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개울 건너 비행장으로 달려가는 게 보였다. 나도 덩달아 뛰었다. 어느새 사람들이 하얗게 모여들고 순경이 총을 들고 보초를 서고 있었다. 한참 후에 안 일이지만 그게 당시 소련제 최신 전투기인 미그15기이고 정낙현이라는 북한군 소위가 몰고 귀순해 왔다는 거였다. 가까이 가보니까 덩치도 크지 않고 장난감처럼 날렵하게 생긴 하얀 비행기였다.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다.

나아가 벼슬하면 대부(大夫)이고 강호 산수에 엎드려 있으면 사림(士林)으로 행세하는 게 조선의 사대부 문화다. 그러나 유배와 은둔, 낙향의 영동지방은 대체적으로 선비문화가 부재했던 곳이다.

<택리지>에서 그랬듯 양양도 동서가 100리도 못되는 땅이다. 그것도 경사가 심하여 비는 시루처럼 빠져나가고 변변한 산물이 없다. 그러나 설악산과 멀리는 오대산 그 높고 너른 품에 배어든 인문적 향기와 불교문화의 자취는 양양의 정신세계를 한결 풍요롭게 하기도 한다.

옛 속초비행장을 끼고 설악산 쪽으로 한참 올라가면 강현면 둔전리 진전사(陳田寺)에 닿는다. 진전사는 당나라에서 선종을 공부한 도의선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당시 교종 위주인 신라에서 새로운 선풍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곳에서 40여 년 선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진전사는 오늘날 조계종단의 할아버지 격인 종찰의 사격을 가지기도 한다. 더 의미 있는 것은 저먼 경상도 경산에서 태어난 일연(一然) 스님이 14세에 이곳에서 축발염의(祝髮染衣: 머리를 깎고 옷을 물들여 불가에 입문함)하고 출가했다 하니 진전사의 불교사적 의미는 더욱 심장한 것이다. 진전사에는 양양의 유일한 국보인 3층석탑이 있다.

거기서부터 20여㎞ 남서쪽으로 들어가면 서면 황이리, 하늘이 멍석 한닢깔이 만한 미천골 깊은 골짜기에 선림원지(禪林院址)가 있다. 폐사된 지 오래되어 내력이 모호하나 창건 연대에 비추어보면 진전사 스님들이 수행하던 선원이 아니었을까 짐작케 하는 곳이다.

낙산사 부처님이 고마운 이유


▎옛날에는 구절양장 험준한 한계령을 넘어야만 서울을 가고 물산이 이동할 수 있었다.
진전사가 있는 둔전골 골짜기는 내가 어린 시절 형님들 따라 나무하러 다니며 소 먹이며 미역 감고 송이나 싸리버섯을 따기도 하던 곳이다. 지금도 나는 해마다 한두 번은 그곳에 간다. 특히 멀리 사는 벗이나 글쟁이들이 오면 자랑삼아 가기도 하고, 더러는 벗들과 미천골 자연 휴양림에서 밤새 별을 쳐다보며 삼겹살을 굽기도 한다. 마흔을 졸업할 무렵 나는 그곳에 가서 이런 시를 섰다.


▎낙산사에는 동양 최대라는 해수관음상이 서 있다.
선림(禪林)으로 가는 길은 멀다/ 미천골 물소리 엄하다고/ 초입부터 허리 구부리고 선 나무들 따라/ 마음의 오랜 폐허를 지나면/ 거기에 정말 선림이 있는지//

영덕, 서림만 지나도 벌써 세상은 보이지 않는데/ 닭 죽지 비틀어 쥐고 양양 장 버스 기다리는/ 파마머리 촌부들은 선림 쪽에서 나오네/ 천 년이 가고 다시남은 세월이/ 몇 번이나 세상을 뒤엎었음에도/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근 농가 몇 채는/ 아직 면산(面山)하고 용맹정진하는구나//

