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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초상] 이 가을에,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읽다 

“생의 진실은 고통과 직면해야 찾을 수 있는 것” 

김재혁 시인·고려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시인 릴케에게 고통은 아름다움을 위한 대전제. 진한 포도주에 마지막 단맛이 스미길 염원한 시인의 진실은 어디에…

릴케는 낭만의 인간으로 삶을 살지 않았다. 미래를 사지 않으며 추억마저도 끌어들이지 않고, 그저 고통과 마주하는 생명이고자 했다. 인간 존재를 형이상학적 초월세계로 이송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릴케적인 삶의 본령이다. 운명과 싸웠던 한 시인의 숭고한 모습에 우리는 전율한다.


▎릴케는 독일 시문학사에서 처음으로 ‘나’를 탐구대상으로 하여 시를 쓴 시인으로 평가된다. / 사진제공·문학판
벌써 근 20년은 되었다. 1997년에 나는 독일의 유명한 전기 작가 볼프강 레프만이 쓴 릴케 전기를 우리말로 번역해서 <릴케. 영혼의 모험가>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적이 있다. 일본의 릴케학회에서 <릴케 전집>을 발간하면서 포함시켰을 만큼 평판이 좋은 책이었다. 번역본 한 권을 나의 이종사촌 형인 신경림 시인에게 보냈다. 그리고 얼마 뒤에 형님을 만났다. 만나자마자 형님이 말했다. “재혁아, 그 책 잘 읽었다. 그런데 릴케 쪼다더라!” 순간 릴케 연구자로서 좀 흠칫하면서도 너무나 적확한 표현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릴케가 손을 씻는 모습은 어떠했는지, 걸음걸이는 어떠했는지, 부인과 비교해서 덩치와 키는 어떠했는지까지 자세히 기록한 책이라서 그 책에서 ‘쪼다’로서의 릴케를 발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군사 유년학교 시절의 릴케. 몸이 허약해서 5년 만에 학교를 그만뒀지만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다. / 사진제공·김재혁
생활 면에서 보면 릴케는 영락없는 ‘쪼다’였다. 광적으로 기독교에 흠뻑 빠져 있던 릴케의 어머니가 릴케를 세상에 낳고서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하루의 시점과 동일하다고 하여 ‘마리아의 은총’으로 여겨 붙인 세례명 ‘마리아’는 그에게 많은 부정적 체험을 선사했다. 더욱이 릴케가 세상에 나기 전에 죽은 어린 누나 대용으로 어릴 적에 여자아이 옷을 입고 자란 릴케는 스스로의 정체성에 늘 혼돈을 느꼈다. 하사관에서 장교로 입신출세하려다가 좌절된 아버지의 꿈을 대신하여 군사유년학교에 보내진 그는 어머니가 싸준 레이스 달린 속옷 때문에 동료들로부터 많은 놀림을 받았다. 옆자리 동료에게 왼쪽 뺨을 맞자 오른쪽 뺨마저 때려라, 했다가 흠씬 두들겨 맞은 릴케였다.

몸이 약해서 군사학교를 5년 만에 그만두었지만, 그곳에 다닐 동안은 자주 결석을 했음에도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의 어설픔은 계속 이어졌다. 군사학교 생활을 못 견뎌 했던 그였지만 그곳에서 자퇴하여 고향 프라하에 돌아와서는 줄곧 군사학교 유니폼을 입고 카페를 전전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1916년 초, 빈에서 징집당했을 땐 입대 판정을 하던 하사관으로부터 ‘마리아’라는 이름 때문에 놀림을 받기도 했다. 릴케의 외형적 삶은 그야말로 ‘쪼다’라는 말에 어울리게 허술하고 속이 들어차지 못했다. 그렇기에 시인으로서 그에겐 진정한 자아, 즉 ‘나’를 찾는 일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릴케는 독일 시문학사에서 처음으로 ‘나’를 탐구대상으로 하여 시를 쓴 시인으로 평가된다.

