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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선비정신의 미학(10)] 사도세자 만인소 일기 남긴 학서(鶴棲) 류이좌 

영남 사림의 조선판 촛불집회 

글 송의호 기자 yeeho@joongang.co.kr / 사진 공정식 프리랜서
정조, 예상 깨고 직접 상소문 듣고 비답(批答) 내린 뒤 만인소에 담긴 민의 지렛대삼아 개혁 정책에 박차

▎학서 류이좌의 7대손인 류세호씨가 당호가 된 화경당 앞에서 만인소의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12월 3일 서울 광화문광장 일대에선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6차 촛불집회가 열렸다. 주최 측인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은 이날 집회에 170만 명(경찰 추산 32만 명)의 시민이 참가했다고 밝혔다. 집회 사상 최대 규모다. 촛불을 든 시민들은 청와대를 향해 최순실 국정 농단에 휩싸인 박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촉구했다.

주말 촛불집회가 한 달 이상 이어지면서 구호는 퇴진에서 구속으로 바뀌었다. 법원은 이날 촛불을 든 시민들이 청와대 앞 100m까지 행진을 허용했다. 시위는 충돌 없이 평화적으로 마무리됐다. 최고 권력을 향한 언로(言路)가 새 장을 열었다. 민주주의 역사도 새로 쓰이고 있다.

왕조 시대에도 임금을 향한 언로가 마련돼 있었다. 조선시대엔 상소가 민의 전달 통로의 하나였다. 명망 있는 선비의 상소는 그대로 공론(公論)이 됐다. 상소의 형식은 진화했다. 선비 한 명이 아닌 수백 명이 한꺼번에 상소를 올리는 방식이다. 1792년 창덕궁 앞에 전대미문의 상소가 등장한다. 선비와 유생(儒生) 1만 명이 연대 서명한 집단상소였다. 선비·유생의 ‘촛불집회’였다.

200여 년 전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조선 정조(正祖) 16년의 일이다. 그해 3월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8도 중 사림의 본거지 영남 껴안기에 나선다. 안동 도산서원에서 특별 과거시험인 도산별시를 개최한 것이다. 지방에서 처음이었다. 영조 시기 영남 사림은 노론의 득세로 정승 한 사람이 나지 못했다. 별시 소식을 듣고 지역 유생 7228명이 응시했다. 그날 거둔 답안지만 3632장에 이를 만큼 성황을 이뤘다. 정조는 답안지를 직접 점검한 뒤 강세백·김희락을 합격시켰다.

그리고 한 달 뒤 사도세자 신원(伸寃: 원한을 푸는 것) 상소가 올라온다. 영남지역 선비 1만57명이 연명한 상소였다. 이른바 영남 만인소(萬人疏)다. 만 사람의 뜻은 곧 천하의 뜻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당시 상소문은 아쉽게도 전하지 않는다. 대신 한국국학진흥원에는 1855년 만인소가 남아 있다. 만인소는 크게 상소문과 이름·서명을 적은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참여자가 많아 이 만인소는 길이만 자그마치 96.5m에 이른다.

영남 유생들, 삼계서원 통문 받고 상소 추진


▎만인소의 진행 과정을 기록한 ‘임자소청일록’.
당시 만인소는 가담한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일과가 하루 단위로 자세히 남아 있다. <천휘록(闡揮錄)> 중 ‘임자소청일록(壬子疏廳日錄)’이다. 임자년 상소추진본부의 일지다. 필자는 적혀 있지 않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만인소에 참여했던 유생인 학서(鶴棲) 류이좌(柳台佐, 1763∼1837)가 쓴 것으로 보고 있다. 일기는 1792년 4월로 시작된다.

