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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의 종교 이야기(9)] 구원의 여명 밝힌 ‘미 국민의 대표자’ 토마스 머튼 

“진흙더미 같은 내 위에 귀하의 삶을 쌓지 마시오” 

김환영 중앙일보 논설위원, 정치학 박사
<칠층산(七層山)> 저술로 위기의 시대 삶에 대한 해답 제시… ‘사기꾼’에 불과, 유명해지려는 열망만 강했을 뿐이라는 비판도

▎토머스 머튼은 현대의 대표적인 영적 스승으로 꼽힌다. 그는 트라피스트회 신부, 작가, 평화 인권운동가였다. 성모 마리아상 아래에 앉은 한 가톨릭 신도가 간절히 기도를 올리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정치인들에게 ‘공(功)은 공대로 과(過)는 과대로’라는 원칙을 적용하자는 주장이 있다. 공을 업적으로 인정하고 과는 교훈으로 삼자는 말이다. 신앙인들에 대해서도 공과를 모두 고려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허물은 신앙인들이 평생 쌓은 공든 탑을 무너뜨린다’라고 봐야 할 것인가? 정치와 종교는 다르다. 영역이 다르다. 하지만 정치와 종교는 서로 만날 때가 있다.

역대 교황은 사실 매우 ‘정치적’인 인물들이다. 어쩌면 그들은 싫어도 정치적인 인물이 돼야만 한다. 그들은 가톨릭 교회라는 거대한 조직을 이끌어야 한다. 그들은 바티칸 시국의 국가원수다. ‘세계 가톨릭 제국의 황제’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래서 황제를 연상시키는 교황(敎皇) 대신 교종(敎宗)이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교황은 위기 속에서도 최소한 현재의 교세를 유지하고 가능하면 교세를 팽창해야 한다. 교황도 세속의 정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유산(legacy)을 남겨야 한다. 교황의 연설은 최고 정치 지도자의 연설에 상응하는 기능을 한다. 가톨릭 신자라고 모두 교황의 말에 절대 복종하는 것은 아니다. 가톨릭 교회 내에도 상대적인 보수와 진보가 있다. 교황이 말 한마디 잘못하면 보수·진보 양 캠프 간의 갈등이 심화될 수 있다. 교황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어떤 놓치기 쉬운 깊은 뜻이 담겨 있을 수 있다.

“기도하는 사람, 영혼과 교회의 새 지평 열었다”


▎달라이 라마가 2010년 5월 24일 자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자신과 토머스 머튼의 만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세계 13억 가톨릭 신자의 지도자인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9월 24일 미국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네 명의 미국인 이름을 언급했다. 에이브러햄 링컨(1809~65) 미국 제 16대 대통령, 민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1929~68) 목사, 가톨릭 사회운동가 도러시 데이(1897~1980)와 가톨릭 사상가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 1915~68)이었다. 교황의 관점에서 보면 이 네 명이 “미국 국민의 대표자”였다.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교황은 토머스 머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머튼은 무엇보다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시대의 확신에 도전하는 사상가로서 영혼들과 교회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그는 또한 대화하는 사람이었으며 사람들이나 종교들 간에 평화를 증진시키는 사람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왜 굳이 미국을 대표하는 네 명의 인사 중 도러시 데이와 2015년이 탄생 100주년이었던 토머스 머튼을 포함시켰을까. 어쩌면 교황은 미국이 개신교뿐만 아니라 가톨릭의 나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상기시키려고 했는지 모른다. 미국 인구 중 약 20%, 7000만 명이 가톨릭 신자다.