스물 이후 방랑의 삶을 살았던 시인


▎철학자 니체가 흠모했던 루 살로메는 릴케에게도 많은 지적 영향을 주는 등 그의 삶에 항성과 같은 역할을 했다.
릴케는 어느덧 거의 ‘우리의’ 시인이 되었다. 그의 시 ‘가을날’은 이제 우리의 가을 풍경 속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릴케는 우리와 함께 가을벌판을 걷고 있다. 너른 벌판에 내리는 햇살과 그 속에서 빛나는 황금의 들판은 시인의 입에서 ‘주여’라는 낱말이 저절로 튀어나오 게 한다. 그 한 마디의 낱말이 그의 가슴속에 숨겨져 있던 고백들을 고구마줄기처럼 끌어낸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해주소서,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진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더 이상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로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맬 것입니다.



▎릴케의 처남 헬무트 베스트호프가 그린 릴케의 초상(1930년). 젊은 시절 릴케의 날카로움이 잘 드러났다. / 사진제공·김재혁
시인은 여름의 완성에 이어 가을을 ‘진한 포도주’에 깃드는 단맛으로 완성케 해주기를 신에게 기도한다. 여름의 완성은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이라는 표현 속에 들어 있다. 동유럽과 북유럽의 기후에 익숙한 시인에게 남프랑스 같은 남국에 비치는 햇살은 그 의미가 각별하다. 하루만 그 햇살 속에 있어 보아도 시인이 왜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원하는지 알 수 있다. 시인은 언어의 포도원을 가꾸는 주인이다. 시인은 외적으로는 가을의 풍요로움을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스스로에게 시인으로서의 사명을 다독거리는 중이다. 남국의 햇살을 받아 자신의 언어가 무르익기를 바라는 것이다. 1902년 9월 21일 프랑스 파리에서 쓴 이 시는 시 안쪽에 시인의 생활코드를 그대로 감추고 있다.

제1연과 제2연에서는 아름다운 계절의 초입에서 외치는 감사의 감탄과 소망이 주를 이루지만, 마지막 연에서는 시인으로서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할 생활의 면면들이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다. 집과 책 읽기, 편지 쓰기, 산책 등 평생토록 릴케에게서 떠나지 않았던 것들이다. 독일의 어느 평론가는 이 시가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이유로 ‘집’ 이야기를 들었다. ‘집’의 표상이 집 없이 떠도는 시인의 삶과 대조를 이루면서 아늑함과 자유의 이중감정을 연출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 ‘집’ 이야기가 없이 초·중반의 풍요로운 기도만 있었다면 이 시는 그만한 호소력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릴케는 스무 살에 고향 보헤미아를 떠나 그 이후로 줄곧 방랑의 삶을 살다간 시인이다. 그에겐 고독과 방랑과 책 읽기와 편지 쓰기 그리고 산책이 삶의 모든 것이었다. 타향의 외딴 다락방에서 책을 읽고 편지를 쓰다가 파리의 오래된 플라타너스 가로수길 사이로 쓸쓸하게 방랑하는 가을날의 릴케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이 시는 ‘가득 참’에서 ‘텅 빔’으로 변해가는 시인 자신의 가슴의 벌판 모습을 그려 보인다. 계절의 풍요로움이 시인의 풍요로움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그는 그 스스로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늘 가슴으로 느낀다. 이 시절 릴케는 조각가 로댕의 비서로 일하면서 “불안으로부터 사물을 만든다”고 말한다.

