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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운동 중국 현지 답사기(5)] 배신의 광풍 속에 물거품이 된 광복의 꿈 

세상이 몇 번 뒤집어진 다음에야 되찾은 이름, 김산… 님 웨일스의 손을 빌려 쓴 회고록 <아리랑>에 회한 남겨 

글·사진 윤태옥 다큐멘터리 제작자, 작가
독립운동가 김산. 그의 생애는 미국의 작가 님 웨일스의 손을 빌려 쓴 회고록 제목인 <아리랑> 만큼이나 한스럽고 처절하다. 그는 식민지 백성이라는 멍에를 메고, 일제 간첩이라는 용수를 쓰고, 함께 투쟁하던 동지들의 손에 이끌려 사형장으로 향해야 했다. 그러고도 독립투쟁이 아니라 중국 혁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조국으로부터도 한동안 외면받았다. 그러나 그가 집을 떠나 압록강을 넘은 것은 무엇을 위해서였던가? 질곡의 우리 현대사만큼이나 현기증 나는 그의 한 많은 생애를 광둥에서 만난다.

▎광저우 봉기를 기념하는 광저우 치의리에시링 위안(广州起义烈士 陵园)의 석탑.
아리랑은 내게 두 번의 충격을 주었다. 하나는 프랑스의 폴 모리아 오케스트라가 내한공연에서 선보인 연주곡 ‘아리랑’이다. 일렉트로닉 기타의 고고한 쇳소리를 휘어 퉁기는 선율로 시작해 합창단의 허밍으로 받쳐주는 아름다운 연주곡이다. 폴 모리아의 아리랑은 눈물이 뚝뚝 떨어질 듯한 처연함 대신 감미롭고 사랑스러운 느낌으로, 내겐 충격이었다. 사랑스런 아리랑에 흠뻑 젖어본 다음에야 나는 가슴 저린 한의 아리랑도 서서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게 1980년 전후였다.

아리랑으로 인한 두 번째 충격은 중국대륙을 누빈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이야기 <아리랑>(1984, 동녘)을 읽으면서였다. 광저우 봉기, 삼일천하, 해륙풍 소비에트, 테러리스트, 옌안, 님 웨일스(Nym Wales) 같은 낯선 어휘들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중국의 공산혁명에 왜 조선인 젊은이들이 죽어갔을까? 충격이었다. 김산이 피신했던 해륙풍 소비에트는 환상 속의 소국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결혼을 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1980년대 중반의 일이었다.

그 후 내 생활은 일상의 과제들로 채워지면서 폴 모리아와 김산은 기억창고로 밀려났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2016년 1월 나는 스마트폰에 폴 모리아의 ‘아리랑’을 담고, 중고서적으로 다시 구입한 김산의 <아리랑>을 배낭 속에 넣고 광저우(廣州)행 비행기를 탔다. 김산이 생사를 걸고 헤매던 그곳에서 그의 아리랑을 음미해보고 싶었다. 비행기는 어둑한 시간에 광저우 바이윈(白云) 공항에 나를 내려주었다.

광저우에 도착한 그날 밤 바로 광저우치의리에시링위안(广州起义烈士陵园)을 찾아갔다. 능원(陵园) 중앙에는 손으로 움켜쥔 구식 총이 하늘을 향하는 형상의 기념탑이 세워져 있었다. 경관조명 덕분에 한결 멋지게 보였지만, 기념비에 총을 직설적으로 묘사한 것이 생경했다. 한편으로는 당시의 생생한 혁명의 전운이 느껴지기도 했다. 탑의 기저부에는 ‘광저우치의(广州起义)’당시의 시가전을 부조로 새겼다. 기념탑 옆의 나무에 핀 빨간 꽃이 눈에 들어왔다. 무장봉기와 빨간 꽃, 그것이 ‘No War’를 외치는 것 같기도 하고, 혁명의 과정에서 흐른 피로 보이기도 하고, 또 다른 피를 부르는 전조처럼 보이기도 했다.