토머스 머튼은 G. K. 체스터턴(1874~1936), 자크 마리탱(1882~1973), 에디타 슈타인 성녀(1891~1942), 도러시 데이 등과 함께 가장 유명한 20세기 가톨릭 작가다. 종교·영성 분야뿐만 아니라 민권운동, 비폭력, 미소 군비경쟁, 환경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70여 권의 책을 썼다. 신학·문학·역사학·평화연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그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또 미국의 대학들은 그의 삶과 글에 대해 가르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나 미국에서 지금은 올드팬들을 제외하고 일반인들에게 그는 좀 낯선 인물이다. 양국에서 그는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인 <칠층산(The Seven Story Mountain)>으로 유명하다. 베스트셀러·스테디셀러를 넘어 고전이 된 책이다. 1946년 31세에 탈고(脫稿)하고 1948년 출간한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 중 1915에서부터 1944년까지를 다뤘다.

머튼은 1915년 프랑스 프라드에서 태어났다. 뉴질랜드 출신인 아버지 오언과 미국 출신 어머니 루스는 모두 화가였다. 머튼은 조실부모했다. 어머니가 6세 때 위암으로, 아버지는 16세 때 사망했다. 머튼은 케임브리지대(1934~35)에서 공부하다가 컬럼비아대(1935~39)로 옮겨 영문학 학사·석사를 받았다.

‘20세기판’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의 <고백록>이라 불리는 <칠층산>의 주제는 행복이다. 그는 1942년 미국 켄터키 루이스빌 인근에 있는 게스세매니 트라피스트회 대수도원에 입회함으로써 행복을 찾았다. 1949년에는 신부로 서임(敍任)됐다. 수많은 미국 젊은이가 <칠층산>의 영향으로 기도하고 명상하는 삶을 살기 위해 수도자가 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지만 냉전 시대가 개막했다. 핵무기로 인해 전 인류가 공멸할 수 있는 위기의 시대에 사람들은 삶의 의미에 대한 해답을 찾았고 많은 사람에게 <칠층산>은 구원의 여명이었다.

<고백록> 이래 서구의 고백록·참회록 전통에서 자서전은 자신을 미화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는 수단이다. 대중과 독자들을 향한 고해성사다. <칠층산>의 초고 또한 ‘지나치게 솔직’했기에 수도원 고위층의 지적에 따라 일부 내용이 삭제됐다.

바람둥이이자 공산주의자였던 ‘신부님’


▎토머스 머튼의 생전 모습. 그는 사제(司祭)가 되기 전 혼외 자식을 둔 바람둥이였다.
자신의 술회에 따르면 머튼은 수도자가 되기 전까지 남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자기 중심적이고 무절제하고 육체의 쾌락에 탐닉하는 바람둥이였다. 혼외 자식을 뒀다. 한때 공산주의 운동에도 가담했다. 자신이 불행한 이유는 잘못된 사회 체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가 그의 인생 모토였다.

어느 날 미사에 참석하고 ‘갑자기’ 행복하게 됐다. 삶에 대해 만족하게 됐다. 어렸을 때 성공회에서 세례를 받은 머튼은 1938년 11월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도러시 데이 또한 성공회에서 개종했다)


▎<칠층산>의 한국어판 표지와 영문판 표지. / 사진·중앙포토
머튼의 시대는 지금보다 오히려 더 종교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아이러니다. <뉴욕타임스>는 <칠층산>이 종교 서적이라는 이유로 주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리지 않았다. 하지만 대중은 케임브리지대·컬럼비아대에서 공부한 수재가 가톨릭에 귀의한 이유가 궁금했다. 반응이 열광적이었다. 얄궂게도 세월이 흐른 후 머튼은 <칠층산>이 자신에게 낯설다고 말했다. 1953년에는 “<칠층산>은 내가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쓴 작품”이라고 했다. 전 세계 15개 언어로 번역돼 수백만 권이 팔렸지만 가난을 허원(許願)했기 때문에 인세는 한 푼도 받지 않았다. 풍족하게 된 것은 그가 아니라 그가 소속한 수도회다.

명사가 된 머튼은 <의사 지바고>로 유명한 러시아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1960), 폴란드 출신 노벨 문학상 수상자 체스와프 미워시(1911~2004),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1900~80), D.T.스즈키(鈴木大拙 貞太郎, 1870~1966), 달라이 라마, 베트남의 틱낫한 스님 등 세계의 수많은 명사와 교유했다. 켄터키에 있는 토머스머튼연구센터에 가면 그가 보냈거나 받은 서신 1만 개가 보관돼 있다.