릴케의 삶의 등대는 루 살로메


‘불안’은 시인에게 극복해야 할 대상이면서 또한 시적 재료이기도 하다. 시 ‘가을날’은 그 안에 시인의 불안을 품고 있다. 그것은 실존의 불안이며 또한 시인으로서 시 쓰기의 불안이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더 이상 집을 짓지 않습니다”로 시작되는 마지막 연은 릴케가 객지 생활을 하면서 처했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제1, 2연의 ‘밝음’과 이 마지막 연의 ‘암울함’ 사이의 극명한 대립은 릴케 자신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던 파노라마의 한 면이기도 하다. 실존적 고통은 시인을 진정한 시인으로 만들어준다. 고통이 시인에게 시를 쓰게 만들고 그것은 이른바 고통의 시학이 되는 것이다. 고통은 아름다움을 위한 대 전제 조건이다.

릴케를 기려서 만든 우표는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스위스에서 각각 발행되었다. 릴케가 독일어권 시인으로서 이 세 나라에 자신의 흔적을 깊이 남겼기 때문이다. 첫 번째 사진의 우표는 릴케 탄생 125주년을 맞이하여 2000년에 독일에서 만든 것이다. 공모를 통해 릴케의 문학과 관련하여 설득력을 확보한 이 우표가 당첨되었다. 릴케의 초상도 없이 하트 모양으로만 장식된 것이 특이하지만, 사실 이 우표는 그만큼 릴케의 삶을 잘 드러내고 있다. 가운데에 옛 독일어 서체로 쓰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라는 이름이 먼저 보이고 아래쪽에 출생 연도(1875년)와 사망연도(1926년)가 적혀 있다. 그 이름 주위를 수많은 하트가 에워싸고 있다. 그 하트 중 가장 뚜렷한 하트가 되는 인물은 릴케보다 열네 살 연상의 여인인 루 살로메다.

러시아 장군의 딸로 당시에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대학교육까지 마친 그녀는 1897년 5월 12일 뮌헨에서의 첫 만남 이후 릴케의 삶에서 항성과 같은 역할을 한다. 정규교육을 제대로 마치지 못한 릴케에게 많은 지적 자극을 주고 이탈리아 여행을 권유하기도 한다. 르네 마리아 릴케였던 릴케를 독일식으로 ‘라이너’ 마리아 릴케로 이름을 바꾸게 한 것도 그녀였다. 시인으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을 뿐 아니라 아름다운 이름을 선사하여 릴케가 시인으로서 더욱 유명하게 되는 외형까지도 갖게 해준 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아닌, 이를테면 ‘압둘 핫산 릴케’였다면 어땠을까? 릴케는 루 살로메를 향한 사랑의 감정을 시로 표현하는 가운데 절실한 사랑의 시를 쓸 수 있었다. ‘내 눈의 빛을 꺼주소서’는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또 다른 하트는 릴케의 부인 클라라 베스트호프에게 바쳐진 것이다. 북부 독일 출신의 조각가로 파리에서 로댕 밑에서 조각을 공부한 여인이었다. 릴케가 그녀를 만난 것은 1900년 러시아 여행에서 돌아와 찾았던 독일의 예술가촌 보릅스베데에서였다. 그녀와의 결혼생활은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 결혼을 하면서 “서로를 위해 고독의 파수꾼이 되어주자”고 했던 사이였던 것은 예술가로서 각자의 삶을 잘 도모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지만, 릴케는 늘 자유를 꿈꾸었다. 그렇게 자유를 꿈꾸던 그는 제1차 대전이 한창일 무렵, 여류화가 루 알베르 라사르를 만나 뮌헨 근교에서 동거에 들어간다. 릴케를 위한 또 하나의 하트다. 그들의 동거는 아내 클라라의 분노를 일으켰고, 루 살로메가 나서서 중재를 함으로써 릴케는 이혼은 면하게 된다.

사랑의 고통은 릴케로 하여금 ‘소유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모토를 말하게 한다. 사랑에서 소유를 버림으로써 진정한 사랑을 위해 더 넓은 공간을 지향하는 것은 시인으로서 자기만의 자유의 공간을 확보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사랑의 체험은 릴케가 나중에 <두이노의 비가>에서 ‘위대한 사랑의 여인들’을 말하는 계기가 된다. 그밖에 릴케와 한 번이라도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여인들은 스스로를 릴케의 하나뿐인 애인으로 여겼으니 이들이 또 다른 하트들을 차지한다.