좋다야, 이 아름다운 물감 같은 가을에/ 어지러운 나라와 마음 하나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소처럼 선림에 눕다/ 절 이름에 깔려 죽은 말들의 혼인지 꽃이 지천인데/ 경전이 무거웠던가 중동이 부러진 비석 하나가/ 불편한 몸으로 햇빛을 가려준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여기까지 오는데 마흔아홉 해가 걸렸구나/ 선승들도 그랬을 것이다/ 남설악이 다 들어가고도 남는 그리움 때문에/ 이 큰 잣나무 밑둥에 기대어 서캐를 잡듯 마음을 죽이거나/ 저 물소리 서러워 용두질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슬픔엔들 등급이 없으랴//

말이 많았구나 돌아가자/ 여기서 백날을 뒹군들니 마음이 절간이라고/ 선림은 등을 떼밀며 문을 닫는데/ 깨어진 부도(浮屠)에서 떨어지는/ 뼛가루 같은햇살이나 몇 됫박 얻어 쓰고/ 나는 저 세간의 무림(武林)으로 돌아가네 [졸시 ‘선림원지(禪林院址)에 가서’ 전문]


더 의미 있는 것은 일연 스님이 나중에 <삼국유사> (1281)를 펴내는데 알다시피 <삼국유사>는 불교문화의 정수이자 고구려·백제·신라의 유사(遺事)를 기록한 책인데 유독 낙산사에 대한 기록이 적잖은 분량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낙산사는 옛날부터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의 하나다. 진전사에 내려다보면 낙산 바다가 보인다. 그때 젊은 일연 스님이 그곳을 왕래하며, 파랑새의 안내를 받아 관음을 친견했다는 의상의 행적이나 조신(調信)의 꿈 이야기 등 낙산사에 얽힌 설화에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낙산사는 동양 최대라는 해수관음상이 있는가 하면 수 년 전 큰 산불로 국가보물인 동종까지 녹아내린 천년 고찰이다. 어려서 내가 다닌 강현초등학교는 낙산사로부터 10리 안팎인데 지겹게도 봄가을 소풍 갈 데가 거기밖에 없었다. 게다가 우리 집은 낙산사 절 땅을 부쳐 생계를 꾸렸고, 그것으로 내가 공부한 걸 생각하면 지금도 낙산사 부처님이 고맙기 그지없다. 수년 전 화마가 절을 쓰러뜨릴 때도 나는 남다른 충격을 받기도 했으나, 복원을 마친 요즘 그 단아함과 예스러움이 옷깃을 여미게 하기도 한다.

양양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매월당 김시습이다. 생육신이자 천재시인이었지만 신세모순(身世矛盾)과 세여불합(世與不合)의 불우를 6∼7년 관동지방에서 견디며 그는 1516년 경 양양남대천 상류지역인 현북면 법수치(法水峙) 근처 검달동(黔達洞)에 수년간 은거한다. 그러면서 지방청년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당시 양양부사 유자한은 예를 갖추어 그를 청하고 때로는 술과 안주와 쌀을 보내고, 부디 출사 할 것을 권유하기도 하였으나 김시습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혹은 여자를 보내기도 했는데 취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의 작품 중에는 양양부사의 고마움에 보답하는 ‘느낀 일이 있어 명부에 올리다(有感觸事呈明府)’라는 시도 전해지고 있다. 방외인(方外人)의 외진 삶이지만 한 가닥 맑은 기운 같고 푸른 안개 같은 역사의 내면이기도 한 것이다.

양양의 보양식 ‘뚜거리탕’의 구수함


▎양양 사람들의 입맛을 돋우는 음식으로는 구수한 뚜거리가 으뜸이다.
양양은 1960년 대 초반 까지만 해도 속초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래서 남애, 수산, 물치, 대포 등 이름난 포구를 가지고 있었으나 특산물을 보면 해산물보다는 남대천의 산물이 더 많았다. 조정에 바치던 공물(貢物)도 송이를 비롯한 남대천의 연어와 은어, 연어알 등이 주고 해산물로는 문어 등이 고작이었다. 어려서 길들여진 음식 맛은 평생 몸을 지배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양양음식은 뚜거리탕이다. 남대천에는 연어는 물론 황어·송어·은어·밀어 등 다양한 물고기가 철따라 양양 사람들의 입맛을 돋우지만 구수하기로는 뚜거리가 으뜸이다. 다른 말로 꾹저구라고도 하는데 양양사람 치고 뚜거리국을 안먹어본 사람은 드물 것이다.