달라이 라마는 2010년 5월 24일 <뉴욕타임스>에 실린 “신앙은 여럿, 진리는 하나(Many Faiths, One Truth)”라는 기고문에서 이렇게 썼다. “머튼이 내게 말하길 자신은 그리스도교에 완전히 충실하면서도 불교와 같은 다른 종교에 대해 깊이 있게 배울 수 있다고 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기에 나는 열렬한 불교도이지만 세계의 다른 종교로부터 배운다.”

사실 회심(回心)은 머튼에게 단 한 번에 그치는 게 아니었다. 그는 ‘종교간 대화의 혁신가(interfaith ni novator)’로도 불린다. 그는 유대교·이슬람·힌두교·자이나교·유교·도교 등 다른 종교들을 섭렵했다. 다른 종교들과 그리스도교 사이에 공통의 진리가 있다고 믿었다. 타종교의 교리나 제도보다는 타 종교들이 ‘나’를 향해 어떻게 접근하는지에 대해 종교 체험의 차원에서 관심을 뒀다.

유대교·이슬람·힌두교·유교·도교 등 두루 섭렵


▎토머스 머튼의 무덤. / 사진·중앙포토
특히 가톨릭과 다른 종교들의 신비주의 전통의 유사점을 파고 들었다. 그는 다른 종교들, 특히 동양 종교들이 그리스도교를 보완할 수 있다고 봤다. 머튼은 불교, 불교 중에서도 선불교(禪佛敎), 선불교보다는 참선(參禪) 자체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참선을 통해 그리스도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망 전날 머튼은 “참선과 그리스도교가 미래”라고 말한 것으로 전한다.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다’고 보는 상당수 크리스천 입장에서 보면 머튼은 헛수고를 한 것이다. 머튼은 그들에게 혼합주의와 상대주의를 상징한다.(머튼은 ‘중국식 상대주의’로 유명한 장자에 대해 <장자의 길(1969)>을 썼다.)

머튼이 20세기 가톨릭 영성(靈性)의 스타로 떠오를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가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비(非)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은 가톨릭 교회가 “타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성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는다”며 “그들 안에서 발견되는 정신적 혹은 윤리적 선과 사회적 내지 문화적 가치를 긍정하고 지키며 발전시키기를” 권고했다.

동양 종교에 대한 머튼의 관심과 저작은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의 모범적인 실천 사례였다. 머튼은 가톨릭을 젊은이들이 ‘쿨(cool)’하게 여기도록 만드는데 일조했다. 하지만 머튼은 어쩌면 가톨릭의 테두리를 넘어버렸다. 특히 말년으로 갈수록 그러했다. 그를 ‘선불교 신자’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타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성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뒤집으면 “타 종교에서 발견되는 그릇되고 성스럽지 않은 것은 모두 배척한다”는 말이 된다. 정통주의자들이 보기에는 머튼이 타종교의 ‘잘못된’ 점까지 수용했다.

1960년대에 그는 반전운동·평화운동·민권운동 등 사회운동의 양심으로 떠올랐다. 머튼은 환경주의를 수용한 최초의 가톨릭 사상가 중 한 명이다. 그는 자연을 사랑하고 찬양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의 ‘정치적’ 활동을 비판했다. ‘정치’는 수도자, 특히 묵언정진(默言精進)을 강조하는 전통으로 유명한 트라피스트 수도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27년에 걸친 그의 수도자 생활은 의외의 사건으로 끝났다. 1968년 그는 태국 방콕에서 개최된 종교간 수도자 대화 모임에 참석하러 갔다가 감전사했다. 53세. 일부 연구자와 전기 작가는 그가 암살당했거나 혹은 자살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반전운동·평화운동 등 사회운동의 양심으로


