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북한.국제

Home>월간중앙>정치.사회.북한.국제

[입체분석] 核도박 김정은의 노림수 

크게 배팅해야 생존?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김정은, 핵실험 제재 정면돌파 위해 인도·파키스탄 사례 읽었을 것··· 핵협력협정 맺고 강대국의 전략적 가치 이용사례 롤모델로 삼았을 가능성 높아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올해 2월 12일 새 중장거리 전략탄도미사일 북극성 2형 시험발사 장면을 참관하고 있다. / 사진캡처·노동신문
한반도 정세가 격랑에 휩싸였다. 북한의 6차 핵실험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미국 존스홉킨스대 한미연구소의 북한 전문 웹사이트 ‘38노스’는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의 핵실험장을 촬영한 4월 12일자 상업 위성사진을 분석해 “풍계리 핵 실험장이 ‘장전, 거총’ 상태”라고 전했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명령만 내리면 언제든 핵실험을 할 수 있도록 6차 핵실험 준비를 마친 상태라는 이야기다. 위성사진을 분석하면 풍계리에 있는 2200m 높이의 만탑산 북쪽 갱도에서 핵실험 준비가 이뤄지고 있다. 이에 따라 북한의 6차 핵실험이 임박했다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커진 것이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의 6차 핵실험을 ‘레드라인’으로 설정하고 이를 넘을 경우 군사적 타격을 포함한 강력 대응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은 4월 7일 1차 무력시위를 벌였다. 시리아에서 화학무기 공습을 벌인 것으로 보이는 정부군의 공군기지를 59발의 토마호크 순항미사일로 공격한 것이다. 순항미사일은 지중해에 배치된 구축함 포터함에서 발사돼 시리아 내륙으로 향했지만 여기에는 분명히 북한을 향한 ‘화학냄새 나는’ 경고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뿐만 아니다. 4월 13일에는 비핵무기로는 최고 화력을 지닌 GBU-43/B 폭탄을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극단주의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의 주요 시설에 투하했다. 무게 9.5t으로 TNT 11t의 위력이 있는 이 폭탄은 지상 3m 상공에서 폭발해 주변 550m를 초토화하는 가공할 파괴무기체계다. 미국이 이 폭탄을 실전에 투하하기는 처음이다. 아프가니스탄의 IS 기지가 아무리 위협적이라도 이런 무서운 무기를 투입할 이유는 쉽게 찾기가 힘들다. 북한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넘어 북한에 대한 예방적 폭격을 할 경우 사용할 무기를 사전에 시험해 보는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미국이 북한 눈 앞에 앞으로 사용할 카드와 무기체계 목록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야말로 ‘강 대 강’이 부딪히는 형국이다.

6차 핵실험 ‘레드라인’, 미국 강력대응 메시지


▎1998년 5월 인도의 5연속 핵실험 직전의 샤크티 1 핵폭탄. / 사진·중앙포토
중국도 1단계 교역중단, 2단계 석유 공급 중단, 3단계 금융거래 중단이라는 대북 압박 카드를 사용할 가능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결심과 행동을 이끌어내기 위해 중국을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하지 않겠다는 당근을 제시하고 있다. 남은 것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 시 주석의 결심뿐이다.

한반도에서는 치열한 정보전쟁도 동시에 벌어지고 있다. 우리 군과 정보당국은 상업위성이 촬영한 영상보다 훨씬 고해상도인 미국 군사위성의 영상·신호 정보를 제공 받아 공유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을 맺은 일본으로부터도 위성정보 등을 제공받고 있다. 위성정보 수집능력에서 우리보다 한 수 위인 일본은 한반도 주변에 4기의 정지위성을 운용하며 북한을 샅샅이 들여다보고 있다. 우리 군과 정보당국도 영상정보를 수집하는 금강, 신호정보를 수집하는 백두를 띄워 공중에서 북한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대북 감청부대도 비상 가동해 북한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서울에 미국과 일본, 중국 등의 정보요원들이 이미 입국해 활동 중이라는 첩보도 전해진다. 서울 광화문의 미국대사관, 명동의 중국대사관, 중학동의 일본대사관의 통신량도 급속도로 늘고 있다는 소식이다.

문제는 북한의 숨은 의도다. 달라진 미국, 달라진 중국 앞에서 마주 보고 달리는 기관차 같은 상황을 연출하는 노림수는 무엇일까. 북한의 노림수를 살필 때 반드시 생각해야 할 점이 핵과 장거리미사일로 도발하는 북한에 대한 상반된 두 가지 시각이다. 국제사회에선 이와 관련해 상반된 두 가지 시각이 존재한다. 어디를 따르냐에 따라 대처방안이 달라진다.