사랑과 죽음을 가장 순수한 의미대로 복권


두 번째는 1976년 오스트리아에서 시인의 사거 50주년을 맞이하여 발행한 우표다. 릴케가 태어난 체코가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해 있었으므로 릴케의 국적은 오스트리아다. 릴케는 어린 나이에 체코를 떠나왔다. 그가 스무 살이 못 되어 시를 쓰기 시작했을 무렵(20세기 초) 유럽에서 유행했던 예술사조는 유겐트슈틸이었다. 릴케의 왼쪽 어깨 너머로 보이는 나무의 모습은 바로 이 유겐트슈틸 풍으로 그려져 있다. 본디 유겐트슈틸은 식물의 꽃과 잎에서 보이는 생동감을 곡선 형태로 양식화한 것이 특징이다. 젊은 시절의 릴케는 시에서 이런 소재를 직접 쓰기도 했는데, 실제 나무로 그의 초상의 배경을 장식한 것은 보잘것없던 프라하의 촌뜨기 시인이 초상에서처럼 원숙한 시인으로 성장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거의 동년배였던 오스트리아의 천재 시인 호프만슈탈이 릴케의 발전을 보고 깜짝 놀란 것을 보면 릴케의 문학이 어떤 길을 걸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은 릴케가 생의 만년을 보냈던 스위스에서 1979년에 발행한 릴케 우표다. 만년의 대작 <두이노의 비가>를 완성했던(1922년) 저택 뮈조 성관이 그의 등 뒤에 서 있다. 릴케는 대작의 탄생을 비호해준 이 중세의 돌집에 감사를 표한 바 있다. 시인이 평생 사랑하여 정원에 몸소 키우곤 했던, 그의 묘비에도 들어간 장미의 모습도 보인다. 오스트리아 우표에 있는 릴케의 모습보다 훨씬 더 근엄해 보인다. <두이노의 비가>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를 완성시킨 시인의 내면의 모습이 겉으로 드러난 것 같다.

릴케의 마음속에 늘 감돌던 낱말은 사랑과 죽음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그에게 유명세를 가져다 준 시적 산문의 제목은 ‘기수 크리스토프 릴케의 사랑과 죽음의 노래’이다. 릴케의 생애 전 작품을 통해서 보아도 사랑과 죽음은 늘 그의 가슴속에 들어 있었다. 사랑과 죽음을 그 가장 순수한 의미대로 복권 시키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사랑과 죽음의 개념과 그 본질을 우리가 평소에 관습에 의해 길들여진 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두이노의 비가> 중 첫 번째 ‘비가’ 안에는 릴케가 평생 품었던 기본적인 생각들이 응축되어 들어 있다.


▎릴케의 아내는 로댕 밑에서 조각을 공부했던 클라라였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파탄 위기를 맞는 등 행복하지 못했다. / 사진제공·문학판
내가 소리친들, 천사의 계열 중 대체 그 누가 내 목소리를 들어줄까? 한 천사가 느닷없이 나를 가슴에 끌어안으면, 나보다 강한 그의 존재로 말미암아 나 스러지고 말 텐데.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간신히 견디어내는 무서움의 시작일 뿐이므로. 우리 이처럼 아름다움에 경탄하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를 파멸시키는 것 따윈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천사는 무섭다.


1912년 1월, 이탈리아 아드리아 해안 높은 바위 위에 솟아 있는 두이노 성에 묵고 있던 릴케는 산책을 위해 햇살에 반짝이는 겨울바다를 바라보며 비탈길을 내려오던 중 하늘에서 들려오는 위 구절을 바람결에 듣고 그대로 받아 적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그로부터 10년 뒤 스위스의 뮈조 성관에서 완성을 보게 된다.