▎광저우치의리에 시링위안 안에 있는 열사의 묘.
다음날 아침 다시 능원으로 갔다. 기념탑 옆에 있는 열사의 묘로 올라갔다. 열사의 묘는 높이 6.2m에 지름 43m나 되는 커다란 봉분이다. 가로 2m 정도의 석판 수십 개로 분묘를 둘렀다. 그 석판 하나에 비명(碑銘)이 새겨져 있었다. 제법 긴 문장이었지만 떠듬떠듬 읽어 내려갔다. 중간에 ‘朝鮮等國際戰友(조선등국제전우)’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혁명 기록에 ‘조선’이라는 말을 선명하게 새긴 것이다. 광저우 봉기에는 님 웨일스의 소설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과 그의 멘토 오성륜을 포함해 150여 명의 조선인이 참가했다. 1927년의 혁명은 실패했다. 5700여 명의 혁명가와 진보인사가 죽었다. 거기에 참여했던 조선인 대부분도 살해됐다.

열사의 묘에서 내려와 조그만 호수를 건넜다. 중자오런민시에이팅(中朝人民血誼亭)이라는 안내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가로 세로 13m 정도 되는 2층 누각이다. 누각 1층 중앙에는 석비가 하나 세워져 있었다. 그 석비에는 “중국과 조선 양국 인민의 전투우의여, 만고에 푸르라!”는 국가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을 지낸 예젠잉(葉劍英)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능원에서 보이는 중국인들의 조선인 동지들에 대한 예우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당시 희생된 조선인은 150여 명. 이들은 어쩌다 압록강 건너 만주도 아니고 황해 건너 베이징(北京)이나 상하이(上海)도 아닌 중국 남해안의 끝자락 광저우까지 와서 남의 나라 폭동에 참여해 바람에 날린 꽃잎처럼 스러져간 것일까?

김산의 아리랑에는 두 개의 물줄기가 이어진다. 하나는 1927년 12월 10일 중국 공산당이 광저우에서 폭동을 일으키기까지의 중국 현대사고, 다른 하나는 김산을 광저우까지 오게 한 우리의 독립운동 역사다.

열여섯의 나이에 압록강을 건너다


▎열사의 묘 둘레석에 새겨진 비명. 중간에 ‘朝鮮等國際戰友 (조선등국제전우)’라는 문구가 보인다.
중국의 청조는 18세기 100년의 전성기를 넘어서면서 급격하게 쇠락했다. 1840년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후 서구 제국주의의 먹잇감이 되었다. 백성들은 고통의 늪에 빠졌다. 혁명가 쑨원(孫文)은 청조 타도를 외치고 나섰다. 1911년 신해혁명이 터졌고, 그 힘을 받아 1912년에는 중화민국이 세워졌다. 청조는 막을 내렸으나, 혁명을 이끌었던 쑨원은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축출당해 일본으로 망명했다. 1916년 위안스카이는 혁명을 배신하고 황제 놀음을 벌이다 병사했다. 그가 남긴 것은 군벌이 할거하는 찢겨진 중국이었다.

쑨원은 1919년 일본에서 상하이로 복귀했다.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돈과 무기가 필요했다. 1924년 코민테른과 손을 잡았다. 이게 제1차 국공합작이다. 쑨원은 코민테른의 자금과 무기로 광저우에 황푸군관학교를 세웠다. 광저우는 중국의 혁명 메카로 떠올랐다.

쑨원은 1925년 “아직도 혁명은 완수되지 않았다”는 유언을 남기고 병사했다. 황푸(黃埔)군관학교 교장이던 장제스(蔣介石)는 북벌군 총사령관이 되어 1926년 북벌전쟁을 개시했다. 1927년 4월 장제스의 북벌군은 상하이를 점령했다. 장제스는 돈줄을 코민테른에서 장쑤(江蘇)·저장(浙江)성 재벌들로 바꾸기로 밀약하고는 국공합작을 깨기로 했다. 1927년 4월 12일 장제스는 상하이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국민당을 깨끗이 한다(淸黨)’는 슬로건을 내걸고 공산당원과 노동 운동가 등 진보적 인사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상하이에서만 며칠 사이에 5000여 명이 시체로 나뒹굴었다. 그는 상하이에 새로운 정부를 세웠다. 곧이어 상하이에서와 같은 학살의 광풍이 중국 전역으로 번져갔다. 거리와 광장과 감옥 도처에서 도살이 벌어졌다. 조선인 혁명가도 적지 않게 살해당했다.