▎2006년 3월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의 인도 방문은 양국 관계에 획을 긋는 일대사건이었다. / 사진·중앙포토
하나는 ‘이성을 잃은 행동’이라는 주장이다. 국가의 기본적인 책무인 국민의 먹고 사는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처지에 제한된 내부 자원을 핵과 장거리미사일 개발에 쏟으면서 ‘강성대국’이나 ‘핵경제 병진정책’을 외치는 것은 정상적인 국가의 사고방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로 우파들이 북한을 보는 시각이다. 정상적이 아니기 때문에 협상이나 치료가 아니라 벌을 줘야 한다는 시각이다.

또 다른 시각은 북한 정권이 ‘김씨 왕조 유지’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철저히 계산되고 계획된 행동을 계속하고 있다는 시각이다. 상황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북한은 ‘서울 불바다’를 외치며 한국을 볼모로 잡고, ‘순망치한론’을 주장하며 중국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긴다. 그러면서 미국에는 양자 협상을 요구하는 것이 기본 전술이라는 주장이다. 북한은 이 두 가지 중 어디에 해당할까?

북한을 자세히 분석하면 아무래도 둘째 시각이 타당해 보인다. 북한은 오래전부터 핵개발을 체제 유지를 위한 핵심 전략으로 삼아온 흔적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북한은 이미 2012년 4월 13일 최고인민회의에서 개정한 헌법의 서문에 “김정일 동지께서는… 선군정치로 김일성 동지의 고귀한 유산인 사회주의 전취물을 영예롭게 수호하시고 우리 조국을 불패의 정치사상강국, 핵보유국, 무적의 군사강국으로 전변 시키시었으며 강성국가건설의 휘황한 대통로를 열어놓으시었다”는 부분을 추가했다. 헌법에 ‘핵 보유국’임을 아예 못 박은 것이다. 지난해 5월 제7차 당대회에서도 ‘핵강국’이라는 표현을 여러 차례 사용하면서 핵에 대한 집착을 노골화했다. 주목할 점은 당 대회 결정서에 “핵무기의 소형화·다종화를 높은 수준에서 실현하고 우리 조국을 ‘동방의 핵대국’으로 빚어내 나갈 것”이라고 명시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북한이 노리는 것은 인도나 파키스탄 같은 ‘사실상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 받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눈여겨볼 대목이 하나 더 있다. 최근 북한은 풍계리에 여러 개의 핵실험용 지하갱도를 파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여러 발의 핵실험을 동시에 하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북한은 2006년 10월 9일, 2009년 5월 25일, 2013년 2월 12일, 2016년 1월 6일, 2016년 9월 9일 등 지금까지 1~5차 핵실험을 하면서 한 번에 한 발씩의 핵폭탄을 터뜨렸다. 기술적 완성도를 살펴보는 의도가 엿보인다. 문제는 1~3차까지는 3~4년이던 핵실험 간격이 지난해에는 8개월로 줄었다는 점이다. 올 4월 중 6차 핵실험이 이뤄지면 7개월 만이다. 그만큼 북한이 핵 기술에 자신감이 붙었다는 이야기다.

북한은 1·2차에선 플루토늄탄을 사용했던 북한은 3차에선 고농축우라늄을 사용했으며 4차에선 수소폭탄 실험을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폭발력을 높인 증강핵분열탄을 사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지난해 9월의 5차 핵실험에선 핵폭발 규모가 10㏏ 수준으로 핵무기 완성에 접근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에 따라 이번에는 20㏏ 이상의 폭발 규모로 플루토늄탄·우라늄탄·증강핵분열탄 등 여러 종류의 핵폭탄을 동시다발적으로 터뜨릴 것으로 전망된다. 북한이 말한 ‘다종화’의 ‘높은 수준에서의 실현’을 이번에 입증해 보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모든 핵무기에 대한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주겠다는 것은 실질적인 핵보유국으로 인정해 달라는 말로 풀이할 수 있다.

위험한 것은 소형화다. 소형화는 장거리미사일에 장착해 미국까지 보낼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겠다는 뜻이다. 트럼프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 다만 이번에 실험을 하더라도 소형화까지 이뤘는지는 파악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북한이 핵문제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을 롤모델로 삼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1998년 5월 다종의 핵폭탄을 한꺼번에 터뜨려 핵능력을 입증했다. 이후 급변하는 글로벌 정세를 틈타 제재를 피하고 실질적인 핵보유국으로 인정 받아 미국의 협력과 지원을 받고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사례를 살펴보자.