<비가>의 첫머리와 끝머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천사다. 초반에는 시인이 이 세상에 없는 천사를 향해 애잔한 하소연을 띄우지만, <비가>의 끝에 가서는 천사가 기쁜 표정으로 시인의 솜씨와 사명감에 찬사를 보낸다.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간신히 견디어내는 무서움의 시작일 뿐이므로”라는 구절처럼 천사는 미적인 것의 총화다. 기독교의 냄새가 점점 가시고 릴케만의 천사와 신이 모습을 드러내는 단계가 릴케가 시적으로 성숙해가는 과정이다.

“위대한 사랑 어디에도 머무름은 없다”


▎아드리아해 연안에 자리 잡은 두이노의 성(城). 릴케는 1912년 이곳에서 <두이노의 비가>를 쓰기 시작해 1차대전 후 스위스로 이사한 뒤 1922년 2월 뮈조의 저택에서 마침내 완성했다. / 사진·중앙포토
릴케의 작품에서 천사는 초기의 <기도시집>에서도 수두룩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이때의 천사들은 기독교 회화에서 보는 어린 천사나 가브리엘 같은 종교적 천사에 가깝다. 관습적인 것을 버리는 순간이 릴케만의 시적 성취의 순간이 된다. 실제 릴케는 자신의 천사가 유대교나 기독교의 천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만의 존재임을 밝힌 바 있다. 1925년 11월 13일자 폴란드의 번역자 비톨드 훌레비츠에게 보낸 편지에서다. 천사가 갖는 미지의 신화적 힘이 시적 암시력을 부여하여 독자는 <두이노의 비가>의 마법의 세계로 빠져 들어간다. 그것은 시인만의 응축된 시어의 힘에 의한 것이다. 이렇듯 로댕의 조각의 영향까지도 벗어나는 후기 대작의 세계에 들어서면서 릴케의 작품은 완전히 독자적인 단계에 이른다. 진정한 사랑을 노래하는 릴케의 어조는 기존의 연애 시와는 사뭇 다르다.


▎만년의 역작 <두이노의 비가> 중 릴케가 친필로 쓴 ‘제1비가’. 소년의 죽음에 서린 고귀함을 그린 작품이다. / 사진제공·김재혁
꼭 하고 싶거든, 위대한 사랑의 여인들을 노래하라, 하지만
그들의 유명한 감정도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리.
네가 시기할 지경인 사람들, 그들이 너는 사랑에
만족한 이들보다 훨씬 더 사랑스러움을 알았으리라.
결코 다함이 없는 칭송을 언제나 새로이 시작하라,
생각하라, 영웅이란 영속하는 법, 몰락까지도 그에겐
존재하기 위한 구실이었음을, 그의 궁극적 탄생이었음을.
그러나 지친 자연은 사랑의 여인들을,
두 번 다시는 그 일을 할 기력이 없는 듯,
제 몸 속으로 거두어들인다. 너는 가스파라 스탐파를
깊이 생각해 보았는가, 사랑하는 남자의 버림을 받은
한 처녀가 사랑에 빠진 그 여인의 드높은 모범에서
자기도 그처럼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느끼는 것을?
언젠가 이처럼 가장 오래된 고통들이 우리에게
열매로 맺지 않을까? 지금은 우리가 사랑하며
연인에게서 벗어나, 벗어남을 떨며 견딜 때가 아닌가?
발사의 순간에 온 힘을 모아 자신보다 더 큰 존재가 되기 위해
화살이 시위를 견디듯이. 머무름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일상의 사랑은 사랑의 파트너로 인하여 자유를 맛보지 못한다.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소유로 제한을 받는 사랑이다. 사랑을 잃고도, 아니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고도 사랑의 대상을 향한 사랑의 감정을 오히려 강화하여 사랑의 대상을 넘어선 사랑을 구현하는 것을 ‘소유하지 않는 사랑’이라고 한다. 이것을 제대로 실현한 인물로 릴케는 16세기 이탈리아의 여류시인 가스파라 스탐파를 들고 있다. 보통의 사랑은 인간의 태생적 사고의 한계를 잠시 눈앞에서 가려줄 뿐이다. 잠시 조화로운 세계 속에 사는 것 같을 뿐이다. 파트너의 존재는 오히려 열린 세계를 향한 눈길을 막는다. ‘생물’은 오히려 ‘열린 세계’를 바라본다.(‘제8비가’) 차라리 천사처럼 완벽하게 정신적으로 순수하며 완전한 존재이든가, 아니면 일반 생물처럼 순수하게 육체적 존재이면 좋으련만 이 두 가지가 묘하게 뒤섞인 인간은 중간자로서 어디에도 제대로 속하지 않아 반쪽 존재일 뿐이다. 반쪽의 상황은 인간에게 결핍의 존재상황을 낳는다.