“어머니가 병에 걸려 나는 봉서암에서 여러 달을 머물렀다. 16일 병산서원 하인이 말을 끌고 올라와 백부의 편지를 전했다. ‘류성한이 정조를 비난하는 소를 올렸다. 성균관에 머물던 영남 유생들이 삼계서원(三溪書院)에 통문을 보내 사림은 곧 도회(道會)를 열기로 했다. 모두 급히 한양으로 올라간다는데 네 이름이 거론됐다. 너는 듣는 즉시 내려오는 것이 좋겠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 바로 행장을 꾸렸다.” 전염병을 피해 봉서암에 머물던 유생이 백부의 편지를 받고 상소 대열에 합류하는 과정이다.


▎정조 임금이 초계문신 류이좌에게 내린 시집.
일기의 다음은 4월 17일이다.

“(…) 저물녘 백부와 숙부를 뵙고 북촌 본가에 가서 담장밖에서 어머니 건강을 탐문하고 우두커니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어머니께서 한양 가는 일을 상세히 물으셨다.(…)”

류이좌는 일기에서 보듯 병산서원과 북촌댁이 있는 안동 하회마을 출신으로 서애 류성룡의 8대손이다. 일기 속 그 집이 궁금했다.

11월 25일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마을 북촌댁을 찾았다. 솟을대문을 지나 화경당(和敬堂) 편액을 보며 계단을 올라 집안으로 들어서니 ㅁ자 형태의 한옥이 빙 둘러 배치돼 있다. 맨 안쪽에 안주인 방이 있었다.

주손 류세호(64) 씨는 안방을 응접실처럼 꾸민 공간에서 기자를 맞이했다. 학서가 한양으로 떠나기 전 담장 밖에서 바라본 어머니가 머물렀을 방이다. 방 안에는 인장과 갓끈·서류함·관복장·지팡이 등 이 집을 지켜온 선조들의 유품이 가지런히 진열돼 있었다. 작은 박물관이다. 주손의 7대조인학서의 유품도 곳곳에 보였다. 학 두 마리가 아래 위로 마주 보는 수(繡) 장식이 있었다. “이건 관복의 흉배입니다. 정3품 이상에는 쌍학이 들어 있습니다.” 건너편에 <학서문집>이 놓여 있었다. 상소문 이야기도 그 안에 들어 있다.

<천휘록>도 이 집에서 내려오다 2005년 주손 류씨가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한 것이다. 류씨가 직장 생활로 서울에 머물던 1997년 북촌댁에 도둑이 들어 서책 3000여 권을 분실한 뒤였다. 그는 안 되겠다 싶어 2005년 직장 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내려오자마자 집안의 유품을 정리한 뒤 <천휘록> 등 고서와 고문서·목판 등 1만6700여 점을 국학진흥원에 맡겼다.


다시 200년 전으로 돌아간다. 영남의 선비들은 집권세력의 전횡에 맞서 1만 명이 연대 서명해 상소하기로 정한 뒤 서원을 중심으로 통문을 돌리고 상경을 감행한다.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형식의 파괴였다. 류이좌는 한양 길에 오른다. 4월 18일 하회를 떠나 풍기·단양을 거쳐 21일 충주에 닿았다. 한양에 들어간 것은 23일 아침. 안동을 떠난 지 6일 만이다. 류이좌는 성균관 근처에 자리잡고 벗 이인행을 만나 류성한 사건의 전말을 듣는다. 영남 유생들은 소식을 듣고 천릿길을 달려와 속속 집결했다. 당시 직접 상경한 인원은 300여 명. 뜻을 같이 한다며 서명한 인원을 포함하면 1만 명이 넘었다. 성균관에 머물던 영남 출신은 상경한 유생들을 만나 상소추진본부인 소청(疏廳)을 마련한다.

4월 24일 사현사동에 소청을 차리고 역할을 배분했다. 25일 선혜청에서 거사를 진행할 돈 50냥을 빌리고 상소문 작성에 들어간다. 시대의 금기인 사도세자 문제를 정면에서 거론했다. 사도세자는 나경언의 역모 고발로 1762년 뒤주에서 죽음을 맞았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영조는 이후 세손(世孫)에게 이 문제를 다시는 언급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는다.