국민당에 입당해 북벌전쟁까지 함께했던 공산당은 장제스에게 처절하게 배신당했다. 그들은 장제스의 학살에 대항 폭력으로 맞서기로 했다. 1927년 8월 ‘난창치의(南昌起义)’에 이어 9월에는 추수폭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모두 실패했다. 조직화되지 않은 민중봉기는 국민당 정규군에 맞설 수 없었다. 패잔병들은 일부가 징강산(井冈山)으로 들어갔고, 일부는 그해 12월 광저우에 집결해 다시 봉기를 일으켰다. 이게 바로 광저우 봉기다. 쿠데타와 반쿠데타, 혁명과 반혁명, 폭력과 대항폭력이라는 이름으로 화중·화남지역 전체가 전란에 휩싸인 광폭한 시대였다.


▎중국인들이 조선인 동지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중자오런 민시에 이팅 (中朝人民血誼亭). 누각 1층에는 “중국과 조선 양국 인민의 전투우의여, 만고에 푸르라!”는 전 국가중앙 군사 위원회 부주석 예젠잉(葉劍英)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1924년 황푸군관학교가 세워지면서 독립을 열망하던 조선인들이 광저우로 모여들었다. 3·1운동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고, 그 힘을 받아 세워진 임시정부의 외교교섭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채 내부 논쟁과 분열로 허우적댔다. 일본에 국권을 침탈당한 식민지 청년들에게 사회주의·공산주의는 매력으로 다가왔다. 정연한 논리와 견고한 조직, 국제주의 연대와 선명한 투쟁으로 조국의 해방이라는 꿈을 키워준 것이다.

조선의 젊은이들은 중국의 국공합작이라는 새로운 정세를 목도하면서 혁명의 메카 광저우로 몰려들었다. 의열단의 김원봉도 1924년 무기와 자금을 구하기 위해 광저우를 찾았다. 의열단은 1925년 가을 근거지를 베이징에서 광저우로 옮겼고, 김원봉은 쑨원과 면담을 통해 의열단원들의 황푸군관학교 입교 길을 열었다. 김원봉 자신도 1926년 1월 입교했다. 중국 공산당이나 독립군 조직을 통해 만주와 시베리아의 조선인들도 황푸군관학교로 몰려들었다. 상하이임시정부에서도 젊은이들을 보냈다.

쑨원은 황푸군관학교나 중산대학의 조선인 학생들에게 학비를 면제해주고 생활비까지 지원했다. 후원이었고 동맹이었다. 장제스의 북벌전쟁에는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한 조선인도 많이 참전했다. 국내의 독립운동이 꽉 막힌 상황에서 중국의 혁명이 조선의 해방과 혁명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북벌전쟁에서 승승장구하자 이대로 화북으로, 만주까지, 최후에는 조국으로까지 밀고 가는 독립전쟁을 꿈꾸었다. 그러나 중국의 혁명 역사는 장제스의 4·12 쿠데타로 뒤집혔다.

광저우 봉기와 좌절, 그리고 ‘해륙풍 소비에트’


▎하이루펑 소비에트의 주역인 펑파이의 동상. 김산은 펑파이에게 혁명을 배웠다고 회고했다.
김산은 이런 시대의 젊은이였다. 그는 1905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다. 3·1운동은 조선의 청춘들을 독립운동으로 나서게 했다. 김산도 그랬다. 중학생으로 3·1 만세시위에 나섰다 3일간 구류에 처해졌다. 1920년 열여섯의 나이로 압록강을 건넜다. 신흥무관학교를 최연소로 졸업했다. 임시정부를 찾아 상하이로 갔다. 그곳에서 <독립신문>의 교정과 식자 일을 했다. 임시정부 안에서 많은 것을 가까이에서 목도했을 것이다.