이제 그 어려서 죽은 자들이 너를 향해 소곤댄다.
네가 어디로 발을 옮기든, 로마와 나폴리의 교회에서
그들의 운명은 조용히 네게 말을 건네지 않았던가?
아니면 얼마 전의 산타 마리아 포르모자의 비문처럼
비문 하나가 네게 엄숙히 그것을 명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내게 무엇을 바라는가? 내 그들의 영혼의
순수한 움직임에 때때로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는
옳지 못한 감정을 조용히 버려야 하리라.



▎릴케가 만년을 보낸 스위스 뮈조의 저택. 릴케는 자신의 묘비명을 죽기 1년 전에 써놓는 등 생의 고통과 정면으로 대결했다. /사진제공·김재혁
일찍 죽은 자들, 즉 세상을 일찍 뜬 어린 소년들이라고 해서 그들에게 너무 일찍 죽었으니 값어치 없는 죽음을 죽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을 ‘제1비가’는 설파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시인으로서 그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게 노래할 사명을 부여받는다. 소년들의 죽음 속에는 ‘이미 생 앞의 완전한 죽음’(마그다 폰 하팅베르크에게 보낸 1914년 2월 16일 자 편지)이 들어 있다. 살아 있는 자들이 맛보지 못한 달콤함을 앞서서 맛본 존재로 그리는 것이다. 이들은 비록 짧지만 삶의 과일을 깨물어 그 달콤한 깊은 맛을 맛본 것이다. 산타 마리아 포르모자는 베네치아에 있는 교회 이름이다. 릴케는 1911년 4월 3일 탁시스 후작 부인과 함께 그곳을 방문한 바 있다.

죽음을 삶과 화해시키는 것, 그것이 릴케의 의도다. 죽음을 삶의 절반으로서, 아니 더 큰 부분으로서 받아들여 ‘온전한 세계’(훌레비츠에게 쓴 1925년 11월 13일자 편지)를 만드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저승으로 보낸 죽음을 다시 이승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시인 릴케가 할 일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확실하게 그어놓는 것에 대해 릴케는 반대한다.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나쁜 것으로 여겨 쫓아버린 삶의 요소들을 다시 구제하여 우리 것으로 만들려는 자세를 견지한다. 단순한 말의 차원이 아니라 인식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존재의 완전성은 삶과 죽음을 하나로 보는 데서 창출된다. 1923년 1월 6일 자 그래핀 지초에게 보낸 편지에서처럼 죽음을 ‘달의 뒷면처럼 우리에게 늘 등을 지고 있는 쪽’으로 보는 것이다. 죽음은 삶의 절반이 아니라 삶과 함께 존재의 총체를 이룬다. 아니, 그렇게 해서 삶이 완전해지는 것이다. 근대적 인간이 의식적으로 갈라놓은 것을 합쳐놓음으로써 인간은 본래의 삶대로 온전한 존재를 누릴 수 있다. ‘제8비가’의 ‘열린 세계’를 바라보는 ‘생물’처럼. 삶의 절반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 자체를 삶과 합쳐서 삶의 온전한 전체를 이루는 것으로 볼 때 릴케의 지상주의적 사고는 완성된다. 그리고 릴케는 시인의 사명을 노래한다. 지상의 삶은 한번뿐이다. 여기서 시적 변용의 중요성이 나온다.