26일. 상소를 대표하는 소두(疏頭)로 이우(李㙖)가 선출됐다. 삼계서원의 하인은 의성·흥해·진보·영해의 명단을 전한다. 오후에 성균관에 근실(謹悉)을 요청한다. 유생이 상소할 때 반드시 성균관의 1차 동의를 구하도록 만든 절차다. 영조가 정치적 악용을 막자며 마련한 장치였다. 성균관은 만인 소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난관에 봉착했다. 다음 날 일기는 길다.

“4월 27일. 이른 아침 소장을 봉함했다. 상소문에 이름을 적은 사람은 모두 1만57명이다. 상소문은 대략 이렇다. ‘경상도 이우 등은 발을 싸매고 조령을 넘어 피를 쏟으며 소장을 올립니다. 확실한 처결로 화란(禍亂, 사도세자의 죽음)의 뿌리를 영원히 뽑아 의로움을 밝히고 윤리와 강령을 세우시기를 바랍니다.’(부연하면 이렇다. 영남 사림이 사도세자 신원을 가슴에 간직한 지 30년이 넘도록 입을 열지 못하다가 최근 류성한의 흉소를 듣고 상경했다. 사도세자는 벽파에 의해 원통히 죽었으니 역도들을 처단해야 할 것이다.) 오전 7시 대궐에 이르러 돈화문 밖에다 소장을 넣은 상자를 안치했다. 소두가 자리를 마련하고 유생 26명이 차례로 대궐 앞에 엎드렸다.(…)”

이어 소두가 수문장에게 소장을 전해달라고 요청한다. 수문장은 성균관에서 근실 허가가 나지 않은 것을 문제삼았다. 소두가 반박한다. “이 거사는 유생 상소이긴 하지만 전·현직 관리들과 합동으로 올리고 있어 근실과 상관이 없습니다. 또 1만 명이 연명했으니 어찌 근실이란 형식에 구애된단 말이오.”

만인소 우여곡절 끝에 정조 앞에서 직접 낭독


▎ㅁ자 구조의 안채에 마련된 대청. 왼쪽에 어머니 방, 오른쪽에 할머니와 며느리 방이 있다.
수문장은 끝내 봉납을 거절했다. 연명한 전·현직 관리들이 다시 비서실 격인 승정원에 뜻을 전한다. 마찬가지였다. 전·현직 관리의 연명 상소는 근래 금지령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고심 끝에 현직 교리 김한동이 혼자 이름으로 다시 상소를 올렸다. 뜻밖에도 이번엔 받아들여졌다. 드디어 상소의 내용이 전해진 것이다.

그때부터 상황은 급반전된다. 승정원은 곧바로 상소문을 임금에게 올렸다.

연명한 유생과 전·현직 관리 모두 궁궐로 들어오라는 어명이 떨어진다. 밖에서 기다리던 이들이 돈화문 동쪽으로 차례로 들어갔다. 이윽고 주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모습을 드러냈다.


▎북촌댁의 안방은 응접실로 꾸며져 있다. 응접실 한쪽에 진열된 조상들이 사용하던 각종 인장.
승정원이 임금의 교지(敎旨)를 낭독한다. “그대들은 산 넘고 물 건너 천리를 와 충정을 쏟아내니 나의 뜻을 면전에서 알리지 않을 수 없어 그대들을 불렀으니 소두는 전에 올라 상소문을 읽으라.” 이우가 소장을 읽었다. 상소문은 정조의 감정을 흔들어놓았다. 절반쯤 읽었을 때 해가 졌다. 임금은 자주 소매를 들어 눈물을 닦았다. 정조는 목이 메여 말을 못하다가 한참 만에 자세히 말했다.

<정조실록>은 주상의 비답(批答: 상소에 대한 답서)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그 일은 지극히 외경스럽고 중대하고 지엄한 것이며 감히 제기할 수도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 너희들은 의로움이 밝혀지지 않고 형정(刑政)이 거행되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오직 나의 본뜻이 더욱 어두워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소두가 비답을 받고 물러나니 새벽 3시 무렵이다. 주상의 특명으로 통금 시간이 해제됐다.