뚜거리를 손질하여 된장과 고추장을 풀고 얇은 수제비를 띄운다. 거기에 매콤한 제피를 넣어 더위에 지친 몸에 여름 땀을 내기도 하고 속이 헛헛할 때는 허를 메워주는 보양식이기도 하다. 지금도 남대천 주변에는 뚜거리탕을 파는 음식점이 더러 있다. 나는 식욕이 없거나 포식이 하고 싶으면 그곳에 가고는 한다. 세상 어디를 가도 고향음식이나 어려서 먹은 음식보다 입에 맞는 건 없다. 거기에는 산천과 어머니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양의 맛이나 특산물 중 송이를 넘을 수 있는 건 없다. 송이는 해마다 나는 곳에만 난다. 남대천 상류지역인 현북면 어성전과 명지리 일대가 주산지다. 내가 어렸을 적만 해도 송이가 산중 지존인줄도 모르고 호박찌개나 칼국수에 넣어 먹었다. 찢어 말렸다가 장아찌를 박아 도시락 반찬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70년 대 이후 일본 수출이 시작되면서 송이는 귀물이 되었고, 해마다 추석을 전후로 그야말로 금값이 된다.

뒷모습 허전한 이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지금은 양양 사람들도 퍼드레기(갓이 퍼드러진) 송이조차 먹어보기 어렵다. 먹어버리기엔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 나도 어쩌다 한두 뿌리 구하면 한꺼번에 못 먹고 신문지에 싸서 냉장고에 넣고 보약처럼 꺼내 먹는다. 그렇게 신분이 귀한 송이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라면 끓일 때 조금 넣으면 그 냄새가 요즘 말로 죽인다. 그렇더라도 해마다 송이 풍년이 들어 양양사람들의 살림살이가 좀 나아진다면 못 먹으면 어떠랴. 어쨌거나 송이와 연어야말로 하늘이 양양에 내린 최고의 선물이다. 혹시 기후가 변하고 사람들의 인심이 사나워지면 산과 바다의 마음도 변해서 연어가 남대천을 못 찾아오거나 송이 씨앗이 땅속에 몸을 숨기고 나오지 않을까 그것도 은근 걱정이다.

이쯤에서 다시 내가 나고 자란 강선리로 돌아오자.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책보를 팽개치고 아랫동네 물치 바다에 가면 먹을 게 많았다. 자맥질로 조개와 바위에 붙은 진동아리, 미역 등을 따기도 하고 더러는 멍게와 해삼을 줍기도 하던 곳이다. 물치장은 양양에서 둘째로 큰 장이다. 양조장이 있었고 구호물자나 우유가루를 타기 위하여 열심히 다니던 교회가 있었다. 그러다가 양양탄광 철광석을 속초부두로 실어 나르는 트럭들이 먼지와 자갈을 뿌려대는 20여 리 신작로를 걸어 나는 속초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다.

강선리에는 형님 두 분이 아직 농사를 하신다. 농사래야 옛날에 비하면 장난이다. 소출이 그렇고 환금성이 그렇다. 나고 자라 60여 년이 지났지만 물치 장거리만들어서도 마음은 설레고 아프고 그립다.

국수가 먹고 싶다/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 가늘 울고 싶은 사람이 있어/ 마을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졸시 ‘국수가 먹고 싶다’ 전문)

나의 문학에는 나에게 생명과 몸을 준 양양의 산천과 이웃들의 삶과 수천 년 묵은 농경정서가 들어 있다. 그것은 내가 아무리 퍼써도 줄지 않을뿐더러 뭐라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밥보다 국수를 더 좋아한다.

이상국(李相國) - 1946년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났다. 1976년 <심상>에 ‘겨울 추상화’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설악신문사> 사장, 만해마을 운영위원장, 한국작가회의 부이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속초에서 산다. 시집으로 <집은 아직따뜻하다>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뿔을 적시며>, 시선집 <국수가 먹고싶다>등이 있으며 백석문학상·정지용문학상·박재삼문학상·현대불교문학상을 받았다.

201501호 (2014.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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