대지여, 그대가 원하는 것은 이것이 아닌가? 우리의 마음에서 보이지 않게 다시 한 번 살아나는 것. 언젠가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그것이 그대의 꿈이 아니던가? 대지여! 보이지 않음이여!
변용이 아니라면, 무엇이 너의 절박한 사명이랴?


릴케는 암시하는 말투로 말한다. ‘대지’는 이 지상의 모든 사물을 대변하는 표현이다. 보이는, 즉 무상한 사물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정신화하는 것, 그것이 시적 변용의 사명이다. ‘보이지 않게’의 본격적인 의미는 원문에 제대로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나 “세계는, 사랑하는 이여, 우리의 마음속 말고는 어디에도 없다”는 ‘제7비가’의 말에 비추어보면 변용은 시인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것임이 분명해진다. 감정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으로서 그것들만이 시적 체험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시인의 감정을 통해 마음속에서 정화, 승화된 사물은 지속적인 존재를 누릴 수 있다.

죽음은 삶과 함께 존재의 총체를 이뤄


▎1901년 클라라와 신혼 시절의 릴케. 릴케는 삶과 죽음을 하나로 보는 데에서 존재의 완전성이 창출된다고 보았다. / 사진제공·김재혁
시적 보편성은 소통가능성과 직결된다. 이때의 소통은 언어적 소통을 넘어서 심미적 소통까지 포함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예술적 언어가 필요하다. 그것을 대변하는 말이 <두이노의 비가>에서는 ‘말하기’이다. “여기는 말할 수 있는 것을 위한 시간, 여기는 그것의 고향이다. 말하고 고백하라”(‘제9비가’)고 시인은 읊조린다. 사물은 천사의 눈길 앞에서 구원을 받는다. 시인 자신의 눈길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제3자의 보증하는 책임이 필요하다. 천사의 눈길은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초월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상의 무상한 사물은 천사의 눈길 아래에서 구원을 받는다. 어떤 합리적 목적보다 오히려 상징적, 종교적 또는 예술적 가치를 지닌 사물이 더 값지게 보인다.

“집/다리, 우물, 성문, 항아리, 과일나무, 창문”, 특히 ‘기둥’과 ‘탑’(‘제9비가’) 같은 사물들은 세속과 초월의 세계를 이어주는 중간자 역할을 한다. 나아가 천사는 인류문명의 큰 업적들을 기억하는 집단적 기억의 상징이 된다. 시간을 초월하여 인간의 존재를 확증해주는 천사 앞에서 시인의 불안은 극복의 길을 걷게 된다. 결국 천사를 이야기하던 <비가>는 시인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천사는 인간으로서의 시인을 돌아보게 만드는 존재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릴케는 시인으로서의 자신도 구하고 인간으로서 불안 속에 빠진 자신의 존재도 구하는 것이다.