김산은 1921~25년 베이징의 의학대학에서 수학했다. 임시정부에 실망한 조선의 젊은이들은 대안을 찾았다. 김산 역시 이 시기에 공산주의로 기울었다. 김산은 1925년 혁명의 메카 광저우로 갔다. 중산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고, 황푸군관학교에서 교관도 했다. 김원봉·오성륜·김성숙 등과 함께 정치 활동에 힘을 기울였다.

1926년 상하이에서는 임시정부를 지지할 수 있는, 조선인 전체가 참여하는 통일된 정당을 만들자는 민족유일당 운동이 일어났다. 안창호가 제기하고, 당시 임시정부의 국무령이었던 홍진도 나섰다. 중국의 국공합작도 큰 자극이었다. 민족 유일당 운동은 광저우에서도 조직됐다. 김산도 이 활동에 깊숙이 관여했다. 그러나 유일당 운동은 1928년 정체에 빠졌다. 장제스의 4·12 쿠데타로 국공합작이 깨지고, 코민테른 역시 각국의 사회주의자들에게 부르주아 민족주의와 결별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1927년 장제스의 상하이 쿠데타가 터지자 3일 뒤에는 광저우에서도 무차별 학살이 시작됐다. 난창과 창사(長沙)에서 폭동에 실패한 중국 공산당은 광저우에서 1927년 12월 다시 폭동을 일으켰다. 이때 조선인 150여 명이 참여했다. 김산의 회고에 따르면 폭동의 주축이었던 2000여 명의 교도단(폭동 개시 후 ‘적군’으로 개칭됐다) 가운데 80여 명의 조선인이 있었고, 원래 광저우에 살던 조선인도 적지 않게 봉기에 참가했다고 한다.


▎하이펑현 도심에서 멀지 않은 펑파이 고거.
12월 10일 밤의 거사는 일단 성공이었다. 군벌 장파쿠이(张发奎)는 도주했다. 다음날 3만 명이 운집한 군중집회를 열어 광저우 소비에트 정부를 선포했다. 광저우 시내에는 평화가 찾아왔으나 다음 수순이 제대로 준비되지 못했다. 혁명이 성공했다고 생각한 군중 일부는 퇴근하듯 집으로 돌아갔다. 그 사이 교외로 밀려났던 군벌이 전열을 정비해 반격을 시작했다. 폭동으로 도시를 장악했으나 통치할 능력이나 방어할 능력이 없었다. 후퇴하여 자신을 보존하는 방법도 몰랐다. 준비 없는 후퇴를 시작한 폭동의 대오는 급격하게 무너졌다. 3일 천하였다.

김산의 대오는 동쪽으로 후퇴를 거듭하며 20여 일이나 행군한 끝에 하이펑(海丰)·루펑(陆丰)현 지역에 도착했다. 이 두 지역을 묶어 ‘하이루펑’이라 하는데, 김산의 <아리랑>에 나오는 ‘해륙풍 소비에트’는 바로 이곳에 결성돼 있던 지방정부다.

하이루펑 소비에트는 1927년 11월 중국 농촌지역에서 최초로 세워진 소비에트 정부다. 혁명지도자는 펑파이(湃彭)라는 인물이다. 김산이 혁명을 배웠다고 회고한 사람이다. 펑파이는 하이펑현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본유학을 하면서 혁명에 투신했고, 귀국해서는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1927년 11월 고향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소비에트 정부를 세웠다. 이렇게 해서 펑파이가 장악한 하이루펑 소비에트로, 김산이 속한 무장대오가 피신해 온 것이다.

김산의 혁명 스승, 펑파이


▎광저우에서 동쪽으로 280㎞ 정도 떨어진 산웨이시 하이펑현은 중국에서 가장 먼저 소비에트 정부가 수립된 곳이다. 당시 소비에트 정부 수립 기념 군중대회가 열렸던 홍장.
김산과 그의 부대는 이곳에서 숨을 돌렸다. 김산은 이곳에서 혁명의 실제를 경험했다. 하이루펑 혁명재판소 7인위원회의 일인이 되기도 했다. 재판 없이 펜 놀림 하나로 처형 여부가 결정되는 순간도 있었노라고 김산은 이 시기를 회고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광둥의 군벌이 사방에서 공격해 들어왔고, 이들은 또다시 패주했다. 김산은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다. 1928년 8월 피로와 부상과 병에 지친 몸을 이끌고 천신만고 끝에 홍콩으로 탈출했다. 홍콩에서 조선인 인삼장사의 도움을 받아 여객선을 타고 다시 상하이로 돌아간 것이 1928년 9월이었다.