다음 날인 28일 일기에는 “먼 지방 하찮은 사람들이 이런 두터운 은혜를 입을 줄은 꿈에도 감히 기대하지 못했다”고 적었다. 만인소는 당시 정국을 주도한 노론에 일격을 가했다. 영조 때 유배당한 판서 윤숙은 소청에 편지를 보내 “만인이 한 목소리를 내니 말마다 충정이요, 글자마다 의로움이니 어두운 길에 외로운 촛불”이라고 격려했다. 유생들은 마음을 다 펴지 못했다며 재상소를 추진한다. 5월 7일 두 번째 상소에는 1만386명이 연명했다. 그 사이 사도세자 추모 기간이 시작된다. 21일 사도세자 제삿날이다. 주상은 재상소를 철회하라는 전교를 내린다. 5월 27일 유생들은 안동에서 도회를 열기로 하고 소두 이하 모두 길 떠날 채비를 한다. 일기는 여기서 끝이 난다.

김형수(50) 국학진흥원 연구위원은 “만인소가 사도세자의 신원에는 실패했지만 사건의 본질을 부각시키고 정조의 탕평책에 힘을 실어주었다”고 평가했다. 그와 함께 몰락하다시피 한 남인은 노론이 주도하던 정계에서 존재를 과시할 수 있었다. 영남 사림이 만인소를 통해 결집했다는 것이다.

만인소는 이후 어떻게 작용했을까?


▎1855년 사도세자 신원을 호소하는 영남 만인소. 왼쪽 아래에 작게 선비·유생의 이름이 보인다.
일기를 남긴 류이좌는 만인소를 올리고 2년 뒤인 1794년(정조 18년) 문과에 급제한다. 32세 때다. 당시 과거급제자 명단에 오른 그의 이름은 ‘류태조(柳台祚)’였다. 만인소를 올릴 때도 같은 이름이었다. 이름이 바뀐 내력을 주손 류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정조 임금이 급제자 명단을 보다가 ‘이 자를 부르라’고 명했답니다. 만인소 때 들은 이름이었겠지요. 임금은 여러 가지 질문을 하다가 풍산 류씨면 ‘서애와는 어떤 관계인가’라고 물었답니다.” 서애 후손임을 확인한 정조는 즉석에서 “이름 하나를 주고 싶다”며 “‘태’자를 나란 뜻의 ‘이’로 부르고 끝 이름은 도울 좌를 써서 너는 나를 도우라”고 했다. 새 이름을 하사한 것이다. 그때부터 류태조는 류이좌로 불렸다.

정조는 평소 류성룡의 <서애집>을 읽으면서 나라의 경영에 참고하려 했다. 정조는 서애처럼 나랏일을 떠맡을 수 있는 인재가 나오기를 기다렸는데 마침 그 후손이 급제하자 서애의 음덕으로 여기고 기뻐했다고 한다. 류이좌는 규장각 연구과정인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돼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최측근 신하로 활약한다. 그는 동년배인 정약용 등과 함께 활동하고 임금 곁에서 사초(史草)인 <당후일기(堂後日記)>를 기록했다. 또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필선(弼善) 벼슬을 지낸다.

사도세자는 아들 정조가 열한 살 때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정조는 반대세력의 방해공작에도 왕위에 올라 개혁정책과 탕평을 통해 통합을 추진했다. 만인소 이후엔 재야 사림과 손잡고 다시 개혁 드라이브를 건다. 하지만 1800년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개혁은 물거품이 된다.