2006년 부시, 인도와 핵협력


▎1998년 5월13일 지하 핵실험을 강행한 인도 정부가 같은 달 17일 처음으로 공개한 샤크티-1 핵실험장소. / 사진·중앙포토
인도는 1998년 5월 북부 라자스탄주 타르 사막의 포크란 핵실험장에서 다섯 차례 진행한 핵실험을 통해 실질적인 핵능력을 입증했다. 인도는 1974년 ‘미소짓는 부처’라는 암호명으로 첫 핵실험을 한 뒤 24년간 침묵했던 전력이 있다. 그러다 힌두민족주의정당 BJP의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 총리 집권 시절인 1998년 포크란 핵실험장에서 ‘샤크티(위력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작전’이란 이름의 핵실험을 했다. 5월 11일 세 발을 연속으로 터트린 뒤 13일 추가로 두 발을 더 터트렸다. 인도의 핵능력을 전 세계에 보여준 핵실험이었다. 바지파이 총리는 즉시 기자회견을 열고 인도가 핵보유국임을 선언했다.

미국은 인도를 상대로 혹독한 경제·군사 제재를 가했지만 인도는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당시 인도는 개방경제 체제가 아니라서 제재 효과도 떨어졌다. 이는 북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인도는 애초에 핵비확산조약(NPT)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재에도 한계가 있었다. NPT 회원국으로서 평화적 핵 기술을 일정 부분 전수받은 뒤 탈퇴하고 핵무기 개발에 매달린 북한과는 제재 수준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인도는 미국에 커다란 전략적 가치가 있었다. 바로 중국 견제다. 인도는 1962년 10월 10일부터 11월 21일까지 눈 덮인 고산지대에 있는 국경을 놓고 중국과 전쟁까지 벌였다. 중국은 8만의 병력을 동원했으며 1만여 명을 동원한 인도는 1383명의 사망자, 1696명의 실종자를 내면서 패배했다. 이렇게 중국과 구원(舊怨)이 있기 때문에 인도는 미국의 구애를 받을 수 있었다.


▎인도 압둘 칼람의 이름을 딴 압둘칼람 섬의 발사장에서 인도가 자체 개발한 탄도탄요격미사일이 발사되고 있다. 인도판 사드(THAAD)에 해당한다. / 사진·중앙포토
게다가 인도는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 소리를 들으며 선거를 통한 의회 민주주의 제도를 유지한 덕분에 미국으로부터 민주주의 가치 동맹으로 평가 받았다. 이에 따라 2000년 3월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이 인도를 방문해 양국 간 ‘비전 선언문’을 발표했다. 같은 해 9월에는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 인도 총리가 미국을 찾아 양국 관계는 새로운 진전을 이뤘다. 힌두민족주의자인 바지파이 총리는 경제성장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폈다. 이를 위해선 미국이 필요했으며 미국은 중국 견제를 위해 인도가 필요했다.

클린턴의 뒤를 이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더욱 적극적으로 인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했다. 이에 따라 양국간 고위급 인사 교류가 줄을 이었다. 특히 2001년 9·11사태 이후 미국은 인도와 군사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2001년 11월 도널드 럼스펠드 미국 국방장관이 인도를, 2002년 1월에는 조지 페르난디스 인도 국방장관이 미국을 교차 방문하면서 군사교류의 물꼬를 텄다. 핵실험으로 인한 제재는 옛날 일이 됐다.

심지어 2004년 1월 부시와 인도의 바지파이 총리는 정상회담 뒤 양국 관계를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규정하고 민간 원자력 에너지 개발, 민간 우주개발, 첨단기술 이전, 미사일 방어 등 4대 분야에서 협력하기로 약속했다. 2005년 7월 만모한 싱 총리가 방미해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면서 양국 관계를 ‘글로벌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고 인도의 핵에너지 개발 협력을 위한 미국의 적극적 지원과 미국 무기 구매 등 한 차원 높은 협력에 합의했다.