▎기도하는 트라피스트 수도자. / 사진·중앙포토
1966년 51세 때 척추수술을 위해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는 25세 견습 간호사인 마지 스미스와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나 마지에게 베트남전에 참전하고 있는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은 둘의 사랑을 막지 못했다. 수도회 입회 후 줄곧 일기를 써온 머튼은 둘의 사랑을 일기에 기록했으며 머튼의 일기는 1990년대에 출간됐다. 그의 일기에 나온 마지는 “나를 완전하게 만든 내 인생의 기적”이었다. 둘의 관계는 정신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에로틱’했다. 머튼은 수도회에 남아 있기로 결심하고 마지에게 받은 편지들을 불태웠다. 마지는 결국 약혼자와 결혼했다. 자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랑을 이루지 못한 ‘후회’를 이유로 든다.

<칠층산>은 단테(1265~1321)의 <신곡>(1321)에 나오는 연옥에 있는 산을 지칭한다. 천국·지옥·연옥이라는 게 있다면, 머튼은 마지를 통해 천국의 길로 간 것일까. 아니면 지옥으로 떨어진 것일까.

많은 이에게 머튼은 영웅이며 또 ‘예언자’다. 하지만 머튼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 중에는 머튼이 ‘행복한 척하는 사기꾼’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머튼은 사실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누리지 못했으며 유명해지려는 열망이 지나치게 강했다는 평가도 있다.

예언자는 제자를 거느릴 만하다. 어떤 젊은이가 머튼에게 제자가 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 머튼은 이렇게 답신을 보냈다. “그런 시도는 하지 마십시오. 나는 제자가 없고 제자를 바라지 않습니다. 나 같은 진흙더미 같은 사람 위에 귀하의 삶을 쌓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십시오.”

위에서 제기한 질문으로 돌아가자. 프란치스코 교황은 왜 굳이 네 명 중 토머스 머튼을 포함시켰을까. 또 도러시 데이가 포함된 이유는 무엇일까. 도러시 데이는 사회주의자였다. 토머스 머튼은 타 종교에 대해 개방적인 사상가였다. 현 교황은 어떤 때는 매우 보수적이고 어떤 때는 매우 진보적이다. 그가 미국 상하원 합동 연설문에서 토머스 머튼과 도러시 데이를 부각시킨 것을 허투루 보면 안 된다. 20세기에 사회주의와 타 종교들은 가톨릭 교회에 상당한 도전이었다. 데이와 머튼을 언급한 것은 21세기 가톨릭 교회의 자신감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토머스 머튼은 이런 음미해볼 만한 ‘말’들을 했다!

● 인간에게 최대의 유혹은 지나치게 작은 것에 만족하는 것이다.

● 우리는 우리가 추구하는 그것을 갖게 된다. 우리가 추구하는 그것은 항상 거기에 있다. 우리가 그것에 충분이 시간을 준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자신을 알릴 것이다.

● 어쩌면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하다.

● 모든 인간이 인생에서 체험하는 모든 순간과 모든 사건은 그들의 영혼에 뭔가를 심는다.

● 즐거운 고독은 미래의 희망이 아니다. 지금 고독을 찾지 않으면 영원히 찾을 수 없다.

●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와 평화롭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와 평화를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느님과 평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하느님보다는 우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 사실 이성은 신앙으로 이끄는 길이다. 이성이 더 이상할 말이 없을 때 신앙이 이성의 자리를 차지한다.

● 미래의 ‘되어야 할 우리’가 곧 ‘오늘의 우리’다.

김환영 - 김환영 중앙일보 심의실장 겸 논설위원. 외교부 명예 정책자문 위원. 단국대 인재 아카데미(초빙교수), 한경대 영어과(겸임교수), 서강대 국제대학원(연구교수)에서 강의했음. 서울대 외교학과 학사, 스탠퍼드대 중남미학 석사, 스탠퍼드대 정치학 박사. 쓴 책으로 <마음고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만나다>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등이 있다.

201701호 (2016.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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