▎스위스 라롱 공동묘지에 있는 릴케의 묘소. 릴케는 마지막 시에서 “불꽃 속으로 추억을 끌어들이지 않겠다”는 당당한 생의 의지를 선포했다. / 사진·중앙포토
고통에 가득 찬 인간의 내면을 우리는 세상을 뜨기 직전 자신의 신체적, 심정적 상태를 그린 릴케의 마지막 시에서 본다. 1926년 12월, 몸에 지니고 있던 수첩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오라, 너, 내가 알아보는 마지막 존재여,
육체의 조직 속에 깃든 고칠 수 없는 고통아.
정신의 열기로 타올랐듯이, 보라, 나는 타오른다.
네 속에서. 너 넘실거리는 불꽃을
받아들이기를 장작은 오랫동안 거부했다,
그러나 이제 나 너를 키우고, 나는 네 속에서 타오른다.
이승에서의 나의 부드러움은 너의 분노 속에서
여기 것이 아닌 지옥의 분노가 되리라.
아주 순수하게, 미래에 대한 아무런 계획 없이 자유로이
나는 고통의 그 어지러운 장작더미 위로 올라갔다,
속에 든 모든 것이 이미 침묵해버린 이 심장을 위해
그토록 빤한 어떤 미래의 것도 사지 않기 위함이다.
저기 알아볼 수 없이 타고 있는 것이 아직도 나인가?
불꽃 속으로 추억을 끌어들이지는 않겠다.
오 생명, 생명이여, 저 바깥에 있음이여.
그리고 불꽃 속의 나여, 나를 알아보는 이 아무도 없구나.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릴케의 ‘고통’은 17세기 독일 바로크의 시인 그리피우스의 세계에서 그려진 것처럼 죽음으로써 극복되고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크 시대의 고통의 시에서는 인간의 문제를 인간 스스로가 해결하지 않고 신에게 맡겨두는 형태를 띤다. 릴케는 고통 자체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고통을 감내하며 마음껏 타오르고자 한다. 고통을 고통으로 겪어내려 하는 것이다. 행복을 보장해준다는 기독교적 천국의 진통제를 맞으려 하지 않는다. 예전에 삶 속에서 마음으로 느꼈던 고통을 몸으로 직접 겪어내겠다고 다짐한다. 여기에 바로 고통의 시학이 거주하는 것이다. 고통을 잊기 위해 행복한 저승과 쉽게 화해하지 않는 곳에 고통의 시학의 진정성이 자리한다. 현실의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미래도 사지 않으며 추억마저도 끌어들이지 않고, 그저 고통과 마주하는 생명이고자 한다. 고통의 묵직함은 시인이 사용하는 수사학적 메타포에 의해 절실하게 전달된다. 인간의 존재를 쉽게 형이상학적 초월세계로 이송하지 않는 것이 릴케적이다. ‘릴케적’이라는 것은 이승에 모든 것을 두고 저편을 그리워하지 않는 마음을 말한다. 이와 같은 그의 자세는 초기의 <기도시집>에서도 이미 확인된다.

저쪽 세상을 바라지도 넘보지도 않으며,
죽음을 피하려 하지 않는 마음,
이승에서 모습을 새로이 하지 않고
순리에 따르려는 애틋한 마음만이 있습니다.


고통은 그 강도로 말미암아 오래 기억된다. 기억은 상처를 간직하는 그릇의 역할을 한다. 상처가 말을 한다. 고통을 느끼는 것은 육체뿐만 아니라 마음이다. 고통은 마음에 푸르게 새겨지는 문신과 같다. 시인의 경우도 그의 말투와 어조를 가로지르고 또 결정하는 것은 고통의 내용들이다. 기억 속 사건이 인지과정을 통해 시적 언어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릴케는 생의 마지막을 위해 미리 자신의 묘비명을 죽기 1년 전에 써놓고 지상의 모습을 영원히 보려는 듯 눈을 뜬 채로 의사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둔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겹겹이 싸인 눈꺼풀들 속
익명의 잠이고 싶어라.


- 김재혁 시인·고려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김재혁 - 현재 고려대학교 독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시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복면을 한 운명> <릴케와 한국의 시인들> 등의 저서와 <딴생각> <아버지의 도장> <내 사는 아름다운 동굴에 달이 진다> 등의 시집이 있다. <딴생각>을 라는 제목으로 직접 번역하여 독일에서 출판했다. 독일에서 (공저)를 출간했으며, 오규원의 시집 <사랑의 감옥>을 독일어로 옮겼다.

201611호 (201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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