광저우에서 동쪽으로 280㎞ 정도 가면 산웨이(汕尾)시 하이펑현이다. 하이펑현 중심에는 김산이 광저우에서 탈출해 머무르던 하이루펑 소비에트를 찾아볼 수 있다. 도심 한복판에 있는 홍궁(红宫)과 홍장(红场)이 바로 하이루펑 소비에트 정부가 있었던 곳이다. 멀지 않은 곳에 펑파이가 살던 집도 보존돼 있다. 그 어디에도 김산의 행적은 남아있지 않다. 단지 그를 생각하고 찾아온 여행객이 상상으로만 더듬을 수 있을 뿐이다.


▎1. 1937년 옌안 시절의 김산(사진)은 님 웨일스를 만나 인터뷰 했다. / 2. 님 웨일스가 김산의 일생을 정리한 <아리랑> 표지.
홍궁과 홍장은 하이펑현 중심이어서 찾기 쉽다. 홍궁은 명대에 하이펑현의 학궁이었는데 1927년 11월 소비에트 대표들이 모여 하이루펑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한 곳이다. 중국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소비에트 정부를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노동자·농민·병사 등 소비에트 대표들이 3일간 대표자회의를 할 때 붉은 깃발이 안팎을 뒤덮었다 해서 홍궁으로 개명했다. 홍장은 홍궁의 동쪽에 이어진 광장이다. 1927년 12월 5만여 명이 운집해 하이루펑 소비에트 정부수립 기념 군중대회를 열었던 곳이자, 펑파이가 사령부를 두었던 곳이다. 이곳에는 홍장이란 큰 글씨를 새긴 문루가 세워져 있다.

반복되는 배신과 체포와 탈출, 그 끝은…


▎2016년 1월 우리 독립기념관이 광둥혁명역사 박물관과 공동으로 주관한 ‘한국독립 운동과 광둥’이라는 전시회를 알리는 홍보 간판.
홍궁과 홍장의 담장은 온통 붉은색이다. 혁명 또는 반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을까? 역사의 기념물들은 대부분 이긴 자의 기록이다. 그러나 인민이라고 하든 국민이라고 하든 백성들이 엄청나게 피를 흘린 다음에 세워진 것들이다.

1928년 하이루펑을 탈출해 상하이에서 요양하던 김산은 1930년부터 중국 공산당 간부로 화북과 만주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1930년 말 베이징에서 배신자의 밀고로 체포됐고,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일본에 넘겨져 신의주로 끌려갔다. 여섯 차례의 물고문을 견딘 후에야 석방됐다. 1931년 봄 어머니의 간병으로 건강을 회복한 김산은 일본 경찰의 출국금지명령에도 다시 압록강을 건넜다. 베이징의 중국 공산당에서는 그의 석방을 의심하는 동지들이 있었다. 김산은 공개재판을 자청해 혐의를 벗었다.

1933년 배신자로 인해 또다시 중국 경찰에 체포된 김산은 조선으로 끌려가 긴 시간 고통을 당했다. 1934년 1월 다시 베이징으로 탈출했다. 김산에게는 이 시기가 개인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김산은 이런 고통 속에서 자신을 건져준 중국 여인과 1934년 베이징에서 결혼했다.

1935년 김산은 중국의 혁명이 아닌 조국의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하고 상하이로 가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만들었다. 조선민족해방동맹은 김원봉이 주도한 조선민족전선연맹에 참여했다. 광저우에 이어 다시 김원봉과 접점이 이루어졌다. 김산은 1936년 해방동맹의 대표로 중국 공산당이 머무르던 옌안(延安)으로 파견됐다. 김산은 옌안의 항일군정대학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이곳에서 1937년 님 웨일스를 만나 장시간 인터뷰했다. 그렇게 해서 남은 회고록이 바로 <아리랑>이다.