▎북촌유거의 뒤뜰에 서 있는 하회마을의 물굽이를 닮은 하회송.
정조 흠모한 노무현 전 대통령 화경당 찾아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가 화경당에 묵은 뒤 직접 그려주었다는 하회송 부채.
주손 류씨는 이야기를 마치자 안채를 나와 건물 하나하나를 안내했다. 별채 북촌유거(北村幽居)로 이어지는 출입구 쪽에 그동안 이 집을 찾은 명사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눈길을 끈 것은 2007년 2월 북촌댁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의 사진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양반탈을 손에 든 채 막 공연을 끝낸 하회별신굿탈놀이 회원들과 함께 웃고 서 있었다. 생전에 정조를 흠모한 노 전 대통령이 군신의 인연을 듣고 직접 찾은 것이다. 개혁 군주와 시민을 꿈꾼 대통령. 그 접점은 무엇일까? 개혁·민의 같은 것이 아닐까. 얼마 전에는 또 노 전 대통령 재임 시절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가 이곳에서 하루를 묵었다고 한다. 유 교수는 북촌유거의 뒷문을 열면 보이는 명물 ‘하회송’을 부채에 직접 그려 남겨 놓았다.

만인소의 민의는 정조의 개혁을 강화시켰다. 224년 뒤 성격은 다르지만 같은 자리에서 최고 권력을 향해 촛불 민심이 외쳐지고 있다.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된 박근혜 대통령은 이제 어떤 선택을 할까. 역사는 시사점을 준다.

- 글 송의호 기자 yeeho@joongang.co.kr / 사진 공정식 프리랜서

[박스기사] 화경당에 담긴 배려의 철학 - 행인에게 화장실 개방하고 소작료도 낮게 책정

안동 하회마을의 화경당(和敬堂)은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는 대표적인 전통 한옥이다. 하회마을의 북쪽에 위치해 북촌댁(北村宅)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화경당은 서애 류성룡의 7대손인 류사춘(1741∼1814)이 충효당에서 분가하면서 지어졌다. 200년쯤 된 집이다.

북촌댁은 요즘 한옥의 본 모습을 찾는 외국인들이 자주 들른다.

“얼마 전 영국인 자매가 묵고 갔는데 까치발로 마루를 다녀요. 이유를 물었더니 그냥 다니면 집이 훼손될 게 아니냐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이 집의 마지막 손님이 됐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류세호 주손은 한옥의 원형을 고집한다. 편리하도록 한옥에 서양식 화장실·주방을 들이는 건 절대 반대다. 그건 껍데기만 한옥이란 것이다. 한옥의 소재는 흙과 나무임을 강조한다.

외국인이 오면 화장실과 세면대는 불편하지만 방에서 멀리 떨어져 밖에 있다는 걸 안내한다. 그러면서 류씨는 “물을 많이 쓰는 공간은 목조건물 특성상 썩지 않도록 따로 배치한다”고 설명한다. 손님이 들면 군불을 직접 지핀다.

숙박비는 1박에 10만원. 별채인 4인용 북촌유거를 다 쓰면 100만원이다.

노비 거처를 담장 밖에 배치한 이유

화경당은 건물 구조에 배려의 철학이 담겨 있다. 화장실인 측간은 대문채 우측 담장에 붙어 있다. 건물 안팎에서 사용할 수 있다. 길 가는 사람들도 이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 대문채엔 노비가 기거하는 방이 없다. 노비들의 거처를 담장밖에 배치해 저녁이 되면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한 것이다.

주손 류씨는 화경당에 내려오는 더불어 사는 정신을 더 강조한다.

1859년 여름 홍수 때다. 하회마을 강 건너 부용대 쪽에서 건너오던 배가 뒤집혔다. 문상객 수십 명이 타고 있었다. 저녁이라 사방은 컴컴했다. 마침 강변에는 경상도 도사를 지낸 류도성이 집을 지으려고 쌓아 둔 춘양목이 있었다.

사람을 구하기 위해 구명보트 대신으로 춘양목을 던져 넣었다. 불을 밝히는 화목으로도 사용했다. 그렇게 해서 많은 목숨을 구했다. 이 집은 소작료도 낮게 받았다. 다른 부자는 6할을 받았지만 5할을 받고 더 어려우면 4할만 받았다. 나라를 잃고는 5대조와 고조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201701호 (2016.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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