2006년 3월 부시 대통령의 인도 방문은 양국 관계에 획을 긋는 대사건이었다. 원자력 협력을 약속한 것이다. 핵무기를 개발했다가 제재를 받은 나라에 핵폐기를 약속 받지 않고 핵기술을 넘겨주는 등 핵협력을 하기로 한 것이다. 미국 하원은 2006년 7월 원자력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인도와의 민간 원자력 협력을 가능하게 했다. 미국은 인도에 원자력 발전소용 핵연료와 관련 핵기술을 넘겨줄 수 있게 했다. 뿐만 아니라 군사 협력관계도 강화해 인도에 미국 무기체계를 팔기로 했다. 소련 및 러시아와 협력해 전투기·전차·미사일 등을 공급받거나 합작 개발해온 인도는 이후 고성능 미국 무기의 구매자로 변했다. 인도는 공군력의 핵심인 126대의 신형 다목적 전투기 도입은 물론 9억6000만 달러 상당의 미군 C-130J 수송기 6대 도입, 18억1000만 달러의 장거리 해상정찰기 P-8i 8대 도입, 1억7000만 달러의 하푼(Harpoon) 대함미사일 도입은 물론 인도의 미사일 방어체제 구축에 PAC-Ⅲ 기술이 참여키로 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미국과 협력하고 있다. 이후 인도는 미국과 경제 협력과 무역 증진, 에너지 안보·청정 개발, 우주분야 협력, 군사분야 협력 협정 체결, 대량살상무기(WMD) 확산 방지 공동노력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인도 군함이 동중국해에 진출해 미국 및 일본과 연합 해상군사훈련을 한 뒤 한국의 부산 해 군작전사령부까지 방문했다. 1998년 핵실험으로 미국을 분노하게 한 인도는 불과 10년이 되지 않아 미국으로부터 핵기술과 연료를 공급받는 정상적인 관계를 이룬 것이다. 북한은 이런 상황을 눈여겨 보고 있을 것이다.

북-파키스탄 핵기술 교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15개 이사국 대표들은 1998년 7월 6일, 인도와 파키스탄의 추가 핵실험 금지와 핵무장계획 중단 및 핵확산금지조약에 서명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 사진·중앙포토
파키스탄도 북한이 적극적으로 참조할 수밖에 없는 나라다. 파키스탄은 북한과 핵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오랫동안 협력해왔다. 지난해 인도 언론은 파키스탄이 유엔의 대북제재를 어기고 핵분야로 전용할 수 있는 이중용도물품을 북한에 공급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위원회의 전문가 패널은 핵과 관련한 유엔 제재 대상인 북한의 장영선과 김영철이 2012년 12월부터 2015년 10월까지 적어도 28회에 걸쳐 파키스탄을 방문했다고 보고했다. 양국간 핵과학자 교류가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다. 파키스탄은 1995년 핵협력협정을 맺고 파키스탄의 핵기술과 북한의 미사일 기술을 서로 맞바꿔온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파키스탄과 북한이 서로 손잡고 핵개발에 나선 정황은 한둘이 아니다. 전 세계 9개국에 이르는 핵보유국 가운데 유일한 무슬림 국가인 파키스탄은 일찍이 1972년 1월 핵 개발을 시작했다. 당시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는 핵과학자 무니르 아마드 칸 박사에게 1976년 말까지 핵개발을 완료할 것을 지시했다. 칸 박사는 파키스탄 핵에너지 위원회(PAEC) 위원장으로서 PAEC 산하의 20개가 넘는 실험실을 가동하며 핵 개발을 지휘했다. 하지만 핵 개발은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으며 핵분열 물질 생산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자 부토는 1974년 말 유럽에 있던 압둘 카디르 칸 박사를 초빙했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원심분리기를 이용한 핵물질 생산기술을 몰래 들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핵기술을 확보한 파키스탄이 이를 북한과 공유했다는 정황이 적지 않다. 북한도 원심분리기를 활용해 핵물질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파키스탄은 1998년 5월 28일 발루치스탄의 창가이 지역에 있는 라스코힐에서 다섯 발의 핵폭탄을 동시에 터뜨리는 핵실험을 했다. 암호명 ‘창가이1’로 불리는 핵실험은 1980년대 계엄령 당시 이 지역에 파놓았던 지하 터널에서 이뤄졌다. 이어 이틀 뒤인 5월 30일 발루치스탄의 하란 사막에서 한 발의 핵폭탄을 추가로 터뜨리는 핵실험을 했다. 암호명 ‘창가이2’로 불리는 핵실험이었다. 두 차례에 걸쳐 모두 6회의 핵실험을 한 파키스탄은 핵능력을 사실상 인정받았다. 당시 서방 정보당국은 5월 30일의 둘째 핵실험이 북한과의 공동실험이었을 가능성을 의심했다.