김산은 옌안에서 만주로 가서 무장투쟁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만주로 가지도 못하고 1938년 중국 공산당에 의해 일제 간첩이라는 이유로 처형당했다. 중국 공산당은 그가 죽은 지 45년 지난 1983년 재심 청구를 받아들였다. 중국 공산당은 그의 사형에 대해 “특수한 상황 하에서 벌어진 잘못된 결정이었다”면서 복권시켰다. 복권된 다음 해에는 한국에서 님 웨일스의 <아리랑>이 우리글로 출간됐다.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된 황푸국관 학교 정문.
김산은 공산당에서 활동하며 중국의 혁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국내에서는 외면받기도 한다. 그러나 김산은 1935년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 이전의 활동 역시 당시 국제정세 속에서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이뤄진 일들이었다. 애당초 그가 집을 떠나 압록강을 넘은 것 자체가 조국의 독립을 갈구한 때문 아니던가? 이런 그가 중국 어느 구석에서 누구와 어떤 투쟁을 벌였든 그것은 조국의 독립을 찾겠다는 몸부림이었다. 누구나 스스로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해 각각 직선로나 우회로를 택했을 뿐이다.

김산의 아리랑은 피눈물이었다. 식민지 백성이라는 멍에를 메고, 일제 간첩이라는 용수를 쓰고, 사형장으로 향한 그의 일생은 처절한 아리랑이었다. 검붉은 피와 싯누런 고름이 뚝뚝 떨어지고, 증오와 원망의 눈물이 넘치는 아리랑이었다. 그는 아리랑을 부르면서 결기를 닦아 세웠다. 아리랑의 선율 속에서 좌절했지만, 좌절 속에 다시 몸을 일으켜 아리랑을 불렀다.

그는 살아서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했다. 죽은 뒤에도 세상이 몇 번 상황이 바뀐 뒤에야 복권됐다. 그 후 조국에서 회고록이 출판됐다. 그제야 누군가 그의 이름을 기억해주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그를 찾아 이곳 하이펑까지 온 것이다.

홍궁과 홍장은 아침에 내린 겨울비에 촉촉이 젖어 있었으나 하늘은 파랗게 갰다. 붉은 담장 위로 맑은 햇살이 부서졌다. 그의 행적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그 광장 위에 그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나는 그를 위해 폴 모리아의 사랑스런 ‘아리랑’을 틀었다. 그리고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그가 남긴 <아리랑>의 첫 페이지에 기록된 그의 아리랑, 피눈물로 얼룩진 아리랑을 읊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청청 하늘엔 별도 많고, 아리랑 고개는 탄식의 고개, 이천만 동포야 어데 있느냐, 지금은 압록강 건너는 유랑객이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에 실린 노랫말)

황푸군관학교 구지 안의 두 조선인


▎군벌의 반란을 진압하다 희생된 516명의 황포군관 학교 사생들을 안치한 둥젱젠왕리 에시무위안(东征 陈亡烈士墓园). 두 명의 조선인 학생의 묘비도 있다.
하이펑에서 홍궁·홍장과 펑파이의 고거까지 둘러보고는 광저우로 돌아왔다. 다음날 황푸군관학교를 찾아갔다. 황푸군관학교는 광저우시 창저우도(長洲島)의 해군기지 안에 있다. 황푸군관학교는 역사박물관으로 개방돼 있다. 학교 본부를 1996년 중건했다는데, 총리실부터 교실·집무실·숙소·식당 등이 1920년대 풍으로 복원돼 있다. 한쪽에는 황푸군관학교의 역사와 주요 졸업생, 중국 혁명에 대한 다양한 자료도 전시돼 있다. 정문에는 개교 당시의 정식 명칭이었던 육군군관학교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정문에서 기념사진을 찍느라 항상 사람이 붐빈다.

이곳을 찾았던 2016년 1월 예상치 못했던 특별한 이벤트를 만났다. 우리 독립기념관이 광둥혁명역사박물관과 공동으로 주관한 ‘한국독립운동과 광둥’이라는 특별전시회였다. 제목은 광둥이지만 실제로는 중국 전체에서 전개된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이었다. 마치 나를 위한 전시회로 착각이 들 정도로 반가웠다. 전시회는 중국의 항일전선, 조선의 독립투쟁이 어떻게 연합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었다.

보통의 중국인들은 지금도 일본에 대항한다는 면에서 한국인들에게 상당한 공감대를 갖고 있다. 적지 않은 중국인이 만난 지 30분도 되지 않는 초면의 한국인에게 “그런데 저 르번구이(日本鬼, 중국인들이 일본인을 비하하는 말)들은 말이야~” 하면서 일본을 비난하곤 한다. 중국과 한국이 항일투쟁을 공유했던 역사에서 비롯된 일종의 정서적 연대다. 그런 면에서 황푸군관학교의 조선인 독립운동역사 전시회는 두 나라 국민의 상호 이해를 위해 상당히 훌륭한 기획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정서적 연대가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논란과 함께 크게 위축됐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황푸군관학교 구지 안에서는 한중동맹을 이뤘던 또 다른 조선인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황포군관학교 정문에서 서쪽 700m 떨어진 강가에 둥젱젠왕리에시무위안(东征陈亡烈士墓园)이 있다. 1925년 황푸군관학교 사생들이 군벌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두 차례 출정했을 때 희생된 516명의 시신을 안치한 곳이다. 이 가운데 조선인 두 사람의 비석이 있다. 안태(安台)와 김근제(金瑾濟)다. 안태의 비에는 1927년 11월 숨졌다고 적혀 있다.

광저우의 한국 총영사관에 근무하던 강정애 씨가 6년 전이 묘비를 발견하고는 이를 널리 알렸다. 3년 만에 김근제의 후손이 광저우를 찾아왔다. 이곳을 참배한 후손은 “하얼빈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돌아가신 줄로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김근제는 팔촌인 김은제와 함께 황푸군관학교에 입교했다. 김은제는 조선혁명당 당원이자 국민당 비행장교로 일본군과 싸우다 희생됐다. 하지만 안태의 후손은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사망 당시 28세였고 묘비에 ‘한국 괴산’이라고 적힌 게 유일한 단서다.

장제스의 중화민국은 임시정부와 의열단을 모두 지원했다. 자금과 군사교육 등이었다. 윤봉길 의거 직후 김구와 임정 요인들에게 피신처를 제공한 것도 장제스의 중화민국이었다. 물론 일본과 관계 악화를 우려해 비공개로 지원했다.

김원봉은 1938년 10월 10일 우한(武漢)의 중화기독청년회관에서 거행한 조선의용대 결성식에서 100여 명의 대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뒤바뀐 혈맹, 뒤바뀐 적


▎두 명의 조선인 중 안태의 묘비. 출생지가 한국 괴산으로 적혀 있다.
“중국혁명이 완성되지 못함으로써 일제의 한국에 대한 압박과 착취가 날로 심하며, 한국 민족이 해방되지 못함으로써 일제의 중국 대륙 침략이 더욱 포악해졌음이 사실이다. 조선의용대의 기치를 높이 들고 중국 형제들과 곧게 손잡고 최후의 일각까지 분투하자.”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보다 한 단계 더 깊었다.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많은 조선인이 중국 공산당에 가입해 항일투쟁을 벌였다. 만주에서는 그 수가 더욱 많았다. 1930년대 조선인은 민족주의 진영이든 사회주의 진영이든 만주의 중국 공산당과 연합해 일본군·관동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들의 주축이 1940년대 초반 일본군과 만주군의 잔혹한 토벌에 밀려 소련으로 넘어간 이후에도 남은 사람들은 88여단이라는 단일부대로 편제돼 게릴라 활동을 벌였다.

만주뿐만이 아니다. 김원봉의 의열단은 조선의용대가 되었고, 조선의용대의 주력은 1941년 황하를 건너 북상해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에 합류했다. 조선의용대는 팔로군과 합동으로 항일 전투에 참여했다. 그들은 전장에서 희생된 조선인 동지들을 일일이 묻어주고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조선의용대는 이곳에서 화북지방의 조선인들을 받아들이면서 병력을 늘렸고 1942년에는 조선의용군으로 확대개편했다. 1944년에는 해방에 대비하기 위해 옌안으로 이동했다. 이들이 바로 연안파다. 이들 역시 독립운동에 관한 한 팔로군과는 혈맹이었다.