파키스탄도 인도처럼 핵실험 뒤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제재를 받았다. 인도처럼 NPT 회원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재의 강도도 대단하진 않았다. 게다가 파키스탄은 냉전기간 중 미국의 남아시아 동맹국이었다. 미국은 소련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파키스탄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1974년 앙숙인 인도의 첫 핵실험 뒤 파키스탄이 핵개발에 나선 징후를 보이자 제재를 취했다. 파키스탄의 핵개발은 1971~73년 대통령을 지내고 1973~77년 총리를 지낸 줄피카르 알리 부토가 주도했다. 하지만 부토는 친미 무하마드 지하울하크 장군의 쿠데타로 실각했다가 1979년 군사정권에 의해 사형에 처해졌다. 처형 직전 부토는 자신이 핵개발을 했기 때문에 미국의 미움을 사서 목숨을 잃게 됐다는 생각을 털어놓은 것으로 전해졌다.

파키스탄은 1979년 소련이 이웃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전략적 가치가 더욱 높아졌다. 전쟁은 1989년까지 이어졌으며 소련 붕괴에 한몫했다. 미국은 심지어 우라늄 농축과 관련한 제재까지 해제하면서 파키스탄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파키스탄은 아프가니스탄으로 건너가 소련과 싸우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몰려든 무자히딘(이슬람전사)으로 북적였다. 미국과 파키스탄은 서로 손잡고 이들을 훈련시켜 전사로 키웠다. 그런 다음 부패한 동유럽 국가에서 빼돌린 소련제 무기로 이들을 무장시켜 아프가니스탄에 보내 소련군과 싸우게 했다.

탈레반 공격하는 미 CIA 무인기도 파키스탄서 발진


▎2002년 파키스탄 카라치 주민들이 자체 핵실험 성공 4주년을 맞아 미사일 모형물을 에워싸고 축하행사를 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미국은 핵실험을 한 파키스탄을 더 이상 몰아세울 수가 없었다. 파키스탄은 인도를 견제할 의도가 있었던 중국으로부터 원자로와 핵물질 농축시설을 들여왔으며 원심분리기 핵심부품을 공급받기도 했다. 파키스탄은 소련 견제 목적의 미국과 인도 견제 목적의 중국 사이를 줄타기하며 핵기술을 축적했다. 파키스탄은 절묘하게 미국과 중국을 이용하며 실리를 취했다. 그 결과 인도가 핵실험을 하자 즉각 핵실험으로 맞설 수 있었던 것이다.

핵실험으로 껄끄러워졌던 미국과의 관계도 자연스럽게 회복됐다. 2001년 9·11테러가 발생하면서다. 1989년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면서 파키스탄을 떠났던 미군은 9·11을 계기로 파키스탄에 돌아왔다. 미국은 2001년 10월 7일 탈레반이 지배하는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파키스탄은 내륙 국가 아프가니스탄에 미군이 접근하기 위한 군수와 작전의 후방기지 노릇을 했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서부의 파슈튠족 자치지구의 탈레반 세력을 공격하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무인기도 파키스탄에서 발진했다. 1998년 핵실험으로 인한 미국의 제재는 3년이 가지 못했다.

북한은 이러한 인도와 파키스탄에서 크게 배웠을 가능성이 크다. 지정학적 가치와 조변석개하는 국제정세를 잘만 이용하면 핵개발로 인한 제재 정도는 언젠가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북한은 이번에 다종 핵실험을 동시에 실시해 사실상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으려고 할 태세다. 그런 다음 핵군축을 내세워 미국과 양자대화를 추구할 것이다. 나아가 주한미군 철수를 비롯한 한미동맹의 분열을 시도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북한의 숙원인 남조선 점령의 길을 열어줄 절호의 기회다. 김일성 주석은 1968년 2월 8일에 “우리 인민 군대의 장래 임무는 공화국 남반부를 해방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당시 2월 8일은 조선인민군 창건일이었다. 1975년 김일성 우상화의 일환으로 1932년 4월 25일 빨치산 부대를 조직한 날을 군 창건일로 새로 정했다. 군 창건일에 했던 김일성의 발언은 3대 세습이 이뤄진 김정은 시대인 지금도 유효하다. 북한은 김일성의 모든 말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어떠한 수정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수정하면 김정은의 카리스마도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북한의 생각을 읽고 북한정권이 살아가는 방식을 정리하다 보니 2017년 김정은의 핵선택이 어떻게 전개될지 더욱 우려스럽다.

-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201705호 (2017.04.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