중국에 비하면 소련은 우리의 독립운동에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일본과 갈등을 우려해 조선인 망명객들을 국경 밖으로 퇴거시키거나 무장해제하기도 했다. 1921년의 자유시 참변은 일본의 강력한 항의로 인해 자국 영토 안으로 들어간 우리 독립군을 무장해제하면서 발생한 참극이다. 1930년대에는 일본 첩자들이 적지 않게 섞여 있다는 이유로 우리 동포들을 대거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일군의 사람을 정치적 이유로 황무지에 내던진 거대한 국가폭력이었다. 1940년대 일본군과 만주군의 토벌에 견디다 못해 연해주로 밀려온 동북항일연군에 군영을 제공하기는 했지만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통제했고, 그 가운데서 김일성을 발탁한 것도 소련이다.

미국은 아예 조선의 즉각 독립에 대해서는 변함없는 반대자였다. 미국은 필리핀을 차지하기 위해 조미수호통상조약(1882년)의 거중조정 조항이 있음에도 일본에 조선을 넘겼다. 바로 1905년의 카쓰라-태프트 밀약이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한때 조선인의 희망이었으나 전승국의 사기극임이 곧 폭로됐다.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1943년 3월 영국 외무장관에게 일본이 항복하면 조선을 독립시킬 것이 아니라 국제적 신탁통치 하에 두자고 제안했다. 그해 12월 미국·영국·소련의 정상이 만난 테헤란회담에서 미국은 조선에 대해 40년간의 신탁통치를 선제적으로 주장했다. 1945년 2월의 얄타회담에서 미국은 20~30년의 신탁통치를 주장했고, 스탈린은 소극적으로 동의했다.

일본이 항복한 뒤 1945년 12월의 모스크바3상회의에서도 미국은 5년 신탁통치에 5년 연장 방안을 끈질기게 주장했다. 이에 대해 조선인들이 임시정부를 세우면 미국·영국·소련·중국이 후원하는 것으로 그치자고 주장하던 소련은 연장 없는 5년 신탁통치로 수정 제안했다. 이 3상회의의 내용이 국내에서는 정반대로 보도됐다. 미국은 독립을,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엄청난 오보가 우리나라를 뒤덮었다. 이로 인해 찬탁반탁 논쟁은 국내 정세의 혼란을 더욱 부추겼다.

미국은 시종일관 조선 독립의 반대자였다. 미국은 소련의 남하를 막아야 한다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소련은 해양으로 진출하려는 자국의 국익을 위해 김일성을 내세워 남북을 분할했다. 나아가 이들은 한국전쟁에 직접 개입하거나 후원했다.

분단 70여 년이 지나는 동안 대한민국에서 ‘혈맹’이란 미국을 지칭하는 말로 굳어졌다. 조선 독립을 방관했던 소련은 일본이 항복하자 점령군으로 즉시 진입해 김일성을 내세웠다. 결국 조선의 독립투쟁에서 가장 큰 동맹이었던 중국은 빠진 채 미국과 소련의 후원 아래 남한과 북한은 동족상잔이라는 끔찍한 비극을 벌이고 말았다. 중국은 미군이 국경선 가까이 북진해오자 직접 한국전쟁에 개입하면서 대한민국과는 적대국이 돼버렸다. 해방 후 몇 년 사이에 동족은 적으로 갈라섰고, 항일 전장에서 함께 싸운 중국마저 적국으로 급변해버렸다. 참으로 현기증 나는 우리 현대사다.

윤태옥 - 중국 인문 다큐멘터리 전문 제작자. 2006년 <다큐멘터리 인문기행 중국(7부작)>(MBC플러스)을 기획, 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매년 6개월 정도 중국을 여행하면서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거나 중국 문화와 역사에 관한 글을 쓴다. 저서 <개혁군주 조조 난세의 능신 제갈량> <중국식객> <중국민가기행> 등이 있다.

201705호 (2017.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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